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예스티카가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다닌 것처럼 그녀와 함께 온 기사들 역시 세자르에 있는 다른 기사며 병사들과 함께 훈련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공작가 기사들 답게 지방의 기사들보다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는 그들인지라 처음엔 시골구석에서 지내는 것에 조금의 불만을 품었지만 그 불만은 얼마 가지 않아서 사라졌다.
거대한 육지 말미잘처럼 생긴 몬스터에게 붙잡혀서 수십미터 위로 치솟았다가 내려오질않나, 당당하게 정원을 활보하는 만티코어에 이따금씩 몸에 뱀을 두르고 다니는 영주 대리인 왕자는 머리나 어깨 위에 작은 햄스터까지 올리고 다녔다!
마치 익사체처럼 호수에 둥둥 떠다니는 어린 인어에 검과 이야기하는 다크 엘프까지.
그들은 난생 처음 보는 이종족들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그러다보니 같은 인간이라는 카테고리의 안에 속한 영주성 기사들과는 금세 가까워졌다.
왕자의 손님인 이종족보다는 같은 인간에 기사 일을 하고있는 이들에게 친근감을 느끼기 쉬웠다.
덕분에 세자르의 기사들은 공작가 기사들에게 영지 투어며 저택 설명을 해줘야했다.
물론, 그들은 몬스터며 이종족 손님들을 볼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사람들로 인해 굉장히 즐거워하며 안내역을 맡게되어도 불평하지 않았다.
“여긴 사트로누스가 주로 낮잠을 자는 곳입니다. 잘 보시면 자국이 남아있죠? 여기 누워있어서 그런겁니다.”
“허어…”
“햇볕을 쬐려고 따라서 움직이는 경우도 있어서 눌린 자국이 있는 곳에는 안 가면 좋고, 이-런식으로, 이쪽 길을 통해서 자주 다니니까 앞을 잘 보고다녀야합니다. 만약 사트로누스랑 부딪치기라도 한다면…”
“…부딪치면?”
“말도 안 통하는 만티코어라서 얼마나 사과해야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습니다. 엎드려서 빌어야죠.”
“…….”
앞장서서 길 안내를 해주는 기사는 농담을 하려고 꺼낸 말이었지만 잘 통하지 않았다.
머쓱해하면서 기사는 걸음을 옮기면서 저택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곳 세자르는 검은 숲을 가까이 뒀기에 늘 삼엄하게 경계를 지키고 있었고 저 너머의 미개척지에는 몬스터들이 가득했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사냥을 해야했고 몬스터들에서 얻을 수 있는 부산물을 손에 넣기위해 사냥꾼이며 용병들이 매 시기마다 찾아오곤했다.
그러한 이유등으로 몬스터에게 익숙했던 사람들이었지만 카이엔이 만티코어를 데려오고 몬스터를 기르기 시작하면서 몬스터를 대하는 생각이 점점 달라졌다.
적응하지 못하는 자는 떠났으니 영주성의, 세자르에 남은 이들은 이종족이며 카이엔의 애완 몬스터들에게 호의적이었다.
다만 외부에서 온 손님들까지 그들에게 호의적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기에 이야기할 기회가 생길 때마다 기사들은 예스티카와 함께 공작가에서 온 사람들에게 여기 있는 몬스터와 이종족 손님들은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 반복해서 언급했다.
“일단 겉보기에 다른 점도 거의 없고요. 이종족도 인간과 다를바 없어요.”
“하긴… 말해주지 않으면 모를 것 같긴 하던데.”
“그렇지?”
“그렇다고 어떤 종족인지 캐물어보진 마시고요. 귀찮아할거예요. 사람 사는건 다 똑같잖아요? 대표적으로 저기 지나가시는 엔베인 씨는 다크 엘프에 뭐라더라, 아무튼 이상한 검을 가지고 계시는데 인간과 다른 점은 피부색이랑 귀 정도죠.”
과연 기사가 가리킨 방향에서 엔베인이 걸어가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는건 아니었고 뭘 찾으려는 듯 주변을 두리번 거리고 있었는데 모두의 시선이 엔베인에게 쏠리자 맨 앞에서 그들을 안내하던 기사가 큰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엔베인 씨-!!”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엔베인은 옆을 돌아보았고 열광적으로 손을 흔드는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뒤에 다른 사람들이 더 있는걸로 봐선 단체 행동 중이었나, 싶었다.
왜 저렇게 반기는거지? 무슨 일이라도 있나? 잠시 망설이다가 엔베인은 손을 흔들어주고 그대로 달려가버렸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시는 분입니다.”
“어… 그래…”
다크 엘프들은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건가?
공작가 기사들은 이상한 착각을 하게 되버렸다.
애초에 다크 엘프를 본게 이번이 처음이었으니, 그 종족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했다.
