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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왕자는 조용히 살고싶다-86화 (87/219)

86화

말 많고 탈 많았던 제국을 뒤로하고 카이엔은 무사히 가르간트로 돌아올 수 있었다.

변경백령을 넘을 때엔 긴장했지만 다행히 별 탈 없이 통과할 수 있었고 세자르에 도착하고 나서야 카이엔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전에 그가 세자르를 떠났다가 돌아왔을 때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예전엔 항상 그가 언제 오나 내내 목이 빠져라 기다렸던 남작이 미리 마중을 나와 있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병환에 요양 중인 남작은 저택 밖에서 카이엔을 기다릴 수 없었다.

“오셨습니까, 왕자님?”

세자르 남작은 카이엔이 방 안으로 들어오자 웃으면서 그를 맞이해주었다. 허나 카이엔이 가까이 오려고 하자 손을 뻗어서 그를 제지했다.

“폐렴이라는군요. 옮을 수 있습니다.”

“괜찮아.”

“안 됩니다. 큼…”

기침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면서 남작은 고개를 숙였다.

건강한 성인이라면 모를까, 노인에게 폐렴은 굉장히 위험한 질병이었다.

제국으로 떠나기 전에 봤던 것보다 좀 더 안색이 나빠진 남작을 보며 카이엔은 입술을 깨물었다.

“좋은 약이 있으면… 가져오려고 했는데.”

적당한 것이 없어서 영양제로 쓸만한 것밖에 구해올 수 없었다.

사제에게 보여준다고 해도 그들은 외상치료 전문이지 신성력은 그 외의 질병에는 별 효과가 없었다.

남작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카이엔은 의자를 끌어당겨 침대 가까이에 두고 앉았다.

“건강 잘 챙겨. 아프지말고… 죽지도 말고.”

“허허. 늙으면 다 죽기 마련입니다.”

“그래도.”

“아직 왕자님이 이렇게나 어리신데 제가 죽을 수는 없죠. 힘내겠습니다.”

다 컸다고 할 땐 언제고.

투덜거리고 싶었지만 카이엔은 꾹 참았다. 그만큼, 세자르 남작의 몸 상태는 안 좋아 보였다.

허나, 그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남작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었다.

그 어떤 의사를 불러와도 차도가 없었고 좀 더 고통을 줄여주고 증상을 완화시키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꾸준히 약해지고 있던 것이다.

이쯤 되면 폐렴 말고 다른 문제가 있다는 것일 텐데 그 누구도 정확한 병명을 알아내지 못했다.

카이엔은 영주 대리로서 일하면서도 매일 꼬박꼬박 남작을 찾아갔다.

지금이 아니라면 안되는 것처럼, 조금이라도 같이 있는 시간을 늘리려고 애를 썼다. 그 마음을 알기에 바이스는 카이엔을 말리지 않았다.

“…오늘은 날씨가 좋아.”

창문을 가린 커튼을 걷으면서 카이엔이 말했다.

모처럼 맑은 날이라 햇볕이 따뜻하다면서 중얼거린 카이엔은 남작을 바라보았다.

며칠 사이에, 좀 더 몸이 마른 것 같았다.

“밖에 나간 지도 오래됐지?”

“그렇군요. 꽤 오래됐어요.”

“…걸을 수는 있겠어?”

“걸을 수는 있지만 계단을 오르내리는건 장담할 수 없군요.”

“잠깐만 기다려.”

말을 마치고 카이엔은 방 밖으로 나갔다.

삼십 분 정도 있다가 돌아온 그는 라스를 데리고 왔는데, 라스는 들고온 커다란 의자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싶어서 남작이 의아해하자 카이엔이 말했다.

“의자에 앉아서 나가자. 라스한테 부탁했어.”

“그런… 힘드실 텐데.”

“괜찮습니다. 이런 식으로라도 도움이 된다면 저도 기뻐요.”

“부축해줄 테니까 천천히 일어나봐.”

행여나 추위를 탈까봐, 의자가 불편할까봐.

등받이 부분에 쿠션을 하나 더 덧대고 담요로 몸을 감싸주었다.

혹시라도 의자에서 휘청거리다가 떨어질까봐 걱정되어서 벨트로 몸과 의자를 단단히 고정시킨 다음 라스는 남작을 앉힌 의자를 번쩍 들어 올렸다.

