90화
왕성에서 무언가 왔다.
거대한 짐마차가 함께 오는 것을 목격한 그리델라가 별채의 모두에게 알렸고 그들은 덩달아 심각해졌다.
남작의 사망 후, 카이엔은 그의 유언대로 세자르를 맡기로 했다. 그러나 유산 상속은 당사자만 관련이 있는게 아닌 모양이었다.
게다가 카이엔은 남작의 핏줄도 아니었으니 더욱 복잡한건지, 이것저것 신경쓸게 많았다는 바이스의 말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던중 뜬금없이 바이스가 오늘은 카이엔이 그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니 신경쓰지 않으려고 해도 걱정 되었다.
덕분에 주방에서 밑재료를 손질하느라 바빴던 비셰도 끌려나와 한 자리에 모였다.
“저 일하러 가야하는데요…”
“어차피 조리할 땐 쓸모없다면서. 재료 손질도 거의 끝났으니 데려가도 된다고 했고.”
“저 설거지도 해야하는데요…”
“다른 사람들이 하겠지!”
막무가내로 끌려온 비셰는 울상을 지었다.
한자리에 모인 별채의 이종족 식구들은 저녁식사 자리에 카이엔이 나타나면 무슨 말을 붙여야할지, 어떻게 대화를 이끌어나가면 좋을지에 대해 중점적으로 회의를 진행했다.
안그래도 오랜시간 함께 지낸 보호자와 작별했기에 요며칠 카이엔은 굉장히 우울한 상태였다. 활기찬 분위기를 이어나가야한다며 그리델라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치만 우리 중에서 분위기를 띄울 수 있는 사람은 없잖아! 나밖에 없잖아!”
“으음…”
“그건 동의할 수 밖에 없겠군.”
“다들 너무 무뚝뚝해! 농담이라도 좀 하란 말이야! 나라고 해서 맨날 머릿속이 꽃밭인 것도 아닌데.”
“이번에도 그리델라가 힘내면 되겠네.”
슬로세이가 태평하게 대꾸하자 그리델라는 고개를 저었다.
카이엔의 상태가 좋지 않은 지금, 그를 위해서 여기있는 모두가 합심해서 가족같은 분위기를 만들어주는게 중요하다는게 그녀의 의견이었다.
참으로 다행인점은 그들 모두 이종족이라 절대로 카이엔보다 먼저 죽을리 없다는 것이다.
다들 살아온 시간이 꽤 길긴 했지만 종족의 평균 기대수명에 비하면 절반도 채우지 못했으므로 아직 미래는 밝았다.
카이엔에게 그런식의 상실을 겪지않게 해줄 자신이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요?”
프라우디에의 물음에 다들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아직도 애도의 시간을 끝마치지 못한 사람 앞에서 그들은 무어라 위로의 말을 전해야하는걸까.
머리를 모았지만 번뜩이는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어영부영 저녁식사 시간이 되어서 그들은 터덜터덜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식탁의 모습이 평소와 달랐다.
“이게 다 뭐야?”
술병이 가득했다. 게다가 다 비슷비슷한 병에 담겨있었다.
적혀있는 연도를 읽어보니 그것만큼은 제각각이었다.
지금까지 카이엔이 함께 하는 식사 자리에서 술을 허락한 적이 없었기에 다들 의아해했다.
“딸기주?”
“이런 것도 있구나…”
“왜 이렇게 많지? 왕자님은 아시려나…”
“일단 앉을까?”
딱 사람 수에 맞춰서 세팅을 해놨을테니 뒷자리부터 채워나가자며 그들은 각자 맘에 드는 자리에 앉았다.
이전에 함께 식사 했었을 때가 떠오르니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그들이 자리에 앉은지 이십분정도 지나자 카이엔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식당에 도착했다.
에빌이 글라스, 페이리와 함께 자리를 찾아가서 앉았지만 바이스는 카이엔의 옆에 제 자리가 뻔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이엔의 옆자리에 섰다.
“너 안 앉을거야?”
“여기가 제 자리입니다만.”
“갈수록 뻔뻔해진단 말이야…”
“칭찬 감사합니다.”
웃는 얼굴로 저리 대답하니 뭐라고 더 말할 수가 없었다.
