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두 사람을 직접 만나게 해서 사과까지 시켰건만, 에이들러와 슬로세이의 사이는 데면데면했다.
에이들러는 별채 쪽으론 가지도 않았고 대신 영주성 안을 돌아다녔다. 구경할만한 것도 없는데 이곳저곳 돌아다니다보니 저절로 페이리와 마주치는 일이 많아졌다.
페이리는 읽는 책의 폭이 넓은지라 에이들러도 읽을 수 있는 책들을 추천해주곤 했다.
그러나 대다수가 동화여서 에이들러는 불만족스러워 하면서도 페이리가 골라준 책들을 읽었다.
어린애가 아니라고 말해봤자 페이리가 웃으면서 골라주는 책들은 죄다 동화에 전설과 관련된 판타지였기 때문이다.
“왕국 사람들이 생각보다 늦네요. 금방 올 줄 알았는데.”
“에이, 거리가 있는걸요.”
도서관에서 두 사람은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페이리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에이들러가 겁먹을까 봐 첫 대면에선 모습을 감추려고 애를 썼지만 에이들러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를 대해주니 부담감을 많이 덜었다.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는 에이들러의 옆에서 의자를 뒤로 밀어내고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페이리의 옆에는 수북히 책이 쌓여있었다.
그녀의 옆에 있는 어린아이를 배려해 일반 소설을 읽고있는 페이리였다.
에이들러 역시 어른스럽고 다정한 페이리를 잘 따르면서 쉬는 시간마다 도서관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페이리가 카이엔이 어렸을 적 곁을 지켜주면서 담당 유모나 시녀 비슷한 일을 한 적이 있다고 하니 더욱 맘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페이리는 꼭 누나같아요.”
그래서인지, 신분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이들러는 페이리에게도 존댓말을 썼다.
비슷한 갈색 머리카락에 친근감을 느낀 걸지도 몰랐다.
물론 페이리는 에이들러가 이런 말을 하자 그런 말은 하면 안 된다면서 손사래를 쳤다.
“돌아가면 카이엔 형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많이 보고 싶을 거에요.”
세자르에 오고 나서 이곳의 이종족 손님들과 만나봤지만 자주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각자 할 일에 몰두하며 방에서 나오지 않거나 훈련을 하고 있으니 그쪽으로 갈 일이 없는 이상 보지 못 했다.
반면 페이리는 도서관에 가면 자주 볼 수 있으니 친근감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이종족들보다 명확하게, 인간과 다른 신체를 가진 그녀였지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의 신분상 다른 이들이 그를 껄끄럽게 여기는 건 당연했다.
슬로세이는 그런 것 따윈 신경쓰지 않고 그와 싸웠지만 다른 이들까지 그렇게 생각할 리는 없었다.
세자르에서 에이들러가 교류하는 건 친척인 카이엔과 바이스, 자주 보는 페이리 정도였다.
‘다른 어른들은 좀 무섭기도 하고.’
뺨을 긁적이며 에이들러는 다 읽은 책을 덮었다.
이곳에 있는 이종족이 워낙 다양하다보니 카이엔이 관련 서적을 사모으기라도 하는 건지, 도서관에는 이종족에 대한 책들이 가득했다.
허나 페이리처럼 인간의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아라크네의 이야기는 없었다.
오늘도 쉬는 시간을 모조리 도서관에서 보낸 뒤 에이들러는 다시 공부를 하기 위해 방으로 돌아갔다.
바이스는 굉장히 깐깐한 선생님이여서 수업을 빼먹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사촌 형이라면서, 하는 행동은 남과 다를 게 없었다.
방에 가니 여느 때나 다름없이 수업 준비를 마친 바이스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이스의 손에 쥐어진 교편을 보고 에이들러는 마른침을 삼켰다.
공부를 못한다고 때리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것도 안 들고 있는 것보단, 무언가를 들고 있는 모습이 훨씬 무서운 게 당연했다.
“오셨습니까?”
“으응…”
“편하게 대하십시오. 저희가 혈연관계긴 하지만 전 의절을 한 몸이니까요. 남처럼 편히 대하세요.”
“그렇게 말해도…”
편하게 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혈육보다 남을 더 편하게 대할 수 있긴한가?
짧은 한숨과 함께 에이들러는 책상 앞에 앉았다.
분명히, 바이스도 어린 나이에 집을 나와서 세자르에서 카이엔과 함께 지냈다고 알고 있었는데 공부를 가르쳐주는 걸 보면 웬만한 가정교사들과 맞먹을 정도였다.
아무튼 놀러와서 공부도 엄청 하고 가게 됐다며 에이들러는 제 신세를 한탄했다.
“흠.”
에이들러에게 간단한 시험지를 풀게 하며 바이스 또한 생각에 잠겼다.
