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세자르 남작이 사망했고 그는 친아들이 두 명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한 유산은 한 푼도 남기지 않았다.
모조리, 카이엔에게 넘기겠다는 유서를 쓴 것이다.
그의 유언장을 집사가 낭독했고 카이엔은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이상입니다. 왕자님은, 이제 이곳의 영주이십니다.”
“하…”
“후계자 문제에 대한건 이미 왕성으로 관련 서류를 보내놨습니다. 문제없을 겁니다.”
“나한테는 말 한 마디도 없이 대체 뭘한거야…”
“남작님이 원하신 거였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어디 있을지 모를 남작님의 아드님들을 찾아서 이곳을 넘기시면 됩니다.”
“내가 그럴 것 같아?”
“아뇨. 한번 해본 소리입니다.”
독립한 건 둘째치고, 자기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제 부모에게 알리지 않은 놈들이다.
그놈들이 유산을 노리고 온다면 바로 걷어차서 쫓아내주겠다며 카이엔은 몸을 일으켰다.
남작은 죽었고 그가 남작의 유지를 이어 이 땅을 지켜야 했다.
다만,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었기에 카이엔이 말했다.
“영지민들에게도 말해야겠다. 이미… 다들 알고 있겠지만.”
“그렇죠. 장례식에 참석한 이들이 알렸을 겁니다.”
“난 몬스터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어. 몬스터를 기르고 있고 곁의 이들은 인간보다 이종족이 많지. 이걸 싫어하는 이들도 있을 거야.”
“그럼 어떻게 하실겁니까?”
“여기서는 무서워서 도저히 못살겠다고 하면 다른데로 이사갈 돈을 챙겨줘야지.”
“현명하십니다.”
카이엔이 무슨 약한 소리를 할까봐 걱정했던 바이스였지만 불만있는 사람을 쫓아냈다는 말에 방긋 웃었다.
그 모습에 집사는 작게 한숨을 쉬었고 카이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튼, 발표할 자리를 만들어줬으면 해.”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남작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영지민들은 한마음으로 슬퍼했다. 남작은 굉장히 인자한 성품의 좋은 영주였고 영지민과의 교류도 잦은 편이었다.
요양 중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사망소식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면서 그들은 저 너머의 영주성을 보고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남작이 요양하는 동안 영주 대리로서 카이엔이 일하고 있던 것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왕자가 이 세자르를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여겼다.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그들역시 그것을 바랐다.
그래서 뜬금없이 카이엔이 시종과 영주성 하인들과 함께 광장으로 나오자 의아해했다.
모두를 보며 말할 수 있게 세워진 단상 위에 올라 카이엔은 어리둥절해하는 영지민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남작의 사망 소식을, 다들 전해들은걸로 알고 있다. 유언에는… 내가 이 땅을 맡아줬으면 한다고 적혀 있었다.”
카이엔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 모습에 정식 영주가 된걸 축하한다고 외치려던 사람들은 냉큼 자신의 입을 막았다.
눈동자를 굴리면서 그들은 카이엔의 눈치를 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린 것을 확인하고 카이엔은 말을 이어나갔다. 한 마디 말을 꺼내는게 너무나도 무거웠다.
“모두 알다시피, 나는 몬스터를 기르고 있고 저택에는 내가 보호하는 이종족 손님도 있다. 그런 내가 영주 대리도 아니고 영주로 있다면, 불안해하는 이들도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미덥지 못한 이들은 떠나도 좋다. 다른 곳에서 정착하고 살 수 있게 지원금은 넉넉히 챙겨줄 테니까. 한 달 정도 생각할 시간을 줄테니까 생각이 있으면 언제든지 영주성으로 찾아오도록.”
“네??”
“그게 무슨 소리세요?”
“저흰 괜찮습니다!”
카이엔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외쳤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카이엔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고 영주성 바로 앞에 위치한 마을 주민들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입을 모아 외쳤다.
“왕자님이 만티코어를 데리고 산책하시는 것도 이젠 일상이죠. 없으면 서운해요.”