카이엔은 한숨을 푹 쉬었고 턱을 괴며 식당에 모인 모두를 바라보았다.
“왜 모이라고 했는지, 모르지? 별거 아니야. 그냥, 같이 밥이나 먹을까해서. 저 술들은 뭐라고 해야할까… 예전에 내가 선물로 받은 딸기밭이 있는데, 내가 왕성을 떠난 뒤에도 딸기가 그쪽으로 가는 바람에 몽땅 술로 만들었다더라. 딸기주밖에 없지만 먹고싶은만큼 먹어. 슬로세이 빼고.”
“왜 나만!!”
“꼬맹이잖아.”
“쟤는?!”
“프라우디에는 너보단 어른이야.”
“난 억울해! 나도 오래 살았단 말이야!”
겉만 봐선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슬로세이는 자기도 먹을거라고 떼를 썼다.
결국 카이엔은 도수 낮은걸로 두 잔까지만 허용했다.
대화가 얼추 마무리 지어지자 대기하고있던 요리사들이 식탁위에 접시를 올렸다.
전채부터 하나하나 내오는게 아니라 카이엔이 다른 이들과 막힘없이 대화를 이어나가게끔 한꺼번에 가져와 식탁을 가득 채웠다.
그리델라는 바로 딸기주 한 병을 개봉했고 그녀의 재촉에 다들 앞에 있던 술병을 열었다.
바이스역시 카이엔의 비어있는 와인잔에 딸기주를 한잔 따라주었다.
“가볍게 마시기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먹어본적이 없으니까…”
“이참에 주량을 가늠해보시는 것도 좋겠군요.”
살짝 잔을 기울여 입술만 조금 적셔보았다.
딸기로 만든 술이니 딸기향이 나는건 당연한거였지만 왠지 어색했다.
“달다.”
“그러게.”
다른 사람들은 달다고 하는데 왜 그의 입에는 쓴 것 같을까. 술을 잘 안 먹어서 그런걸까. 카이엔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딸기주를 한 모금 머금었다.
음, 역시 썼다.
“으엑- 써. 이게 뭐야!”
“슬로세이 넌 술 처음 마셔보는구나?”
“끄으응-”
“먹다보면 적응돼. 이거 꽤 단데. 그렇지 않아?”
“달아.”
“난 잘 모르겠는데.”
모르겠단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달다는 평이었다.
여기서 쓰다는 말을 하면 슬로세이와 동급이다. 그런 생각에 카이엔은 술맛에 대한건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다.
술판을 벌였다가 소란이라도 벌어지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들 적당히 마시고 있었다. 슬로세이는 두 모금 먹더니만 맛없다면서 주스를 받아다가 홀짝이고 있었다.
다만 페이리는 딸기향이 나는 술이 마음에 들었는지 벌써 얼굴이 붉어져있었다.
“…페이리. 괜찮아?”
“괜찮아요-”
말끝을 늘리는게 안 괜찮아보였다.
저렇게 마시다가 내일 못 일어나는거 아닐까? 걱정이 들어서 카이엔이 바이스를 보며 소곤거렸다.
“페이리에게 찬물 좀 가져다줘.”
“알겠습니다.”
마시고 정신차리라는 뜻에서 바이스가 찬물을 한잔 가져다주니 페이리는 그것도 한번에 쭉 마셔버렸다.
그 모습에 오히려 그의 머리가 아파와서 카이엔은 한숨을 쉬었다.
식탁 위에 올려놓은 술들은 제조 년월도 제각각이라 그리델라는 여러병을 까놓고 하나하나 마셔가면서 어떤게 제일 나은지 비교하고있었고 글러티나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같이 마시고 있었다.
프라우디에는 얼마 안 마신 것 같은데 어쩐지 꾸벅꾸벅 졸고있었다.
반면 라스와 자네인은 멀쩡했고 엔베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술잔을 비우고 있었다. 옆에 빈 병이 주르르 나열된걸 보니 술이 굉장히 센 모양이다.
비셰는 식사를 하는둥 마는둥, 허공을 한번 쳐다봤다가 한숨을 쉬는 것을 반복했다. 취한건가 싶어서 카이엔이 물었다.
“비셰? 어디 불편한데라도 있어?”
“네? 아뇨 그게 아니라… 직업병이 도지려고 해서요.”
