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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왕자는 조용히 살고싶다-87화 (88/219)

87화

비가 오는 날이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좍좍 쏟아지는 비에 슬로세이는 호숫물 대신 비를 맞으며 빗속에서 놀았다.

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를 뒤로하고 카이엔은 서류를 읽는 것에 집중했다.

그를 보조하기 위해 에빌도 영지 관리법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그가 할 일이 줄어들어서 보다 수월하게 일할 수 있었다.

이따금씩 울리는 천둥번개 소리에 몸을 떨면서 카이엔은 저러다가 슬로세이가 벼락이라도 맞으면 어쩌나, 하는 이상한 상상을 했다.

인어도 벼락에 맞나? 맞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헛생각에 잠긴 그는 바이스가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마저 집중했다.

장마는 며칠 동안 이어졌다.

저러다가 비가 멈추고 날씨가 급격히 추워지겠지.

얼른 그쳤으면 좋겠다며 카이엔은 커튼을 닫았다.

날씨가 좋지 않으니 남작을 데리고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바퀴 달린 의자가 있다고 해도 저택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으니 답답할 테고.

금세 겨울이 올테고 그 역시 한 살 더 먹게 될거다. 스무 살이 눈앞이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나 지났구나.

열아홉 생일날 에빌이 뜬금없이 찾아오는걸로 놀랄만한 사건은 더이상 없을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뒤로 별의별 사건이 벌어지면서 영주성의 잔뜩 식구가 늘어났다.

‘내년에는 안 그러겠지?’

이걸로 충분하다며 카이엔은 피식 웃었다.

언제 끝날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비를 살피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짙은 먹구름에 가려진 태양을 그리워하면서 카이엔은 그가 할 일에 몰두했다.

그 일은 해 질 무렵에 벌어졌다.

업무를 마무리 짓고 에빌을 퇴근시키고 그 역시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밖에서 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에빌이 벌떡 일어나 문을 열어주니 숨을 헐떡이면서 하인이 외쳤다.

“와,왕자님! 나,남작님께서…!”

“뭐?”

“빠,빨리… 빨리 가보셔야합니다!”

그 말에 카이엔은 자리를 박차고 달려 나갔다. 그의 뒤를 바이스가 따라갔고 에빌또한 몇 걸음 뒤처지긴 했지만 그 두 사람을 따라갔다.

남작의 방으로 달려가는 내내 카이엔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설마 무슨 일이 생긴걸까? 상태가 많이 안 좋아졌나? 하지만 점심 식사 후에 찾아갔을 때엔 괜찮았었는데?

또 약을 먹다가 토한 건지 잠시 숨을 쉬지 않았던 건지. 그 무엇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그가 도착했을 때 숨이 멎어있는 일만은 없기를.

“헉… 허억…”

단숨에 달려서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건만, 카이엔은 쉬지 않고 달려 나갔다.

장애물들 따윈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휘청이는 몸에 무언가가 부딪치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 나갔다.

그런 그의 뒤를 바짝 쫓아가면서 바이스는 혹시라도 카이엔이 넘어질까봐 유심히 그를 살폈다.

카이엔이 벽에 부딪치면서 액자가 흔들리니 붙잡고 꽃병이 엎어지려고 하니 잡아챘다.

‘아직은 아냐.’

바이스 역시 남작이 잘못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허나 그 이유는 카이엔과는 달랐다.

‘그 사람은 좀 더 왕자님의 곁에 있어줘야한다. 버팀목이 되어줘야한다. 의지할 수 있는 어른으로서 남아있어줘야해.’

그의 눈에는 아직도 카이엔은 성숙하지 못한 아이였으며 상실의 아픔에 너무나도 취약했다.

쉬지 않고 달리다 보니 그들은 어느새 남작이 요양하고 있는 방 앞에 도착했다. 숨이 몰아쉬며 카이엔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남작의 전담 시종과 시녀, 의사와 집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왕자님…”

그들은 카이엔을 보자 바로 뒤로 물러났다.

침대 위의 남작은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왕자…님…”

“뭐야… 무슨 일이야… 놀랐잖아.”

카이엔은 터덜터덜 침대 근처로 갔다. 의자에도 앉지 않고 그대로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남작의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아냐, 아닐거야. 수십번 되뇌면서 어떻게든 진정하려고 애를 썼지만 남작은 카이엔을 향해 손을 뻗으며 느릿느릿 목소리를 냈다.

“괜찮…으실 겁니다. 다 준비, 했거든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니지…?”

“죄송합니다. 왕자님, 저는… 계속 후회하고 있었어요. 제가, 당신을… 좀 더 잘, 돌봤어야했는데…”

남작의 눈동자가 카이엔의 모습을 담았다.

1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훌쩍 자란 청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그의 눈에는 어린아이인 왕자는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불안해하고 겁을 먹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마치 이곳에 처음 왔었을 때처럼 불안정한 모습이었다.

