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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왕자는 조용히 살고싶다-79화 (80/219)

79화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첫 마디로 운을 떼며 예스티카는 바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과거와 달라진 점이 거의 없는 여전한 첫사랑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첫사랑이자 약혼자는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자기 입으로 서슴없이 암살 같은 단어를 말하곤 했었으니까.

예스티카의 말에 바이스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래서, 이제는 어떻게 하실 거죠? 전 가문을 배신하고 나온 몸입니다. 과거에 저는 “왕자님의 암살을 명령받았지만, 그것을 거부하고 그분을 지켰고 지금은 의절까지 하고 나왔어요. 예스티카 님께 도움이 되지 못할 겁니다.”

“제힘으로 해결할게요. 결혼하지 않고 저만의 길을 찾아보려고요.”

대답하면서, 예스티카는 살포시 웃었다.

“제가 좀 더 훌륭한 인물이 되어서 나타난다면, 당신도 저를 받아들여 주실 수 있겠죠.”

“흐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그런가요?”

“당신이 선택한 길을 응원하겠습니다. 그리고, 힘든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다시 오세요. 왕자님이 보살피는 사람들의 수가 꽤 많으니, 예스티카 님 한 분 더 추가된다고 해서 힘들 일은 없을 겁니다.”

“아하하… 열심히 할게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에 예스티카는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녀의 마음이 정해졌기에, 준비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다행히 그녀가 떠나기 전에 공작가에 요청했던 돈이 세자르에 도착해서 예스티카는 카이엔에게 억지로 돈주머니를 쥐여준 다음 귀환길에 올랐다.

돌아가는 내내 예스티카는 말이 없었다. 시녀들이 그녀를 걱정해 어떻게든 말을 붙여보려고 했지만 예스티카는 빙긋 웃을 뿐이었다.

긴 여정 끝에 그녀는 벨라시 공작가로 돌아왔다.

언제 그녀가 올지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공작은 딸의 도착 소식에 결재 서류에 사인을 하다 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달려 나갔다.

“예스티카! 별일은 없었느냐?”

“네. 즐거운 여행이었어요.”

웃으면서 예스티카가 말했다. 막 도착한 직후라 피곤할 법도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마음을 정하고 왔어요. 페르세이지 님도 만났고요.”

“음… 그랬구나. 정말로 파혼이니…?”

“네. 제게 미리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도 하셨어요. 저도 파혼에 동의하기로 했어요. 아, 그리고 페르세이지 님께서 바이올로스 후작가에서 여러 가지 잘 챙겨내라고 하셨어요.”

“그, 그랬구나.”

대체 어떻게 자란거냐 페르세이지!!

딸과 약혼시킬 때도 그랬지만 나이에 맞지 않게 묘한 구석이 있는 녀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예스티카가 너무 좋아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벨라시 공작이었다.

어차피 파혼했으니 더이상 페르세이지에게 신경 쓸 필요가 없기에 그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해결됐다니 다행이구나.”

“그리고 저,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머리카락도 자르고 싶고요.”

“응?”

“물결처럼 퍼지는 곱슬머리는, 예쁘긴하지만 너무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워요. 아버지, 저 공부를 하고 싶어요.”

벨라시 공작의 손을 잡고있는 그녀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건축을 배우고싶어요.”

그녀는 본디 재능이 뛰어났다.

어렸을 적부터, 그 재능은 빛을 발했지만 부모의 반대로 이루지 못했다.

명망높은 귀족가 아가씨가 건축가를 한다니! 덕분에, 그녀에게 남은건 어렸을 적 직접 나무 조각을 자르고 깎아서 만든 성의 모형 하나뿐이었다.

실패하고 빼앗긴 꿈이었지만 그녀가 남몰래 모은 서적들은 아직도 침대며 서랍장 깊숙한 곳에 숨어있었다.

인간이 아닌 이종족들과 대화하면서 예스티카는 그녀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결정했다.

그들의 말대로, 그녀는 돈이 많지 않나! 늦은 꿈이지만 시작해보고 실패하면 그때 생각해봐도 무방했다.

뜻밖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진 아버지를 향해 예스티카는 밝게 웃었다.

“조각도요. 아, 이왕이면 제련법도 배우고 싶은데, 허락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예스티카…?”

“안되나요?”

“끄으응… 실력이 뛰어난 여성 건축가와 대장장이로 구해보겠다. 여자가 험한 일을 배운다면서 대충 가르칠 남자놈들 말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정말 괜찮겠니?”

“물론이죠. 제가 어렸을 때 그런걸 잘 가지고 놀았던거 아시잖아요.”

물론 아가씨답지 않다며 뺏기고 금지당했지만 지금이라도 허락을 받아서 공부할 수 있는게 어딘가.

