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카이엔의 간절한 바람이 하늘에 닿은 건지, 왕성에서 파견된 기사단은 그의 계산보다 며칠 정도 빨리 세자르에 도착했다.
남작과 카이엔은 그들을 두 팔 벌려 환영했고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기사단장은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에이들러는 왕성에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서운해했지만 그래도 얌전히 그들을 따라가기로 했다.
여기까지 쉴새없이 달려오느라 기사들도 많이 지쳤기에, 그들또한 하루 영주성에 묵어가기로 했다.
…릴리시아의 인식 절차를 걸치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으아아악!”
익숙치 않은 하늘 구경에 기사들은 너나할 것 없이 비명을 질렀다.
꾹 참는 것으로 용기를 증명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고소 공포증이 있는 기사는 여지없이 비명을 질렀고 이 기회에 자신에게 고소 공포증이 있다는 걸 알게된 기사도 있었다.
카이엔의 옆에서 그 모습을 보면서 에이들러는 입을 크게 벌렸다. 그러더니 카이엔의 옷을 살짝 잡아당기며 소곤거렸다.
“릴리시아가, 저는 많이 봐줬나봐요.”
“그치?”
기사들을 거의 십 미터도 넘게 공중에 들어올렸다가 내려놓는 모습에 에이들러는 마른 침을 삼켰다.
인식을 거친 기사들은 저마다 바닥에 주저앉거나 엎드려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바빴다. 카이엔에게 주의사항에 대해 들었음에도 방심하고 있던 탓이 컸다.
말로만 듣던 폐세자의 애완 몬스터의 등장에 그들은 처음부터 기세가 꺾였다.
저들에게 이종족에 대한 설명까지 할 필요는 없었기에 카이엔은 여기 몬스터들은 사람을 공격하지 않으니 발견한다고 해도 웬만해선 적대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페이리의 경우는 저들이 보고 검이라도 빼들면 큰일이 날 테니 양해를 구해 다락방에서 나오지 않도록 설명했다. 이해심 많은 페이리는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말 많고 탈 많은 하루는 금세 지나갔고 다음 날 아침, 에이들러는 기사단을 따라 왕성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멀리는 못 나간다며 카이엔은 영주성 바로 앞까지만 배웅하러 나왔다.
“잘 있어요.”
“너도. 다음엔 몰래 마차에 숨어있지 말고 당당하게 놀러오겠다고 말하고 와.”
“그래도 돼요?”
“허락받고 온다면야.”
“에헤헤. 다음엔 꼭 허락을 받고 올게요.”
다음에 또 와도 된다고 해서일까. 에이들러는 웃으면서 세자르를 떠났다.
에이들러가 돌아가고 나서야 그리델라와 라스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따금씩 카이엔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기에 내내 변신해있었던 것이다.
힘들었다면서 그리델라는 기지개를 켜며 외쳤다.
“나 다음번엔 절대 고양이로 변신하지 않을래!”
“잘만 돌아다니더만.”
“그치만 맛있는 것도 못 먹고 고양이가 먹을 수 있는 것만 먹었단 말야! 그리고 그 작은 왕자님도 카이엔 왕자님한테만 신경쓰지 동물들한텐 관심도 얼마 없더만!”
“아 그랬나?”
“그랬어. 왕자님만 몰랐나보네.”
입술을 삐죽 내밀곤 그리델라는 그동안 못 먹은 간식들을 먹으러 가겠다며 쌩하니 가버렸다.
그동안 같이 늑대로 지냈던 라스는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다.
“저도 가보겠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불러주십시오.”
“응. 고마웠어, 라스.”
“아닙니다. 저야 그리델라보단 편하게 있었으니까요.”
적당히 해도 될 텐데 그리델라는 에이들러가 관심을 보이면 놀아주기 바빴다.
라스는 관심 없는 척 고개를 돌리면 그만이었지만 처음에 쌓아놓은 이미지가 있었기에 그리델라는 ‘사람 좋아하는 개냥이’ 연기를 충실히 해내야 했고.
그런데 에이들러가 돌아가고 나서, 바이스는 카이엔에게 종이 한 뭉치를 내밀며 말했다.
“세력을 늘려야겠습니다.”
“뭐?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왕자님과 관계된 이종족이며 몬스터들이 지낼 공간을 따로 분리해놔야겠어요. 계획은 모두 짜놨습니다. 설계도도 있고요. 남작님 허락도 받아놨고 계약할 인부들도 구해놨습니다. 왕자님 허락만 받으면 됩니다.”
“이런건 처음부터 알려줘야지.”
혀를 차며 카이엔은 바이스가 내민 계획서를 읽어보았다.