기사들이 세자르에 적응하는 사이 예스티카는 아버지인 공작에게 편지를 보냈다.
미안하지만,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질 것 같으니 지불할 생활비를 요청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녀를 따라온 가신이며 호위기사들의 수가 굉장히 많아서 카이엔에게 기댈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안그래도 작은 영지의, 작은 금고의 돈을 쑥쑥 낭비할 수는 없다며 예스티카는 전령을 보냈다.
잘 지낸다는 내용 역시 편지에 썼다.
다시 만난 페르세이지는 예전과 비슷하면서도 달라진 면이 있었고 아무래도 약혼은 파기하는게 나을 것 같지만 아직 누군가와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적었다.
북부지역은 굉장히 신기해서, 검은 숲을 구경하고 싶었지만 위험하다며 카이엔이 말리기도 했고 카이엔은 몬스터를 애완 동물 처럼 기르면서 그들과 굉장히 친해보였다는 감상도 적었다.
세자르 말고 다른 영지도 검은 숲과 맞닿아있는데 그들모두 지금까지 단 한번도 몬스터가 방벽을 넘어 인간의 땅을 침범하게 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감탄과 감사.
그리고, 인간과 함께 지내는 이종족.
굉장히 많은 이종족이 이곳에 있었고 다들 저마다 사정이 있었다.
자네인의 소개로 예스티카는 바이스와 함께 갔을 때에는 만나지 못했던 이종족 손님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녀를 소개하자 다들 화들짝 놀랐는데, 사정을 들어보니 말로만 듣던 바이스의 약혼녀를 직접 보게 되어서라고 대답했다.
…파혼 직전이긴 하지만.
예스티카는 쓴웃음을 지었다.
“바이스 씨는… 솔직히 말하면 대단한 사람이긴 한데 난 좀 무섭더라.”
“그렇긴하지.”
고개를 끄덕이며 글러티나가 그리델라의 말에 동의했다.
그들이 예스티카 앞에서 망설임 없이 종족을 밝혔기에 예스티카는 마녀와 뱀파이어조차 두려워하는 바이스에 대해 잠시 생각해봐야했다.
그녀의 앞에선 얌전한 모습을 많이 보여줬는데 다른 이들의 앞에선 그러지 않았다는걸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에게 인어 소녀가 슬쩍 한 마디 덧붙였다.
“바이스 씨는 되게 신경질적이고 무서운 사람이야. 결혼 안 하는게 나아.”
“그,그런가요?”
“응!”
슬로세이는 있는힘껏 인상을 쓰면서 제 눈을 가리켰다.
“항상 날 이렇게 쳐다보고 있단 말이야.”
“에이, 그건 아니다.”
“맞아.”
“아냐! 내 말이 맞아!”
다른 이들이 고개를 저어도 슬로세이는 자기 말이 맞다며 고집을 부렸고 그리델라는 익숙하게 슬로세이를 다독여 소파에 앉게 했다.
아무래도, 슬로세이는 바이스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모양이었다.
예스티카는 아무렇지도 않게 종족을 밝힌 이종족 손님들에게 그녀의 사정을 말해주었다.
쉴새없이 밀려드는 구혼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그녀가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 중 가장 나은 사람이었던 페르세이지를 찾아온 것. 외국에서까지 온 구혼. 그 이야기를 하자 그리델라가 질색을 했다.
“결혼 안 하면 죽기라도 해? 왜 그렇게 유난이야? 아, 종족이 달라서 그런가? 겉보기엔 별다를거 없는데 이런데서 차이가 나네. 뱀파이어 쪽은 어때?”
“우리는 애초에 그런 관계를 잘 맺지 않는다. 그래서 종족의 수명이 길어도 점점 숫자가 줄어드는 추세지. 솔직히, 출산이란건 너무 비효율적이야. 뱃속에 아이를 품은 개체는 빠른 속도로 쇠약해지니까.”
“아, 역시 관점이 다르구나.”
그리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슬로세이는 과자를 우물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잘 모르겠던데? 나야 위에 언니가 셋이나 있고… 인구수를 늘리기 위한 번식? 그런걸 조절하지는 않는데.”
“번식이라는 말을 쓰는군요…”
“나야 제일 막내니까, 관계가 없어서 잘은 몰라.”
예스티카의 중얼거림에 슬로세이는 대답을 해주면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인간처럼 결혼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뱀파이어. 인어인 슬로세이는 별말이 없는걸 보면 아무래도 인간이 이상한건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예스티카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델라는 좀 더 생각하는가 싶더니만 이렇게 말했다.
“뭐, 좋은 점이 있어서 하는거겠지. 하기 싫단 사람은 내버려두면 좋으련만. 마녀 종족은 유전이고 대부분 딸에게만 전승되는데 간혹가다 남자 마녀도 나오긴 하더라. 집회에 나갈 때 종종 봐. 결혼하고 싶지 않은거면 좋은 약같은거 알아볼까? 저주라던가.”
