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솔직히 말하면, 카이엔은 바이스가 마법사가 필요하다고 언급했던 일을 반쯤 잊어버리고 있었다.
티아마티스에게 도움을 요청하긴 했는데 그는 드래곤이면서 인간으로 위장해 1인 2역으로 가르간트와 아이칸트라 제국을 왔다 갔다 하면서 귀족 노릇을 하고 있지 않나.
그래서 편지를 보내거나 자네인을 통해 몇 마디 충고만 해줄 줄 알았는데, 그의 생각이 틀렸다.
점심을 먹고 나서 오후 업무를 하기 위해 집무실에 들어온 순간, 카이엔은 소파에 앉아있는 사람을 보고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으왁!”
“뭐냐?”
“아니 왜 여기에…”
“나정도로 나이를 먹은 드래곤이 텔레포트도 못 쓰겠냐?”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티아마티스는 카이엔에게 손짓했다.
“냉큼 와서 앉아. 나도 바쁘다.”
“아 네…”
“예상보다 빨리 오셨군요. 차라도 준비해오겠습니다.”
“됐다. 그럴 시간에 한 마디라도 말을 더하지.”
티아마티스의 손짓에 카이엔은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바이스는 소파 뒤에 섰다.
카이엔이 소파에 앉자 티아마티스는 팔짱을 끼더니 턱짓으로 바이스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놈이 보낸 편지는 읽었다. 그래, 리치왕에 대해 더 알고 싶다고?”
“네. 저번에 마법사가 필요하단 이야기가 나왔는데 프라우디에가 말하길, 리치왕이 흑마법 말고 다른 마법도 가르쳐줄 수 있다고 말해서요.”
“하긴. 그놈 실력이면 웬만한 마법사보단 뛰어날거다. 다만 거의 천 년 전의 마법이라 효율은 나쁠 수 있지.”
“대체 리치왕은 뭡니까? 어째서 단 한 명의 마법사가 재앙이라고 불린 건지…”
“그만큼 실력이 뛰어났으니까. 그리고 추종자들도 꽤 많았다. 나는 그때 어느 정도는 방관자 입장이었지만 그래… 리치왕 녀석, 원래 뛰어난 마법사였으니까. 어쩌다가 리치가 돼서 세계를 말아먹을 뻔했는데 너희도 잘 알다시피 용사니 뭐니 하는 놈들이 대거 각성해서 나타났다. 서로 박 터지게 싸우다 보니까 해결됐지.”
“으으음… 여러명이서 한 명을 친겁니까?”
“그놈이 워낙 쎄서. 아, 그때 그런 녀석들도 있었지.”
갑자기 떠올랐다며 티아마티스가 입을 열었다.
“마법 소녀.”
“…네?”
“마법 소녀.”
“그건 또 무슨…”
“그런 애들 있어. 무슨 나풀거리는 옷 입고 날아다니면서 싸우던 애들. 엄청 강하긴 했는데 리치왕녀석 죽은 이후론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 세상이 쑥대밭이 되니 너도나도 각성해서 난리였으니.”
“…대체 몇 년 전 이야기예요?”
“엄청 오래 전이라 기억이 안 난다. 그 뒤로도 세상은 몇 번 더 망할 뻔했으니까.”
“대체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
딱!
쓸데없는 질문을 한 카이엔은 한 대 얻어맞았다.
티아마티스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지만 마법을 쓴건지 카이엔은 이마에 느껴지는 둔탁한 통증에 윽,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였다.
혀를 차며 티아마티스는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튼, 그런 녀석들도 있었어. 셋이서 한 팀이었는데 참 괴상한 녀석들이었지. 마법인지 아닌지 모를 이상한 힘도 썼고.”
“리치왕도 다시 나타났는데, 그럼 걔네도 또 나타날까요?”
“옛날도 아니고. 리치왕은 본래 힘의 반도 못 내는 쬐끄만 꼬맹이 몸 안에 있는데다가 과거 기억도 잃어서 지금은 큰 위험이 못 된다. 괜찮아. 그러니까 이제 자네인 그녀석이 가까운 곳에서 감시할 필요도 없는데 녀석은…”
뒷말은 궁시렁거림에 가까웠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면서 안 돌아온다고 투덜거리고 있는 그 모습에 카이엔이 말했다.
“둘이 서로 좋아하는거 아니예요? 그냥 두시지는…”
물론, 돌아온건 싸늘한 눈총이었다.
