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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왕자는 조용히 살고싶다-73화 (74/219)

73화

한편, 티아마티스는 자네인에게 예스티카 벨라시가 세자르에 방문할 것을 알려주었다.

더불어 그녀가 페르세이지 바이올로스의 약혼녀라는 것을 알려주니 자네인은 크게 놀라서 카이엔에게 달려가 바로 그 사실을 전했다.

카이엔의 옆에는 항상 바이스가 있으므로 그 역시 자연스럽게 그 소식을 접했는데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이스는 허탈해하며 웃더니 입을 열었다.

“하하. 이제와서 절 찾는군요.”

“너… 이야기 들어봐선 네가 잘못한 거잖아.”

“전 잘못한 거 없습니다. 흠, 그럼 저는 최선을 다해 망나니 역할을 하면 되는 걸까요?”

“시종이면서?”

“역시 무리가 있겠군요.”

바이스는 한번 해본 소리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있어서 예스티카 벨라시는 어쩌다보니 약혼하게 된 사이일 뿐이었다.

상대방이 그를 꽤 좋게 보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어렸을 적에 만났다면 지금보다 정신상태가 좀 더 정돈되지 못한 상태였을 텐데.

그 이야기를 카이엔에게 전하니 저절로 카이엔이 인상이 찌푸려졌다.

“네 입으로 네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고 하는 거야?”

“그땐 좀 더 절제란 걸 몰랐을 때라서요. 아마, 맘에 안드는 또래 애들은 죄다 패고 다녔을 겁니다.”

“허…”

“개중엔 어린 영애들을 괴롭히는 녀석들도 있었을 테니 다른 남자들에 비하면 멋있어 보였을 법도 합니다만.”

“너 진짜….”

“맞은 놈들이 항의하려고 해도 제 뒷배를 알곤 저절로 꼬리를 말았을 테니 뒷감당할 필요도 없고요. 기껏해야 어린애들 싸움이지 않습니까.”

활짝 웃는 얼굴에 카이엔은 고개를 돌렸다.

평화로운 두 사람의 대화와는 달리 자네인은 굉장히 염려하고 있었다.

자신이 바이스의 정체를 누설한 거나 마찬가지기에, 그녀는 고개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바이스 씨의 이야기를 흘려서…”

“아뇨. 티아마티스 님이시라면 제 정체 따윈 쉽게 알아내셨을겁니다. 벨라시 공작이 페르세이지 바이올로스의 추적을 의뢰했다면 마법을 써서라도 금방 찾았겠죠. 문제는 제 약혼자인데…”

잠시 고민에 잠긴 바이스는 말끝을 흐리더니만 좋은 생각이 났는지 즉시 입을 열었다.

“회의라도 열죠.”

“회의?”

“지난번에 왕자님 왕 안 되기 회의 같은 걸 열지 않았습니까? 비슷한 거로요.”

“…네가 약혼을 안 하기 위한 작전 회의같은 거?”

“네.”

“진심이야?”

“부족한 머리라도 모은다면 좋은 생각이 나지 않을까요?”

“당사자가 좋다면야… 못할 것도 없긴 하지.”

좋은 생각이 떠오르진 않을 것 같은데.

하지만 바이스가 괜찮다고 했으니 모두를 불러모으기로 하고 카이엔은 자네인에게 부탁해 별채의 식구들을 모두 회의실로 모이게 했다.

이번 회의에서는 벽에 현수막을 걸지 않고 회의실 안에 옹기종기 모여서 이야기만 나누기로 했다.

하나둘 의자가 채워지기 시작했고 모두 모이자 상석에 앉은 카이엔이 두 번 책상을 치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해서, 바이스의 약혼녀가 여기로 오게 되었다. 바이스는 약혼하기 싫다는데, 잘 거절 방법이 있는지 이야기해보자.”

“큰일이네.”

“것보다 바이스 씨, 파혼한 거 아니었어요?”

“일단 최선을 다해 망나니 연기라도 할 생각입니다.”

“진지하게 말하시니까 거짓말도 아닌 것 같네요.”

“너무 막나간다.”

그리델라가 웃으면서 턱을 괴었다.

뜬금없이 나온 바이스의 약혼자란 주제에 다들 곰곰히 생각하는 듯 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글러티나였다.

“네가 좋게 말해서 돌려보내. 그게 제일 나아.”

뱀파이어 가문의 당주답게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팔짱을 낀 채로 그녀는 바이스가 너무 책임감이 없었다면서 꾸짖었고 다들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과 연을 끊으셨다면서 약혼녀가 오다니… 잘 끊어진 거 맞죠…?”

엔베인은 걱정했다.

다크 엘프 사회에서도 절연은 종종 있는 일인건지 그는 바이스가 아버지인 후작에게 가서 대놓고 선을 긋고 왔다는 말을 듣고 굉장히 기겁을 했었다.