“괘…괜찮아요. 저주라니, 그런건 꼬리가 잡힐지도 모르고요.”
“귀찮게구는 녀석들 처리하는데 효과 좋은데.”
프라우디에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면 흔적조차 남기지 않을테고.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그리델라였지만 예스티카가 거절해서 더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예스티카는 아직 젊고 어려서 결혼으로 묶이기엔 아까울 정도였다.
게다가 그녀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얼굴만 보고 반해서 구혼하려고 달려드는 녀석들이 예스티카를 행복하게 해줄 수도 없을테고.
미모에 반해서 꼬여든 날파리니 그 미모가 사라진다면 금세 내팽겨칠게 뻔했다.
아마 예스티카도 그래서 다른 이들의 의견을 묻고있는걸지도 몰랐다.
“실은, 주변 사람들은 어서 빨리 결혼하라고 재촉하고 있거든요.”
“가족들이?”
“가족들보단 친척이나 지인쪽에서요.”
“그럼 무시해. 가족들은 네 편이라는거잖아.”
“맞는 말이다. 성급한 선택이 긴 불행을 불러올 수도 있어.”
“하지만 그 후의 일에 대해서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제가 앞으로 뭘 해야할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예스티카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깍지낀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불확실한 미래에 두려워하며 목적지조차 정하지못한 그녀는 어딘가로 도피하고 싶었다.
이번에 선택한 도피처는 페르세이지였지만 그녀는 곧 공작저로 돌아가야한다.
끝까지 도망칠 수는 없단걸 알고있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내내 헤메는 마음은 점점 힘을 잃어갔다.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고 있던 글러티나가 예스티카를 향해 말했다.
“만약에, 바이스가 네 구혼을 받아줬다면 어떻게 했을거지?”
“네?”
“만약에. 그랬다면 결혼했을거야?”
“…네. 페르세이지 님은 제 첫사랑이었으니까요.”
“후회하지 않았을 것 같아? 지금 그녀석은 후작가의 차기 당주도 아니고 쫓겨난 왕자의 시종일 뿐인데.”
“그래도 괜찮았을 것 같아요. 전혀 모르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보단 나았을테니까요.”
“만약 결혼을 했다면 너는 무슨 일을 했을 것 같아?”
“네?”
“바이스 씨는 왕자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니까 결혼을 한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았을텐데. 그렇다면 넌 네 나름대로 네 할일에 몰두하게 됐을테고.”
예스티카는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하고싶은 일.
할 수 있는 일.
그녀가 배운 것이라곤 다른 이들도 모두 배우는 것들 뿐이었다. 공부와 교양, 사교에 관한 것들. 배우고 익혔지만 겨우 그정도 뿐인 것들.
예스티카는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그녀가 좋아하고 몰두했던 것이 있었던가? 그것은 아직도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녀가 해답을 찾을 때까지 다들 기다려주었다.
슬로세이조차 손에 들고있는 과자를 조금씩 깨물어먹으면서 소음을 내는 것을 주저했다.
긴 고민 끝에 예스티카는 입을 열었다.
“…떠오른게 있긴한데, 아마 불가능했을거예요.”
그녀는 힘없이 웃어보였다.
“전 정말 옛날에 그 일을 그만뒀었거든요.”
“취미를?”
“취미…라고 해야했을까요? 잘 모르겠어요.”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는건 좋아. 명상이라던가. 마법사들은 명상으로 자신을 수련하곤 하거든. 프라우디에도 종종 하던데.”
“아, 나도 봤어.”
“취미는 하나라도 가지고있는게 좋아. 나의 경우는… 흠,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나조차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군. 몸이 녹슬지 않기위해 훈련을 하고있지만 이게 내 취미냐고 묻는다면 확실히 대답하기 어려울 것 같아.”
“난 정보수집!”
“난 헤엄치는거.”
다들 한 마디씩 덧붙였다.
슬로세이는 해맑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난 계속 왕자님이랑 같이 살건데 왕자님이 돈을 더 벌거나 고집부리는걸 그만두고 왕이 된다면 더 큰 호수를 만들어주겠지!”
“택도 없는 소리.”
“그럴 일은 없을걸?”
꿈도 크다며 옆의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슬로세이가 토라진 듯 양 뺨을 부풀렸지만 그리델라도 글러티나도 웃음을 참지 않았다.
“왕자님은 절대로 왕 안 된다고 하셨잖아. 꿈 깨.”
“맞아.”
“칫…”
“그래서, 아가씨의 취미는 뭐였어요?”
“그… 별거 없었어요. 어린시절에 검을 들고 놀고 흙장난을 하던 것 뿐이었으니까요.”
