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넓은 방. 침대 위에서 에이들러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바이스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어서 마음이 심란해진 탓에 그런걸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그의 외가쪽 사촌형은 단단히 성격이 뒤틀린 것 같다며 에이들러는 한숨을 쉬었다.
그런 바이스가 가장 중요한 거라며 몇 번이고 언급한 건, 카이엔은 왕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왕이 기르겠다고 하면 몬스터라고 해도 성에서 기를 수 있을 거다. 사트로누스는 인육도 먹지 않고 카이엔에게 목줄이 잡혀서 말도 잘 들었다.
카이엔은 정통성 또한 가졌다. 그리고, 현 왕이자 에이들러의 아버지가 약속한 것도 있기에 얼마든지 자기가 돌려받아야 할 자리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카이엔은 침묵했고 왕위엔 관심도 두지 않았다.
다른 이에게 빼앗긴 그 자리를 바라지 않았다.
에이들러는, 그 자리가 카이엔이 앉아야 할 자리라면 기꺼히 양보하고 싶었다. 그러나, 바이스는 단호했다.
카이엔은 왕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서.
‘내가 왕세자가 되고, 그 뒤에 왕이 되어서 형에게 넘겨줄 수도 있을 텐데.’
그 말을 듣고서 바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카이엔이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면서.
그렇다면.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해준 걸까?’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넘길 수도 있었을 텐데 바이스는 자세한 사정까지 이야기해줬다.
그가 꼭 알고 있어야 한다고 여긴 것처럼.
다른 이들은 몰라도 되지만 그는 꼭 알고 있어야 한다고.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휴우…”
늦은 밤이었다.
첫날처럼 카이엔의 방에 베개를 들고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몇 번이고 그 자리에서 뒤척이다가 에이들러는 잠들었다.
카이엔과 함께 있는 건 좋았다. 몬스터와 이종족 손님들을 만나는 것도 좋았다. 하지만 바이스와 대화하고 나니 그 모든 것이 조금은 거북해졌다.
“…얼굴이 왜 그래? 악몽이라도 꿨어?”
“네? 어, 아니에요…”
“아니긴. 역시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가? 어쩌지?”
“여기까지 오는 데도 문제 없었잖아요. 저 진짜 괜찮아요.”
잠자리가 불편해서 생긴 문제였다면 진작에 있었어야 할 거였다며 에이들러는 애써 변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엔은 미심쩍다는 표정을 짓더니만 옆을 보며 물었다.
“바이스. 너 애한테 무슨 말 한 거 아니지?”
“무슨 말 말입니까?”
“너라면 할 말 못 할 말 안 가리고 할 거 아냐. 어른이면 어른답게 행동해.”
“전 충분히 어른답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하여간… 에이들러 너도 무슨 일 있으면 말하고. 알았지?”
“네.”
대답하면서 에이들러는 카이엔의 손을 잡았다.
그 보다도 어린 나이에 온갖 고초를 겪었을 카이엔을 떠올리니 자신도 모르게 살짝 손이 떨렸다. 작은 떨림에 카이엔은 에이들러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아침 식사를 한 뒤, 카이엔은 괜찮다고 말하는 에이들러를 그의 방으로 데려갔다.
소파에 앉혀놓고 어깨엔 담요를 둘러주었다. 맞은 편 자리에 앉아서 유심히 에이들러의 얼굴을 살피다가 그가 입을 열었다.
“향수병 같은 건 아니지?”
“어… 아니에요.”
“그럼 뭘까.”
“잠을 잘 못 자서 그래요.”
“피곤하진 않고?”
“오늘 일찍 잘게요.”
“정말 바이스가 쓸데없는 이야기 한 거 아니야? 그 녀석이라면 하고도 남을 텐데.”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카이엔은 에이들러를 유심히 살폈다.
의심은 가는데 증거가 없었다. 바이스에게 물어봤자 유들유들하게 회피할 테니 소용이 없겠지만 에이들러라면 말해줄지도 몰랐다.
카이엔의 시선에 에이들러는 움츠러들었다. 같은 사촌인데도 두 사람의 행동이 확연이 달라서였다.
“…형은, 어땠어요?”
“뭐가?”
“여기 처음 왔을 때요. 무섭지 않으셨어요?”
“글쎄. 별생각 없었을걸? 죽으면 어쩔 수 없는데 그래도 살고 싶다라곤 생각했지. …바이스가 무슨 말 한 게 확실하구나. 그 녀석 진짜-”
“제가 물어봤어요.”
