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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왕자는 조용히 살고싶다-77화 (78/219)

77화

저녁까지 예스티카는 카이엔의 집무실에 있다가 돌아갔다.

하는 일이 서류작업뿐이라 재미없었을 텐데 그녀는 조용히 카이엔과 바이스를 지켜보았다.

말은 시종, 이라고 했지만 바이스는 거의 집사 수준으로 영주성의 일에 관여하고 있었다.

바이스는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없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그가 영주성에서 하고 있는 일을 적어놓은 목록을 예스티카에게 넘겼다.

목록의 내용상이라면 바이스는 카이엔이 저녁을 먹은 뒤에 한 시간에서 두 시간정도 남은 업무를 돕거나 공부를 봐주었고 마지막으로 저택을 한 바퀴 빙 돌아 순찰하고 방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순찰에 동행하고 싶다고 요청하니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바쁘게 하던 일을 마무리짓고 내일을 위해 자러가는 시간. 예스티카는 바이스와 함께 등불을 들고 저택 안을 활보했다.

불을 끈 저택의 내부는 굉장히 어둡고 을씨년스러웠는데, 바이스는 무섭지도 않은건지 성큼성큼 걸어다니면서 창문이 잘 잠겼는지 빈 방에 누가 있진 않은지 점검했다.

1층부터 맨 윗층까지, 지하실이며 바깥의 정원까지 살피니 금세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익숙하게 문단속을 하고 점검하는 그를 보며 예스티카가 말했다.

“매일, 혼자 하시는건가요?”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하기도 하지만 오늘은 혼자입니다.”

“힘들지 않으세요?”

“이젠 익숙해졌어요. 예스티카 님이야 말로 피곤하실텐데.”

“전 괜찮아요.”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순찰을 마친 바이스는 별채까지 예스티카를 데려다주었다.

모시는 아가씨가 오지않아 바깥에서 서성이고 있던 시녀들은 예스티카의 모습이 보이자 빠르게 달려왔다.

“안녕히 주무세요.”

“네. 바이스…씨도요.”

아직 호칭이 완벽히 입에 붙지 않았다. 살짝 말을 더듬은 그녀를 보고 옅은 미소를 짓고 바이스는 돌아갔다.

그의 등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있던 예스티카는 시녀들의 재촉에 별채로 들어갔다.

그녀의 귀환이 늦어서 이미 목욕물은 다 식어버려서 시녀들이 급하게 다시 물을 데우고 목욕 준비를 시작했다.

“늦으셨네요. 피곤하진 않으셨어요?”

“으응. 별거 없었는걸.”

그녀는 구경만했을 뿐이다.

카이엔이 서류를 보며 끙끙거리고 있을 때도 그녀는 도움을 주지 못했다. 영지를 관리하는 일이다. 외부인인 그녀가 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가만히 앉아서 카이엔이 바이스와 함께 일하는 모습을 관찰하면서 차를 마셨을 뿐이다.

목욕물이 준비가 다 되었다는 말에 예스티카는 욕조 안에 몸을 담갔다.

그러고보니 바이스는 시종 일을 하고 있으니 모시는 주인인 카이엔이 이런저런 잡다한 시중을 들어줄터.

시녀들이 그녀에게 해주는 것처럼 바이스도 옆에 붙어서 옷 입는 것부터 시작해 머리 손질, 목욕 등 별의별 것을 다 해줄텐데 왠지 그 모습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 페르세이지가 다른 이의 시중을 든다니? 작게 웃으며 예스티카는 고개를 숙였다.

내일은, 오늘처럼 바이스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지 않을거다.

이곳에 사는 많은 이종족들과 만나보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싶었다.

이미 함께 온 사람들은 이종족 손님들과 만난 적이 있어서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걸 들은 적이 있었다.

인어가 헤엄치는 작은 호수와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는 마녀부터 시작해서 개중 가장 눈에 띄는 다크 엘프까지.

오늘을 기대했던 만큼 내일도 굉장히 기대가 되었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고 별채 밖에서 서성이고 있으니 카이엔과 바이스가 함께 왔다. 그런데 카이엔의 어깨에 작은 솜뭉치같은게 있었다.

그게 무엇인가 하고 예스티카는 카이엔의 어깨를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순간 솜뭉치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기지개를 쭉 켰다.

“찍!”

“꺅!”

“응?”