카이엔을 가르칠 적에는 교편 따위를 든 적이 없었다. 그런게 있던 없던 카이엔은 무기력했고 안 그래도 귀한 왕자님은 때릴 구석도 없었다.
에이들러의 경우엔 조금은 무게를 잡고 있을 필요가 있다고 여겨 대충 하나 구해서 손에만 들고 있었다.
매로 위협하는 건 좋아하지 않았지만 덕분에 집중력은 늘어난 것 같았다.
“왕성에 있을 때, 공부를 못 하면 맞으셨습니까?”
“에? 아뇨 그렇진 않았는데…”
“겁을 먹으신 것 같길래.”
누구든지 그가 손에 뭘 들고 있다면 겁을 먹었겠지만 바이스는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에이들러역시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을 수 밖에 없었다.
의문이 풀리지 않아서일까. 수업이 끝나고 나서 에이들러에게 일찍 자라면서 방을 정리해준 뒤, 바이스는 카이엔을 찾아갔다.
가느다란 교편을 들고 그가 방에 들어오자 소금이와 놀아주고 있던 카이엔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건 또 뭐야?”
“교편입니다. 가죽으로 만든 회초리 같은 거죠.”
“그건 왜 들고 왔어?”
“에이들러 왕자님의 공부를 봐줄 때 종종 들고 가는데 이걸 들고 있으면 제가 꽤나 무섭게 보이는 모양입니다. 왕자님 생각은 어떠신가요?”
“…난 네가 살상력이 없는 걸 들고 있어도 무서울 때가 있어.”
“이런 가느다란 회초리로는 수천 번을 때려도 안 죽을 텐데요?”
물론 오러를 두르면 달라지긴 하겠지만 바이스는 굳이 그 말을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의 말에 카이엔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건 그렇지만,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왕자님은 저를 어렸을 적부터 봐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무서운 모양이군요.”
“너라면 안 그러겠냐?”
“만만하게 보이는 것보단 위협적으로 보이는 게 낫긴 하겠군요.”
바이스는 바로 태도를 바꿨다.
허나 이런 건 전혀 무기가 될 수 없다면서 살짝 흔들기만 해도 이리저리 움직여대는 교편을 가리키며 다시 한 번 물었다.
“전혀 아프지도 않겠지만 무섭다면 안 들고 가는 게 낫겠죠?”
“그렇지 않을까?”
“바람소리만 요란하던데.”
카이엔에게도 한 번 휘둘러보라면서 바이스는 교편을 내밀었다.
제 손등에 찰싹찰싹 회초리질을 해보던 카이엔은 곧 고개를 저었다.
“아프진 않은데 이왕이면 매는 들지 마라.”
“흠. 그렇게 하겠습니다.”
바이스가 공부를 못 한다고 에이들러를 때릴 리도 없고, 방에 날파리가 날아다니면 그걸 잡으려고 휘두르는 일은 있을 법했다.
친척이라면서, 좀 다정하게 대해주면 어디 덧나나.
의절했으니 이제 바이올로스 후작가와는 남남으로 지내려고 그러는 걸까. 그래도 애한테는 좀 잘해줘도 되지않나.
카이엔의 눈초리에 바이스는 다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시죠.”
“…어.”
“왜 그런 눈으로 보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알아서 잘 하겠습니다.”
“그래.”
미심쩍어 하면서도 카이엔은 교편을 다시 건네주었다.
그것을 잘 접어서 주머니에 넣고 바이스가 물었다.
“저는 왕자님을 가르칠 때에도 매를 든 적은 없었죠.”
“그랬지.”
“왜 그랬는지 아십니까?”
“어… 때릴만한 구석이 없어서?”
“멍은 안 들지만 때려서 아픈 곳은 굉장히 많습니다. 반쯤은 정답이네요.”
나머지 절반의 이유를 물어보기가 심히 두려워졌다.
하지만 바이스는 지난번에 그의 앞에서 대놓고 그를 죽이고 싶었다고 말한 적이 있는 놈이었다.
카이엔은 인상을 쓰면서 입을 열었다.
“한 대 두 대 때리다가 나중에 때려 죽일까 봐 그런 거겠지.”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뭔데?”
“흠, 말하기 좀 그렇군요.”
“네가 먼저 꺼낸 말이잖아.”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그럼 대체 중요한 건 뭐란 말인가.
여전히 제멋대로인 시종 녀석을 보는 카이엔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제가 예전에 왕자님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군요.”
“그냥 나 앉혀놓고 네 할 말만 했지.”
“그래서 왕자님이 지금 이렇군요.”
“뭐야?”
“어렸을 땐 정말로 누워서 숨만 쉬고 계셨으니까요. 그럴만도 하지만. 어떻습니까, 지금이라도 제대로 가르쳐 드릴까요?”