인간보다 근력과 체력이 좋은 늑대 인간인지라 쉽게 의자를 들고 걸을 수 있었다.

조심히 계단을 내려가고 문 밖으로 나가 정원으로 향했다. 햇볕에 눈이 부신지 남작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오랜만이군요.”

“앞으로는 자주 나오자.”

라스의 도움으로 카이엔은 남작과 함께 천천히 정원을 산책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남작이 산책을 나간 사이 시녀들이 방을 환기시키고 청소를 마친 상태라 아까보다 훨씬 공기가 좋았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자신에게 알리라고 말하고 카이엔은 마저 일을 하러 집무실로 돌아갔다.

그 후로도 카이엔은 라스에게 요청해서 남작이 방 밖으로 나와 바깥 공기를 쐴 수 있게 했다.

일상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말없이 지켜보기만 하는 라스는 좀 더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한 끝에 엔베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왕자님이 남작님과 둘이서 산책할 수 있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으음… 밖으로 나오는건 네가 도와줘도 산책할 때 정도는 두분이 함께 있으실 수 있게?”

“응. 그랬으면 좋겠어.”

“남작님은 몸이 많이 안 좋으시니까… 의자에 바퀴를 달면 어떨까?”

“만들 수 있을까?”

“바퀴가 있으면 움직이기도 수월할테고 손잡이를 달면 다른 사람이 밀어줄 수도 있겠지. 설계도를 만들어봐야겠다.”

함께 가구를 수리하고 적당히 만들어내던 경험을 떠올리면서 라스와 엔베인은 즉시 작업에 착수했다.

의자에 달 바퀴는 마차 바퀴로 쓰는 단단한 나무를 사용하기로 했다.

금속도 좋겠지만 일단 나무로 연습해보고 괜찮은 결과물이 나오면 금속으로 바꾸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이미 있는 의자에서 다리를 떼어내고 바퀴를 다는 작업을 하다가 때려치우고, 바퀴에 맞는 의자를 직접 만들어서 손봤다.

전문적인 목수가 만드는 것만큼 예쁘게 만들어지진 않았지만 의자로는 충분한 결과물이 탄생했다.

두 사람이 훈련도 내팽겨치고 바퀴달린 의자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니 별채의 다른 친구들도 한번씩 기웃거리고 필요한 물건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적당한 결과물을 만들어낸 그들은 다른 사람을 태워보는 것으로 안전성 실험까지 끝마친 다음에 그것을 카이엔에게 가져다주었다.

난생 처음 보는 바퀴달린 의자에 카이엔이 깜짝 놀라 물었다.

“너희가 만든 거야?”

“같이 만들었습니다. 왕자님이 남작님과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실 수 있도록요. 제가 있으면 하실 말도 못하실거 아닙니까.”

“그건 아닌데…”

“안전하다는 것도 확인했어요. 괜찮을 거예요.”

“쿠션만 추가로 올리면 더 좋을 겁니다.”

“고맙다.”

이걸 만드느라 엄청 고생했겠지. 그가 별채 근처를 지나갈 때 들었던 망치질 소리가 아마 이걸 만들 때 났던 소리였던 모양이다.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하고 카이엔이 말했다.

“그런데 계단에서는 못 쓸테니 일 층 현관 앞에 둬야겠네.”

“방에서 일층까지 모셔다드리는건 제가 돕겠습니다.”

“고마워.”

라스와 엔베인이 만든 바퀴달린 의자는 일층 출입구 옆에 세워두도록 했다.

처음 보는 물건에 저택 사람들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는데 그것이 남작을 위해서 두 사람이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살짝 감동했다.

남작역시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여느때와 달리 라스가 의자에 앉힌 그를 들어 올리지 않고 담요로 얌전히 감싼 다음 안아들자 이건 또 무슨 일인건가, 싶었는데 일층까지 내려오고 나니 바퀴달린 의자가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손잡이가 있어서 카이엔이 뒤에서 밀면 앞으로 나아갔다. 라스가 힘들게 의자째 그를 들고 산책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었다.

“라스랑 엔베인이 같이 만들었어. 괜찮은 물건이 없을까, 라고 라스가 물어보니까 엔베인이 생각해냈나봐.”

“실패도 많이 했지만 이건 쓸만할 겁니다.”

“그런… 고생이 많았겠군요. 감사합니다.”

