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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왕자는 조용히 살고싶다-70화 (71/219)

70화

“왕자님. 이 땅을 받아주실 수 있으십니까?”

“…뜬금없이 무슨 말이야?”

함께 점심을 먹던 중 세자르 남작이 꺼낸 말에 카이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반응에 남작은 허허 웃으며 말했다.

“짐작했던 반응이 그대로 돌아오는 군요. 저는 왕자님께서 이곳을 잘 보살펴주시면 좋겠습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몸이 많이 힘들군요. 불경한 말이란 거 압니다. 허나, 저는 왕자님께서 이곳을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몸이 아프면 얼른 낫기나 해. 자식들은 뭘하길래 코빼기도 안 비치는 거야? 내가 있어서 그런가?”

“왕자님이 계시지 않을 적부터 집에는 잘 오지 않는 녀석들이었습니다.”

“그럼 다행이긴 한데…”

카이엔은 포크를 내려놓고 남작을 빤히 쳐다보았다.

확실히, 많이 늙긴 했다.

그를 맡아 기르기로 하겠다고 나섰을 때부터 거의 할아버지 뻘이었던 남작은 십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니 그 시절보다 훨씬 주름도 많아졌고 건강도 나빠졌다.

허나 아직은 영주직에서 물러날 정도는 아니었다.

앞으로 십 년은 더 활동할 수 있지 않나? 카이엔이 그런 말을 하자 남작은 웃기만 했다.

“정말 그러면 좋겠군요. 왕자님이 제대로 자리를 잡고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바로 영주 자리를 맡아달라고 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대리 역할쯤은 왕자님도 충분히 해내실 수 있을 겁니다.”

“…유산 같은 건, 자식들에게 줘야지.”

“아뇨. 이 땅이 싫다고 나간 놈들이니 절대 안 받을 겁니다.”

확실하다며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찜찜한 점심 식사를 마친 뒤, 카이엔은 방으로 돌아가 생각에 잠겼다.

남작이 장난삼아 그런 말을 꺼낸 게 아닐 거다.

정말로 그에게 이 세자르를 맡기고 싶어서 그를 떠보기 위해 일부러 말했을 게 뻔하다.

짐작가는 일들이 있어서 카이엔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나한테 검은 숲에 관한 자료나 영지 관련 서류를 읽게 한게 다 이것 때문이었던 건가?’

살고 있는 이 땅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보는 게 어떠냐면서 권하던 것들이 있었다.

남작이 이전부터 그리고 있었을 큰 그림에 카이엔은 혀를 찼다.

“…넌 어떻게 생각해?”

“뭘 말입니까?”

“옆에서 들었잖아.”

“왕자님이 세자르를 다스리는 것 말입니까? 배우시려면 일찍부터 배우시는 게 좋죠. 남작님이 건강하실 때 옆에서 차근차근 배워둬야 도움이 될 겁니다.”

“너 진짜…”

“하시기 싫다고요? 하셔야 할 텐데요.”

“왜?”

“그야, 이제와서 남작님의 자식들이 찾아와 이 땅을 차지하게 된다면 왕자님은 갈 곳이 없어지게 되십니다. 그렇게 된다면 꼼짝없이 왕성으로 가서 열 살은 어린 공주랑 결혼해야 할 테고요.”

“그건 싫은데…”

“그럼 하십시오.”

자기 일 아니라며 쉽게 말하는 바이스를 보며 카이엔은 짜증을 냈지만 바이스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려 뭐가 문제냐는 듯 카이엔에게 되물었다.

“남작님은 돌아가신 뒤의 왕자님을 걱정하셔서 그런 말을 꺼내신 겁니다. 장성한 아들들은 이 위험한 땅으로 돌아오려고 하지 않을 테고 그 중 한 명을 데려오려고 후계자 문제로 골머리 썩기보단, 가까이 있는 믿을만한 왕자님께 맡기려는 거죠. 그분이 이곳을 얼마나 아끼는지는 왕자님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나도 알아. 하지만 나는…”

“이곳 사람들 모두 남작님의 뜻을 존중할 겁니다. 왕자님을 도울 거고요. 저도 당신의 곁에 있지 않습니까.”

“…모르겠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일이야.”

“남작님의 건강이 나빠지고 있다는 건 사실입니다. 그분은 충분히 늙으셨어요. 어디 한 군데가 고장날만도 합니다.”

바이스의 말에 카이엔은 듣기 싫다는 듯 손을 저었다.

“그만. 다음에 이야기하자.”

“피하시는 겁니까?”

“나도 대충은 알아. 하지만 생각하고 싶지 않아.”

