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편지 한 장을 앞에 두고 바이올로스 후작, 가르실 바이올로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몇 백통은 받아온 편지였지만 여전히 가슴이 무거워졌다.
그 탓인즉슨, 맏아들인 페르세이지의 부재 때문이었다.
폐세자가 세자르로 가니 자기도 옆에서 관찰하고 자기가 이용할 수 있게 만든다던 놈은 폐세자인 어린 왕자에게 홀랑 넘어가서 최근에는 의절을 선언하고 가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덕분에 그에게 남은 건 페르세이지가 저지르고 간 일들의 뒷정리였다.
“…이걸 어쩌면 좋을까.”
그중 하나가, 바로 약혼이었다.
어릴 적에나 갑자기 병에 걸려서 못 만난다고 거절의 편지를 쓰고 설득도 했지만 페르세이지의 약혼녀인 영애는 아직도 그놈을 포기하지 못했다.
얼굴과 인성이 반비례하는 아들놈을 떠올리다가 후작은 겨우 펜을 들어 답장을 썼다.
이번 답장은, 이전에 보낸 편지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빠르게 편지를 마무리지은 바이올로스 후작은 곧바로 편지를 부쳤다.
남은건 편지를 받을 당사자이자 페르세이지의 약혼녀인 예스티카 벨라시와 그녀의 아버지인 벨라시 공작에게 사과와 함께 약혼을 파기한 것에 대한 위로금을 지불하는 것뿐이었다.
“흐어어엉-!”
편지를 받아 그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예스티카 벨라시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가까스로 성사시킨 약혼이었건만 몇 번 만나지도 못 하고 약혼자가 중병에 걸려서 드러누웠다는 소식만 주구창창 들었다.
만나고 싶다고 몇십 번 몇백 번을 요청해도 돌아오는 건 거절뿐이었다
.
지금쯤이면 낫지 않았을까,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하루가 멀다하고 쓴 편지를 모은다면 방 하나를 꽉 채울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약혼자에게 진심인 그녀였지만, 이번에 온 답장은 그 약혼을 파기해야겠다는 내용이었다.
“페르세이지 님…!”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면서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던 그녀는 소매로 대충 얼굴을 문지르고 아버지인 벨라시 공작을 찾아갔다.
약혼 파기라는 중대한 사항을 그녀에게만 전달했을 리 없었다.
분명히, 아버지에게도 편지가 왔을 거라고 생각해 찾아가니 굳은 표정의 벨라시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둘째 딸인 예스티카에게 자신이 받은 편지를 보여주었다.
“약혼을 파기해주라고 하는구나. 정말로 미안하지만 페르세이지에게 가망이 없으니 포기해주라는데…”
“그럴리가 없잖아요! 페르세이지 님이 곧 돌아가신다는 거예요?”
“아니 그런 말은 없는데…”
“예전부터 앓아 누우셨다는 분인데 죽는 게 아니면 뭐라는 건가요?”
딸의 말에 벨라시 공작은 입을 다물었다.
처음부터 예스티카가 졸라대서 성사한 약혼이니 딸아이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 역시 바이올로스 후작이 어느 순간부터 제 아들 이야기를 하지 않고 만나고 싶다는 요청도 거절하니 무언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맏아들이 중병에 걸렸다는 바이올로스 후작의 말을 믿지 않았다.
‘모르는 척 결혼시킬 수도 있었을 텐데 대체 왜?’
그 역시 이제와서 약혼을 파기해주라는 요청과 함께 위로금을 지불하겠다는 제안이 의아하긴 마찬가지였다.
바이올로스 후작을 아무리 건드려봐도 그는 페르세이지에 대해선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게다가,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둘째 딸이 저렇게 펑펑 울고 있으니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는 몸을 일으켰다.
“페르세이지에 대한 건… 내가 알아보겠다.”
“예전부터 알아보셨는데 아무것도 없었잖아요!”
“흠흠, 아무튼… 내 이번에는 믿을만한 분이 있으니 그분께 도움을 요청할 거야.”
“흑… 그런 분이 계시는 거예요? 그런데 왜 이제와서…”
“하, 함부로 부탁드릴 수 없으니 그렇지! 넌 그놈이 그렇게 좋냐? 그 긴 시간 동안 어떻게 변했는지도 모르는데!”
