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클로디우스는 산책 중이었다.
산책, 이라고 해도 현재 모의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눈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돌아다니는게 낫다는 친누나, 옥타비아의 말에 그는 꼬박꼬박 재미도 없는 산책을 나오는 길이었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사건사고에 대비해 호위 기사에 시종까지 줄줄이 달고 다니던 그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처음보는 사람이었는데 그보다도 작은 키에 무언가를 찾는 건지 구경하는 건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목적지 없이 발 가는 대로 가는 것만 같은 움직임이었다.
안그래도 모의 전쟁 때문에 황성에는 그의 형제자매가 끌어들인 외부인이 상당히 많았다.
앞에서 걸어가는 저 애도 분명 그럴 거라면서 클로디우스는 소년인지 소녀인지 모를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프라우디에가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그제야 그 문제의 답을 알 수 있었다.
‘여자애네.’
심각한 오해를 해버린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클로디우스는 프라우디에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와 비슷한 나이인 것 같은데 여기서 뭘 하고 있던걸까? 누구를 따라 여기서 온거지? 머릿속으로 질문을 정리하고 그가 입을 열었다.
“대답.”
“어… 그게… 저, 이노스 황자,님이 데려오신 용병단의 그… 회계사인데요…”
거짓말을 하는데 능숙하지 않아서 목소리가 조금씩 떨렸다.
허나 클로디우스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고 긴장해서 그런가보다, 라고 여겼다.
그의 뒤에 선 호위기사를 보고 겁을 먹었을만했다. 게다가 회계사라니까. …회계사?
“…회계사?”
“네.”
“회계… 회계라.”
돈 관리를 해야 하니 같이 온 모양이었다.
이해할 수 있다며 클로디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노스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력한 회계사 혼자서 황성을 돌아다니게 내버려 두다니? 방임주의인 것도 정도가 있었다.
그같이 착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린애한테 무슨 시비를 걸지도 모르는데. 황성 안에는 인성파탄자가 참으로 많았다.
내색하지 않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형님도 참 별나시지. 바깥에서 데려온 사람을 혼자 다니게 하다니. 병사라도 한명 붙여줄 것이지.”
“아, 그게…”
그 말에 프라우디에는 목걸이를 보여주었다.
그곳에 2황자의 손님이라는 글이 써있는걸 보고 클로디우스는 인상을 썼다.
“무슨 강아지 목걸이 같은 것도 아니고. 하여튼 성격 이상한건 알아줘야한다니깐.”
아무렇지도 않게 외부인 앞에서 형님 욕을 하고 클로디우스는 손가락으로 저 앞을 가리켰다.
그는 혼자서 겁도 없이 황성 안을 돌아다니는 그의 또래 여자애가 위험에 처하게 두고 싶지 않았기에, 작은 경고를 해주었다.
“저쪽은 1황자 궁이니 근처에도 가지마. 무슨 일에 휘말릴 수도 있어. 구경하는건 좋지만 모의 전쟁에 가까워질수록 다들 예민해질 테니까. 알겠지?”
“네. 충고 감사합니다.”
프라우디에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처음에는 3황자가 뒤에서 부르길래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성격이 좋은 사람이었다.
이노스가 설명하길, 3황자는 누나인 1황녀보다 유약하다고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과연 클로디우스는 그에게 충고만 해주고 가던 길을 마저 갔고 프라우디에는 오늘 관찰은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그가 직접 1황자 궁 근처까지 가보면 좋겠지만 황족에게 충고까지 들은 마당에, 대놓고 무시할 수는 없었다.
프라우디에는 돌아가자마자 이노스에게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해주었다.
“아아~ 괜찮아요. 별일 없을 거예요.”
“그럴까요?”
“물론이죠. 클로디우스라면 괜찮아요.”
“…정말요?”
“괜찮다니까요~”
웃으면서 이노스는 손을 저었다.
조금 찜찜한 구석이 있었지만 이노스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괜찮겠지.
내일은 다른 곳을 둘러보기로 하고 프라우디에는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이노스가 준 지도와 그가 확인한 장소를 비교하면서 추적망을 좁힐 필요가 있었다.