“제가… 왕자님을, 좀 더 잘 보살폈다면… 왕자님은, 좀 더 밝고 활기찬 아이가 되셨을까요…? 그저, 살아있는 것만을 바라고… 숨만 붙어있으면 된다고… 그게 아니라, 꿈을 가지고 보다 높은 목표를 세우고 도전하는… 그런, 어른이 될 수 있었을까요.”

왕성에 있었을 땐 정말로 밝게 웃었을게 분명했던 어린 왕자는 가족을 잃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것처럼, 내내 우울해져 있었다.

인간은 그를 감히 위로해줄 수 없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다독여준건 몬스터들이었다.

남작은 그것이 너무나도 미안하고 죄송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불경한 말이지만… 왕자님을, 막내아들이라고 생각하고… 돌봐드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잘할 수 없었어요… 제가 모자른, 탓입니다….”

“…아냐. 충분했어. 잘 해줬어. 나, 멀쩡히 살아있고 잘 자랐잖아. 그렇잖아.”

“…왕자님.”

“응.”

“이곳을, 받아주십시오. 이 땅을, 당신께 드리고 싶습니다.”

남작은 카이엔을 보며 흐릿하게 웃어 보였다.

그것은 유언이었고 카이엔은 떨리는 눈으로 남작을 바라보았다.

남작은, 그에게 있어서 두 번째 부모였다. 돌아가신 부모님 대신 그를 맡아주겠다고 나선 유일한 사람이었으며 그를 어렵게 여기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은 뭐든지 해주었다.

몬스터를 기르게 해주고 그의 곁에 있을 수 있게 해줬고 무엇보다도, 끝까지 그를 내치지 않았다.

수많은 암살 위협속에 시달리는 그를 대놓고 도와주진 못했지만 뒤에서는 어떻게든 암살자들을 방해하려고 애를 썼고 그가 이 세자르라는 땅에 발을 붙이고 살 수 있게 해주었다.

이곳의 환경을 그에 맞추어주었다.

“왕자님.”

“…응.”

“분명, 잘해내실 수 있을 겁니다. 다들, 아시지 않습니까… 왕자님은, 왕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하셨지만… 이 땅만큼은 받아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남작은 카이엔을 향해 손을 뻗었다. 떨리는 손을 잡고 카이엔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남작은 작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왕자님이… 좀 더 자란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결혼 상대는, 바이스 군이 알아서… 잘 해주겠죠. 카이엔, 왕자님…”

카이엔은 남작의 다음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긴 침묵이 깔렸다.

다음에 와야할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들리지 않았다. 카이엔은 남작을 바라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게슴츠레 뜨고 있었던 눈이 완전히 감겨있었다. 남작의 손을 붙잡고 있는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아무리 힘을 줘서 잡아도 반응이 없었다. 끊어질 듯 말듯한 숨소리도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아….”

카이엔의 목소리가 힘없이 떨렸다.

움직이지 않는 남작을 향해 그는 손을 뻗었다.

침대를 움켜쥐고 일어나 몸을 숙여 심장 근처에 귀를 가져다 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뭐야.”

이러면 안 되잖아.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왜 다 마치지 못하고.

입을 벙긋거리다가 카이엔은 그대로 울음을 토해냈다.

“아아아…!!”

이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보내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하늘은 칙칙하고 잔뜩 먹구름이 껴있었고 어두웠다. 적어도 밝은 날. 파란 하늘을 보여주고 싶었다. 좀 더 좋은 날,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눈을 감게 해주고 싶었다.

당신이 나에게 미안해할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하고싶었다.

몇 번이고 몇 십번이고 말해줄 수 있었다.

그때 나를 살린건 당신이고 지켜주려고 한 것도 당신이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아들처럼 대해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나에게도 부모님이 필요하다고 진심으로 부탁하고 싶었다.

남작의 시신을 끌어안고 카이엔은 비명을 질렀다.

영문도 모르고 지나쳐버린 부모님의 장례식과는 달랐다.

그는 많이 자랐고, 거의 성인에 근접한 나이가 되었으며 곧 어른이 될 것이다. 남작은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방 안의 모두 침통한 얼굴로 그런 카이엔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택에 있던 시간이 길었던 그들인 만큼, 카이엔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남몰래 눈물을 훔치던 아이는 지금 다른 이들의 눈을 신경 쓰지 않고 울고 있었다.

“안 돼, 안된다고… 죽으면 안 돼…!!”

심장이 뛰지 않는다.

숨을 쉬지 않는다.

알고 있으면서, 확인했으면서 카이엔은 시신에 매달리며 절규했다.

그는 아직, 남작에게 해준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그에게 남작은 이 땅을 맡긴다고 말하고 눈을 감았다. 유언을 남겼다.

끝까지 그를 걱정하면서 죽어버렸다.

목이 터져라 그는 비명을 질렀다.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 누구도 카이엔을 떼어낼 수 없었다.

그는 계속 눈물을 흘렸다. 지금까지 참아왔던 눈물을 모두 흘리려는 것처럼, 끌어안은 시신에 덮힌 이불을 적셔가면서 울었다.