“몰라요. 그러니까 다시 보고 싶다는 거예요. 전 절대 파혼 못 해요!”
바이올로스 후작이 위로금으로 지불하겠다는 금액은 어마어마했다.
그도 그럴 것이, 둘째 딸이라고 해도 공작가의 영애다. 그런 영애를 거의 십 년 동안 애가 타게 만들어놓았으니 이 정도 금액쯤은 지불해야 마땅했다.
허나 예스티카는 절대로 파혼할 수 없다며 계속 울고 있으니 아버지인 공작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어쩔 수 없다면서 그 혼자 결정을 내린다면 분명히 예스티카는 혼자서라도 바이올로스 후작가로 찾아가 그 집 대문을 두드리면서 페르세이지를 보여주라며 대소동을 벌일지도 몰랐다.
일단 예스티카를 잘 달래 방으로 돌려보낸 뒤 그는 책상 앞에 앉았다.
이런 부탁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혀를 차면서 그는 그나마 친분있는 다른 귀족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
“그래서, 도와달라고?”
“…네.”
고개를 푹 숙이고 벨라시 공작이 힘없이 대답했다.
그동안 어찌나 둘째 딸에게 시달린 건지, 안색이 좋지 못했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젊은 남성은 쯧하고 혀를 차더니만 다리를 꼬았다.
겉모습만 봐선 벨라시 공작이 맞은편의 청년에게 경어를 쓸 이유가 전혀 없었다.
허나 벨라시 공작은 깍듯이 청년을 대했고 그의 편지를 받고 벨라시 공작가로 몸소 찾아온 티아마티스… 에빌라이 공작인 아티카 듀란 에빌라이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 소리에 벨라시 공작이 움찔 몸을 떨었다.
“더 좋은 남자 찾아줘.”
“그, 그게 됐다면 제가 도와주란 말을 안 꺼냈을 겁니다!”
“아니 그놈이 대체 뭐가 좋아서 저런데?”
“모르겠습니다….”
이번엔 벨라시 공작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 역시 예스티카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그 역시 어린시절의 페르세이지를 기억하고 있기에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의젓하고 잘생겼던 소년을 알고 있었다. 허나 그로부터 십 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였다.
열 살 쯤 됐던 꼬맹이도 지금은 스물이 훌쩍 넘었다.
그간 약혼자만 바라보면서 결혼하지 않은 예스티카도 결혼 적령기에 다다른지 오래였다. 물론 벨라시 공작가의 위상을 생각하면 약혼자 따위에 금방 새로 구할 수 있었다.
지금도 끊임없이 아름다운 예스티카를 보고 첫눈에 반해 구애하는 남자들이 줄지어 있었으니까.
그러나 예스티카는 오직 페르세이지만을 바라보고 있어서 다른 남자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세상 온갖 시름이란 시름은 다 짊어진 것만 같은 벨라시 공작을 보고 에빌라이 공작이 입을 열었다.
“나라면 페르세이지 바이올로스 그놈이 어떤 상태인지 알 것 같아서 도와주라고 한 거랬지?”
“네. 당신이라면 아시지 않습니까.”
아들뻘로 보이는 청년에게 벨라시 공작이 깍듯이 대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아티카 듀란 에빌라이가 인간이 아니라 정체를 감춘 드래곤이란 걸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인간 중 한 명이었다.
제발 좀 도와주라며 안쓰러운 눈빛을 보내는 그를 보며 에빌라이 공작은 혀를 찼다.
“그때같은 꼬맹이였다면 통했을 눈빛이군.”
“큽…”
“늙은게 죄는 아니지. 그리고, 네 생각대로 난 그놈이 어디서 뭘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그, 그럼…!”
“도와주지. 다만, 정보의 출저가 나라는 것을 철저히 숨기고 페르세이지 바이올로스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다른 이들이 알아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철저히 입단속 하겠습니다.”
“그래.”