카이엔을 째려보며 티아마티스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난 며느리도 사위도 받아들일 생각 없다.”
“아 네… 어차피 친자식도 아니잖아요. 예전에 말 들어보니까 노예처럼 부려먹었던 모양이던데요.”
“…그정돈 아니었다.”
“그럼 오신김에 부모님 노릇이라도 하고 가셔요. 그게 아니면 후견이라던가.”
“…흥. 그럼 물어보고 싶은건 이게 끝이냐? 난 알아서 돌아갈 테니 너도 네 할일 해라.”
짧은 대화를 마치고 티아마티스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올 때는 텔레포트로 왔던 사람이 갈 때는 얌전히 문으로 나가는게, 자네인을 보러 가는 모양이었다.
“거참, 이야기해 주러 온게 아니라 자네인 보러왔네.”
걱정되면 걱정된다고 솔직하게 말하던가.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과거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좀 더 솔직해지면 어디 덧나나?
카이엔은 투덜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티아마티스가 해준 말 중에 쓸모있는 정보는 거의 없었지만, 프라우디에가 리치왕에게 흑마법 말고 다른 마법을 배울 수 있다는건 확실한 정보였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그럼 이걸로 마법사 문제는 해결인가?”
“그래도 찾아보긴 하겠습니다. 마법에 능한 이종족이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오기라도 하면 좋겠군요.”
“무서운 소리 하지 마.”
“찾아보면 나올 겁니다.”
“찾지 마.”
단호한 카이엔의 대답에 바이스는 빙긋 웃었다.
그 웃음에 불길한 기운을 느낀 카이엔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진짜. 진짜로. 찾지 마.”
“네. 알겠습니다.”
“내가 저번에 말이야… 너랑 세자르 남작이 유니콘 찾고 있다는 말 듣고 얼마나 기겁했는지 알아?”
유니콘이 뭐냐고.
그걸 타고 다니라고 할 셈이냐고.
그 말에 바이스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괜찮지 않습니까? 신성해 보이고 좋을 텐데.”
“나한테 그런게 어울릴 것 같아?”
“까만색과 흰색은 서로 잘 어울립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하긴 설화나 민담 같은걸 보면 유니콘은 여자를 좋아한다더군요. 그래서 작전도 하나 짜놨습니다.”
“뭐?”
어디 있는지도 모르지만 나중에 마주칠지도 모르니 작전을 미리 짜놓은 모양이다.
그가 어이가 없어서 입을 떡 벌리는 것을 봤으면서도 바이스는 모르는척하며 말했다.
“프라우디에 님을 앞에 내세우고 미끼를 흔들면 어떨까 합니다만.”
“유니콘은 여자 좋아한다면서.”
“겉만 봐선 훌륭한 미소녀니까요.”
고작 말 주제에 투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걸 알아차릴 리가 없다면서 바이스는 열심히 그가 세운 계획을 알려주었다.
하나만 있는게 아니라 두 개 세 개 네 개… 줄지어 나오는 계획은 숫자가 늘어날수록 무력을 동원한 강제 포획 작전이 되었다.
“하지마.”
“할겁니다.”
“유니콘 필요없어…”
“언젠 왕자님이 필요하다고 해서 몬스터를 들여놓았던가요? 다 제 발로 왔지.”
외출할 일이 많으면 유니콘도 제 발로 찾아올지 모르는 일이라며 바이스는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그러니 어딜 갈 때는 꼭 프라우디에 님을 데리고 다닙시다.”
“결론은 그거냐.”
“그것 말고도 가장 유능한 분이니까요.”
“본인 의견이 중요하지만.”
“글쎄요. 왕자님이 어디 가신다고 하면 웬만해선 따라갈겁니다.”
티아마티스가 해줬던 리치왕 이야기는 머릿속에서 지워진지 오래였다.
카이엔은 검은 숲에 유니콘이 있었다는 목격 정보만 나와도 바이스가 프라우디에랑 함께 덫을 들고 검은 숲으로 가서 그걸 설치하는 모습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악몽을 꿀 것 같았다.
한편, 돌아가기 전에 자네인이 어떻게 지내는지 얼굴이라도 보고 가려고 걸어가던 티아마티스는 자네인과 함께 있는 프라우디에를 보고 손으로 이마를 탁 쳤다.
“허어…”
벌어진 입에선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지금 그가 눈이 똑바로 달려서 제대로 된 광경을 보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안그래도 예쁘장했던 녀석이 지금은 겉만 봐선 그 누구도 소년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예뻐졌다.