이종족들이 별채를 쓰고 있긴 하지만 나중에 다른 손님들이 오게 된다면 불편해할 수도 있으니 아예 그들이 쓸 건물을 새로 만들고 프라우디에의 연구실도 그곳으로 옮기자는 내용이었다.
한곳에 몰아놓자는 말인가. 이래도 되는 건가 싶어서 카이엔은 턱을 괴었다.
하지만 영주성의 별채를 그의 손님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미안하게 여기고 있었으므로 바이스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리고 그가 동의하자마자 바이스는 바로 공사를 시작했다.
새 건물 공사를 위해 영주성을 들락거리게 된 인부들 또한 릴리시아의 인식 절차를 거치게 되었는데 이미 수십 번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몇 명은 비명을 질렀다.
창 밖에서 들리는 비명소리에 카이엔은 한숨을 쉬었다.
‘오래걸릴 텐데.’
건물이 하루아침에 뚝딱 지어지는 것도 아니고, 빨라도 일 년은 잡아야 할 텐데.
돈을 쏟아부어서 많은 인원을 고용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을 텐데 지금부터 지어도 되는 걸까. 카이엔은 고민에 빠졌다.
별채를 하나 더 짓는 것에는 모두가 다 동의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라스는 인부들이 두어 명은 달라붙어야 옮길 수 있는 무거운 자재들을 번쩍 들어서 옮겨주었고 그리델라는 건물이 완성되면 곳곳에 마법을 걸어야겠다면서 자신이 가져온 마법 서적을 뒤적였다.
아직 뼈대를 짓는 과정이었지만 프라우디에도 일찍부터 이사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진행되는 공사에 약간의 소음이 생기긴 했지만 다들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한편 바이스의 계획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아무리 검은 숲을 옆에 끼고 있다고 해도 카이엔이 세자르에 있는 이상 기사의 수를 늘리는 것은 어려우니, 일당백의 능력을 가진 일행들을 좀 더 강화시키기로 했다.
물론, 카이엔은 모르게 진행했다.
라스는 무기를 들기보단 맨몸으로 부딪치면서 싸우는 타입이었고 엔베인과 글러티나는 검을 주무기로 쓰기에 주기적으로 대련을 하기로 계획을 짰다.
“왕자님은 약하시니까 저희가 지켜드립시다.”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엔베인은 마검 밖에 쓸 수 없었고 글러티나는 본가에서 가져온 검이 있었기에 그걸 쓰기로 했지만 라스는 마땅한 무기가 없어서 바이스가 따로 주문 제작을 맡기기로 했다.
그리델라야 마녀이므로 알아서 잘 훈련할 테고 비셰와 슬로세이는 전력 외였다.
프라우디에는 리치왕에게 개인 교습을 받고 있으니 간섭할 필요가 없었다.
오로지 카이엔만을 위한 세력이 필요하다며 바이스는 카이엔에게조차 전력증강을 위한 수를 숨겼다.
그러던 중, 변경백령으로부터 긴급 공문이 전달되었다.
제국과의 국경부근에서부터 역병이 돌기 시작했으니 다들 문을 걸어잠그고 검은 숲을 주시하라는 내용이었다.
간혹 야생 몬스터에게 물린 이들이 병에 걸리는 일이 있었기에 세자르 역시 빠르게 문을 걸어잠그고 통행하는 이들을 면밀히 관찰했다. 전염병의 소문이 퍼지자 사냥꾼이며 용병들도 사냥을 중단하고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전염병이라니. 날씨가 덥지도 않은데 말이야.”
“퍼지는 이유는 제각각이니까요. 왕자님도 조심하십시오.”
“아직 여기까지 퍼지진 않았을걸? 변경백령은 골치아프겠네.”
그쪽이 약화되면 제국이 무슨 수를 쓸지도 모르지만.
물론 그쪽은 지금 후계자 문제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가르간트 쪽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도 있었다. 공에 눈이 먼 멍청이가 싸움을 걸지만 않는다면, 무사하겠지.
변경백령에서 보내온 공문은 내용을 확인해 다른 곳에 옮겨적고 즉시 태워버렸다.
세자르와 맞닿아있는 검은 숲과 나트폰트라 변경백령에서 관리하는 땅과 맞닿아있는 검은 숲은 그 환경부터가 달라서 서식하는 몬스터들도 다르다.
그 중 어떤 놈이 발병 원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염병이 퍼진 이상 수도에서도 무슨 조치를 취하겠지.
가만히 손 놓고 있어도 된다며 카이엔은 그쪽에 관심을 끊으려고 했다.
허나, 프라우디에는 달랐다. 전염병이라는 말에 곰곰히 생각에 빠진 그는 연구실에서 나와 카이엔을 만나러 갔다.
“왕자님. 저는 그 전염병을 조사해보고 싶어요.”
“뭐?”
