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정확히 두 시간 뒤, 자네인은 예스티카를 찾아갔다.
별채로 가니 바로 앞까지 나와있던 시녀가 자네인을 안내해주었다.
예스티카와 바이스가 대화를 나누었던 그 짧은 시간동안 이미 짐정리를 마친 뒤인지 안내받은 방은 깔끔하게 정리된 상태였다.
예스티카는 조금 더 편한 드레스로 갈아입은 상태였는데 아직도 눈가가 살짝 붉은 상태였다.
자네인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진 눈이었지만, 조금 기운이 없어보였다.
“다시 와주셔서 감사해요. 앉으셔요.”
“네.”
“다 나가주세요. 둘이서만 이야기 하고 싶어요.”
“알겠습니다.”
시녀들은 고개 숙여 인사하고 방에서 나왔다.
미리 준비해놓은 다과가 올려진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마주보고 앉았다.
자네인은 티아마티스에게 예스티카에 대한 상세정보를 들었지만 예스티카는 자네인이 에빌라이 공작의 사람인 것 밖에 알지 못 했다.
어째선지 아버지조차 쩔쩔매는 젊은 공작이 쫓겨난 왕자의 주변에 두고 있는 기사.
그녀는 어째서 에빌라이 공작이 그런 일을 한 건지 알지 못 했지만 자네인의 존재를 감사히 여겼다.
낯선 세자르라는 땅에서 자네인은 그나마 그녀에게 가장 호의적인 인물이 될 테니까.
무릎 위에 올라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어렵게 예스티카가 입을 열었다.
“예스티카 벨라시라고 합니다.”
“자네인 마스퀘이어입니다. 에빌라이 공작님의 명령으로 독스 백작가의 장남, 프라우디에 독스 도련님의 호위를 맡아 세자르에 머물고 있습니다.”
“네? 왕자님 곁에 있는 게 아니셨어요?”
“정확히는 세자르로 공부를 하러 온 프라우디에 독스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아…”
자신이 조금 오해한 점이 있었기에 예스티카는 얼굴을 붉혔다.
“죄송해요. 전 왕자님의 호위신 줄알고…”
“카이엔 님의 호위기사는 따로 있습니다. 저 역시 따지고 보면 손님… 아니, 이젠 식객에 가깝군요.”
“여기에 오래 계셨나요?”
“아직 1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군요…”
예스티카는 말끝을 흐렸다.
그녀와 마주보고 앉아있는 자네인을 바라보며 그녀는 무슨 질문을 먼저 해야 할지, 열심히 고민했다.
조금 빙 돌려서 말해볼까, 싶기도 했지만 제일 궁금한 건 페르세이지에 대한 것이었다.
마음을 정하고 예스티카가 입을 열었다.
“페르세이지 님에 대해 묻고 싶어요. 여기서 어떻게 지내셨는지… 뭘 하고 지내셨는지…”
“여기서는 ‘바이스’라는 가명을 쓰고 계십니다. 본명을 밝히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고요. 본가와 의절하고 난 다음에 왕자님께 맨 먼저 본명과 정체를 알리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의절이요?!”
“네. 예스티카 님도 아시다시피 현 왕가와 카이엔 님의 관계가 좀, 복잡하니까요. 바이스 씨는 현 왕비님의 가문 출신이시니 카이엔 님께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거라고 여겨 의절을 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편지에는, 그런 말이 없었는데…”
“장남이 의절했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았겠죠.”
“그렇겠네요.”
고개를 숙이고 예스티카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페르세이지로서는, 가문과 의절까지 했는데 난데없이 약혼녀가 찾아오니 굉장히 난처했으리라.
역시 괜히 찾아왔던 걸까. 울적해진 그녀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예스티카 님은, 바이스 씨를 많이 좋아하시는군요.”
“…네.”
“옆에서 보고 있으면 유능하기도 하고 말도 잘 하고 검도 잘 쓰시고, 못하는 게 없으시긴 하죠. 하지만 가문까지 버리고 나와서 카이엔 님의 시종으로 있길 선택하셨어요. 그래서 예스티카 님을 더 밀어내려고 하시는 걸지도 모르고요.”
“제가 고집부리고 있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페르세이지 님을 포기할 수가 없어요.”
무릎 위에 올라가있던 손을 깍지껴 잡으면서 예스티카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계속 페르세이지만을 바라보고 그를 마음에 담고 있었던 건,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일의 탓이 컸다.
예스티카 벨라시는 어렸을 적부터 굉장한 미인이었기에 다가오는 사람이 많았다.