“햄스터를 머리에 얹고 다니는 것도요.”
“영주가 되셨지만 자주 가게에 들러 주시는거죠?”
“저희야말로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무슨… 걱정되는 일은 없는 거냐? 나는-”
“그동안 잘 해주셨잖습니까!”
“맞아요. 왕자님은 하실 수 있어요.”
응원 섞인 말들에 카이엔은 당황해서 바이스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바이스는 웃기만 할 뿐 도와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주민들은 주민들대로 새로운 영주를 향해 환호를 보냈다.
시간이 너무 흘러 이젠 얼굴도 기억 안 나는 남작의 친자식보단 이전부터 자주 봐와서 익숙하기도 한 카이엔이 영주가 된 것을 반기는 것이었다.
당황해서 어쩔줄 모르는 카이엔을 향해 마을 아이들이 어디서 가져온건지 모를 꽃다발을 건넸다.
얼떨결에 카이엔이 그것을 받으니 맨 앞에서 그것을 건넨 소녀가 웃으며 말했다.
“저희 가게에서 가져온거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세요.”
“…부모님 허락은 받았니?”
“이제 받을게요.”
카이엔의 물음에 소녀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 말에 카이엔은 피식 웃고 말았다.
계속 죽상이었던 왕자가 그제야, 조금이라도 웃는 모습을 보여주니 환호성은 더욱 커졌다.
“왕자님 만세!”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광장에 몬스터들 동상이라도 세웁시다!”
“오, 그거 좋은데? 사자 머리 위에 올라탄 햄스터로 하면 되겠어!”
“…그런거 만들지 마라.”
잘 나가다가 이상한 결론을 내는 사람들을 향해 카이엔이 어이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꽃집 소녀가 건넨 꽃다발을 품에 안은채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곳 주민들이 그를 거부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영주성에 얹혀사는 왕자가 몬스터를 기르는 것과 영주가 몬스터를 기르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단단히 마음 먹은게 허무할 정도로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영주로 받아들이고 인정했다.
고개를 들어 주민들을 바라보며 카이엔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도, 이곳을 잘 이끌어나갈 수 있게 노력하겠다. 너희들도 끝까지 나를 믿어주었으면 좋겠어.”
“물론이죠.”
“왕자님이 좋은 분이라는건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아무렴.”
“나중에 가서 영주 안 하고 싶다고하셔도 저희가 안 놔드릴 겁니다!”
안정적인 분위기에 한 걸음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바이스는 안도했다.
카이엔이 이전부터 남작을 대신해 영주 대리로 일하면서 손댄 일들이 많았기에 저들역시 카이엔의 일처리 능력을 의심하지 않고 걱정을 던 것이리라.
영지민들의 신임은 이미 얻었다. 이제 남은건, 왕성으로 보낸 문서가 국왕에게 어떻게 판단되느냐였다.
세자르 남작은 자신의 유서와 똑같은 내용의 유서를 한장 더 써서 여러 서류와 함께 묶어놨고 그가 죽으면 바로 그것들을 왕성으로 보내주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 세자르를 카이엔에게 주길 원했다. 유언역시 그러했지만 현 국왕이 카이엔이 한 영지의 주인이 되는걸 달갑게 여길지가 문제였다.
‘안 되면 되게해야지.’
그가 일방적으로 의절하고 나왔긴 하지만 아버지인 후작은 아직 그를 포기하지 않았을 테니 그쪽에 압박 좀 넣고, 티아마티스한테도 도와달라고 옆구리 좀 찌르고, 벨라시 공작도 저번에 그에게 폐를 끼친 적이 있으니 이번 일로 갚으라고 독촉하면 어느 정도 긍정적인 결과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바이스가 걱정한 대로 세자르 남작의 사망소식과 그의 유산이 친자식이 아니라 카이엔에게 상속된다는 서류를 받은 국왕, 바르바스 이디에우스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카이엔은 아직 왕자였지만 가진게 아무것도 없었다. 아주 어릴 적에 제 아버지가 생일 선물로 줬던 땅 조금, 그리고 그때쯤에 제국 황자랑 어울려 놀다가 생긴 딸기밭 하나.