“적당히 돌려서 말해줄 수도 있는 거잖아. 미안하다. 이런 말 하긴 좀 그런데, 그 녀석이 예전부터 나에 대한 일에는 좀 민감하게 반응해서…”
“괜히 떼를 써서 여기 온 것 같아요. 형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고…”
“모르는게 당연하지. 누가 알려줄 리가 없으니까.”
카이엔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바이스가 쓸데없는 짓을 해서 이 어린애가 이렇게 고민하고 있었다.
그가 어린 시절 힘든 일을 겪었다고 해서 에이들러가 미안해하고 괴로워할 필요는 없었다.
‘정말로.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니까.’
“…왕성에 편지 하나 더 쓸까? 최대한 빨리 와주라고.”
“아뇨… 아니에요.”
“네 잘못 아냐. 그리고 원래 권력 다툼이란 게 다 그런 거고. 나였어도 그렇게 했을걸?”
“형은 안 그랬을 거예요. 죄송해요.”
에이들러는 고개를 푹 숙였다. 카이엔은 그를 걱정해주고 있었지만, 그는 걱정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었다.
왕족은 중요하고 그 만큼 노리는 자가 많기에 위험에 처할 일이 많다는 건 귀가 닳도록 들어서 알고 있었다. 허나 카이엔은 바로 그런 위협을 아주 어린시절부터 겪고 있었다.
바이스도 제 입으로 말하지 않았는가. 자기가 없다면 카이엔은 진작에 죽었을 거라고.
철없는 행동을 후회하며 에이들러는 눈을 꼭 감았다. 울고 싶지 않아서 애써 꾹 참고 있었는데 무언가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미안하다. 내가 미안해.”
그 목소리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양손으로 얼굴을 덮어 가리며 에이들러가 웅얼웅얼,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냈다.
“왜… 흑, 으으… 형이 왜, 사과… 해요…?”
“나 때문에 네가 심란해졌잖아. 바이스는 내가 혼내줄게.”
“으…”
“애한테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난 정말 괜찮은데 말이야. 다들 왜 그렇게 내 눈치를 보는지 모르겠다. 특히 왕성에 관련된 거라면 더더욱.”
이후는, 거의 푸념에 가까웠다.
“원망도 없다. 미움은… 글쎄. 날 죽이려 드는 건 조금 괘씸하다고 여기고 있지만 나를 왜 두려워하는지 아니까 이해할 수 있어. 그렇다고 얌전히 죽어줄 생각은 없지만.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있잖아.”
“나 계속 이렇게 살 거야. 몬스터 키우고 이종족 친구들이랑 어울리면서 이대로 계속. 넌 내 말 믿지?”
에이들러는 울먹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를 지으며 카이엔은 어린 사촌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렇게 됐으니까, 넌 나중에 커서도 다른 녀석들이 나 처리해야 된다고 고집부려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안 그럴 거예요. 절대로.”
“믿음직스럽네.”
“그런데…”
“응?”
“레이지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어요…”
“내가 좀 더 조용히 살면 되겠다.”
될지 모르겠지만.
카이엔은 뒷말을 애써 삼켰다.
그저 에이들러가 울음을 그쳤으면 하는 마음에 안심하라며 웃어보이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결국엔 품에 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품 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작은 아이였다. 카이엔은 작게 혀를 찼다.
그에게도 이렇게 어린 시절이 있었을 텐데. 그때 뭘 했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때도 여전히 사트로누스의 품 안에 몸을 누인 채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고 그저 목숨만 붙어있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한참 동안 에이들러를 달랜 뒤 카이엔은 오늘 밤에 같이 자자고 약속까지 해줘야 했다.
그런 다음 에이들러를 그의 방에 두고 바이스를 찾아가서 혼을 냈다.
애한테 무슨 말을 한 거냐는 물음에 바이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어차피 공주는 거의 눈치챈 모양이던데요?”
“모르는 애는 모르는 채로 내버려둬야지.”
“어차피 왕자님이 잘 달래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너 진짜…”
“그렇게 그 어린 왕자는 당신의 편이 되어주겠죠. 바이올로스 후작가를 멀리하게 되면 더 좋고요.”
“너…”
“제가 원하는 건 당신의 안전뿐입니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어요. 제 친족이라고 할지라도요.”
