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멀리 떨어진 이노스의 군대역시 마찬가지였다.
지진이 생기자 다들 근처의 물건을 잡고 몸을 지탱하느라 바빴다.
언데드들은 땅울림이 그친 다음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병사들은 한 박자 늦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가까스로 검을 들거나 몸을 돌려 공격을 피한 자도 있었지만 절반은 무력하게 언데드에게 공격당했다.
“프라우디에!”
땅이 갈라지고 나서야 카이엔 역시 흑마법의 기운을 알아차렸다. 그의 외침에 프라우디에는 즉시 마력을 움직였다.
이리저리 뒤틀리고 뒤엉킨 땅에서 솟아올랐던 언데드는 그의 마력에 의해 다시 땅속으로 돌아갔다.
민첩하게 언데드의 공격을 피한 자도, 힘없이 공격당하고 말았던 자도 나온지 5분도 되지 않아서 땅으로 돌아간 언데드들 때문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무슨 일이지…?”
“글쎄…”
“으악! 내 팔!”
“어서 빨리 치료해!”
언제 다시 언데드들이 나올지 몰라 부상자들은 급히 치료를 받았고 멀쩡한 이들은 손에 무기를 들었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1황자와 1황녀의 군단이 언데드들과 맞서 싸우느라 바쁜 와중에 이노스가 이끄는 군단만은 언데드에게서 멀쩡했다.
언데드를 부리는 술사는 이상상황을 놓치지 않았다.
프라우디에가 언데드가 다시 일어나는 것을 억제하느라 손이 잠시 묶인 사이 또 다른 마법이 그들을 향했다.
“컥…”
“뭐,뭐야 이건!”
“으아악!!”
검은 안개 같은 것이 그들을 감쌌고 병사들은 우왕좌왕하며 주변을 살폈다.
주변에서 비명소리가 들리니 긴장감이 더해졌다.
그리고 한 병사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거대한 거미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으,으아악! 저게 뭐야! 으아악!!”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거미를 보았지만, 병사들은 각자 다른 괴물들을 보고 있었다.
괴물이기도 했고 두려워하던 사람이기도 했으며 정체불명의 근원을 모를 공포또한 눈앞에 나타났다.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그 누구도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없었다. 그들 역시, 비슷한 악몽을 꾸고 있었다.
“…….”
카이엔은 말없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뜨는 것을 반복했다.
그에게 있어서 악몽이라는 것은. 공포라는 것은.
그날 밤이었다.
지금보다 더 무력하고 약해빠졌던 어린아이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들릴 듯 말 듯했던 비명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을 느끼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침대 위에 앉아있었다.
짐승의 울음소리.
피와 땀의 냄새.
짐승의 숨결과 축축히 젖은 가죽.
몇 번이고 질리도록 봤던 악몽 속에서 카이엔은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그 순간,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 흔들었다.
“왕자님!”
금빛이 도는 보라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어느새 본모습으로 돌아온 비셰가 그의 양 뺨을 붙잡고 얼굴을 살폈다.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러더니 다행이라며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괜찮으세요?”
“응… 무슨 일이 있었던거지?”
“환상이예요. 사람들에게 악몽을 보여주고 있었어요. 제가 처리할 수 있지만요.”
꿈을 조종하고 사람을 미혹하여 환상을 보여주는 몽마.
비셰는 이곳의 그 누구보다도 정신조작에 능한 이였다. 가짜 모습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마력도 아까운지 본 모습을 드러내고 비셰가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지휘봉 없이 손을 움직이는 지휘자와 같은 모습이었다.
“몽마는 이런 것도 할줄 아나?”
“네. 어느 정도는…”
아까까지만 해도 눈을 빤히 쳐다보던 녀석이 이젠 그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여겼지만 카이엔은 더 묻지 않았다.
말을 걸어봤자 비셰의 집중에 방해될 거라 여겨서였다.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어. 너는?”
“저한텐 별 효과 없었던 모양입니다. 다른 분들은 좀 힘들어하시던걸 비셰 씨가 도와줬고요.”
다들 휘말렸던거구나. 이거, 비셰의 역할이 막중하다. 안 데려왔으면 큰일 날뻔했다며 카이엔은 혀를 내둘렀다.
비슷한 생각을 한건지 바이스가 입을 열었다.
“안 데려왔으면 큰일이 날뻔했군요. 쓸모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어… 그러게.”