‘그러고 보니 딸기밭에 대한건 잊어버린 건가?’
그의 형이자 전대 국왕이 적당한 관리자 하나 붙여서 돌보게한 딸기밭은 지금도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러다가 국내 시장 딸기란 딸기는 전부 다 그곳에서 재배한걸로 채울셈인건지, 생산량이 어마어마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한 끝에 그는 왕비의 동의를 얻기 위해 집무실로 올 것을 요청했다.
카이엔에 관한 일을 상의없이 진행했다가 나중에 호되게 혼이 나기보단, 이렇게 할건데 당신 생각은 어떻냐고 넌지시 묻는게 훨씬 낫다는걸 이미 몇 번의 실수 끝에 경험한 그였다.
잠시 후 왕비가 집무실에 방문하자 국왕은 세자르 영지에 대해 말했고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이야기를 했다.
의외로 왕비는 아무렇지도 않게 수긍했다.
“남작이 물려준다고했고 막을 이유도 없으니 괜찮지 않겠습니까? 영주 대리로 일했다니까 업무 처리 능력도 검증됐고.”
“흠, 역시 그렇지?”
“하지만, 남작령의 땅을 갖게 됐어도 남작 칭호를 내릴 수는 없죠. 왕자인데 좀 더 좋은 작위를 주시죠.”
“음?”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어서 국왕이 의아해했고 왕비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나중에, 레이지와 혼인하게 된다고 하면 공작까진 올려줄 생각이 있지만 아직은 아니니 그 땅을 백작령으로 상승시키고 작위를 주죠.”
“음, 당신도 그렇게 말한다면야.”
“그리고 말이 나온김에 그 딸기밭 좀 어떻게 해버려요. 매년 갖다 바치는데 처리하기 곤란하니까. 아예 그쪽 땅이랑 인근 지역들을 싹 엮어서 줘버리세요.”
“그럼 꽤 넓을 텐데.”
“어차피 세자르랑 멀리 떨어져 있어서 쓸모도 없고 세금만 잘 받아서 모으라고 하죠.”
딸기밭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왕비 쪽에서 먼저 나왔다.
카이엔이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딸기밭도 챙겨주기로 하고 국왕은 헛기침을 했다.
주인은 카이엔이었지만 딸기는 매년 카이엔이 없는 왕성으로 세금과 함께 운반되었기에 처치가 곤란해서 과일주나 잼 등으로 만들어놓은게 창고 한 켠에 가득 쌓여있었다. 저것들도 보내버리기로 마음먹고 그는 자필로 기나긴 임명서며 작위와 영지 수여에 관한 서류를 써 내려갔다.
왕비는 옆에서 혹시라도 남편인 그가 빼먹은 땅이 있나 확인하기 위해 꼼꼼히 살폈다.
그녀가 국왕의 말에 쉽게 동의한 이유는, 바로 카이엔의 옆에 떡하니 버티고 서있는 페르세이지를 걱정해서였다.
‘그놈이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알고.’
어떻게 나올지 당최 알 수가 없지만 그놈의 성격상 정상적인 행동은 하지 않고 분명 무슨 미친 짓을 벌일게 분명하니 예방할 수 있는 문제라면 빠르게 처리하는게 나았다.
이거 줄테니까 먹고 떨어져라, 식의 대처였지만 원하는 것을 얻게 된다면 그놈도 조용해지리라.
그런 왕비의 속내도 페르세이지가 카이엔의 옆에 딱 붙어있는 줄도 모르는 국왕은 열심히 종이 위에 왕명을 적어 내렸다.
***
세자르를 백작령으로 바꾸고 카이엔 이디에우스 왕자에게 백작의 작위를 수여한다.
…왕명서를 보고 카이엔은 인상을 썼다.
백작명을 새로 짓고 싶으면 얼마든지 새로 지어도 된다는 말도 쓰여있었다.