“…알겠습니다.”

얌전히 바이스는 고개 숙여 인사하고 방에서 나갔다.

허나 방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는 한숨을 쉬었다.

카이엔의 성향은 그 역시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작도 조심스럽게 이야기했을 텐데 반응이 저랬다.

아무래도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면서 그는 바로 세자르 남작을 찾아가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역시나, 남작도 시름이 깊어졌다.

“내가 죽기 전에 왕자님께 이곳을 물려드릴 모든 준비를 해야 할 텐데…”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바이스 군이 도와준다고 해도 말이지…”

“왕자님 성격상, 좀 더 시간을 들여야겠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쿨럭, 쿨럭.”

말하다가 말고 남작은 마른 기침을 했다.

최근들어 건강이 나빠진 건 사실이었다. 카이엔이 나트폰트라 변경백령의 역병에서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떠나기 전부터, 그는 약한 감기를 앓고 있었다.

허나 시간이 지나도 잘 낫지 않았고 나이든 몸은 전혀 낫지 않는 감기가 폐렴으로 진화되자 더욱 악화되었다.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한참 동안 기침을 하던 남작이 손수건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조만간 요양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네. 맡겨주십시오.”

“집사도 도와줄 테니까… 문제는 없겠지.”

푸념을 늘어놓으면서 남작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카이엔보다 먼저 바이스에게 그의 건강을 알리면서 카이엔에게 이 땅을 주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바이스는 놀란 기색 하나 없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인물인지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참 대단하다며 그는 혀를 내둘렀다.

이틀 뒤, 남작은 다시 한 번 카이엔에게 그 이야기를 꺼냈다. 건강 상태가 나빠져서 당분간 요양을 하겠다고 말하니 카이엔은 슬그머니 남작의 시선을 피했다.

“…언제부터 나빠진 건데?”

“꽤 됐습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제가 숨긴 거죠. 왕자님이 공연히 신경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금방 나을 거라고 생각했고요.”

“미안하다.”

남작의 건강이 나빠진걸 눈치채지 못한 것에, 카이엔은 사과했다.

그 모습에 남작은 웃을 뿐이었다.

“그럼, 제가 요양하는 동안 세자르를 돌봐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정도는 해야지. 내가 잘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집사와 바이스 군도 도와줄 겁니다.”

“바이스 이 녀석…”

남작을 노려볼 수는 없기에 카이엔은 그의 뒤에 서있는 바이스를 째려보았다. 물론 바이스는 웃기만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할 텐데, 솔직히 자신은 없어.”

“언제든지 조언을 해드리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남작이 대답했다.

그렇게, 세자르 남작이 잠시 일에서 손을 떼고 요양을 시작했고 카이엔이 영주 대리로서 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전에 심심치않게 봐왔던 서류들을 살피는 그의 옆에는 영주성의 집사와 바이스가 서서 그의 업무를 도왔다. 카이엔이 백수에서 벗어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에 몰두하게 된 것이었다.

검은 숲을 옆에 둬서인지, 업무량은 상당히 많았다. 검은 숲에 관련된 자료만 해도 수북히 쌓여있어서 카이엔은 두통이 밀려와 이마를 짚었다.

다행히 옆에서 집사와 바이스가 도와준 덕분에 어렵진 않았지만 익숙치 않은 지식들을 머릿속에 쑤셔넣는 것이 곤욕이었다.

“…진작부터 일 좀 도울걸.”

“하하. 그러십니까?”

“웃지 마라.”

“왕자님이 영지 일에 간섭했다면 주변에서 눈치를 줬겠죠.”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카이엔은 빼곡히 적혀있는 금전 관련 서류를 읽었다.

이런 서류에는 단위로 장난질을 치기 마련이라 꼼꼼하게 살펴야만 했다.

‘0이 몇 개냐…’

한숨을 푹푹 쉬면서도 카이엔은 못 하겠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힘들다고는 버릇처럼 말했지만 서류를 내던지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영주성의 집사는 안도했다.

그 역시 오래 전부터 카이엔을 봐왔지만 남작의 제안은 너무 뜬금없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변변찮은 일 하나 하지 않았던 카이엔에게 영주 대리로 일하라는 건, 어린아이한테 유명한 학자의 수업을 들으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여겼으니까.

이 속도라면 남작이 건강을 회복한 뒤에도 카이엔이 대신 일할 수 있겠다며 그는 만족스러워했다.

그리고 카이엔은, 불현듯이 등골을 스치고 지나간 싸늘함에 몸을 떨었다.

***

“왕자님, 바빠?”

그가 영주 대리로 일하기 시작하니 자유 시간이 부쩍 줄었다.