소리까지 지르다 보니 금세 목이 쉬어버렸다. 숨이 막힌지 컥컥거리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그런 그를 말린건 바이스였다.

억지로 카이엔을 떼어내면서 그가 말했다.

“왕자님, 진정하세요.”

“헉… 허억… 끄으….”

“숨을.”

“흐, 으윽…”

“안 되겠네요.”

달래는 것을 포기하고 바이스는 카이엔을 끌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카이엔은 바이스에게 붙잡힌 채로 몸을 비틀었다. 어떻게든 빠져나가 남작에게 가려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놓아줄 바이스가 아니었다. 그는 팔에 더욱 힘을 주었고 카이엔은 그의 품 안에서 버둥거렸다.

“흐윽… 으… 아아아아악!!”

“비명 지를 기운은 남아있으시군요. 이런다고 남작님이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여러분, 장례식 준비를 시작합시다. 장의사를 불러와 주세요.”

“어…”

“하지만 왕자님이…”

“좀 더 작별 인사를 나눌 시간을 드리는게 좋지 않을까요?”

냉정한 바이스와는 대조되듯 카이엔은 아직도 울음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가족과도 같은 사람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시종과 시녀도 눈시울이 붉어졌는데 카이엔은 오죽할까. 아마 속도 갈가리 찢기는 것만 같으리라.

집사의 말에 바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계속 울어봤자 힘만 빠집니다. 왕자님, 정신 차리세요.”

“흐윽… 어떻게… ? 넌, 아무렇지도 않아…?”

“저까지 손 놓고 망연자실할 시간은 없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는데.

남작이 그를 자식처럼 생각하고 싶었다고 말했던 것처럼, 그 역시…

조금쯤은 아버지, 그것도 아니면 할아버지를 대하듯이 그에게 다가갔어도 됐을 텐데.

어린 시절의 그는 오로지 사트로누스에게만 의지했다. 남작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긴했지만 좀 더 빨리, 가까워져도 됐을 텐데.

좋은 사람이란걸 알면서도 먼저 다가가지 못했던 그의 잘못이었다. 겨우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로 카이엔이 중얼거렸다.

“나는… 못해. 못 보내겠어. 이거 놔… 놓으라고!”

“저도 못 놓습니다.”

바이스는 더욱 단단히 카이엔을 붙잡았다.

이대로 놔뒀다간 카이엔은 시신 곁을 떠나지 않고 내내 울다가 쓰러질게 뻔한데, 그는 그 꼴은 못 본다. 남작또한 카이엔이 그런식으로 쓰러지는걸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억지로 카이엔을 떼어냈다. 싫다고 버둥거려도 절대로 놓지 않을 것이다.

“부탁드립니다. 장례식 준비를 해주세요. 유언장도요.”

“…알겠습니다.”

“왕자님을 부탁드립니다.”

의사와 집사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는 가방에서 흰 천을 꺼내 남작의 얼굴을 덮었다.

차분한 목소리로, 그는 사망선고를 내렸다. 카이엔의 얼굴이 더욱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결국 참지 못한 시녀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아…”

“왕자님도, 조금은 쉬십시오. 진정하시고요.”

“내가 어떻게 진정을-”

목소리를 높이려던 카이엔이었다.

바이스는 그런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입 안으로, 무언가가 들어왔다.

무엇인지 알아낼 틈도 없이 목구멍 안으로 들어갔고 곧 그의 몸이 축 늘어졌다.

“하아…”

미리 그리델라에게 부탁해두길 잘했다며 바이스는 쓰러진 카이엔을 안아 들었다.

남작이 죽었을 때. 카이엔이 이런 식으로 정신을 놓을까봐 즉효성에 시간은 짧은 수면제를 미리 부탁해놨었다.

앞으로 3-4시간 정도면 일어날 테니 그전까지 장례식 준비를 끝마쳐야했다.

다시 한번 집사에게 부탁을 해놓고 바이스는 카이엔을 데리고 방 밖으로 나왔다.

비냄새가 섞인 찬공기에 마음 한켠이 서늘해졌다.

“…….”

카이엔을 위해서라도 그는 항상 냉정해야만했다.

그것이, 그가 지켜야 하는 왕자를 위한 행동이었다.

아마 카이엔은 깨어나고 나면 굉장히 크게 화를 낼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대뜸 약을 먹여서 기절시킨 거나 마찬가지였다.

뒤통수를 후려쳐서 기절시킬 수는 없으니 약을 쓴거였지만 이거나 그거나.

“…좀 더 강해지십시오.”

일단 카이엔을 방에 눕혀놓을 생각으로 바이스는 걸음을 옮겼다.

자기한테 하는 말인 건지, 잠든 카이엔에게 하는 말인 건지 모를 소리를 계속 중얼거리면서,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었다.

“더이상 당신을 슬프게 만들지 않을테니.”

“당신보다 먼저 곁을 떠날 사람은 이제 없을 테니까.”

“강해지셔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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