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비밀에 가까운 이야기는 하지 않고, 도움이 될만한 중요한 대화만을 이야기하며 자네인은 카이엔과 바이스의 표정을 살폈다.
카이엔은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바이스의 표정은 뚱했다.
자기 일임에도 불구하고 저런 태도라니. 자네인은 바이스의 냉정함에 허탈한 기분까지 들 정도였다.
그녀도 이정도인데 그동안 페르세이지에게 의지하고 있던 예스티카는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저절로 동정심이 들었다.
바이스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렇다고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해주는 건 예스티카 님도 바라지 않는 결과이실 텐데요. 그나저나 벨라시 공작은 뭘 하고 있답니까?”
“티아마티스 님께 조언을 구한 것도 그렇고, 아마 그분도 예스티카 님이 외국으로 시집 가는 걸 바라시지는 않는 게 아닐까요?”
“너, 이제 어떻게 할래?”
“솔직히 말하면 미치겠습니다만. 그렇다고 한 사람이 불행해지는 걸 손 놓고 바라만 보고 있을 수는 없군요.”
“외국이니 가서 난리칠 수는 없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국내라면 참 좋았을 텐데.”
‘저 녀석 진심이다 저거.’
가르간트 내에서였다면 큰일을 저질렀을 게 뻔하다. 거리낄 게 없을 테니까.
어디 사는 어떤 놈이 구혼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 모가지를 조심해야 할 터. 카이엔은 바이스를 툭툭 치며 말했다.
“이번엔 잘 좀 이야기 해봐.”
“네. 허나 예스티카 님은 저를 너무 좋은 사람으로 보고 계십니다. 솔직히 어린 시절에 했던 일은 별거 아닌 것들 투성이거든요. 눈에 거슬리는 녀석들을 손봐준 것뿐이고요.”
“…너라면 그랬을 것 같아.”
“그런 저에게 호감을 품으실 정도로 예스티카 님의 주변에 괜찮은 사람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하긴, 너무나 뛰어난 사람은 동경의 대상도 되지만 질시의 대상이 되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동경이 단숨에 질투로 바뀌는 일도 흔하고요. 뭐, 제가 제대로 마무리 짓겠습니다.”
“말 조심하고. 제발.”
“말 안하셔도 압니다.”
“그렇게 말해놓고 안 하잖아.”
카이엔의 투덜거림을 뒤로 하고 바이스는 예스티카와 만나기로 한 장소로 향했다.
오전에 약속을 잡아뒀기에, 어제 만났던 응접실로 가니 예스티카가 미리 와있었다.
“이런. 먼저 와계셨군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긴장이 되어서… 어서 앉으세요.”
단 둘만이 마주보고 앉아있게 되었다. 부끄러운 건지 예스티카는 얼굴을 붉히며 바이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겨우 입을 열어서 그녀가 목소리를 냈다.
“…보고 싶었어요.”
“말도 없이 사라져서 죄송합니다. 저도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우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처음에는 불순한 의도로 왕자님께 접근했는데, 너무 정이 들어버린 건지 집안과의 연을 끊기로 했으니까요.”
“역시 정치에 대한 문제인건가요…?”
“네. 처음엔 카이엔 왕자님을 제거하거나 뜻대로 이용하려고 했지만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왕이 되실 생각이 없는 그 분을 끝까지 지킬 겁니다.”
“그렇군요.”
예스티카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페르세이지 님이 항상 그리웠어요. 페르세이지 님은 어떠셨나요? 단 한순간이라도 저를 떠올려주신 적이 있나요?”
“죄송합니다.”
“역시… 저는 당신에게 있어서 큰 의미가 없었던 건가요? 저는, 페르세이지 님이 계셔서 좀 더 행복할 수 있었는데….”
“당신은 고작 그 정도의 행복만으로 만족해선 안됩니다. 앞으로 더 행복해지실 수 있어요.”
“예전이랑 비슷한 말을 하시네요.”