산책하러 나오는 시간이 줄어드니 하루에 많으면 네다섯 번은 마주치던 슬로세이와도 한 번 마주칠까 말까 했다.

들은게 있을 텐데도 슬로세이는 모르는 척 물었고 카이엔은 이렇게 대답했다.

“응. 바빠.”

“어른은 힘들겠네.”

“그렇지.”

“우리 아빠는 별로 안 힘든 것 같던데.”

“네 아버지는 인어왕이잖아. 힘드실 거야.”

아마 일하다가도 막내딸인 슬로세이가 걱정되어서 한숨을 푹 쉬지 않을까?

허나 철없는 막내인 슬로세이는 그렇지 않다면서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 아빠는 안 바쁘니까 나중에 왕이 되는 사람도 한가할 거야.”

“아닐걸.”

“아직 언니들도 결혼 안 했구 누가 왕이 되려나?”

“인어들은 그런걸 미리 안 정해놓는 거야?”

“내가 알기론 없어.”

그럼 슬로세이만 모르는 걸지도.

잠시 머리를 식히러 산책을 나온 카이엔이 금방 돌아갈 것을 알기에 슬로세이는 열심히 그의 옆에서 재잘거렸다.

“왕자님, 저번에 바다 갔을 때 어땠어?”

“바다? 음, 신기하더라.”

“헤헤.”

“책에서만 봤던 말미잘이 정말로 릴리시아를 닮았었지.”

“감상은 고작 그것 뿐이야?”

슬로세이가 눈에 힘을 주며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정말 그런 걸 어쩌란 말인가.

산호며 물고기, 해초도 신기했지만 그는 말미잘이 제일 신기했다.

육지에서만 사는 알라우네인 릴리시아가 왜 말미잘처럼 자랐는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가 당황해서 대꾸를 하지 못하니 슬로세이는 홱 고개를 돌리더니 다 들리도록 큰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아아~ 바다에서 살면 골치 아픈 일도 없을 테고 놀 시간도 많을 텐데-”

“집에 가고싶으면 다녀와도 돼.”

“아냐!”

그럼 왜 그의 앞에서 뜬금없이 바다 이야기를 한다는 말인가.

카이엔은 멀뚱히 슬로세이를 바라보았고 그때, 뒤에서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아하하하! 왕자님, 여기서 뭐해?”

“그리델라?”

“왠지 재밌어보여서 와봤어! 그런데 요즘 바쁘다면서? 이렇게 여유 부리고 있어도 돼?”

“한 바퀴만 돌고 돌아가기로 했어. 바이스도 허락했고.”

“바이스 씨가 허락한 휴식이야? 정말, 왕자님은 이러다가 결혼도 바이스 씨가 정해주는 사람이랑 하겠다!”

“그건 좀 심하지 않아?”

“그치마안-”

정말 그럴 것 같다면서 그리델라는 재밌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야기를 하려면 앞이나 적어도 옆으로 와주면 좋을 텐데. 뒤에서 끌어안은 채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리델라가 그에게 달라붙자 경쟁심이라도 생긴 건지 슬로세이도 그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저기, 나 무거운데…”

“거짓말! 난 하나도 안 무거워!”

“아니 진짜 무거운데.”

뚱한 얼굴로 카이엔은 대꾸했고 뒤에서 들리는 그리델라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아- 많이 웃었다. 오늘도 재밌었어!”

“그래, 너라도 즐거웠다니 다행이네.”

“그런데 왕자님, 눈치 없다는 소리 들어본 적 있어?”

“아니. 왜?”

“그냥. 난 그런 왕자님이 좋더라.”

이제 가봐야 하지 않겠냐며 그리델라는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제야 주머니에 든 회중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카이엔은 기겁을 하면서 외쳤다.

“악! 늦었다! 바이스가 찾으러 오겠어. 슬로세이, 나 간다!”

“응? 으응, 알았어.”

더 늦기 전에 가야 한다면서 카이엔은 황급히 달려갔고, 둘만 남게 되자 그리델라가 웃으며 말했다.

“왕자님은 그렇게 돌려서 말하면 못 알아들을걸?”

“그치만 대놓고 말하면 바이스 씨가 어떻게든 방해할걸?”

“그 말도 맞네.”

“바이스 씨는 자기 일이나 잘하지, 괜히 눈치나 주고있어.”

“그것도 바이스 씨가 할 일이겠지.”

심통이 난 슬로세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그리델라는 미소를 지었다.

언젠간 약점을 잡고 말겠다면서 으르렁거리는 어린 친구가 귀엽기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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