어쩐지 바이스의 그 말은, 드디어 비셰가 밥값을 한다고 하는 것만 같았다.
주방에서도 아직 막내를 벗어나지 못해 재료 손질을 도맡고 있는 비셰였으니까.
지금까지 다른 이들에 비해 기도 못 펴고 쭈그러든 모습만 봤던지라 적극적으로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이 새로웠다.
***
검은 안개가 퍼지자 비셰는 바로 그 안에 섞인 마법을 알아차렸다.
대규모 정신조작! 이런걸 즉시 해낼 수 있는 마법사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경악하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비셰는 급하게 일행의 상태를 확인했다.
프라우디에는 언데드를 억누르면서 자신의 몸을 마력으로 보호했기에 정신계 마법이 통하지 않았지만 다른 이들은 달랐다.
악몽과 같은 환상을 보고있는 이들을 보고 비셰는 급하게 그들을 챙기려고 했다.
“무슨 일 있는 겁니까?”
“어…??”
그런데 그 와중에 바이스는 멀쩡했다.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보여주는 환상에서, 과거 트라우마를 재현해내는 악몽에서 그 혼자만은 멀쩡히 두 발로 서있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을 공포라는 감정이 그에게는 없는 것마냥 바이스는 너무나도 정상이었다.
덕분에 비셰는 당황한 나머지 더듬거리면서 설명을 했고 바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요컨대, 환상을 보여준다는거군요.”
“네…”
“왕자님 먼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나머지 분들은 제가 충격요법으로 어떻게든 정신 차리게 하겠습니다.”
때린다는건가?
경악을 하며 비셰는 손을 저었다.
바이스가 손속을 두고 팬다고 해도 언제 싸움이 있을지 모르는데 얻어맞게 둘 수는 없었다.
일단 카이엔부터 정신을 차리게 도운 다음 비셰는 다른 이들을 확인했다.
그가 마법에 개입해 환상을 약화시키고 그 틈에 바이스가 살짝 머리를 쥐어박거나 때리는 식으로 정신을 차리게끔 할 수 있게 조정을 해준 다음에야 비셰는 안도했다.
다행히 악몽과도 같은 환상을 보면서도 글러티나와 자네인은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엿보게 된 악몽에 비셰는 입술을 깨물었다.
“…고맙다. 도움을 받았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면서 글러티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런 그녀의 악몽은, 공포는 일족이 습격당한 그 날의 기억이었다.
혼자 힘으로 그 환상에서 벗어나진 못했지만 글러티나는 그것이 거짓된 것임을 알고 애써 이를 악물고 그 자리에서 버틴 것이었다.
반면 자네인은 환상을 없애줘도 한참 동안 굳어서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다가 긴 숨을 토해냈다.
일반인보다 능력치가 높은 그들 일행을 먼저 안정화 시킨 다음에야 주변의 다른 이들에게서 환상을 거둬냈다.
자초지종을 모르는 카이엔은 바이스의 말만 듣고 그런가보다, 라면서 비셰가 힘을 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온갖 비명으로 아비규환이 된 와중에 그들만은 차분하니 굉장히 기분이 이상했다.
주방에서 감자 껍질이나 깎고 설거지를 하던 비셰는 조금 어설프고 순해 보였는데 지금의 그는 굉장히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법은 이쪽에 한정되어있다.’
다른 이들은 언데드와 맞서싸우느라 바빠서 환상을 보고 있지 않았다.
더 큰 피해가 생기기 전에 해결해야겠다며 비셰는 바쁘게 마법을 파훼해나갔다.
흑마법사가 이정도의 마법을 쓰려면 굉장히 준비를 많이 했겠지만 날 때부터 정신계 마법에 특화되어있는 몽마를 상대로는 부족했다.
검은 안개가 산산히 흩어졌고 그제야 비셰는 한숨을 돌렸다.
“다행이다…”
“아직 끝난건 아닌 모양입니다. 술자의 위치 추적은 가능한가요?”
“제가 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바이스 씨, 제가 다녀올게요. 저쪽의 언데드들도 처리해야하니까요. 이쪽은 이제 괜찮을 거예요.”
들고 온 지팡이 하나를 갈라진 땅 틈에 집어넣으며 프라우디에가 말했다.
내면의 리치왕과 쉴 새 없이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프라우디에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갈피를 잡은 상태였다.