비슷한 위치에 있는 귀족 자제들은 또래들 중에서도 특출날 정도로 아름다운 예스티카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그 관심은 예스티카에겐 전혀 반갑지 않았다.
어떻게든 말을 붙여보려고 하고 장난을 치고 일부러 심술궃게 구는 등.
당시 그녀의 아버지인 벨라시 공작은 공작위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었고 점점 침체되어가는 가문의 힘을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기에 어린 공자들이 딸에게 관심을 갖는 걸 어린애들 사이에 흔히 있는 일인 줄 알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비록 정략결혼이긴 해도 페르세이지 님은 정말 저에게 친절하셨는걸요. 당시의 또래 남자아이들보다 훨씬 점잖고 예의바른 분이셨어요.”
그녀는 어린 시절 만났었던 페르세이지를 떠올렸다.
나이에 맞지 않게 점잖은 구석이 있는 소년이었다.
“정략결혼은 서로의 마음 없이 그저 두 가문의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손익계산의 결과잖아요. 행복한 경우보단 행복하지 않은 경우가 너무나도 많아서 그게 무서워요.”
그래서 그 상대만이라도 자신이 정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바뀌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페르세이지는 바뀌지 않을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다 내 얼굴만 보고 내가 좋은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게 잘 살 거라고 하는데,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따지면 왜 예쁜 평민 여성들이 미혼이든 기혼이든 귀족의 눈에 들면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억지로 첩으로 보내지거나 하는 일이 벌어지는 건가요?”
예쁘다고 다 행복해지는 것도 아닌데.
“예쁘니까 누구에게나 상냥해야 하고 친절해야 하고 거절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누구 좋으라고 그러란 건지 모르겠어요. 예쁜 것이 권력이라고 하는데, 그럼 저는 왜 저를 쳐다보는 음습하고 끈적한 시선들을 견뎌야 하는 거죠? 예쁜 것이 권력이라면 그런 자들은 감히 저를 쳐다도 보지 못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녀는 벨라시 공작가의 여식이었다. 그런 자신에게도 불쾌한 일은 굉장히 많이 일어났는데, 그보다 못한 직위를 가진 이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 일이 생길수록, 그런 일을 겪을수록 페르세이지가 떠올랐다.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도 겪은 고난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어렸을 적 페르세이지 바이올로스와의 약혼이 성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에서 찔러대는 일도 많았다.
공작의 딸인 그녀와 현 왕비의 뒷배인 바이올로스 후작가가 손을 잡았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건 페르세이지가 공식적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수록 심해졌다.
“페르세이지 님만은 그렇지 않았어요. 저와 약혼을 하시기 전에도요. 제 관심을 끌려고 머리를 잡아당기고 드레스의 리본을 뜯어버리던 남자애들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다리를 발로 차버리면서 쫓아내셨어요.”
눈을 감으니 저절로 그때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예쁜 곱슬머리를 리본으로 정돈해놓았는데 한 소년이 그 리본을 풀어버렸다.
돌려달라면서 그녀는 울면서 소년을 쫓아다녔고, 그녀를 놀리듯 도망치던 소년은 누군가에게 한 대 얻어맞고 풀밭에 넘어졌다.
바닥에 철푸덕 엎어진 소년을 기어이 한 번 더 걷어차버린 다음 페르세이지는 그녀에게 리본을 건네주었다.
“저한테, 다음에도 저런 녀석들이 꼬이면 망설이지 말고 뺨을 때리든지 발을 밟든지 걷어차버리라고 하시면서요. 창피한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않을 테고 그것을 모를 정도로 멍청하다면 독하다, 건방지다 따위의 소릴 하거나 ‘아름다운 장미에는 가시가 있다더니’ 따위의 소리를 지껄일 것이라고 하시면서요.”
“예스티카 님은, 바이스 씨만은 그런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시는군요.”
“네. 보셨잖아요. 제가 여기까지 와서 약혼 파기를 거둬주라고 하니 고개를 저으셨잖아요. 세상에는 행복하게 해준다, 라던가 나한테는 너밖에 없다, 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처럼 내뱉는 사람이 천지에 있는데.”
그녀에게는 언니가 한 명 있고, 그 언니가 다음 대 공작이 되어 아버지의 뒤를 이을 것이다.
허나 그녀가 둘째 딸이라고 해도 벨라시 공작에겐 충분히 둘째 딸의 사위 될 사람에게 물려줄 재산과 땅이 많았고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면 굉장히 많은 부와 권력을 쥘 수 있었다.
