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아.”
바이스는 카이엔의 시종일 뿐이었다. 그런데 한 나라의 왕자가 친족의 시종에게 형이라는 호칭을 붙이다니?
인간 세상의 권력이나 신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슬로세이였지만 그 호칭이 이상하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눈이 동그래진 슬로세이는 에이들러를 쳐다보다가 카이엔에게 시선을 돌렸다.
애써 그 눈을 외면하면서 카이엔이 말했다.
“…바이스한테 물어봐.”
“안 알려줄 게 뻔한데!”
“나는 말 못 한다. 가자, 에이들러.”
“으응…”
급하게 카이엔은 에이들러와 함께 그 장소를 빠져나갔다.
카이엔이 빠른 걸음으로 걷자 에이들러도 열심히 카이엔의 보폭에 맞춰서 반쯤 달리다시피 움직였다.
두 사람이 가버리자 슬로세이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가만히 서있다가 엔베인에게 물었다.
“넌 뭐 들은 거 없어?”
“응? 아니… 없는데.”
“힝. 대체 뭐지? 바이스 씨는 대체 정체가 뭐야?”
“그러게.”
그 자리를 벗어난 카이엔은 어느정도 별채에서 멀어지고 나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바이스는 그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혔고 함께 왕성으로 갔던 일행에게도 자신이 바이올로스 후작가의 사람이라는 걸 알렸지만 카이엔이 바이스의 동의없이 다른 이들에게 그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카이엔이 힘들어하는 만큼 에이들러도 바쁘게 발을 움직였으므로 옆에서 헉헉 숨을 몰아쉬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느정도 숨쉬는 게 편해지자 에이들러는 카이엔에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제가 말실수를 해서…”
“아냐. 바이스라면 슬로세이가 물어보면 순순히 대답해줄걸?”
“그럴까요…”
“알고보니 우리들 사이의 연관성이란 게 참 이상하잖아. 건너건너 친족이라니 참…”
혀를 차며 카이엔은 기지개를 쭉 켰다.
왕성으로 편지를 보냈으니 그는 그곳에서 에이들러를 데리러 올 사람들이 올 때까지 이 어린 사촌 동생을 잘 보살펴줄 의무가 있었다.
비셰를 만나기 위해 두 사람은 이번엔 주방으로 향했다.
여전히 재료 손질 담당인 건지 비셰는 글레이터로 레몬 껍질을 긁어내고 있었다.
아마 디저트용으로 손질하고 있는 모양이었는데, 글레이터에 손가락을 갉아버리지 않게 조심하면서 레몬을 이리저리 돌려가면서 노란 껍질만을 긁어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비셰를 놀래키지 않을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한 뒤 카이엔은 작게 헛기침하는 소리를 냈다.
“어? 누구… 왕자님?”
“안녕.”
“여긴 어쩐 일이세요? 오셨다는 말은 전해 들었어요.”
“…참 빠르네.”
“어제 오셨잖아요. 오시지마자 당연히 퍼지죠.”
환하게 웃으면서 비셰가 말했다.
눈부시게 잘생긴 미남이 요리를 하고 있는 모습에 에이들러의 눈이 다시 한 번 휘둥그레졌다.
도저히 주방에서 막내 일을 하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할 수 없는 외모였다.
물론 카이엔의 눈에는 그냥 헤실헤실 웃고있는 철없는 몽마일 뿐이었다.
비셰에게도 에이들러를 소개시켜주니 그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님이라는거군요. 음음! 다른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나요?”
“어렴풋이는? 별채 사람들한텐 내가 다 말했어. 하지만 널리 퍼지는 것도 안 좋겠지.”
“그렇겠죠? 왕족이라면 납치당할 수도 있잖아요. 수도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엄청 오래 걸릴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바이스를 붙여두려고. 나보단 얘가 더 걱정되니까.”
“…괜찮을까요?”
비셰의 그 물음에는 여러가지 뜻이 내포되어있었다.
무슨 걱정을 하는지는 잘 알고 있으므로 카이엔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에이들러를 보았다.
바이스는 에이들러의 시중을 들 사람으로 믿을만한 사람들을 붙였다고 했지만, 그래도 만약을 대비해서 나쁠 건 없었다.