벨라시 공작이 순순히 허락해주자 예스티카는 내심 안도했다. 허락해주지 않으면 담판이라도 지으려고 했는데, 다행히 그럴 필요까진 없을 듯했다.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집에 관심이 많았다. 집과 건축물. 아름다운 건물과 성. 그것들을 구경하는게 좋았고 설계도를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늦은 나이긴 하지만 돈은 많으니 시간과 노력, 열정을 투자한다면 성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페르세이지 님은 여전히 제 첫사랑이 맞으세요. 그 분께 어울릴 수 있게 저도 힘내야죠.”

그 바이올로스 후작가를 이을 거라고 당연시 여겨지던 사람이 지금은 집을 나와서 쫓겨난 왕자의 시종을 하고 있었다. 허나, 그는 너무나도 행복해 보였다.

어렸을 적에 그녀가 볼 수 있었던 페르세이지가 지을 수 없던 표정을 지으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것이, 굉장히 부러웠다.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다면.’

동경하던 페르세이지처럼, 스스로가 내린 선택에 후회하지 않고 제 삶을 개척해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다독이며 예스티카역시 삶의 목적을 정하고 그것을 향해 달려가기를 원했다.

***

예스티카를 떠나보낸 뒤, 바이스는 생각에 잠겼다.

카이엔이 열아홉 살이 되기 전까지 자잘하게 몬스터로 인한 사건들이 일어나긴 했지만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을 다 합친 것보다도 많은 일이 올해 시작되지 않았나?

예상을 벗어나는 사건이 벌어진다는건 굉장히 골치 아픈 일이었다.

‘내 손이 닿지 않는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어.’

카이엔의 곁에 이종족이 늘어나질않나 다들 하나씩 사정이 있지 않나.

인간사에는 능한 그였지만 이종족이나 몬스터의 사정까지 모조리 알 수 없으니 걱정이 되었다. 물론, 그의 안위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카이엔에 대한 걱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몬스터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카이엔이 고생할 것은 뻔한 일. 귀하게 키운 왕자님의 안전이 위협받을 수도 있었다.

만약 그가 카이엔을 지키지 못한다면? 애써 키워온 존재를 잃게 된다면?

카이엔은 그의 속도 모르고 잠만 잘 자고 있겠지만 바이스는 하루가 멀다하고 고민에 잠겨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의 힘까지 빌릴 정도로 조급한 것은 아니라서.”

그는 뒤를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방 안에는 그 말고는 아무도 없었지만 바이스는 싸늘한 눈으로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게다가 불법 침입자가 하는 말을 귀담아들을 정도로 어리석은 인간은 아닌지라.”

“얌전히 꺼져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 순간, 촛불이 훅 꺼지는 것처럼. 창문을 통해 들어온 달빛으로 일렁이던 그림자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밤중에 찾아온 괴이한 무언가를 쫓아낸 바이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검은 숲의 영향인 건지 몬스터나 이종족 때문인 건지, 저런 것이 들어올 줄이야. 예상 밖이었다.

가라고 해서 간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안 갔으면 쫓아냈어야 했으니까.

‘마법사를 데려와야 하나?’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일인지라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쉽게 쫓아냈지만, 이곳의 모두에게 그와 같은 자제력이 있을리 없으니 말이다.

다음날, 바이스는 바로 다른 이들을 찾아가 아는 마법사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한 명 한 명 찾아가는건 너무 오래 걸린다고 생각해 회의를 하겠다고 한 곳에 불러모았다.

그의 부름에 다들 영문을 몰라 의아해하면서도 회의실로 모였다.

카이엔 역시 마찬가지라 턱을 괸 채 바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번엔 무슨 회의야? 이번엔 그 이상한 천을 안 매달아놨네?”

“아, 그정도로 심각한 사항은 아닙니다.”

‘그전에도 심각하진 않았을 텐데.’

할 말이 많은 카이엔이었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모두 착석한 것을 확인하고 바이스는 카이엔의 옆에 선 채로 입을 열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이야기하겠습니다. 혹시, 아시는 마법사 있으십니까?”

“마법사요?”

“갑자기 왜요?”

“없는데…”

다들 고개를 저었다.

뜬금없이 마법사에 관해 묻는 바이스 때문에 그들은 어리둥절해 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별일 없었는데 갑자기 왠 마법사? 카이엔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바이스에게 물었다.

“마법사? 무슨 일 있어?”

“저희 세력에 대해 생각해보니 마법사가 없더군요. 프라우디에 님은 아직 흑마법을 공부하고 있는 중이니 예외로 두려고 합니다. 자네인 씨는 어떠신가요?”

“아… 제가 티아마티스 님의 피를 받은 독룡이긴 하지만 인간이었을 적부터 기사여서 마법은 못 씁니다.”