“직업병?”
“그런게 있어요.”
어색하게 웃으며 비셰가 대답했다. 카이엔은 비셰가 여기 오기 전에 어디에서 뭘 하고있었던건지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술집에서 일했으니까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떠오른걸지도 몰랐다. 여기 사람들은 굉장히 조용히 마시고 있었으니까.
비셰가 샴페인 타워를 떠올리고 있을동안 카이엔은 바이스에게 얼른 앉아서 밥이나 먹으라고 다시한번 권유하다가 거절당했다.
“그럼 내가 널 해고하면 되는거냐?”
“순순히 해고당할 제가 아니죠.”
“뭔소리야…”
“왕자님이야말로 고집부리지말고 식사를- 아, 그러고보니 이걸 잊어버렸군요. 여러분, 잠시 주목해주세요.”
짝짝-
손뼉을 치면서 바이스는 모두의 시선을 돌렸다.
식탁 앞에 앉은 이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바이스가 말했다.
“왕자님이 세자르 영지를 다스리게 되어서, 국왕께서 백작 작위를 하사하셨습니다. 더불어, 백작으로서의 성을 따로 지을 수 있게 됐고요. 이 땅의 이름은 바꾸지 않을거지만 좋은 이름이 있다면 추천해주시길 바랍니다.”
“백작?”
“하긴, 지금은 그냥 왕자님이었지…”
“축하드립니다.”
“이름이라…”
다들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본래 성을 그대로 붙여도 되겠지만 아무래도 왕가의 성인지라 쉽게 부를 수 없기에 저런 의견이 나온 것일터.
카이엔에게 어울리는게 무엇일지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생각에 잠겼지만 맑은 정신에서도 좋은 답이 나오지 않은데 술을 마시고 취한 상태에서 좋은 생각이 나올 수 있을리가 없었다.
끙끙거리다가 식탁에 머리를 박고 잠들거나 헛소리를 하게되기 마련이었다.
“그냥 계속 왕자님이라고 부르면 안 되나?”
“공식 석상에서 부를 이름이 새로 필요한거겠지.”
“그런가?”
“어렵네요…”
“좋은 뜻을 가진 단어를 쓰고싶은데.”
무슨 단어가 나올지 몰라 목이 타는지 카이엔은 딸기주를 홀짝였다.
계속 먹으니까 적응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미묘했다.
“검은 숲의 인접한 영지니까… 어두컴컴한데 멋있는 이름 없나?”
“신화나 전설에서 찾아볼까요?”
“엘프어엔 좋은 말 없어?”
“으음… 글쎄.”
“뭐가 좋을까?”
“어둠… 밤… 검은색…”
“왜 다들 그런 칙칙한 단어만 떠올리시는겁니까? 환하고 찬란한 이름이 어울릴수도 있잖아요.”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자님 이름에 붙을 말이니까 왕자님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세요.”
바이스의 핀잔에 카이엔은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그 역시 마땅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런건데, 다들 쉽게 좋은 이름을 떠올리지 못했다.
검은 숲을 인접하고 있는 영지의 주인.
쫓겨난 왕자.
몬스터의 말을 알아듣는 능력.
이종족을 보호하는 영주.
어쩐지 부정적으로 들리는 것들 뿐이지않나?
잠자코있던 카이엔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지옥.”
누군가가 말하길, 사람사는 세상은 지옥이라고 했다.
정말로 지옥에서 사는 악마가 들었다면 비웃었을지도 모르는 말이다.
다른 이들이 보기엔 이 땅은 지옥과 비슷하지 않을까? 영주는 몬스터의 말을 알아듣는데다가 이종족과 한 지붕 아래에 살고있는 괴짜 왕자다.
입에서 입으로 퍼지는 소문은 변질되고 변형되어 이 땅을 공포의 대상으로 만들겠지.
입가에 살짝 냉소를 띄고 카이엔이 바이스를 보며 물었다.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지옥이라. 그럼 왕자님은 지옥의 왕이십니까? 진짜 마왕이 듣는다면 웃다가 의자에서 굴러 떨어지겠군요. 뭐, 좋습니다. 의도는 알겠으니 그렇게 하죠. 아베르나 백작님.”
“아, 그렇게 되는건가?”
“네. 이걸로 정해진거네요.”