눈물이 날 것만 같았음에도 예스티카는 웃었다. 어째서인지 바이스의 그 말에 저절로 웃음이 났다.
“당신을 핑계삼아 행동하라고 하셨죠. 네, 그렇게 했어요. 싫어하는 사람을 거절하고 제게 무례한 사람들에겐 강경하게 대처했어요. 당신의 이름을 내세웠어요.”
“잘하셨습니다. 해코지 당하시진 않으셨습니까?”
“바이올로스 후작님이 도와주신 적도 있으셔요.”
“다행입니다.”
“인형 같이 살지 말라고 하셨죠. 그런데 이렇게 되버렸네요. 페르세이지 님, 저는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어요. 다른 이들처럼 살아야 할지, 아니면 어렵고 힘들다고 해도 제가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할지. 두려워요, 페르세이지 님. 누군가에게 있어서는 배부른 소리며 기만으로 보일까 봐 움직일 수 없어요.”
“앞서가는 사람은 이해받지 못 하기 마련이죠. 저만해도 카이엔 님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아버지께 미쳤냐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바이스는 예스티카를 바라보았다.
그는 큰 의미를 두지 않고 했던 행동이 그녀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의미있는 일이 되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바이올로스 후작가의 교육이 다른 귀족가문들의 교육보다 잔혹한 면이 있지만 보다 뛰어난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여동생만해도 어렸을 적부터 기본적으로 제 몸을 지키기 위한 검술이며 전투기술을 배웠고 제 욕망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철저하게 교육받았다.
허나 다른 이들의 경우엔, 그렇지 않았다. 특히 영애들의 경우 자신의 재능을 갈고 닦기보단 평범하게 지내는 것을 우선으로 한정적인 상자 안에 갇히고 만다.
좀 더 좋은 사람과 결혼해서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기 위해. 여성들은 손위, 손아래 남자형제에 비해 부족한 지원과 교육을 받는다.
‘내가 예스티카 님에게 그런 말을 한 것도.’
그런 상황에 처한 이를 가까이에서 본 것은 처음이어서 그랬을 터다.
그의 여동생 만큼이나 영리한 사람이 재능을 개화시키지 못한 것이 조금 답답해서 몇마디 얹은 것뿐이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것만이 최우선은 아니건만.
법으로 정해지지 않은 암묵적인 무언가가 세상이 발전하는 걸 막고 있으며 뛰어난 인재가 등장하지 못 하게 막고 있다.
곰곰히 생각에 잠긴 바이스는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예스티카 님. 지금의 저는 페르세이지가 아니니 ‘바이스’라고 불러주세요. 제가 일하는 모습을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이곳에 머물러 있는 이종족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눠보시는 것도 좋겠군요. 분명 도움이 될겁니다.”
“네. 그렇게 할게요.”
그의 제안에 예스티카는 바로 동의했다.
예스티카로선 그렇게나 꿈꾸었던 페르세이지와의 재회였으므로, 그와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었다.
그녀가 동의했기에 예스티카는 바이스가 세자르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한 걸음 뒤에서 지켜보기로 했다.
카이엔에게 허락을 구하니 카이엔 또한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예스티카는 그 다음 날, 하루 동안 두 사람을 따라다니기로 했다.
카이엔의 이동범위는 굉장히 좁은 편이라 예스티카도 부담없이 그 뒤를 따라갈 수 있었는데 집무실에서 영주 대리로서 일하는 그를 지켜보며 예스티카는 바이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살폈다.
시종인 그는 옆에서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하거나 일차적으로 서류를 솎아내는 작업을 했다.
중요도에 따라 서류를 분리하고 카이엔이 꼭 확인해야 할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나누어놓고 중요도가 떨어지는 서류의 경우엔 간략하게 내용을 요약한 메모를 붙여놓았다.