함께 온 다른 서류에는 세자르를 포함해 그의 손안에 들어오는 땅들이 적혀있었는데 그 안에 살포시 끼어있는 딸기밭을 보며 카이엔은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왕명을 전달하기 위해 온 심부름꾼 뒤에 커다란 짐차가 있었고 그 안에 딸기주며 포도주가 잔뜩 있는 이유가 궁금했는데.
딸기밭에서 왕성으로 운송된 처치 곤란한 딸기들이 모조리 술이나 잼이 된 모양이다. 그쪽에서 먹은 딸기만큼은 포도주로 보내주기도 했고.
아무튼 덕분에 지하 와인 창고가 터질 것 같다며 바이스가 덧붙였다.
“…나눠줘. 나 혼자서는 다 못 마시니까 영지민들한테도 적당히 나눠주고 영주성 사람들한테도 선물로 주고 별채 녀석들한테도 줘. 슬로세이는 잼 주고.”
“알겠습니다.”
슬로세이가 고집을 부리는 모습이 눈에 선했지만 바이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그는 왕성에서 온 딸기주를 살펴서 제일 좋은 것들은 카이엔을 위해 빼놓을 생각이었다. 지금은 술을 멀리하는 왕자님이지만 나이를 더 먹으면 입맛이 바뀔지도 모르니 말이다.
왕성에서 술과 잼을 얼마나 보냈는지 표도 같이 왔다며 바이스는 카이엔에게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그리고 왕자님, 백작위를 받으신걸 축하드립니다.”
“어.”
“이제 왕자님이 아니라 백작님이라고 불러야겠네요.”
“그건 좀 낫겠다.”
“다들 왕자님이란 호칭이 입에 붙어서 왕자님이라고 부르겠지만요.”
“끄응…”
“다른 이름을 지으실 건가요? 세자르를 다스리는 세자르 백작 카이엔 이디에우스로 칭하셔도 됩니다만.”
“…됐어. 내가 어떻게 그 이름을 쓰겠어.”
흘러내린 앞머리를 뒤로 넘기면서 카이엔이 말했다.
“적당한걸로, 네가 생각해봐.”
“일주일의 시간을 주시면 최고의 이름을 만들어오겠습니다.”
“…이틀 안에 해결해. 도대체 얼마나 고민을 하려고?”
“그럼 다른 분들에게도 의견을 구해야겠군요. 술을 건네면서 토론을 해봐야겠습니다.”
“술판에서 좋은 생각이 나올 것 같아?”
“물론이죠.”
“이상한걸 내밀면 던져버릴 거야.”
“저도 압니다.”
웃으면서 바이스는 한 마디도 지지 않았다.
더이상 이야기는건 시간 낭비일 것 같아서 카이엔은 마저 서류를 읽어나갔다.
이노스로 인해 얻게된 딸기밭은 세금 말고도 왕성에 주기적으로 최상품 딸기를 보냈는데 그가 세자르로 간 이후로도 꾸준히 왕성으로 딸기를 보냈고, 그것은 왕실 주방으로 옮겨졌다.
그가 어렸을 적에도 그랬으니 아마 그가 떠난 뒤에도 비슷했으리라.
다만 주인이 없는 과일을 먹는게 마음에 걸린 건지 절반은 식재료로 쓰고 절반은 술로 만들어버린 모양이다.
서류에는 딸기주를 만든 양조장 위치까지 적혀있어서 카이엔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차분히 모든 서류며 왕명서, 편지 등을 읽고 내용을 정리한 뒤 카이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별채로 가십니까?”
“어. 오랜만에 같이 식사라도 하지.”
“그러실 줄 알고 미리 준비해놨습니다.”
“…어떻게 안거야?”
“그야 왕성에서 왕명이 내려오지 않았습니까. 마음이 복잡하시겠죠.”
“됐으니까 이번엔 너도 앉아서 식사한다.”
“그건 거절하겠습니다.”
“왜?”
“어찌 고작 시종 따위가 왕자님과 겸상을 할 수 있다는겁니까.”
“이럴 때만 예의 바른 척 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