아직도 사방에서 날아드는 구혼서에 저택이 모닥불이 꺼질 일이 없었다.
그 구혼들을 멈출 수 있는 건, 그녀가 좋은 상대를 만나 바로 결혼하는 것 뿐이었다.
여전히 파티나 사교모임에 참석하면 그녀에게 날아드는 말들이 있었다.
언제 결혼을 할 것인지. 어떤 사람과 결혼하고 싶은지.
빨리 결혼하지 않으면 금세 다들 흥미를 잃을 거라고. 서둘러 결혼하지 않으면 그 미모도 시들 거라며.
아름답지 않은 여인은 가치가 없다며. 그러니 아름다울 때 얼른 누군가의 것이 되어야 한다며.
굉장히 불쾌한 말들이었다.
나는 나의 것인데, 내가 아름답든 그렇지 않든 그들이 신경쓸 바가 아닌데.
예스티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럴수록 떠오르는 건 페르세이지뿐이었다.
그가 그녀를 도와준 건 한 번이 아니었다.
귀족들이 참석하는 모임이 그게 그거였고 벨라시 공작과 바이올로스 후작이 관리하는 인맥이며 권력이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 그들은 꽤 자주 볼 수 있었다.
괴롭히고 장난치는 걸로 그녀의 관심을 끌려고 했던 또래 남자아이들에 비해 페르세이지는 굉장히 성숙했고 그녀를 괴롭히는 아이들을 모조리 때려눕혔다.
말 그대로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버렸다.
그녀의 머리를 잡아당긴 사람은 똑같이 머리를 잡아당겨 한움큼 뽑아버리질 않나, 머리장식이며 드레스를 잡아당긴 사람은 똑같이 넥타이며 옷을 잡아당겨 반쯤 찢어버리질 않나, 그녀를 억지로 끌고 가려는 사람은 발로 차버렸다.
그렇게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도 똑같이 해야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학습능력 없는 머저리들은 계속 똑같은 짓만 반복할 거 예요. 강하게 말해봤자 소용없을지도 모르니 이렇게 밟아놓는 게 최우선이지만.”
“어…”
“뭘 보고 배운 건지, 하는 짓들이 영… 벨라시 영애, 마음을 강하게 먹으세요. 웃으면서 계속 받아주면 더 기고만장해져서 기어오를 겁니다. 차라리 앞으로 이런 장소에 나오지 않는 것도 좋겠어요. 어른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느네 바빠서 애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르고 있으니 말이죠. 본다고 해도 관심이 있어서 그러는 거라며 대충 흘려넘기겠지만.”
…라고 말하고, 그는 바쁜 일이라도 있는지 금세 어딘가로 달려가버렸다.
예스티카는 그런 그를 졸졸 따라갔고 페르세이지가 또다른 사고현장에 뛰어들어 곤란에 처한 아이를 구해주는 걸 목격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페르세이지는 가만히 있는 게 좀이 쑤셔서 일부러 이곳저곳 다니면서 안좋은 상황에 처한 아이들을 도와준 걸지도 몰랐다.
바이올로스 후작가의 권세는 강력했고 또 좋은 의도로 주먹을 쓴 것이라면 후작은 분명 넘어가줬을 테니까.
“당신은 누구보다도 똑똑해져야 해요. 흑심 품고 접근해오는 사람들이 분명 많을 테니까요. 당신이 어리고 아름답다는 걸 충분히 이해하시고 느낌이 좀 안 좋다, 싶은 사람이 있으면 바로 피하세요.”
“어…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럼 직감부터 기르세요.”
그녀가 알아듣기엔 어려운 말들을 하는 그였지만 예스티카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른 이들과는 달랐던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 아버지인 벨라시 공작을 졸랐고 공작은 충분히 생각한 끝에 바이올로스 후작가에 그녀와 페르세이지의 약혼을 제안했다.
바이올로스 후작가에서도 흔쾌히 동의했기에 간략한 절차 하에 어린나이에 약혼식까지 했다.
그때 반지를 나눠가지면서 페르세이지는 이렇게 말했다.
“저를 내세우세요. 맘대로 이용하세요. 당신에게 예의없이 대하는 자들에게 강경하게 대처하고 당신의 그 모든 행동의 이유로 저를 입에 올리세요. 당신이 스스로의 의지와 판단으로 결정해 자신에게 반대하고 저항한다고 여긴다면 당신에게 분노할 이들은, 당신이 저를 내세우는 순간 놀랍게도 그 분노가 반쯤은 식을 테니까요. 비겁한 이들입니다. 예스티카 님, 당신이 왜 저를 약혼자로 지정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 악명을 높이는데 도움을 주세요.”