한편, 클로디우스는 산책하다가 우연히 만난 은발의 미소녀를 떠올리고 있었다.
아는 것이라곤 그 아이가 이노스의 손님으로 왔다는 것 뿐이었다.
용병단의 회계사라니, 그렇게 어린아이가 회계사로 있다는건 누군가의 가족이라 적당히 안전한 직책에 앉혀둔걸지도 몰랐다.
하루종일 딴생각에 빠져있던 그는 친누나인 옥타비아와 함께 하게된 저녁 식사 자리에서 대뜸 이런 말을 꺼냈다.
“누님, 역시 모의 전쟁 땐 정신이 없겠죠?”
“그렇지.”
뭘 그렇게 당연한걸 묻느냐는 눈빛이 향했지만 클로디우스는 눈치채지 못했다.
“비전투원인 의사나 사제라던가… 그런 사람들은 뒤로 빠져서 큰 피해를 입진 않겠죠?”
“애초에 후계 다툼에 사제를 데려올 리가. 죽기라도 하면 낭패인데.”
“아무튼, 비전투원은 크게 다치지 않겠죠?”
“그건 왜 물어보니?”
이쯤 되니 수상한 점을 느낀 건지 옥타비아가 클로디우스에게 물었다.
처음에는 말하지 않으려고 버티던 클로디우스였지만 결국엔 사실대로 누님에게 털어놓고 말았는데, 그 이야기에 옥타비아가 황당해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녀석이!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있는데 웬 여자 타령이야?”
“하지만 그렇게 예쁜 애는 처음 봤단 말이예요! 회계사라는데 이노스 형님이 무슨 생각으로 회계사까지 데려온 건지 모르겠다니까요.”
“소규모인가 보지. 내가 알아보니까 몇 명 없더만.”
“그 애는 안전하겠죠?”
“당연히 안전하겠지! 이노스 걔가 하는 꼴을 봐, 걔는 절대로 싸움엔 안 끼어 들거야. 어떻게든 삼파전으로 보이고 싶어서 모의 전쟁에 참가하겠지만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안 하거나 움직인다고 해도 먼저 싸움을 걸지는 않을걸? 나도 베르나르 오라버니도 그 애는 안 건드릴 거고. 괜히 건드렸다가 상대방 편에 붙으면 곤란하니까.”
“두 분이서 손잡고 이노스 형님을 치진 않으실 거죠?”
“안 쳐. 빌헬름 후작이 지원해준다고 했다더라. 그 사람은 제국 영웅인데 괜히 밉보였다간 곤란해.”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옥타비아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이노스도 이노스지만, 지금은 이 대책없는 남동생에 더욱 관심을 쏟아야할 판이었다.
“너, 쓸데없이 행동하지 마라.”
“네.”
“진짜야.”
“알았어요.”
허나 옥타비아는 여전히 미심쩍은 눈으로 클로디우스를 쳐다보았고, 그녀의 짐작은 적중했다.
프라우디에의 이름조차 모르는 클로디우스는 그날 이후 아무리 산책을 나가도 프라우디에를 볼 수 없었다.
모의 전쟁이 점점 다가오고 있으니 그의 말대로 밖으로 나오지 않는 건가?
괜히 조바심이 나서 클로디우스는 이노스의 궁 근처를 서성였다. 혹시 이쪽을 지나다가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런 그의 행동에 주변인들은 3황자와 2황자가 손을 잡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품었다.
결국 보다못한 이노스는 클로디우스를 데려와서 앉혀놓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처 좀 서성거리지 마요! 정신 사납잖아요!”
“아니 그게…”
“왜 그런지는 대충 알 것 같긴해요. 제가 데려온 회계사랑 저번에 마주쳤다면서요?”
“어… 그 애랑 잘 아세요?”
“대화쯤이야 몇 마디 나눠봤죠.”
몇 마디 수준이 아니라 카이엔의 닦달에 간단한 마법을 배우게 되어서 현재 프라우디에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건 이노스 본인이었다.
그러나 이노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했고 클로디우스의 표정을 살폈다.