난데없이 소금이가 찍하는 소리를 내자 예스티카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솜뭉치인가 싶었는데, 잘 보니 쥐였기 때문이다.

카이엔이 어깨 위에 쥐를 얹고 다니는걸 보고 예스티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아… 얘는 소금이라고 햄스터 몬스터예요.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요.”

소금이는 굉장히 귀여운 햄스터 몬스터였지만 쥐를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충분히 겁먹을만했다.

예스티카의 반응에 소금이는 굉장히 좋아하면서 찍찍거렸다.

“찍-! 찌잇, 찍!”

- 보거라! 저 인간은 나를 보고 공포에 물들지 않았느냐!

“어… 그래, 그래.”

대충 소금이에게 맞장구를 쳐주면서 카이엔은 조심스럽게 예스티카를 살폈다.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리는지 숨을 가다듬고 있는게 굉장히 미안했다.

다른 손님들과 인사시키는건 바이스에게 맡기기로 하고 카이엔이 말했다.

“안내는 네가 해라. 난 소금이 데리고 방에 가있을게.”

“저한테 맡기시는겁니까?”

“응. 네가 알아서 잘 하겠지.”

“전 자네인 님에게 맡기려고 했는데요.”

“어…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 네가 알아서 판단해.”

“알겠습니다.”

예스티카가 소금이를 무서워하니 그는 이 자리에 없는게 나았다.

카이엔은 가버렸고 바이스는 예스티카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네… 네에…”

“많이 놀라셨나봅니다. 하긴, 소금이는 쥐 과에 속하니까요.”

“그… 다른 분들은 익숙하신가요?”

“다들 오랫동안 저 모습을 봐왔으니까요. 소금이는 왕자님의 머리 위에서 놀기도 하고요.”

“네에?!”

어깨 위에 올리고 다니는 것도 신기한데 머리 위에도 올라간다고?

참 이상하고 대단한 햄스터라며 예스티카는 깜짝 놀랐지만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카이엔의 성격상, 그 소금이라는 햄스터가 자기 머리 위에서 돌아다녀도 떨어지지 않게 주의만 줄 뿐 억지로 떼낼 것 같지 않아서였다.

“그럼 바로 옆에 있는 건물로 갈까요? 이번에 새로 공사를 해서 이종족 손님들은 그쪽으로 모셨습니다. 별채를 계속 차지하는 것도 미안했거든요.”

“그랬군요… 저, 제가 갑자기 온다고 해서 그런건 아니죠?”

“시기를 앞당기긴 했지만 공사는 이전부터 하고 있었습니다. 이사 계획도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바이스는 예스티카와 함께 다른 손님들이 지내고있는 건물로 향했다.

다들 방에만 처박혀있는게 아니라 방으로 찾아간다고 해서 모두 만날 수 있을리는 없었지만 안 가는 것보단 나았다.

다행히 두 사람은 바로 프라우디에와 자네인을 만날 수 있었다.

날씨가 좋아서인지 프라우디에가 햇볕을 쬐러 연구실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풀밭에 천을 하나 깔아놓고 무슨 돌 같은걸 말리고 있었지만.

“프라우디에 님?”

“어? 바이스 씨? 그리고… 손님이시네요.”

천 위에 늘어놓은 가지각색의 검은 조각들을 이리 뒤집었다 저리 뒤집었다 반복하던 프라우디에는 바이스와 예스티카를 발견하고 몸을 일으켰다.

실험할 때 방해가 되지않게 소매가 팔에 딱 붙어있는 긴 셔츠 위에 가디건을 걸친 상태였는데 프라우디에는 두 사람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벨라시 공작가의 예스티카 벨라시 님입니다.”

“안녕하세요. 독스 백작가의 프라우디에 독스예요.”

“예스티카 벨라시입니다.”

통성명을 하며 두 사람은 인사를 주고받았다.

자네인에게 프라우디에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기에 예스티카는 그가 바로 자네인의 호위 대상임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둘이 같이 있는건가, 싶었다.

분명 백작가의 장남이라고 들었는데 프라우디에는 굉장히 작고 약해보였다.

어려서일까? 웃는 얼굴이 참 예쁜 아이라고 생각하며 그녀가 물었다.

“으음… 저건 뭔가요?”

“실험할 때 쓰는거예요. 돌도 있고 몬스터의 송곳니도 있고 가시도 있고… 어떻게 다듬느냐에 따라서 실험을 했을 때 결과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어서요. 이번엔 말리고 있어요.”

