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하루 푹 쉬고 난 다음, 일행은 나트폰트라 변경백령으로 향했다.
역병이 발생한 곳 답게 입구부터 기사들이 철저히 사람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었다.
허나 미리 변경백에게 언질을 받은 건지 카이엔 일행의 신원을 확인하고 바로 통과시켜주었다.
물론, 영지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전염되는 것을 막기위해 입고있는 옷 위에 빳빳한 방수재질의 옷감으로 만든 망토를 걸쳐야만 했다.
거기다 맨살에 더러운 것이 닿지않게 장갑이며 마스크를 끼고 나서야 다들 마차에서 나올 수 있었다.
변경백이 준비해놓은 마차가 있기에 그들이 타고 온 마차는 일단 입구 쪽에 대기시켜두기로 했다.
나트폰트라 변경백은 사십대 중후반 정도의 강직해보이는 인상의 남성이었다. 그는 카이엔이 마차에서 내리자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편지는 받았습니다. 허나…”
“조사 차원에서 온 거다. 쫓겨났다고 하지만 왕족이 온거니 민심 잡기에도 좋겠지.”
“…감사합니다.”
멀쩡한 사람들도 언제 병에 걸릴지 몰라 불안에 떨고 있는 와중에, 폐세자라고는 하지만 왕족이 와서 직접 마을을 둘러보며 병을 조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불안을 덜어줄 수 있을 것이다.
카이엔의 목적이 그것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변경백은 일단 고개부터 숙였다.
“노력은 하고 있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아직 원인조차 알아내지 못했고요. 기사들을 모아 검은 숲으로 보냈지만 단서를 발견하지도 못했습니다.”
“검은 숲 탐색은 나도 해보고 싶은데. 그리고 이쪽이 내가 데리고 있는 으음… 의사 비슷한 일을 하고 있어.”
프라우디에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몰라서 카이엔은 대충 얼버무렸다.
프라우디에는 잘 부탁드린다면서 고개를 숙였고 변경백은 프라우디에의 어려보이는 겉모습에 의아해하긴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이엔의 곁에 이종족이 많이 있다는 소문은 그도 들었으니, 옆의 작은 아이 역시 이종족이라 어려보이는 거라고 여긴 것이었다.
카이엔과 일행의 차림을 꼼꼼히 살피고 그는 바로 진료소로 그들을 안내해주었다.
영지를 다스리는 귀족이 직접 왔다는 말에 바쁘게 움직이고 있던 의사며 사제들은 얼른 인사만 하고 바로 제 할 일에 몰두했다.
“…바쁘군.”
“네. 진전이, 없습니다.”
변경백은 입술을 깨물었다.
진료소 안은 아비규환이었다. 사방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들이 간이로 마련한 침대 위에 누워있었고 의사들은 그들을 돌보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온 몸이 부풀어올라 피고름이 나오는 환자는 그걸 짜줘야 2차 감염이 되지 않는다는 걸 몇 번이고 들었음에도 고름을 짤 때마다 아프다며, 하지 말라며 비명을 질렀다.
비교적 조용한 환자들도 주변이 계속 시끄러우니 인상을 쓰면서 짜증을 냈다.
글로 읽은 보고서는, 현실에 비하면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실제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카이엔은 인상을 찌푸렸다.
“바로 진료에 투입되기보단, 부검을 좀 해보고 싶은데.”
“이쪽으로 오십시오.”
“왕자님, 그건 저 혼자서 할 수 있어요.”
“아냐. 나도 옆에서 볼게.”
“힘드실 텐데…”
프라우디에는 말끝을 흐렸다. 변경백은 그들을 부검용으로 빼놓은 시신이 있는 천막으로 안내했다.
몇몇 의사들이 변경백을 알아보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수고가 많군.”
“아닙니다. 그런데 백작님, 옆의 분들은…”
“왕자님이시다. 이곳이 걱정되어 찾아오셨고, 도움이 되고 싶다고 하셨지.”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안에 있던 의사들은 일단 감사하다는 말부터 했다. 그러나 못 미더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눈빛에 카이엔은 한숨을 쉬었다.