“필요없어. 그러는 너야말로 오랫동안 후작가를 떠나 있었고 따로 하는 일도 많았을 텐데, 누굴 가르칠 깜냥이라도 돼? 나를 가르칠 때와 에이들러를 가르치는 건 다를 텐데.”
“전 항상 수련을 게을 리 하지 않으니 괜찮습니다.”
바이스는 몸이 여러 개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더 물어보고 싶지 않았기에 카이엔은 손을 저었다.
“알았으니까 나가봐. 나도 좀 쉴게.”
“알겠습니다.”
꾸벅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바이스는 카이엔의 방에서 나왔다.
그 뒤 해야할 일을 마치고 퇴근하던 그는 비셰에 관해 카이엔에게 알려주는 걸 깜빡했다는 걸 깨달았다.
저번에 연못에 빠진 이후로 몸이 좀 으슬으슬 하다더니 약한 감기 몸살로 시작해 결국엔 뻗어버린 몽마에 대한 걸 알려주지 않았다.
‘내일 알려줘도 되겠지.’
비셰가 없어도 주방은 잘 돌아갔다.
그나저나 몽마는 대체 뭐길래 물에 빠졌다고 감기까지 걸리는 걸까.
비셰가 유독 약한 건지 몽마가 다 그런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관찰 대상이 몇 명 더 있었다면 비교라도 해볼 수 있을 텐데 몽마들은 제국에 모여서 살고 있는 것 같고.
제국에 갈 일이 없는 이상 그들이 다른 몽마를 만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현재 비셰의 간호는 슬로세이와 그리델라가 도맡고 있었다.
비셰가 연못에 빠진 건 자기 잘못도 있으니 도와주겠다고 슬로세이가 슬그머니 이야기를 전달했고 그리델라는 그런 슬로세이를 도와주는 역할이었다.
혼자 두긴 걱정되어서였다. 인어가 간호를 해본 적이 있을 리가 없고.
‘…한 번 가봐야겠네.’
그리델라가 옆에 있다고 해도 슬로세이한테 맡기는 건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그가 비셰의 방을 찾아갔을 때 비셰는 멀쩡히 이마 위에 물수건을 올리고 누워있었다.
“어? 바이스 씨? 무슨 일이세요?”
“걱정되서 찾아왔습니다만 별일은 없는 모양이네요.”
“네. 간호도 이젠 필요없어요.”
“무슨 일 없으셨습니까? 슬로세이 님은 남을 간호해보는 게 처음이었을 텐데.”
“어…”
바이스의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비셰가 입을 열었다.
“…첫날에 물에 적신 수건을 펼쳐서 제 얼굴을 완전히 덮어버린 것 말고는 별일 없었어요.”
“죽을 뻔했군요.”
인어여서 물 밖의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잘 모르는 모양이다.
비셰는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숨이 막혀서 얼른 걷어내긴 했지만요.”
“그랬군요.”
“그냥 혼자 있게 해주세요… 저 생선죽도 진짜 싫어하거든요…”
“아아. 이해했습니다.”
“이틀만 더 쉬었다가 복귀할게요.”
“주방에 전달하겠습니다. 몸조리 잘 하시고요. 그리고, 묻고싶은 게 있는데요.”
감기에 걸릴 정도라면 몸 상태가 말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비셰를 똑바로 쳐다보며 바이스가 물었다.
“몽마는 인간의 정기를 흡수한다는데 그쪽은 좀 어떻습니까? 못 먹어서 그렇게 된 건 아닙니까?”
“어어… 그런 것 같기도 한데 문제는 없을 거같아요. 작은 접촉만으로도 충분하거든요. 악수를 한다거나 포옹을 한다거나 길 가다가 툭 부딪치는 것 정도? 물론 자주 해야 하지만요.”
몽마는 사람을 현혹해 그 정기를 빼낸다.
제국의 가게에서 일할 때는 몇 번 안 볼 사이기도 하고, 가깝게 지낼 일 없는 사람들이 대상이라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자리 잡고 일하는데 근처 사람들을 건드리는 건 좀, 거부감이 들었다.
별채의 이종족 식구들이 그런 그의 체질을 알고 지나갈 때마다 손을 잡아준다거나 악수를 하고 간다는 말에 바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괜찮겠군요.”
“네. 걱정하시는 일이 없게 잘 하겠습니다.”
“스토커는 본인이 조심하다고 해서 안 생기는 건 아니지만요. 그런 일이 생겨도 바로 말해주십시오.”
“네.”
짧은 면담이 끝난 뒤에야 바이스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영주성 사람들은 워낙 괴상한 몬스터며 이종족을 많이 봐서 면역이 된 모양이지만 바깥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지도 몰랐다.
비셰는 웬만해선 밖으로 내보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내일 카이엔에게 전달할 사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슬로세이가 간호 첫날부터 비셰를 질식시켜 죽일 뻔했다는 사실은 꼭 말해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