오전 내내 카이엔은 서류작업에 몰두했고 예스티카는 집무실의 소파에 앉아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점심 식사를 할 시간이 되자 함께 식당으로 이동했는데 오늘은 예스티카가 함께 있었기에 카이엔은 따로 식사를 하고 오겠다는 바이스를 꿋꿋이 그의 옆자리에 앉혀놓았다.
“오늘 하루는 같이 움직이는 게 낫지.”
“오늘 하루만입니다. 시종과 겸상이라뇨.”
한마디 하는 바이스였지만 그 이상 불평하지 않았다.
함께 점심 식사를 한 뒤에는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가볍게 정원을 산책하기로 했고 예스티카도 동의했기에 카이엔은 평소처럼 사트로누스를 보러갔다.
세자르에 온 뒤에 페르세이지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지라 예스티카는 사트로누스를 가까이에서 본 것이 처음이었다.
카이엔에 대한 이야기는 그녀 역시 들었기에 사트로누스에 대한 것도 조금은 알고 있었다.
다수의 사상자를 낸 몬스터임에도 불구하고, 카이엔의 앞에선 순한 만티코어.
그 소문답게 사트로누스는 아주 얌전한 모습을 보였다.
“사람을 물진 않습니다만, 이왕이면 귀찮게 안 하는 게 좋습니다.”
“아… 네.”
바이스의 첨언에 예스티카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음엔 릴리시아였는데 카이엔이 머쓱해하면서 예스티카를 보았다.
“그… 일단 같이 온 기사단 분들은 릴리시아에게 보여줬습니다. 이 애가 침입자라고 오해하면 안 되서 얼굴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거든요.”
“네. 소란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더 큰 소란이 일어날까 봐 인식 절차를 거친 건 기사단 한정입니다. 그래서 인식되지 않은 다른 이들은 정원 근처에 오지 말라고 해뒀고요. 예스티카 님의 행동 범위를 제한할 수는 없으니 간략하게나마 인사를 시킬까합니다.”
“전 괜찮아요.”
“놀라실 텐데…”
카이엔은 말끝을 흐렸지만 이내 결심한 듯 릴리시아의 몸통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릴리시아. 잠깐 나와볼래?”
그의 목소리에 저 위에서 촉수 하나가 내려왔다.
그냥 덩치 큰 항아리 같다고 여기고 있었던 몬스터에게서 촉수 하나가 스르륵 내려오자 예스티카는 깜짝 놀랐다.
카이엔은 익숙한 듯이 촉수와 악수를 하더니만 말했다.
“이번에 새로온 손님. 놀라게 하지 마.”
- 응.
“간단하게만.”
- 인사?
“인사.”
고개를 끄덕이듯 릴리시아는 촉수를 까딱거렸다.
아주 느린 속도로 조심스럽게 예스티카에게 다가가서 촉수를 멈췄다.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변종 알라우네의 촉수를 빤히 쳐다보며 예스티카가 물었다.
“어… 이게… 인사?”
카이엔이 한 말을 떠올리며 예스티카가 묻자 카이엔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주었다.
“네. 악수만하세요. 보통 번쩍 들어올려서 몇 번 들었다가 내리는 걸 반복하거나 토닥거리면서 만져보는데 이게 제일 간단한 겁니다.”
“아… 네.”
들어올리다니.
몇몇 기사들이 혼이 빠진 것만 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게 그 이유였던 건가?
머뭇거리면서도 예스티카는 인사를 하겠다며 내밀어진 릴리시아의 촉수를 잡았다.
매끈한 덩굴같은 촉감이었는데 그녀가 촉수를 붙잡고 악수를 하고 손을 놓자 촉수는 스르르 다시 카이엔에게 돌아갔다.
“끝입니다.”
“휴우-”
- 왕자님.
“응? 왜?”
- 저건, 예쁜 인간?
“어? 그렇긴 한데… 그건 왜?”
- 나, 그런 거 잘 모르니까.