다들 염려하거나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는데 그 중 한 명은 예외였다.

”아하하하! 바보! 바보-!”

슬로세이는 열심히 바이스를 놀려댔다.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면서 크게 웃고 있는 슬로세이를 보며 바이스는 슬그머니 회의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주전부리 바구니에 손을 댔다.

그러더니 포도알을 하나 따서 슬로세이를 향해 던졌다.

딱!

분명 물렁한 포도알일 텐데 슬로세이는 바이스가 손가락을 튕겨 던진 포도알에 이마를 맞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딱?’

‘포도를 던졌는데?’

‘저런 소리가 나올 수 있는 건가?’

슬로세이가 웃는 소리 말고는 들리지 않았던 회의실이었기에, 모두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단숨에 분위기가 싸해지니 카이엔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하아… 역시 진전이 없어.”

“회의는 이제 시작인 걸요?”

“너, 나한테만 피해 안 가게 해라.”

“있는 힘껏 폐 끼칠 테니 알아두십시오.”

“너 진짜…”

“왕자님과 저는 한 배를 탄 몸이니 저 혼자 망할 수는 없습니다.”

“보통 그럴 땐 ‘제 몫까지 살아주세요’라면서 혼자 죽지 않나?”

“아뇨. 저 없이 왕자님이 혼자서 잘 사실 리 없지않습니까. 그러니 죽을 땐 같이 죽는 겁니다.”

“살벌한 소릴….”

질색을 하며 카이엔은 몸을 떨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놈이 말한 건 진실임이 분명했다.

이러다가 자기가 죽을 때 같이 죽어야 한다며 무덤까지 끌고가는 건 아닐까? 독한 놈이니 충분히 그럴만도 하다며 카이엔은 인상을 썼다.

“그… 일단, 예스티카 님이 여기 오는 건 확정된 사항입니다.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것 밖에 답이 없어요.”

살짝 손을 들며 자네인이 말했다.

이미 오기로 한 사람을 도중에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예스티카가 세자르에 도착해서 바이스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며 결판을 낼 수 밖에 없었다.

생각만해도 피곤한지 카이엔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티아마티스 님의 전언도 있지만 저도 힘껏 예스티카 님의 고집을 꺾는데 보탬이 되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바이스 넌 어쩔래?”

“과거의 첫사랑이 퇴물이 다 된 왕자 옆에서 시종노릇 하고 있는 걸 보면 있는 정도 떨어지지 않을까요?”

“야!”

“비유입니다, 비유.”

카이엔이 신경질을 냈지만 바이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겼다.

“아마, 얼굴을 잊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굉장히 어렸을 때 만났을 뿐이니까요. 제가 왕자님을 찾아오기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저를 못 알아본다면 제가 미리 알아차리고 도망쳤다고 미리 입을 맞춰두도록 하죠.”

“널 알아보면?”

“그럼 제대로 이야기를 하는 수 밖에 없죠.”

“도망치는 건 해답이 될 수 없어요.”

“맞아. 게다가 너를 보러 여기까지 온다면서? 제대로 대답해줘야지.”

“바이스 씨는 겉모습만 봐선 도저히 시종 위치에 있을 법한 사람이 아니니까요. 영주성 일에 끼치는 영향력을 보면 집사급 아니예요?”

“왕자님이 세자르를 물려받게 된다면 저도 집사로 직위상승할 예정입니다.”

“…난 못 들었는데.”

“남작님은 허가하셨습니다.”

“하…”

“나중에 알려드리려고 했는데 싱겁게 끝났군요. 깜짝 놀라게 해드리려고 했는데.”

“몰라, 네 맘대로 해라. 난 신경쓰고 싶지 않다.”

앓는 소리를 내며 카이엔은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그에게 온 수많은 구혼편지를 뒷일 감당은 생각도 안하고, 제 일 아니라며 싸그리 모닥불 땔감으로 집어넣은 녀석이 자기 약혼녀 때문에 곤란해하는 걸 보니 조금 쌤통이긴 했지만 바이스가 잘못되면 그도 같이 잘못될 게 아닌가? 마냥 기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도대체 이놈의 어디가 좋다고…’

거의 십 년이나 지났는데 바이스를 못 잊어서 몸소 세자르까지 찾아온다는 공작 영애가 궁금해졌다.

사랑하면 서로 닮는다는데, 설마 바이스랑 성격이 똑같은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몸이 으슬으슬 떨리기 시작했다.

‘설마. 아니겠지.’

세상에 바이스 같은 사람이 둘이나 있다는 건 재앙이다.

그가 질색하는 얼굴을 보고 바이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아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만.”

“진짜 아무것도 아냐.”

좀 더 생각해보니 바이스는 약혼녀에게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약혼녀는 바이스같은 사람이 아닐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좀 더 편해졌다.