다른 단어들도 있지만 이쪽이 제일 나은 것 같다며 바이스가 웃었다.
아베르나.
몇 번 그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려보다가 카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그럼 목적도 달성했으니 해산시킬까요? 다들 정신차리세요. 그만 마시고 돌아갑시다.”
“아, 네!”
“그리델라 가자!”
“…엔베인 너 괜찮아? 병이 무더기인데.”
“으음… 괜찮은 것 같아. 시야도 멀쩡하고 머리도 멀쩡하고.”
“술 세구만…”
“누님은 좀 어떠세요?”
“내 입엔 너무 달았다. 다음엔 좀 더 강한걸로 준비해줬으면 하는데.”
“비셰 씨, 다른 이들을 불러서 치우게 할테니까 술병은 그대로 둬도 됩니다.”
“앗, 저도 모르게 그만!”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취한 이들은 없어서 다들 멀쩡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페이리는 조금 취한 것 같긴 하지만 바이스가 찬물을 건네 이후로는 술을 마시지 않아서 어느정도 정신이 든 것 같았다.
그래도 걱정이 되어서 카이엔은 페이리를 방까지 데려다주기로 했다.
“페이리, 괜찮아?”
“네. 괜찮아요!”
“아직도 얼굴이 빨간데.”
“많이 나아진거예요. 평소에 술 마실 일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이 마신건데?”
“왕자님이 많이 자란게 대견해서요.”
“응?”
전혀 예상치 못한 이유에 카이엔은 눈썹을 까딱였고 페이리는 생글생글 웃었다.
손을 뻗어 카이엔의 양 뺨을 붙잡고 그녀가 말했다.
“그 작았던 왕자님이 이렇게 컸잖아요. 시간이 참 빨라요.”
“으음… 그렇긴하지.”
“혼자만 막 마시지말고 왕자님이랑 같이 마실걸 그랬어요. 술잔을 기울이며, 라는 말도 있잖아요.”
“책에서 그런 말이 많이 나오는 것 같긴하더라.”
그의 뺨을 붙잡은 손을 천천히 내리고, 카이엔은 페이리와 손을 잡고 걸었다.
밤바람이 꽤 싸늘해졌지만 페이리는 춥지도 않은지 아무렇지도 않았다.
함께 걷던 중, 카이엔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라크네는, 수명이 얼마나 되지?”
“왕자님보단 오래 살게요.”
“으음…”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처음 왕자님을 만났을 때랑, 지금의 저는 바뀐게 거의 없잖아요. 그럼 길지 않을까요?”
아라크네는 발견하기 쉽지 않은 몬스터고 페이리처럼 인간의 언어를 습득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대부분 짐승과 비슷한 수준의 지능을 가지고 있었고 어느정도 지성이 있고 이성을 갖고있는 아라크네의 경우엔 인간을 잡아다가 필요한 정보를 빼먹으며 성장하고 그 후엔 잡아먹거나 죽이니까.
가장 유명한 아라크네는 15년쯤 전에 사막에서 발견된 거미여왕 아타르다였고 그녀는 돌연변이로 진화한 경우라 페이리와는 전혀 달랐다.
아타르다를 사냥한 기사단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일종의 콜로니를 형성하고 있는 그녀의 수명이 100세를 넘었을지도 모른다, 라는 추측이 있었지만 정확하진 않았다.
허나, 기대 수명이 길다고해서 무조건 오래 살 수 있는건 아니었다. 예상치못한 사고 혹은 질병으로 죽음에 이를 수 있었다.
남작이 그랬던 것처럼.
“…오랫동안, 같이 있을 수 있으면 좋겠네.”
“저도 그래요.”
***
영지민들의 응원을 받고 별채 식구들과 식사도 하고.
카이엔의 기분은 많이 나아진 것 같았다. 허나, 아직도 잘 자지 못하고 뒤척이는걸 알고있기에 바이스의 시름은 깊어져만갔다.
그걸 아는건 바이스 뿐만이 아니었다. 카이엔의 방에서 같이 지내고 있는 소금이 또한 카이엔이 밤마다 제대로 잠도 안 자고 뒤척이거나 방 안을 서성이는걸 알고있었다.
카이엔이 말해준 것이 없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소금이는 동그란 눈을 굴리면서 카이엔을 관찰했다.