그 두 사람이 마주쳤다는 말에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예상하긴 했는데 정말 현실이 되니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제대로 말도 못하고 우물쭈물 거리는 남동생을 향해 이노스가 직구를 던졌다.
“좋아하는 사람 있던데요.”
“네??”
“그러니까 돌아가세요. 안 돼요, 가망 없어요.”
“어…”
“아우님 위치를 생각하셔야죠. 자, 얼른 가요. 얼른.”
벌레 쫓아내듯 손을 젓는 이노스를 보며 클로디우스는 울상을 지었지만 이노스는 냉정하게 그를 돌려보냈다.
하고 싶은 말은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쫓겨난 클로디우스는 미련 가득한 눈으로 이노스의 궁을 쳐다보다가 힘없이 제 궁으로 돌아갔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카이엔이 이노스를 보며 물었다.
“…저래도 되냐?”
“네. 어차피 아우님보다 쎈건 누님이니까요. 그나저나 카이엔, 궁 안엔 보는 사람이 많으니 경어를 써주세요.”
“차라리 너랑 말 안하련다.”
“너무해요. 그리고 옥타비아 누님도 내심 저한테 고마워할걸요? 남동생이 헛짓거리 하는걸 막아줬잖아요.”
“그런가…”
형제가 없으니 알 수가 있어야지.
모의 전쟁도 얼마 남지 않았다. 점점 긴장감이 가파오르고 있으니 이노스도 슬슬 걱정이 되는 모양인지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아직까지, 그들은 흑마법사의 꼬리를 잡지 못했다.
프라우디에에게 평원을 미리 보여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당일까지는 접근할 수 없었다.
빌헬름 후작이 사병을 지원해줬기에 너무 없어 보이진 않을 거라며 이노스가 살짝 덧붙였다.
“조용히 끝나면 좋을 텐데요.”
“그러게.”
그들은 전투에 참여할 생각이 없었지만 언데드가 나타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것을 걱정해서 바이스는 카이엔에게 검을 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전쟁터는 복잡하고 얼마나 혼란스러울지 모르니 휘두르는 법 정돈 알아야한다는 것이었다.
“제가 곁을 떠나지 않겠지만, 혹시 모릅니다.”
“으음…”
일단 모두 방어 마법이 들어있는 마도구를 하나씩 몸에 지니고 있기로 했다. 오래 쓸 수는 없겠지만 몇 번정도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모의 전쟁 당일.
참가자들은 황제의 앞에서 구역 제비뽑기를 했다.
고요의 평원 어느 지점에서 시작할지 정하는 것이었다.
베르나르, 이노스, 옥타비아 순으로 제비를 뽑았고 베르나르부터 군대를 이끌고 지정된 장소로 이동했다.
하루는 이동에 걸리는 시간이었고 그 다음날 오전 9시부터 개전을 알리는 뿔나팔 소리와 함께 본격적인 모의 전쟁의 시작이었다.
온전히, 황손들만의 수완으로 해나가야 한다.
뒤를 봐주는 가문에서 병사며 기사 등을 보내줬지만 여기서 누가 이기던 전투가 벌어진다면 각 귀족 파벌들은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그것에 더해 그들의 곁에 한 명씩 조언을 위한 보좌관이 붙었는데 이들은 황제가 직접 보내준 인물들이었다.
이노스가 외부에서 데려온건 용병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소수인 인원이었고 보좌관은 의아해하며 이노스에게 그들에 대해 물었다. 이노스는 걱정말라며 태평하게 웃어 보였다.
“황자님…”
“전 관찰자예요. 가만히 있을거니까 괜찮아요. 저 친구들은 혹시나 몰라서 제 안전을 위해 데려온 거니까 괜찮답니다.”
이노스가 보좌관과 군단의 대장들과 함께 작전 회의를 하는 동안 프라우디에는 말없이 땅을 살폈다.
수십, 수백 년 동안 피를 흘린 곳이다.
모의 전쟁이 흐지부지하게 끝나기도 하고 피를 흘리지 않고 대화로 원만하게 풀린 적도 있겠지만 처절한 전투가 벌어진 역사 역시 있었다.
이곳에 묻인 시체의 수는. 백골의 수는.