“흑마법사가 의도적으로 역병을 퍼뜨릴 수도 있거든요. 물론 그쪽에 관해 자세히 연구해서 어느정도 지식을 쌓은 뒤에야만 가능하지만요.”
“위험해.”
“맞습니다. 프라우디에 님을 보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쪽도 사제단 말고 다른 이들의 통행을 금지했을 겁니다. 병이 더 퍼지면 안되니까요. 차라리 제가 그쪽에 심어놓은 사람에게 연락을 하죠. 병에 관한 정보를 물어본다면 전서구를 통해 답장이 올 겁니다.”
“…어떻게 그런 곳까지 첩자를 심어둔 거야?”
“어렸을 때부터 했던 사업 중 하나죠.”
“무슨 짓을 했던 거야 너…”
카이엔의 물음에 바이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물론 전서구를 타고 전염병의 원인 인자가 퍼질 수도 있으니 편지를 전해받는 건 세자르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하겠다며 덧붙였다.
하필이면 변경백령이다. 그쪽에서 생긴 병이라면 아마 제국 쪽도 난감하지 않을까.
바이스는 즉시 연락을 취하겠다고 하고 프라우디에도 알겠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병이라도 해봤자 곧 해결되겠지, 라며 안이하게 생각했던 카이엔이었지만 그로부터 한달이 넘어가 전염병에 대해 거의 잊어버릴 때 쯤. 바이스가 그에게 슬쩍 말을 꺼냈다.
“변경백령으로부터 연락이 끊겼습니다. 십중팔구 첩자가 첩자질 하는 걸 들켜서 붙잡혔거나 병에 걸려 쓰러졌겠죠.”
“어…”
“마지막 보고를 봐선 병에 걸리지 않은 것 같은데 이것도 열흘도 전의 연락이라, 성급하게 판단을 내릴 수 없군요. 그쪽도 지금 많이 복잡한 모양입니다.”
“어떻게 할까? 가볼까?”
“왕자님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새로운 병인가…”
한 달이라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고민 끝에 카이엔은 몸을 일으켰다.
프라우디에에게 변경백령의 이야기를 하니 즉시 가겠다는 대답이 돌아왔고 자네인도 동행하기로 했다.
인간이 아닌 이 두 사람이라면, 병에 걸리지 않을 테니 카이엔도 동의했다.
이야기를 들은 그리델라도 자신에게 의학적 지식이 있다며 같이 가고 싶다고 말했기에, 카이엔은 그들과 함께 나트폰트라 변경백령으로 가기로 했다.
문제는 남작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꺼내니 남작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정말로… 가셔야 합니까?”
“위험하다는 건 알아. 하지만 그쪽이 해결되지 않으면 병은 점점 더 퍼질 테고. 어떻게 하나 두고 보려고 했는데 안되겠어.”
“꼭 왕자님이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쪽에서도 사제며 의사들이 밤낮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합니다.”
“좀 찝찝한 구석이 있어서 그래. 금방 다녀올게. 문제없을 거야.”
“…알겠습니다. 제발 무사히 다녀오세요.”
어쩐지 남작의 이마며 미간의 주름이 평소보다 더 깊어진 것 같았다.
속 썩이는건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며 카이엔은 집무실에서 나왔다.
나트폰트라 변경백령으로 가는 일행의 구성이며 챙긴 짐도 조촐했다. 조사하러 가겠다는 공문을 보내고 이틀 뒤, 일행은 세자르를 떠났다.
프라우디에와 그리델라는 가지고 있는 의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필요한 물품들을 챙겨서 짐이 배로 늘어난 상태라 따로 짐마차를 하나 더 가지고 가야 했다.
전염병 지역으로 간다는 걸 아는 마부의 얼굴은 내내 울상이었다.
“원활하게 해결되면 좋겠습니다만.”
“제 추측이 틀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국 쪽으로 망령 무리가 간 것과는 관련이 없겠죠?”
“그렇지 않을까?”
“증상만 따지고 보면 다른 병들과 다를 게 없어요. 고열을 동반한 근육통과 발적, 수포 등등. 하지만 안 좋은 점은, 고통스러운데에 비해 사람을 쉽게 죽이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초기 발병자 중에선 아직 살아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줄지 않는 통증에 시달리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열이 들끓고 온몸에 퍼진 수포가 터지면서 고름을 흘렸다.
제대로 닦아주고 소독하지 않으면 그게 또 곪아서 상태가 악화되니 아마 그곳에 파견된 사제와 의사들 모두 골치 아플 거라며 프라우디에는 살짝 인상을 썼다.
부검을 해봐도 영문을 알 수가 없기에 더욱 질이 안 좋았다.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프라우디에는 한숨을 쉬었다.
“저한테 모든 지식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리치왕은 어느 정도 알고 있으니까요.”