바이스의 물음에 자네인은 차분히 대답했다.

인간이었을 적이라니. 묻고 싶은게 생겼지만, 바이스는 그 질문을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마녀인 그리델라가 마법을 쓸 수 있긴 하지만 그녀의 주전공은 그쪽이 아니었기에 마법사에 비해 연비가 나빴다.

바이스가 원하는건 순도 100%의 마법사였기에 그리델라는 그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유능한 인물이 필요합니다. 괜찮은 사람이 있다면 스카웃도 생각해봐야겠어요. 인간이 아니어도 좋으니까 떠오르는 종족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십시오.”

“으음…”

“모르겠는데…”

“엔베인 씨. 다크 엘프는 마법사 없습니까?”

“아… 일단은 저희도 엘프라서 마법보단 정령의 힘을 쓰거든요.”

“흐음.”

“저는 이렇게 된 이후론 정령과 소통할 수 없게 됐어요.”

시무룩해져서 엔베인은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에게 마검이 무어라 말했지만 엔베인은 무시했고 카이엔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마검의 영향으로 엘프이되 엘프가 아니게 되버린 엔베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글러티나 역시 검술만을 고집한 기사였고 주방에서 설거지하다가 잡혀 온 비셰는 전투 능력이 전무했다. 그 말에 바이스가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비셰 씨, 악의는 없는데 그럼 몽마는 대체 뭘 하고 사는겁니까?”

“큭…”

“정기만 빼내서 먹고 사는겁니까?”

“마,마법 쓰는 애들도 있긴한데 전 재능도 실력도 없어서…”

“그럼 사제 같은 인간들에게 쫓기기라도 하면 그대로 잡혀 죽습니까?”

“아뇨. 일단 저희가 정신 조작 같은 정신계 마법정도는 다들 쓸 수 있어서 잠재운다거나 환각을 보여주는 식으로 빠져나가곤 해요. 그치만 바이스 씨가 원하시는건 공격계통이잖아요… 전 쓸모가 없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비셰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엔베인에 이어 자기가 능력이 없다고 스스로 증언한 그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창피해서라기보단, 좌절해서였다.

연이어 두 사람이나 무너뜨려놓고선 바이스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카이엔은 질색을 하며 옆에 선 바이스의 팔을 툭툭 쳤다.

“심한 말은 하지 말고…”

“심하지 않습니다. 전력에 대해 아는건 중요하니까요. 아무튼, 소득은 없군요. 그럼 해산하겠습니다.”

“네에-”

“이렇게 대충 마무리 지을 거면 왜 회의랍시고 다들 불러모은 거야?”

“제가 한분 한분 찾아가는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거든요. 그 사이에 왕자님께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미래가 낙관적이진 않습니다.”

모두를 해산시키고 나서야 카이엔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가 회의실에서 나오는 순간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프라우디에가 그에게 다가왔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건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그를 봤다가 시선을 피하는 것을 반복하는 프라우디에를 보며 카이엔이 물었다.

“프라우디에? 무슨 일 있어?”

“에… 그게… 그, 리치왕도 마법 쓸줄 알아요!”

“흑마법?”

“그거 말고도요.”

“엥?”

“그게… 자기가 좀 대단했대요. 흑마법말고 기본적인 원소마법도 다 기억하고 있다는데요? 떠올랐나 봐요.”

“흠, 그럼 마법사는 따로 안 찾아도 되는 건가요?”

“그치만 제가 그걸 다 배울 기량이 되야하니까 일단 마법사가 있는게 좋을 것 같아요. 아, 티아마티스 님께 여쭤보면 안 될까요?”

“그 말도 일리가 있지만 저희 쪽에서 에빌라이 공작님과 접촉하는게 알려지면 여러모로 좋을게 없습니다.”

프라우디에는 우물쭈물 하며 카이엔의 눈치를 보았다.

저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혀를 차며 카이엔은 프라우디에에게 말했다.

“일단 연습장이나 하나 만들어줄까? 검은 숲에서 하기엔 위험하니까.”

“네… 감사합니다.”

“뭘. 안그래도 네가 흑마법을 연습할 장소를 만들어줘야한다고 생각했거든. 흠, 저택에서 좀 떨어진 공터를 수배해봐야겠다. 바이스, 할 수 있지?”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에빌라이 공작님께도 몰래 연락을 취해보죠. 물어봐서 나쁠건 없고 “이참에 리치왕에 대해서도 더 캐물어야겠습니다.”

“물어본다고 말해주려나…”

“끈질기게 요구해야죠.”

그래봤자 응해줄지 모르겠다며, 카이엔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허나 그들이 그 이야기를 한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서 그들은 티아마티스와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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