“그렇군요.”

“햇볕이 좋아서 금방 마를 것 같아요.”

활짝 웃으며 프라우디에가 말했다.

흑마법에 쓰는 재료지만 겉보기에 기괴하거나 흉측하진 않았다. 차마 흑마법사라고 대놓고 말할 수 없어서 바이스는 이렇게 덧붙였다.

“연금술을 공부하러 이곳에 오셨습니다.”

“아, 그렇군요. 대단해요.”

예스티카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연구며 마법의 재료로 쓸 것들이었지만 아직 아무 과정도 거치지 않은 순수한 재료 자체라 프라우디에는 바이스와 예스티카가 가까이 오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별채 앞에서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가 두 사람은 자리를 옮겼다. 다른 손님들을 만나러가기 위함이었다.

다른 이들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별채 밖에서 라스와 엔베인은 바닥에 큼직한 천을 하나 깔아놓고 그 위에 올라선 상태였다.

선반이 고장났던건지 라스가 못질을 하고 있었고 옆에는 엔베인이 도료가 든 통과 붓을 들고 서있었다. 고친 다음에 색까지 다시 칠해주려는 모양이었다.

선반의 높이가 낮은걸로 봐선 슬로세이의 방에 있던게 아닐까, 바이스는 추측했다.

“바쁘시군요.”

“아, 바이스 씨. 별거 아닙니다. 금방 끝나요.”

“슬로세이 님의 방에 있던건가요?”

“어떻게 아셨어요?”

“그럴 것 같았습니다.”

“뭘 잘못한건지 제대로 무너졌더라구요. 새로 사는게 나을 것 같긴한데 고쳐주라고 해서 손을 좀 보고있습니다.”

“이참에 색칠도 해주라고 해서 아예 바깥에 가지고 나왔고요…”

못질만 할거였으면 복도에 뒀어도 됐다.

그러나 도료를 바를거라면 냄새때문에 옆방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으니 부득이하게 밖으로 가지고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이해했다며 바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하신게 있다면 언제든지 요청하세요. 며칠 동안 비가 오지 않기를 바라야겠습니다. 아, 이쪽은 예스티카 님이십니다. 손님으로 오셨어요.”

“처음뵙겠습니다.”

뒤늦은 소개에 다들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늑대 인간인 라스는 겉만 봐선 인간과 다른 구석이 없었지만 엔베인은 확연히 티가 났다.

허리춤에 검을 찬 채 양손에는 페인트와 붓을 들고있는 다크 엘프라니.

굉장히 난해한 조합이었지만 예스티카는 내색하지 않았다.

글러티나와 그리델라는 자리를 비운건지 만날 수 없었다.

혹시라도 그 두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예스티카에게 소개시켜 주기위해, 바이스는 자네인에게 부탁했고 자네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예스티카는 티아마티스가 흘린 정보 때문에 여기 오게된거나 마찬가지였기에 그녀역시 책임질 의무가 있었다.

귀하게 자란 공작가 영애가 상당히 자유롭게 살아온 마녀와 꽉 막힌 성에서 살았던 뱀파이어, 제멋대로인 인어와 만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굉장히 소란스럽지 않을까,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자네인은 바이스의 앞에서 굳이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녀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바이스가 잘 알 것이라 여긴 탓이었다.

“아, 그러고보니…”

비셰를 빼먹지 않았나?

늘 주방에 있다보니 이런 일에 한 번씩 빠뜨리곤 했다.

하지만 비셰는 주방에만 가면 만날 수 있으니 나중에 가도 될거다.

한번에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나도 머리가 아픈 법이니 비셰를 소개시켜주는건 나중에 해도 충분하다며 자네인은 애써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비셰가 들으면 굉장히 서운해할 것만 같아서 양심이 아팠다.

“잔느? 왜 그래요?”

“아냐, 아무것도… 그나저나, 저것들은 더 말려야 해?”

“네. 일단 조금만 걷어가고 나머진 이틀 정도 더 말려볼래요.”

“비가 안 와야할텐데.”

“아침 식사 전에 그리델라를 만났는데 내일까진 비가 안 온다고 했어요.”

“그럼 다행이고.”

비가 온다면 프라우디에의 재료 뿐만이 아니라 잘 마르라고 내놓은 슬로세이의 선반마저 엉망이 되버릴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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