벨라시 공작이 단단히 약속하자 에빌라이 공작은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역시 카이엔의 옆에 서있는 시종, 바이스가 페르세이지였다는 걸 첫눈에 알아보진 못했지만 카이엔에게 정체를 밝힌 뒤 바이스가 제 입으로 자기 신분을 다른 이들에게 말해줬기에 자네인이 알게되었고, 그녀가 그에게 알려줘서 전달된 정보였다.
늘상 여유있던 놈이 오래 전에 알고 지냈던 약혼녀가 들이닥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재밌을 것 같다며 그는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으음….”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들은 벨라시 공작은 굉장히 미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폐세자에 대한 건 그도 알고있었다. 페르세이지가 가명을 쓰고 그 왕자의 곁에 있다? 무슨 생각인 건지 도통 짐작할 수가 없었다.
에빌라이 공작이 해준 말이니 거짓은 아니겠지만 걸리는 부분이 아예 없진 않아서 그는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위험하진 않을까요?”
“그곳은 안전해. 나도 저번에 한 번 다녀와봤다.”
“네?”
“거기 내 수족이 있으니 부탁하면 되겠군.”
“감사합니다.”
벨라시 공작은 바로 고개를 숙였다.
정보를 알려준 걸로도 모자라 수족에게 부탁까지 해준다니. 상상도 못한 배려였다.
덕분에 검은 숲을 옆에 두고 있는 세자르라는 살짝 위험한 곳에 귀한 딸을 보낼 용기가 생겼다.
예스티카도 폐세자인 왕자의 시종으로 있는 페르세이지를 본다면 생각이 바뀔지도 몰랐다. 바뀐다면 좋고 안 바뀐다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왕자의 시종이 아무나 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카이엔은 권력을 잃은 왕자니까.
결단을 내렸으니 즉시 세자르로 향할 준비를 하겠다며 벨라시 공작은 몸을 일으켰다. 그가 움직이자 에빌라이 공작 역시 일어섰다.
“다음부턴 쓸데 없는 일에 부르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말을 마치고 에빌라이 공작은 스르륵 모습을 감췄다.
마치 처음부터 이 자리에 없었던 것마냥, 사라져버린 그를 보며 벨라시 공작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 역시 어느 정도 마법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드래곤 앞에선 애들 장난 수준에 불과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참.”
귀한 둘째 딸을 먼 곳까지 보내야 하니 준비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호위기사로 기사단 하나를 떼어서 보내주고 시중들 시녀며 잡일을 도맡아 할 하인이며 짐이며 챙겨야할게 너무 많아서 벨라시 공작은 부랴부랴 움직였다.
파혼하자는 편지 한 통 받고 금방이라도 앓아눕기 직전인 예스티카를 생각하면 일분일초가 아까웠다.
귀한 딸을 여행보낼 준비를 하면서 벨라시 공작은 조용히 예스티카를 불러서 에빌라이 공작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현재 페르세이지는 가명을 쓰고 제 정체를 숨긴 채 과거 힘을 잃고 쫓겨나다시피한 왕자의 곁에 있고, 그의 시종으로 있다고 말했다.
그 이야기에 예스티카는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
“페르세이지 님이요?”
“…그래. 아마 그래서 바이올로스 후작이 어떻게든 숨기려고 한 모양이더구나. 하아- 이 사실이 더 퍼지지않게 조심해야 하지만 너한테는 말해줘야 할 것 같아서 이야기해주는거다.”
“네. 그럼 페르세이지 님은 애초부터 후작가에 없으셨던 거군요…”
“아마 그렇지 않을까? 다행히 내가 아시는 분이 그곳에 있는 사람에게 미리 이야기를 해놓으신다고 하셨으니 거기서 지내는데에는 별 문제 없을 거다.”
“네.”
예스티카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소식조차 알 수 없었던 약혼자에 대한 걸 금방 알아내온 아버지가 고맙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진작에 알려줬다면 좋았을 것을, 약혼이 파기되게 생겼으니 알아오다니!
허나 원망의 말을 내뱉지 않고 예스티카는 무릎 위에 올려진 두 손을 꼭 쥐었다.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약혼자가 과연 어떻게 성장했을지, 기대되서 저절로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그간 상상해왔던 모습만큼 멋지지 않을까? 페르세이지라면 분명히 아주 멋진 사내로 성장했을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