눈을 감고 프라우디에는 그것을 가늠해보았다. 최근에 땅이 파헤쳐진 곳은 있는지, 누가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심어둔건 아닌지 알아차리려고 애를 썼다.
개전부터 난리가 나진 않을 테니, 그는 지켜보는 것을 택했다.
카이엔과 이노스는 그의 의견을 존중해주었다.
작전 회의를 마친 이노스는 카이엔 일행에게도 작전 아닌 작전을 설명해주었다.
“우린 일단 가만히 있고 양쪽이 싸우는거나 구경합시다.”
수완이 좋은 1황녀와 장자인 1황자. 그리고 그 사이에 낀 이노스. 그는 병력도 제일 적었다.
정찰병을 보내놓고 소식이 오면 움직이기로 하고 지금은 경계만 해두기로 했다.
옥타비아도 베르나르도 바보가 아니니 위협적이지 않은 그보다는 서로를 먼저 공격할게 뻔했다.
게다가 애초에 모의 전쟁은 하루 만에 끝나는게 아니었다.
며칠이 걸릴수도, 몇 주가 걸릴 수도 있었다. 물론 식량 공급이 잘 되어야겠지만 말이다.
하루는 모두 눈치만 보고있다가 지나갔다. 그러나 다음날, 옥타비아의 군대가 이동했다. 프라우디에가 새의 눈을 통해 확인한 사실을 알렸다.
“목표는 역시 큰형님이겠네요. 누님께서 형님을 상대하고 저한테는 아우님을 붙여 견제할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두고보죠.”
하루 이동한다고 바로 마주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노스는 좀 더 지켜보는 것을 택했다.
보좌관이 옆에 붙어있다고 해도 최종 결정을 내리는건 황자인 그였기에 아무도 그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들은 내심, 가장 안전한 이노스의 군대에 속한 것을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옥타비아의 군대가 움직이는걸 베르나르 역시 알아차렸다. 그 역시 군대를 움직였다.
도망이 아닌, 맞대결이었다!
질질 끄는 것 대신 빠르게 결판을 내는 것을 택한 베르나르는 걸어진 싸움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움직일 때 이노스 역시 군대를 움직였다.
물론 싸움에 끼어들려고 가는게 아니라 멀찍이 서서 지켜보기 위함이었다.
너무 멀리 떨어져있다면 언데드 출몰이라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을 때 형제자매를 구할 수 없으니 그는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그 진군에 두 사람이 싸움을 하려다가 멈칫하는 것또한 바라는 바였다.
허나 그들의 도착보다 빠르게 싸움이 시작되었다.
“맞붙기 시작했어요.”
프라우디에의 말에 이노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가까이 가죠.”
“우리만 가도 돼.”
“괜찮겠어요? 일단 상황을 좀 더 지켜보도록 하죠. 어차피 지휘관에게 보내진 병력의 우위로 판가름나는 모의 전쟁인걸요. 게다가 국력 깎아 먹는 일이고요.”
“으음…”
“지금은 양쪽 다 비슷한 상태고 싸움이 격해져서 여기서 죽어도 전쟁은 전쟁, 할말이 없지만요.”
이노스는 좀 더 군대를 움직이기로 했다.
정찰병이 있겠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를 견제하려면 싸움을 멈출 수 밖에 없을테지만 그들 역시 그가 끼어들 생각이 없단걸 잘 알고 있을 테고.
그는 어디까지나 관찰자로서 이곳에 서 있고 싶었다.
‘아무 일 없으면 좋으련만.’
그가 느낀게 그저 기분탓이면 좋으련만.
프라우디에 역시 황성에서 아무것도 발견해내지 못했다. 그러니, 온전히 그의 착각이면 좋을 텐데.
허나 그의 기대는 보기좋게 배신당했다.
두 군이 한창 맞붙고 있을 때, 갑자기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드드드드-
거센 진동.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만 같았다.
거대한 땅울림. 땅이 뒤틀리면서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언데드들이 솟아났다.
인간의 뼈를 뭉쳐서 만든 스켈레톤과 썩은 살점을 지닌 좀비들이 괴성을 지르면서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