“이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산책이 끝나면 불러주세요.”

“그래.”

바퀴 달린 의자는 카이엔의 힘만으로도 끌고다닐 수 있었다.

남작의 몸무게가 너무 가벼운 것 같아서 카이엔은 우울해졌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여전히 햇볕이 참 따스했다. 이러다가 추워지면 산책도 못 나올텐데. 병이, 더 깊어질 수도 있을텐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카이엔은 바퀴 달린 의자의 손잡이를 잡고 앞으로 밀었다.

고르지 못한 땅에 살짝 덜컹거리긴 했지만 남작은 불편하지 않은 건지 참 좋은 물건이 생겼다는 말만 반복했다.

꽃밭 앞에서 카이엔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저번보다 더 피었네.”

“그렇군요.”

“봄 되면, 다른걸 더 심으려고. 그리델라가 아는 꽃이 많다더라.”

“예쁘겠군요.”

“…아직도 많이 아프지?”

“왕자님이 걱정해주셔서 그런지 점점 나아지는 것 같습니다.”

거짓말이었다.

남작의 자식들은 이곳에 없기에 의사는 카이엔에게 그의 몸상태를 알렸다.

차도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작은 카이엔의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고 있었다.

입술을 깨물며 카이엔은 할말을 골랐다.

“…아들들은, 뭘 하고 있다고 했었지?”

“수도로 올라가 일자리를 찾았다고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편지를 받았을 땐, 어느 귀족 밑에서 일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어딘지는 모르고?”

“직장을 옮겼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정확히 모른다는 말이었다.

잠시 작게 기침을 하다가 남작은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천천히 그가 목소리를 냈다.

“왕자님.”

“응.”

“유언장은 미리 써뒀습니다. 후계 문제도 잘 처리했습니다.”

“무슨…”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난 안 괜찮아.”

“괜찮아지셔야합니다.”

그 목소리 만큼은 너무나도 단호했다.

의자의 뒤편에 서있던 카이엔은 남작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몸이 햇볕을 가려서 남작의 몸에 살짝 그림자를 드리웠다.

처음 봤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마르고 가늘어진 몸. 주름진 얼굴. 카이엔은 고개를 떨구었다.

“왜, 그런 말을 해?”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둬야하지 않습니까.”

“나을 수도 있잖아.”

“제 몸이니까 알 수 있습니다. 왕자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카이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확히 어디가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작의 몸상태는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지금은 그나마 멀쩡했지만 점점 음식물을 삼키는게 힘들어지고 있다고 들었다.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남작은 웃어 보였다.

“걱정마십시오, 왕자님. 이젠 많은 사람이 곁에 있지 않습니까.”

“안 괜찮아.”

“마지막에, 작별 인사를 할 시간 정도는 있으면 좋겠군요. 저도 아직 다 정리하지 못한 말들이 있으니까요.”

“…무슨 소리야.”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자신의 지난날을 되돌아보면서 반성하게 된다고 합니다. 저역시, 왕자님께는 죄송한 마음 뿐입니다.”

“죄송해하지 않아도 돼.”

“저는 당신을 맡겠다고 한 주제에 처음에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습니다. 당신을 암살하려고 한 자들만큼이나, 그들을 막지 못하고 당신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만 있던 저도 나쁩니다.”

“그런 말 하지마.”

카이엔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세자르 남작을 욕할 권리는 없었다.

그는 아무도 맡으려고 하지 않은 어린 왕자에게 스스로 손을 내민 사람이었으며 지금까지 아무런 요구조건없이 그를 돌봐주었다.

그에게 있어서 남작은 은인이었다. 그런 사람이 좀 더 잘 돌봐주지 못한 것에 미안해하다니.

마음이 무거워지면서 괜히 울컥했다.

“왕자님.”

부드러운 목소리로 남작이 그를 불렀다.

바싹 마른 손바닥이 그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왕자님은 분명히 괜찮으실 겁니다.”

“…아냐.”

“그렇게 되도록 만들 겁니다.”

“그만 가자. 이상한 이야기나 하고 있고…”

카이엔은 몸을 일으켜 다시 의자의 손잡이를 잡았다.

반 바퀴 빙 돌아서 방향을 바꾸고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내딛었다.

어쩐지, 바퀴달린 의자를 끌고 가는 걸음을 내딛는 것이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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