“부검하는 걸 보고 싶은데. 하는 건 이쪽이고.”
“네?”
“그, 왕자님. 정말, 정말로 무례한 말이지만 부검은 위험합니다. 하물며 저런 어린 아이가…”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
“별 뾰족한 수를 발견해내지 못 한 걸로 알고 있는데.”
카이엔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의 태도에 변경백이 의사들에게 무어라 눈치를 준 건지, 의사들은 바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미 부검을 할 준비가 다 되어있는 진찰대 위에서 프라우디에는 그의 작은 손 안에도 쏙 들어오는 사이즈의 나이프를 쥐었다.
“다니엘 알트. 46세. 발병한지 열흘 만에 2차 감염으로 인한 패혈증으로 사망했습니다.”
“사망원인은 다양한 거죠?”
“아, 네. 오래 버티는 환자들은 상처가 감염되는 걸 최대한 막고 있고요. 대개 역병 자체가 아니라 그에 따른 감염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진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왕자가 데려온 사람이라 그런지, 의사들은 자식뻘로 보이는 프라우디에에게도 경어를 썼다.
잠시 뜸을 들이다가 프라우디에는 리치왕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먼저, 팔에 나있는 큼지막한 수포를 터뜨렸다. 누런 액체가 줄줄 흘러나왔고 다음은 다리에 있는, 상처를 확인해 고름을 확인했다.
피가 섞인데다가 묘하게 시커먼 것이 군데군데 보였다.
고름이며 피가 옷에 묻지 않게 조심하면서 프라우디에는 나이프로 시신의 배를 갈랐다.
멀찍히 떨어져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지라 카이엔은 뱃속의 장기가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프라우디에가 뭔가를 알아내기를 바라면서 조급해했다.
슬쩍 옆으로 다가간 그리델라는 단숨에 인상을 찌푸렸다.
“윽. 이게 뭐야. 저기요, 다른 시신들도 볼 수 있나요? 그게 아니라면 부검한 걸 스케치 해놓은 자료라도 있나요?”
“아, 그건 여기에…”
그리델라는 다른 의사들이 검시하고 남겨놓은 기록을 확인했다.
프라우디에는 꼼꼼히 시신의 뱃속을 살피면서 장기를 하나하나 떼어내 옆의 테이블에 올려진 천 위에 늘어놓았다.
기록에 남겨진 스케치와 프라우디에가 눈앞에서 해부하고 있는 시신을 확인하며 그리델라가 카이엔을 향해 손짓했다.
“왕자님, 이거 좀 이상해.”
“뭐가?”
“온갖 병들을 다 섞어놓은 것 같아. 이런게 자연 발생이라니, 거짓말. 누가 일부러 퍼뜨린 게 분명해.”
“그, 그것이 정말입니까?”
“사제님들은 아무것도 발견 못 했대요?”
그리델라의 말에 변경백과 의사들 모두 고개를 저었다. 사제들은 상처를 치유하고 고통을 덜어주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누가 일부러 퍼뜨린 병이라니. 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그들의 표정이 단숨에 어두워졌다.
- 상태가 안 좋네.”
“그러게요.”
- 살상력이 낮다는 게 더 질이 나쁘다. 흠, 내가 데리고 있던 녀석은 이딴 병을 쓰진 않았는데.
“네? 역병도 썼어요?”
- 어쩌다보니. 그놈은 살상력과 감염력을 최대한 높인 병을 만들어 썼었다. 한 마을을 초토화시키는데 하루이틀이면 충분했지.
“그건 좀…”
그정도면 병이 아니라 독이 아닐까?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프라우디에는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카이엔이 옆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오래 시간을 끌고 싶지 않은데 이상한 점이 계속 눈에 들어왔다. 아마 그리델라도 그것을 눈치채서 대놓고 말을 꺼낸 걸 테고.
검은 숲에 들어가야 한다.
그곳에 모든 비밀이 있을 거라며 빠르게 부검으로 원하는 정보를 얻어낸 프라우디에는 긴 한숨과 함께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원인은 아직도 찾지 못 한 상태며 잠복기가 존재. 발병부터 사망까지의 시간은 열흘이 넘는다.