결심한 듯 굳은 표정을 짓고 그는 카이엔을 보았다.
“왕자님,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와.”
“네.”
활짝 웃고 프라우디에는 마법을 써서 그 자리에서 날아올랐다.
보는 눈을 생각해서인지 완전 시커먼 색은 아닌 회색빛의 날개를 달고 하늘로 날아오른 프라우디에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황자와 황녀의 군대는 언데드들고 맞서 싸우기에 바빴다.
그쪽을 향해 손을 뻗으며 프라우디에는 낮은 목소리로 주문을 읊조렸다.
땅속에서 밖으로 솟아오른 언데드들을 돌려보내고 그들이 다시 나오지 못하게끔 땅속에서 분해한다.
흑마법과 네크로맨시에 정통한 리치왕이 추천한 방법이었다.
아예 부숴서 없애버려야 후환이 없을 거란 말에는 프라우디에도 동의했다.
즉시 언데드들을 무력화시킨 다음 프라우디에는 곧바로 땅을 향해 빠른 속도로 고도를 낮췄다. 흑마법사의 위치 또한, 마력을 추적해 확인했다.
“흡!”
작은 손에서 만들어진 번개가 지상을 향해 내리쳤다.
꽈광 하는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높게 일어났다. 바람을 만들어내 흙먼지를 흩어지게 하면서 프라우디에는 흑마법사를 노려보았다.
검은 로브를 쓰고있는 흑마법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서 외쳤다.
“너,넌 누구냐! 도대체 누구길래 악마와 계약한 나를…!”
“네? 그런거 모르는데요.”
- 야, 그냥 얼른 죽여. 캐낼 것도 없어 보이는데.
“그래도 되는거예요?”
- 난리통에 죽이는게 이로워.
“그럼 그럴게요.”
“누구랑 무슨 말을 하는거야!!”
살짝 드러난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날아온 어린애가 혼잣말을 하니 공포를 느낄법도 했다.
리치왕의 의견에 프라우디에는 조금 망설이긴 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에 생긴 검은 창을 흑마법사에게 겨누고 프라우디에가 말했다.
“나쁜 사람이니까,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할게요.”
“무,무슨… 크헉!!”
프라우디에 던진 창은 흑마법사를 향해 날아갔다. 흑마법사는 도망쳤지만 창은 날아간 방향 그대로 땅에 꽂히지 않고 흑마법사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흑마법사의 몸을 관통한 창은 즉시 불꽃으로 변화해 그 몸을 태우기 시작했다.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태워버릴 거라고 리치왕이 소곤거렸다.
-그 편이 낫다.
“으음… 저 사람도 리치가 될까 봐요?”
- 리치는 아무나 되는게 아니야. 저놈은 하급중의 하급이다.
“꽤 광범위한 마법을 쓰던걸요?”
- 미리 준비해논거겠지. 저번에 역병 연구하던 놈보단 조금 낫나?
리치왕의 눈에는 둘 다 약하기 짝이 없었지만.
불꽃은 순식간에 흑마법사의 몸을 뒤덮고 사라졌다. 정말로, 재조차 남지 않았다.
흑마법사의 끝을 확인한 프라우디에는 다시 날개를 만들어서 진영을 향해 날아갔다.
카이엔에게 보고를 해야 했고 흑마법사를 발견한 곳이 베르나르의 군대 진영과 근접한 곳이라는 것도 이노스에게 알려야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말을 하던데.’
악마 어쩌구.
하지만 정말로 악마랑 계약했다면 이 정도 실력일 리가 없었다.
흑마법사의 헛소리로 치부하기로 하고 프라우디에는 고개를 저었다.
게다가, 정말로 악마의 기운이 느껴졌다면 리치왕이 눈치채지 않았을까?
리치왕이니까 악마 정돈 알고 있을 테고.
다만, 이걸 이노스한텐 뭐라고 해야 할지 골치가 아팠다.
흑마법사가 나타났는데 그가 흔적도 남김없이 태워버렸으니까.
“증거를 남길걸 그랬나 봐요.”
- 흑마법에 당했던 놈들이 증인이 되겠지.
“그럴까요?”
- 네가 더 해줄 필요는 없어.
단호한 대답에 프라우디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이노스를 도와주러 온 거였으니까. 어려운 일은 이노스에게 다 맡기면 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