“천년 전의 지식인데도?”
“그래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그때는 지금보다 상황이 열악했을 테니까요.”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는 말이기에 카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델라는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각 지역의 풍토병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다면서 적극적으로 프라우디에의 조수 역할을 자처했다.
세자르에서 빠져나와 도착한 곳은 에피넬 백작이 다스리는 영지였다. 카이엔이 온다는 말을 이미 전해 들었는지 백작은 바로 앞까지 나와있다가 반색하며 카이엔을 맞이했다.
“왕자님! 어쩌자고 이런 곳에!”
“…속마음이 튀어나온 거야?”
“그, 그건 아니고… 위험합니다! 변경백령에 가신다면서요!”
“난 편지 보낸 적 없는데. 남작이 보낸 건가?”
“제가 부탁드렸습니다.”
“너 진짜…”
“며칠은 더 가야 하는데 제가 지금까지 봐온 왕자님이라면, 분명 머지않아 마차 멀미를 하실 겁니다. 몸상태가 나빠져서 병에 걸리시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하루 이틀쯤은 푹 쉬었다 가십시오.”
바이스가 옆에서 귓속말로 소곤거리니 카이엔의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그 모습에 죄 없는 에피넬 백작은 자신이 뭘 잘못한 건가 싶어서 안절부절 못했고, 카이엔은 짧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직도 해결되지 못했다니 보러가는 거다. 고생하고 있는 이들을 격려하기도 하고, 나 역시 병에 대해 조사해보고 싶고.”
“그, 그렇습니까? 그럼 옆의 분들은…”
‘이종족인가요?’라고 묻고 싶은 것을 애써 참고 에피넬 백작은 카이엔 일행을 영주성으로 안내했다.
다행히 바로 옆에 위치해있음에도 에피넬 백작령까지 전염병이 퍼지진 않은 것 같았다.
다만 영지민들이 불안해하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있었다. 다들 문을 걸어잠그고 밖으로 나오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세자르와는 조금 달랐다. 그곳의 주민들은 병이 퍼졌으면 벌써 퍼졌을 거라면서 평소와 다를 것 없이 행동했으니까. 변경백령과 거리가 멀다는 것도 이점으로 작용했고.
남작도 식수의 상태를 점검하고 사람들에게 손씻기를 잘 하자고 강조했을 뿐이다.
에피넬 백작의 부담스러운 환영과 대접을 받은 그날 밤, 카이엔은 그가 묵는 방에 모두를 불러모았다.
“아직은 집히는 구석이 없지?”
“네. 역병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어.”
“여기가 관리를 잘한 건지, 변경백령에서 차단을 잘한 건지~”
“일단 저 너머로 가긴 해야겠구나.”
끔찍한 광경이 상상되어 카이엔은 이마를 짚었다.
나트폰트라 변경백은 만나본 적이 없었다. 설령 있다고 해도, 아주 어릴적에 얼굴을 본 게 전부일 테니 모를 법도 했다. 슬쩍 바이스를 쳐다보자 바이스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변경백이 날 통과시켜줄지 모르겠군. 이미 편지를 보냈긴 해도 막아설 수도 있으니.”
“그럼 몰래 넘어가야지. 검은 숲 통해서. 병도 그쪽에서 왔을 거 아냐?”
“으음, 그건 좀…”
그리델라의 말에 카이엔은 말끝을 흐렸다. 이왕이면 상부상조하게 원만하게 진행되면 좋겠다고 바랐다.
머리를 모아봤자 여기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기에 카이엔은 일행을 해산시켰다.
그리델라는 정찰을 좀 해보고 싶다고 했기에 오랫동안, 너무 멀리, 눈에 띄지는 않게 하라는 조건을 덧붙여서 허락했다.
“골치아픈 일이 생겼네요. 만약, 흑마법과 전혀 상관없이 자연 발생된 병이라면 저희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텐데.”
“프라우디에가 수상하다고 했으니까. 그 감을 믿고 싶어.”
“그렇다고 해도 이상하군요. 대체 뭘 위해서 병을 퍼뜨린 걸까요?”
“미친놈 생각을 우리가 알 수 있을 리가 없지. 병이 퍼지지 않은 건… 역시 변경백령에서 빠르게 발견해 차단을 잘해서 그런걸 테고.”
병을 널리 퍼뜨릴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면, 한 군데가 아닌 여러 군데에서 동시에 퍼뜨렸을 것이다.
검은 숲의 몬스터들부터 감염시킨 뒤 그 몬스터들을 이곳저곳에 옮겨두었다면 따로 손을 쓰지 않아도 군데군데 퍼져갔겠지.
굳이 나트폰트라 변경백령을 선택한 이유라도 있을까? 카이엔은 고개를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