카이엔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입을 여는 바이스의 시선은 날카롭게 벼려진 검과 비슷했다.
“시도는… 네. 조금은 심술이 있다고 칩시다. 그래도 결말은 괜찮게 나오지 않았나요?”
“어린아이잖아. 네가 심했어.”
“다음부턴 그 점을 염려하도록 하죠.”
“그래도 널 떼어놓을 수 없다는게 가장 큰 문제다.”
“시중은 잘 들겠습니다. 절 거부할지도 모르겠지만요.”
“하아아…”
시름이 깊어지는 한숨이었다.
그리고 그 시름은 밤이 되어서 에이들러가 베개를 들고 같이 자러 왔을 때 더욱 심해지고 말았다.
카이엔의 옆에 누운 채 에이들러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이렇게 말했다.
“형이 이렇게 좋은 사람이란 걸 레이지도 알아야 하는데.”
“알아서 뭐하게.”
“그럼 결혼해도 좋다고 할 거 아니에요?”
“그건 내가 싫다.”
“부마가 되면 생명의 위협은 덜 받지 않을까요?”
“싫어.”
안 그래도 복잡한 족보가 더 꼬이고 만다.
친척간의 결혼은 흔하지만 이건 아니라며 카이엔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이 뭐가 그리 재밌는지 에이들러는 웃고 있었다.
울던 것보단 낫다며 카이엔은 그런 에이들러를 가만히 놔두기로 했다.
전날 잠을 설쳤던지라 에이들러는 불을 끄고 나니 금세 잠들었다. 옆에서 누가 자는 일이 드물었기에 이번엔 카이엔이 몇 번이고 몸을 뒤척였다.
에이들러가 그의 옆에 딱 붙어서 자려고 한 탓에 자세를 쉽게 바꾸지 못하고 몸을 비틀면서 편한 자세를 찾으려고 애를 썼다.
…확실히, 누군가의 온기는 낯설었다. 사트로누스라면 모를까.
“으음…”
괜히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땐 사트로누스도 침대에 올라오게 해 그 보라색 털에 파묻혀서 자기 일쑤였다. 그게 아니라면 사이좋게 바닥에 담요와 방석등을 깔아놓고 잤다.
덕분에 온 몸에 보라색 털이 덕지덕지 붙어서 떼어내는 게 일이었고 바이스는 그 꼴을 보고 알레르기가 안 생긴 게 다행이라며 농담을 했다.
만티코어 털 알레르기라니. 지나가던 개도 웃겠다.
몇 번 더 뒤척이던 카이엔도 밤이 깊어지자 곧 잠들었다. 그런 카이엔을 바라보는 누군가가 있었다.
야행성인 햄스터 몬스터인 소금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만 제 집 안에 보관해놓은, 껍질 깐 해바라기 씨를 하나하나 집 밖에 옮겨놓았다.
총 열네 개의 해바라기 씨를 꺼내놓고 소금이는 뿌듯해했다.
위대한 햄스터 몬스터인 본인은 무려 숫자도 셀 수 있었던 것이다!
카이엔이 몇 번이나 몸을 뒤척였는지 세고있던 소금이는 해바라기 씨를 밖에 둔 다음 제 집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와 말이 통하는 건 카이엔 뿐이었지만 바이스가 어떻게든 그에게 신호를 보내려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영리한 햄스터 몬스터인 본인은 그림도 볼 수 있었다!
바이스가 뭘 원하는지 파악해낸 소금이는 해바라기 씨로 신호를 주었다. 아마 내일 아침 와서는 그걸 보고 알아차리겠지.
참으로 보람찬 하루였다며 소금이는 기쁘게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흠?”
카이엔을 깨우러 온 바이스는 소금이 집 앞에 어지럽게 놓여있는 해바라기 씨를 발견했다.
껍질을 까놓은 게, 아무리 봐도 소금이가 나중에 먹으려고 저장해놓은 것 같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는 해바라기 씨에게 시선을 뗐다. 버리면 나중에 소금이가 카이엔에게 굉장히 서운해할 것 같아서 일단 두고 볼 셈이었다.
“왕자님.”
“응…?”
“어젯밤에 무슨 일 있으셨나요?”
“없었는데?”
“흐음. 아무것도 아닙니다. 역시 제가 몬스터와 소통하는데에는 장벽이 있군요.”
“허?”
잠이 덜 깬 카이엔은 바이스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서 의아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