약도 아직 개발되지 않아 여러가지 약초를 조합해가면서 쓰고 있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약 또한 너무 독해서 몇 가지 부작용이 있다.
정상적으로 발생된 질병이 아니란 걸 알았으니 더 이상 지체할 시간 따윈 없었다.
“왕자님, 검은 숲으로 가요. 그곳에 답이 있을 거예요.”
“그래. 혹시 검은 숲의 지도가 있나?”
“저희가 탐색한 곳을 그려놓은 거라면, 있습니다. 허나 영주성에 있는데…”
“검은 숲의 방벽 앞에 가있을 테니 가져다주면 좋겠는데.”
“드리겠습니다.”
변경백은 카이엔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몬스터와 말이 통하는 왕자는, 아무래도 이 끔찍한 사태를 해결할 단서를 잡은 모양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기에 그는 순순히 카이엔의 뜻에 따랐다.
시종을 보내 지도를 가져오게 하고 그는 카이엔과 그의 일행을 직접 방벽 앞까지 안내했다.
나트폰트라 변경백의 도움으로 검은 숲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카이엔은 바로 주변 환경부터 살폈다. 이름은 ‘검은 숲’이지만 그 광활한 땅이 모조리 숲으로만 가득 차있는 건 아니었다.
세자르 영지와 맞닿아있는 검은 숲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돌로 가득한 협곡과 황무지가 나온 것에 비해 나트폰트라 변경백령과 인접한 검은 숲은 말 그대로 숲이었다.
울창한 숲은 키큰 나무들 때문에 아직 해가 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둑어둑했다.
빠르게 해결할 셈으로 변변찮은 짐조차 챙겨오지 않았기에 그들은 바로 이동했다.
군데군데 있는 작은 연못이며 늪은 시꺼먼 색이었지만 저게 전염병의 원인일 리는 없었다.
저게 원인이었다면, 변경백령의 의사들이 진작에 밝혀냈을 테니까.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프라우디에가 빠르게 마법을 썼다.
짐승형 몬스터를 사냥한 프라우디에가 피를 채취해 작은 유리병에 담아 이름표를 붙였다.
“흑마법사들은 인체 연구를 많이 하다 보니 시체가 썩어서 생기는 곰팡이며 병균들과도 밀접할 수 있어요.”
그 자리에서 바로 검사를 마친 프라우디에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아니네요. 역시 뭐가 있는데, 감이 잘 안 잡혀요.”
시무룩해서 고개를 숙인 프라우디에였지만 몬스터가 나타나는 족족 잡아서 피를 뽑았다.
그리델라는 정찰을 해보겠다면서 빗자루를 타고 날아올랐다.
나뭇가지에 다치지 않게 조심하며, 통행에 방해되는 나뭇가지들을 모조리 잘라내면서 그녀는 주변에 수상한 곳이 없는지 살폈다.
흑마법을 배우고 있는 프라우디에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면 범인 또한 흑마법사일거라며 추측한 그녀는 흑마법사가 쓸만한 오두막이 있는지 관찰했다.
어두운 시야를 밝게 비추기 위해 빛 덩어리를 몇 개 띄워놓고 일행과 멀리 떨어져서 날아다니던 그녀의 시야에 곧 오두막 한 채가 들어왔다.
변경백령에서 검은 숲 관리를 위해 만들어놓은 곳일지도 몰랐지만 그리델라는 일단 오두막의 존재를 카이엔에게 알렸다.
“오두막?”
“응.”
“일단 가볼까?”
“쉽게 발견되면 좋겠지만 그리델라 님이 발견해낸 걸 기사들이 발견해내지 못했을 리 없을 텐데. ”걱정되는군요.”
“내가 마녀라 그럴지도. 여기 백작님도 검은 숲 안에 뭐가 있다는 말은 없었잖아?”
“그 말도 맞군요.”
마법으로 눈속임을 해놨다면 마법을 쓸 줄 모르는 기사들이 발견해내지 못 했을 것이다.
그리델라야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다가 우연히 그곳을 발견해냈을지도 모르고, 실제 거리를 들어보니 걸어서 가기엔 꽤 멀었다.