몬스터인 릴리시아가 인간의 미추 기준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그러나 여기 있으면서 본 것이 많으니 저런 질문을 했을 터. 카이엔은 일단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 말에 릴리시아는 알겠다고 대답하며 촉수를 거두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카이엔은 예스티카와 바이스에게 걸어갔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그냥, 릴리시아가 뭘 물어봐서. 별거 아니야.”
알라우네를 연구한 학자의 논문 대로라면, 알라우네 같은 종의 몬스터는 일종의 의태의 과정을 거친다고 했다.
주로 사냥감을 유혹하기 위한 형상을 취하는데 피식자와 동종의 모습을 하거나 피식자보다 약한 생물의 모습을 선택한다. 가장 많이 잡아먹은 종의 모습을 띄기도 한다.
이렇게 진화한 알라우네의 경우를 완전한 성체로 취급하는데 한 장소에 붙박이로 있다는 특징으로 다른 몬스터와 구분한다고 했다.
물론, 그런 식으로 진화한 상급 개체를 발견하는 건 꽤나 어려운 축에 속한다. 이 연구 기록도 알라우네 서식지 주변에 주둔하면서 알아낸 것에 대해 적혀있었으니까.
릴리시아의 주식은 가축이었고 한 번씩 침입자가 암살자를 잡아먹기도 했지만 그녀의 입맛에는 살이 통통하게 오른 가축 쪽이 더 맞았다.
그래서 진화한다고 해도 가축의 형태를 띨 텐데 왜 인간에 대해 물어보는 걸까?
‘하긴 주변에 인간이 더 많지.’
그래서인 걸까?
릴리시아가 아예 말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저번에 다쳐서 비명을 질렀을 땐 저택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었다.
어딘가에 성대가 있긴한데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음역대로 말을 한다는걸까.
알라우네에 대한 자료를 더 찾아봐야겠다며 카이엔이 입을 열었다.
“릴리시아한테 더 관심을 가져야겠어.”
“그렇군요. 식사에는 문제가 없답니까?”
“그런 말은 안하던데? 너 또 이상한거 먹였어?”
“누가 들으면 제가 이상한 것만 먹이는 줄 알겠군요.”
“너 저번에-”
암살자 던져줬잖아! 라고 말하고 싶은 카이엔이었지만 옆에 예스티카가 있었으므로 입을 다물었다.
예스티카도 바이스의 성격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있겠지만 그래도 말을 아끼는 편이 나았다.
짧은 산책을 마치고 카이엔이 예스티카에게 말했다.
“한 시간정도 방에서 쉬시다가 오세요. 저도 쉬다가 그때부터 다시 일할 생각입니다. 집무실에서 나가지 않고 계속 책상 앞에만 앉아있을거라 지루하실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페르… 바이스 씨가 무엇을 하는지 보고싶어요.”
“그럼 조금 있다가 뵙겠습니다.”
다른 모습도 보여줄 수 있다면 좋을텐데, 오늘 카이엔의 스케줄은 영주성 내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들 뿐이었다. 덕분에 바이스도 카이엔의 곁에 붙어있는라 보조적인 일을 하는 것 밖에 보여줄 수 없었다.
카이엔이 그 점을 아쉬워하자 바이스는 웃으며 말했다.
“제가 대략 어떤 일을 하는건지는 나중에 따로 알려드릴겁니다. 제 일거수일투족을 예스티카 님이 감시하듯 따라다니실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렇겠지…”
“그나저나 왕자님 취향은 역시 강인한 분이신 것 같군요.”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예스티카 님은 미인이지않습니까. 어렸을 적부터 추근거리는 사람도 많고 아닌 척 힐끔거리는 사람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하지만 왕자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니까요.”
“아니… 사람을 그렇게 쳐다보는건 실례지.”
“그렇죠.”
그는 옳은 말을 한 것 뿐인데 바이스는 어쩐지 뿌듯해하는 것 같았다.
“제가 왕자님을 잘 키웠군요. 보람을 느낍니다.”
“이런데서 보람을 느끼지 마.”
“하지만 정말인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