예스티카는 얼굴을 붉혔다.
가족들은 그녀가 금속을 잡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린아이였어도 그정도의 눈치는 있었기에 그녀는 애써 눈을 돌려야만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지금의 그녀는 성인이 되었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굳은살 하나 없는 매끈한 손을 바라보며 예스티카가 말했다.
“정말로, 별거 없었어요.”
그래? 무언가를 배우기에 늦은 시기는 아니잖아? 나도 요즘엔 의사들한테 의술도 본격적으로 “배우고있는걸? 떠돌이 마녀로 살면서 약장수는 해봤지만 역시 의술을 익혀야겠더라구. 약으로 고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으니까. 봉합이야 어떻게든 할 수 있지만 외과적 시술같은건 역시 많이 공부해야겠더라.”
“나는 새 기술을 익히기보단 이미 하고있는 작업에 몰두하려고 한다. 흩어진 동족들을 찾고 가문을 공격한 놈들을 찾아 복수해야지. 재건은 그 다음에 생각할 일이고.”
“뭐야, 나만 노는거야?”
“응. 너만 노는거야.”
뾰로통해진 슬로세이를 보며 그리델라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슬로세이는 아직 어린 인어였으니 놀기만 해도 된다. 어려운 일들은 어른들이 다 하면 되니까.
카이엔에게 아무리 급하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슬로세이까지 나서서 해야할 일은 없을테니까. 솔직히 말하면, 왠만한 일들은 모두 바이스의 손 안에서 처리되리라.
그 유능한 사람이 어쩌다가 일찍 파혼하지 않아서 예스티카를 속상하게 했는지 모르겠다며 그리델라는 의아해했다.
세 사람을 만나고 난 뒤에도 예스티카는 별채 근처를 서성였다. 그러다가 밖으로 나가는 다른 이들과도 만날 수 있었고 그들과도 대화를 나누었다.
다들 그녀의 질문을 불쾌하게 여기지 않고 성심성의껏 대답해주었다.
훈련을 하기위해 밖으로 나오던 라스는 미래에 대해 묻는 예스티카에게 이렇게 답해주었다.
“미래라…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함께 살던 동족들을 모조리 잃어버렸거든요. 추적하는 것도 어렵고, 습격자를 알아내는 것도 힘들어서 부끄럽지만 왕자님께 의존하고 있습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것, 정도죠. 지금은 왕자님께 의탁하고 있으니 그분을 위해 힘을 쓰려고 합니다.”
그 답에는 흔들림이라곤 없었다.
그녀는 같은 질문을 엔베인에게도 했다. 엔베인은 머뭇거리다가 고민하는가 싶더니만 조십스럽게 입을 열었다.
“…실은 저, 원래 살던 곳으로 못 돌아가요. 여러가지 사정이 있거든요. 저를 구해주신 분이 왕자님이시니 제가 도움이 된다면, 끝까지 곁에 있고싶습니다.”
이곳의 이종족들은 모두 카이엔에게 크고 작은 도움을 받아서 이곳에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말할 수 없는 사정으로 도피해왔다는 청년은 주방에서 채소를 손질하면서 그녀의 물음에 대답해주었다.
그들과 자신의 상황이 다르단걸 알면서도 예스티카는 그들의 생각을 묻고다녔다.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은 다들 가지고 있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카이엔이었다.
카이엔에게 도움을 받았으니 언젠가 그들의 힘이 필요해진다면 물심양면으로 돕겠다며.
그 말을 카이엔에게 전하니 카이엔은 질색을 하며 손을 저었다.
“내가 위험해질 일이 뭐가 있다고… 안 그래?”
“물론이죠. 왕자님이 위험해지시기 전에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 말이 아니잖아…”
양손으로 얼굴을 덮어 가리면서 앓는 소리를 내던 카이엔은 한숨을 쉬더니만 예스티카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실지는 정하셨습니까?”
“일단은요. 결혼하고싶지 않아요. 바이스 씨도 마찬가지니 더이상 고집부리는 것도 미안하고요. 하지만 아직 그것뿐이예요.”
“아버지인 공작님을 설득하셔야겠군요. 언니분과의 사이는 어떠신가요?”
“나쁘지않아요. 자매인걸요.”
“가족이라도 충분히 사이가 나쁠 수 있으니까요. 그럼 언니분쪽이 결혼해도 예스티카 님을 쫓아내진 않겠군요.”
그렇다면 차라리, 예스티카가 공작이 가지고있는 수많은 영지 중 하나를 관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땅이 많은만큼 관리직이 많이 필요하니 그녀가 그쪽 공부를 시작하는 것도 좋은 생각이었다.
생각해본 적이 있기에 예스티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흘 뒤. 예스티카는 마지막으로 바이스에게 면담을 요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