다같이 빗자루를 타고 갈 수도 없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하고 있으니 프라우디에게 가방에서 커다란 꾸러미를 하나 꺼내 내용물을 모조리 털어냈다.
“뼈?”
“불안정하지만 일단 이걸로 해도 될 거같아요.”
프라우디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주문을 읊자 뼈가 하나둘 연결되기 시작하더니 네발 짐승의 형태를 취했다.
걷는 속도보다는 빠를 테니 그것을 타고가기로 했다. 다만, 자네인은 달려서 따라갈 수 있다며 거절했다.
“달릴 수 있다고?”
“일단 저도 인간은 아니니까요.”
“으음… 알았어.”
카이엔은 당황했지만 자네인이 할 수 있다고 하니 말리지 않았다.
프라우디에가 뼈 짐승에 올라탔고 카이엔과 바이스가 그 뒤에 탔다. 잡을만한 게 없어서 등뼈를 붙잡아야 한다는 말에 카이엔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델라가 하늘을 날며 방향을 알려주기로 하고 프라우디에가 마력을 불어넣자 뼈 짐승은 자리를 박차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윽!”
탑승감이 최악이었다.
뭐라도 깔고 앉았다면 한결 나았을 텐데, 들고온 게 없어서 꾹 참는 수 밖에 없었다.
단단한 뼈가 꼬리뼈와 부딪치기라도 하면 윽소리가 날 정도로 아팠다.
그런데 프라우디에는 아무 말 없이 운전만 했고 바이스도 혹시나 그가 떨어질까 봐 한 팔로는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다른 한 팔로는 뼈 짐승을 단단히 붙잡고 있음에도 별말 없었다.
‘나만 이상한 건가?’
아프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카이엔은 입술을 깨물었다.
옆을 보니 자네인은 정말 잘 달리고 있었다.
마차에 버금가는 속도로 달리는 뼈 짐승에게 뒤처지지 않고 달리는 그녀는 눈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수도로 쳐서 날려버렸다.
그녀의 손날에 맞은 나뭇가지는 빠직소리를 내며 부러지고 발에 채이는 돌멩이도 휙휙 날아갔다.
보통 돌부리에 걸리면 넘어지기 마련인데, 자네인의 발에 걸리는 돌은 여지없이 부러졌다.
그 혼자만 약골인 것 같아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냐.”
“뼈라서 그런지, 많이 흔들리긴 하군요.”
바이스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불편한 주행 중 머리 위에서 그리델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저 앞이야!”
그 말에 프라우디에는 뼈 짐승의 속도를 서서히 낮췄다. 검은 숲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시커먼 잎의 나무들로 가득 차 있는 외딴 곳에 오두막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다.
그때, 내내 직진만 하던 뼈 짐승이 옆으로 몸을 꺾었다.
드드드득-
땅에 발을 디디면서 감속을 하니 위에 타 있는 카이엔의 몸이 앞뒤로 거세게 흔들렸다. 반면, 프라우디에와 바이스는 안정적이었다.
아직 정신을 못 차린 카이엔을 안아들고 뼈 짐승 위에서 내린 바이스가 프라우디에를 향해 물었다.
“적이 눈치챘습니까?”
“네.”
대답하면서 프라우디에는 품 속에서 작은 나무 막대를 꺼내 휘둘렀다. 쩡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튕겨져나가 바닥에 박혔다.
빠르게 상황파악을 한 바이스가 카이엔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우욱…”
“하하. 여전히 어지러우신가 봅니다.”
“농담할 기분 아니거든??”
“아무래도 적이 눈치챈 모양입니다.”
“그런 것 치곤 꽤 여유로워 보이는데?”
“프라우디에 님이 잘 처리하실 테죠.”
그거 믿고 그러는 거냐. 카이엔은 어이없어 했지만 바이스는 진심인 모양이었다.
누군가가 제 구역에 가까이 오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흑마법사의 공격을 빠르게 쳐낸 프라우디에는 눈에 마력을 집중해 주변을 살폈다. 다른 함정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허나 역병을 쓰던 자인만큼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몰랐다.
그때, 오두막의 문이 열리면서 안에 있던 자가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