그러기를 일주일째. 결국 참다못한 소금이가 폭발했다.
“찌이이!!”
- 이놈아!!
소금이의 외침에 카이엔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잠이 안 와서 창문 근처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는데 뒤에서 웬 고함소리가 들린 탓이었다.
루브가 소금이의 말을 못 알아들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카이엔은 소금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앙증맞은 몸에서 나온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굵은 목소리여서 아직도 가슴이 벌렁거렸다.
“깜짝이야… 무슨 일이야, 소금아.”
- 너 요새 이상하다! 밤에 막 돌아다니고, 병 있냐?
“그건 아닌데…”
- 무슨 일이 있는거야? 나한테도 좀 알려주라고!
“으음…”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카이엔은 망설였다. 그 모습에 소금이는 맘에 안 든다는 듯 짧은 다리를 움직였다. 불만스러움을 표출하며 발을 동동 구르더니 카이엔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카이엔이 가까이 다가와 손을 내밀자 소금이는 그 위에 올라탔다.
- 저쪽가라.
“어…”
앉으라는 말인가? 카이엔은 얌전히 침대에 걸터앉았다.
“찍!”
- 자, 말해봐라!
당당하게 소금이가 요구했다.
그 모습에 카이엔은 천천히 이번에 있었던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
손바닥 위에 올라가있는 햄스터에게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게 우스워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소금이는 진심으로 그를 걱정해서 깊은 사정을 묻고있는거라 회피할 수도 없었다.
남작의 이야기가 나왔다. 소금이 역시 아는 이라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얼굴에 주름이 많이 있는, 이곳에서 본 인간 중에서 가장 나이 든 인간이란걸 알고있었다.
죽음이라는 말을 소금이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 탓에 카이엔은 몇 번이고 죽음에 대해 설명해야했다.
숨을 쉬지 않고 움직이지않고, 이제는 절대 다시 만날 수 없는 것.
작고 작은 햄스터 몬스터에게 죽음이라는 개념은 너무나도 낯선 것이었다.
동그란 눈이 카이엔을 응시했고 조그마한 손이 카이엔을 향해 내밀어졌다.
“찌.”
- 울지마라.
그것이 소금이가 할 수 있는 위로였다.
눈물이 흐르는 뺨을 닦아줄 수 없기에 소금이는 손을 내밀었다가 자기가 올라타있는 손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간질간질한 손바닥에 카이엔은 피식,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소금아. 나 이제 괜찮아.”
- 헛소리말고. 그렇게 사람이 죽는게 싫으면, 헤어지는게 싫으면, 왜 계속 주변 사람이 늘어나는거냐? 저 뱀도 그렇고 계속 늘어나잖아!
“그건 내 의지가 아니라 어쩌다보니…”
- 난 모르는게 많아서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난 내가 죽고나서 네가 계속 축 늘어져있으면 기분나쁠거같다. 그 사람도 똑같을거야. 네가 잘 지내는걸 보고싶어할테지.
“…그럴까.”
- 같이 살았잖아. 당연히 그렇지.
소금이의 말에 카이엔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위로하는 작고 작은 햄스터 몬스터.
몸을 일으킨 다음 카이엔은 소금이를 다시 제 집앞에 내려놓았다.
“이제 잘게. 잘 자, 소금아.”
- 잠깐!!
“응?”
- 나도 옆에서 잘거다.
“뭐? 위험해! 내가 자다가 널 깔아뭉개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 머리맡에서 자면 되지.
“위험하다니까!”
허나 소금이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타협해서 침대 옆에 의자를 두고 그 위에 쿠션을 놓고 소금이를 올려놓기로 했다.
“찍찍!”
- 내가 있으니까 이제 문제 없을거다!
“어 그래…”
괜찮을거라고 말하는데 안 괜찮다고 대꾸할 수도 없고.
쿠션 위에 벌러덩 드러누운 소금이를 한번 쳐다본 뒤 카이엔은 침대에 누웠다.
곁에 누군가 있다면 악몽을 꾼다고 해도 빠르게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을테니까.
소금이가 그걸 알고 옆에서 자겠다고 고집을 부린건지는 모르겠지만, 가까이 있는게 먼 곳에 있는 것보단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