못 본 사이에 좀 더 길어진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땋아 내린건 자네인의 작품이 분명했다.
프라우디에는 머리 묶어준다니까 좋다고 가만히 있었을 테고. 왠지 그런 광경이 눈에 선했다. 대체 뭐지, 리치왕은 안 저랬는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그가 미간을 짚고 있으니 프라우디에 쪽에서 먼저 그를 불렀다.
“티아마티스 님!”
“…오냐.”
“언제 오셨어요?”
“온지 얼마 안 됐다. 잘 지내는지 보러왔지. 무슨 일은 없지?”
“네! 저도 잔느도 잘 지내고 있어요. 그쵸?”
“맞습니다. 그…저, 돌아가야 할까요?”
그의 눈치를 보며 자네인이 물었다. 그 모습에 티아마티스는 한숨을 푹 쉬었다.
카이엔의 앞에선 자네인이 안 돌아온다고 궁시렁거렸던 그였지만 본인을 앞에 두고 혼낼 생각은 없었는지 자네인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몇 번 토닥이더니 입을 열었다.
“…네가 만족할 때까지 있다 와라. 어차피 지금은 시킬 것도 없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프라우디에.”
“네!”
“왕자한테 들었는데, 너 마법 배운다며? 흑마법 말고 다른 것들도.”
“네. 아직 시작도 안 했지만요…”
“천년 전의 마법이라 효율이며 효과가 떨어질 수 있다. 이거라도 읽어봐라. 손 내밀어.”
앞으로 곱게 내민 프라우디에의 두 손 위에 차곡차곡 마법책이 쌓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까진 괜찮았다. 허나 점점 늘어나는 책들에 프라우디에는 당황했다.
열권이 쌓이니 프라우디에는 앞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경량화 마법을 걸어둔 건지 무겁진 않았지만 자칫 잘못했다간 균형을 잃고 우르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받아줘야 하나. 받아줘도 되나. 자네인은 옆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고 어쩐지 피곤해 보이는 티아마티스는 손을 저으며 뒤돌아섰다.
“간다. 마법 열심히 배워라.”
“네…네!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가십시오.”
책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프라우디에는 얼른 인사를 했다.
바로 텔레포트로 수도의 저택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며 티아마티스는 힐끗 뒤를 보았다.
프라우디에와 리치왕의 닮은 점이라곤 머리색이 은색이라는 것 뿐이었다. 흉흉한 기운조차 느껴지지 않은 지금, ‘저것’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위협적이지 않은 지금은 가만히 놔둬도 되겠지만 저것이 또다시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된다면 그의 손으로 제거해야할터.
그땐 부득이하게 함께 쳐내야할 것도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 모습만 봐선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기에 티아마티스는 한숨을 쉬었다.
‘하긴… 리치왕 녀석도 인간이었을 적엔 여성이었지.’
카이엔에겐 말하지 않은 정보였다. 리치에게 성별따위가 뭐가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리치왕이 과거의 기억을 되찾고 나면 현재 자기 몸이 소년이란 것에 충격을 받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그가 알바 아니었다.
“프라우디에, 들어줄게.”
티아마티스가 가고 나서야 자네인은 눈치를 보던 것을 그만두고 프라우디에가 들고 있는 책들을 가져갔다.
마법이 걸린 덕분에 무겁지는 않았지만 하나같이 두께가 어마어마해서 열 권이나 되니 높이가 거의 프라우디에만 해진 것 같았다.
책들을 바닥에 쌓아서 프라우디에와 키 재기를 하고싶은 충동을 애써 억누르며 자네인은 척척 책을 옮겨들었다.
“꽤 많네.”
“그러게요. 읽는데 시간이 걸리겠어요.”
- 흑마법 공부하는데에도 시간이 모자른데.
“그치만 여러 가지를 아는게 좋으니까요.”
- 그 말은 맞지.
“기억나는건 있으세요?”
- 아직.
잘 떠오르지 않는다며 리치왕은 푸념했다.
아무튼, 흑마법 말고 다른 마법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그 역시 동의했다.
사람들은 오래된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모조리 잊었고 그 일에 대한 기록마저 남아있지 않았다.
아무리 그때 인류가 멸망 직전까지 갔다고 해도 그렇지, 지금은 이렇게 복구하지 않았나? 기록정돈 남아있어도 될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 마치 일부러 지워버린 것만 같아.
“네? 뭐가요?”
- 아무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