혼자 걱정했다가 혼자 안심하는 카이엔을 바라보며 바이스는 의아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혼자 이상한 고민하지 마시고 바로 털어놓으세요. 어차피 별거 아닐 테지만요.”

“내가 왜 쓸데없는 고민만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지금까지 제가 봐온 왕자님은 그랬으니까요.”

“그냥, 그 사람이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너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궁금해서 그런 거야.”

“저도 잘 기억 안 납니다만.”

“우와, 바이스 씨 되게 나쁜 사람이다. 그래도 무슨 이유가 있어서 약혼했을 거 아냐?”

그리델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다들 그녀의 말에 동의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보기 드문 타입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지.”

“아, 그런 거라면 이해는 가는데.”

“바이스 씨 성격이 좀 개성 있잖아요. 저희 가게에서도 좀 컨셉 잡고 연기하는 애들이 인기가 많더라구요. 물론 본인들은 퇴근하고 부끄러워 죽으려고 하지만.”

“그치만 계속 일하는 거지?”

“네. 그래야 직원들 월급 주죠. 유행하는 로맨스 소설 남자 주인공을 보면서 캐릭터 연습도 해요. 제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제일 인기있던 게 불사의 인외 미남 타입이었어요.”

“그건 대체 뭐야?”

“그러니까… 저 하늘 위에서 그대를 보고 사랑에 빠져 그 벌로 추락한 천사, 뭐 그런 거요?”

비셰의 설명에 모두의 표정이 괴상해졌다.

“다들 연극 배우가 맡은 배역을 좋아한다, 라는 느낌이기도 하지만요. 여성분들 공략을 위한 자체 연극이나 공연같은 것도 꽤 많이 하니까요.”

“왠지 나 저번에 페이리가 읽는 책에서 그런 내용 본 것 같은데.”

“너도 그런가? 나돈데.”

“아. 그거 맞을 걸요? 저도 봤는데 그거 맞을 거예요. 거기 재밌는거 많아요. 고증은 별로지만.”

“다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왕자님은 모르셔도 될 이야깁니다.”

“어, 그래.”

페이리는 유독 그에겐 무슨 책을 읽는지 숨기려고 했다.

영주성의 돈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확인하고 중간에 새는 돈이 없나 확인하는 것도 영주가 하는 일이니 그도 어느 정돈 알고 있었지만.

본인이 숨기려는데 굳이 들춰내고 싶진 않았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바이스, 너 진짜 어떻게 할 거야?”

“왕자님에게 모범이 되어야 하는 입장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정말 죄송스럽지만, 미래의 제게 맡기고 싶습니다.”

“세상에 바이스 씨가 저런 말을 하다니.”

“진짜 약혼자가 어떤 사람인지 기억 안 나요?”

“정략결혼이었으니 제게 그리 중요한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전 왕자님이 세자르로 갔다는 말을 듣고 일년 좀 넘게 완벽한 시종이 되기 위해 수련하느라 바빴거든요.”

“그래도 그 전엔 많이 만나지 않으셨나요?”

“그리 자주 만나진 않았습니다.”

“바이스 씨가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리지 않은 이상, 겨우 10년 전에 만난 사람을 잊었을 리가 없잖아요.”

“나이 들어서 까먹었을 수도 있지!”

포도알에 맞은 충격에서 벗어난 슬로세이가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이마가 빨갛게 부어오른게 꽤 아파보였다. 잘 보니 딱 포도알 크기로 동그랗게 혹이 났다.

맞은 편 자리의 엔베인은 그 모습을 보고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웃음을 참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에 옆에 앉은 라스가 어깨를 토닥였다.

그제야 바이스는 입을 열었다.

“예스티카 님은… 미인이었죠.”

“엥?”

“왜 과거형이에요?”

“그야 시간이 얼마나 오래 지났는데요. 그 모습 그대로 자라지 않았을 수도 있죠.”

“그것말고는요?”

“여러분이 기대할만한 일은 없었습니다. 약혼한 사이가 되어서 이런저런 행사에 같이 참석하거나 무도회 파트너가 된 일 정도뿐이고요.”

“남 연애 이야기 듣는 게 얼마나 재밌는데!”

“연애 아닙니다.”

그리델라가 책상을 치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바이스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바이스가 곤란한 일에 처할 리가 없으니 이번 일은 모두에게 굉장히 의외였다.

놀릴 수 있을 때 놀리자! 지금이 아니면 언제 이렇게 말하겠는가!

묘한 의욕에 불타는 사람도 몇 명 있었다.

‘저러다 나중에 혼나지.’

카이엔은 턱을 괸 채로 바이스를 바라보았다.

이 녀석이 이런 일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는 없고, 피할 수 없으니 즐기기라도 하려는 건가 싶었다.

“할 말 없으면 해산할까?”

“네.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바이스 씨 더 해줄 말은 없어요?”

“없습니다. 그러니 예스티카 님이 오면 직접 확인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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