“악명을 내세워서 좋을 게 있나요?”
“착한 일 해서 만만하게 보이는 것보단 낫죠. 그간 별 일 없으셨습니까?”
“아… 네.”
“그게 정말이면 좋을 텐데. 어리고 아름다운 여성에겐 굉장히 많은 쓰레기들이 달라붙거든요. 제 여동생이야 강한 아이라 걱정이 없지만 예스티카 님은 여리신 분이니.”
그때는 이해하지 못 했던 말들은, 몇 년이 지나자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조차 알게 되었다.
초대며 권유를 거부하는 그녀를 욕하던 사람들은 그녀가 약혼자를 입에 담자 놀랍게도 잠잠해졌다.
‘그’ 바이올로스 후작가의 장남의 약혼녀를 괜히 더 건드렸다가 불이익을 받을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물론 그 이름값도 페르세이지가 잠적하는 시기가 길어질수록 힘을 잃어버렸지만, 그녀가 가장 어리고 약할 때 그녀를 지켜주기는 충분했다.
“그래서 페르세이지 님을 더 찾고 싶었어요. 저한테 그런 말을 해주신 건, 그 분 밖에 없었거든요.”
움츠려들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했다. 불쾌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똑바로 경고할 수 있게 힘을 보태주었다.
다른 이들이 그녀의 외모만을 보며 칭찬을 쏟아낼 때 그는 그녀의 생각과 의지에 주목했다.
손에 물집이 생기고 굳은 살이 박힌다며 다들 만류하던 검술 역시 페르세이지가 괜찮지 않냐고 운을 띄우며 설득을 도왔다.
오랫동안 검을 배우진 못 했지만 검술은 그녀가 다른 일들에 흥미를 갖게 해주었다.
“다른 곳에서 청혼을 받았어요. 거절하기가 애매해요. 가르간트의 사람도 아니고, 외국의 왕자요.”
“아….”
“외국이면 알지도 못하는 곳인데, 가고 싶지 않아요. 적어도 페르세이지 님의 곁에 있고 싶어요.”
예스티카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버지인 벨라시 공작은 그녀를 외국으로 보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구혼한 이의 나이도 문제였고 외국이란 점도 한몫했다. 허나, 외압이 지속된다면 견딜 수 없을 터.
예스티카는 거절의 명분을 위해 페르세이지를 찾고 싶었고 거절할 용기를 얻기위해 페르세이지를 만나고 싶었다.
또다시 울음을 터뜨린 그녀를 달래주며 자네인은 밤늦게까지 예스티카의 옆에 있어주었다.
“페르세이지 님이 보고 싶었어요.”
결혼에 대해서 깊게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그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페르세이지는 다른 사람들과 달라도 너무 달라서 가족과 절연까지 하고 제 정체마저 숨긴 뒤 이곳에서 지내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달라진 점이 없었다.
다시 만난 그는 여전히 강인했고 이해하기 힘든 감성을 지니고 있긴 했지만 그녀가 그리워하던 페르세이지가 맞았다.
“하지만 저에게 있어서 페르세이지 님이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였던 것에 비해 페르세이지 님에게 저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 비슷한 거였겠죠.”
공작가와의 정략 결혼은 가문의 힘에 보탬을 주었을 테니까.
허나 그것만으로도 좋다고 생각했다.
페르세이지는 그녀를 옆에 세워둔 채로 남들에게 자랑하거나 자신을 뽐내지 않는 사람이니까.
곁에 서있는 그녀를 배려하며 조금이라도 그녀가 관심을 가지는 것이 있다면 이것도 저것도 모조리 해보라며 안겨주던 사람이었다.
이런 저런 일들이 있었다면서 예스티카는 혼자서 꽁꽁 숨겨놓고 힘들 때마다 떠올렸던 추억을 하나 둘 입에 담았다.
자네인은 묵묵히 옆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어린 시절의 페르세이지는, 지금과 별로 다르지 않은 성격인 것 같긴 했지만 어째서 예스티카가 그를 그렇게 좋아한 건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바이스 씨는 왜 모른다고 했지?’
그때, 회의에서 바이스는 기억나는 게 없다고 잡아떼지 않았던가.
굉장히 수상했지만 가서 따지고들 수 없었다.
남녀 사이의 문제라면, 당사자들끼리 풀어야만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