비셰까지 만나고 나니 점심 먹을 시간이 되었다. 별일 없으면 항상 식사는 같이 하자는 카이엔의 말에 에이들러는 얼굴이 환해졌다.
“여기는 참 좋은 것 같아요!”
“그래? 몬스터며 이종족이 많은데 무섭지 않아?”
“다 좋은 사람들이잖아요. 형은, 참 신기해요. 모두랑 친하잖아요.”
“그런가…“
어쩌다보니 하나둘 모인 것뿐인데.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카이엔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점심식사를 한 후에 에이들러는 공부할 시간이라며 아쉬워하면서 카이엔의 손을 놓았다.
공부를 따로 봐줄 사람이 없긴 하지만, 책이라도 읽어보라고 정해준 시간이었다.
카이엔이 어렸을 적 그의 공부는 바이스가 봐주곤 했는데, 바이스는 그의 시종이니까 에이들러를 봐줄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다.
그가 기르는 몬스터며 동물들이 궁금하다고 마차에 몰래 숨었던 어린 아이.
아마 왕성으로 돌아가게 되면 부모님인 국왕부부에게 크게 혼이 날 테니 조금이라도 공부를 하고 가야 덜 혼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방으로 돌아온 카이엔은 조용히 바이스를 불렀다.
”네가 에이들러의 옆에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진심이십니까?”
“응.”
“왕자님은요?”
“라스를 데리고 다닐 게. 그게 아니라면, 글라스를.”
“흠. 아직 수련이 모자르지만, 어쩔 수 없군요. 글라스 씨가 시종 대리로서 잘 해주기를 바라야겠습니다.”
“뭘 수련까지야…”
“왕자님도 제가 곁에 없으면 많이 불편하실 텐데요. 이번 기회에 그걸 알게 되실 겁니다.”
“어… 그래.”
카이엔이 떨떠름해하며 대답했지만 바이스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렇게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며 카이엔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기회에 저의 소중함을 알아주시면 좋겠군요.”
“소중함까지야…”
“제가 왕자님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요.”
“그런데 그 중에 내가 아는 건 몇 가지 없지 않아? 네가 안 알려주잖아.”
“흠. 왕자님도 많이 성장하셨군요.”
“말 돌리지 말고.”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거든요.”
바이스는 글라스에게 알려줄 게 아직도 많다면서, 인수인계를 해야겠다면서 방에서 나갔다.
바이스가 나가자 카이엔은 몇 걸음 걸어가서 말없이 소금이의 집 지붕을 톡톡 두드렸다.
“찍?”
- 뭐냐?
“소금아.”
- 뭐냐? 왜 그러냐?
“바이스는 대체 뭐가 문젤까…”
- 뭔소리를 하는 거야?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
그가 꽤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음에도 소금이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소금이는 항상 그의 방에 있으니까, 그래도 조금은 반가워할 줄 알았는데.
루브야 맨날 잠만 자고 있으니 그가 방에 있는지 없는지조차 몰랐을 테고.
어쩐지 서운해져서 카이엔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가 직접 바이스에게 부탁했기에 바이스는 본인이 직접 에이들러 옆에 붙어서 이것저것 도와주기로 했다.
아무리 카이엔이 바로 옆의 방에 있다고 해도 세자르는 낯선 환경이었다.
그런 에이들러에게 바이스가 시종으로 옆에 붙어있어주겠다고 하니, 에이들러는 정말 그래도 되는거냐며 기뻐하면서도 미안해했다.
몇 번이나 괜찮은 거나고 묻는 질문에 바이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왕자님도 허락하신 일입니다.”
“그렇구나…”
“세자르에 있을 동안 즐겁게 지내셨으면 좋겠군요. 물론, 공부도 열심히 하시고요.”
“윽.”
“제가 공부도 봐드릴 테니 안심하세요.”
“안할 줄 알았는데…”
에이들러는 한숨을 폭 쉬었다.
어린 아이의 한숨에는 공부하기 싫다는 뜻이 섞여 있었고 바이스는 작게 웃었다.
“카이엔 왕자님도 어렸을 적에는 몇 번 그러신 적이 있었죠.”
“형도요?”
“네. 공부는 어려우니까요. 물론 전 혼자서도 잘 했지만.”
“아…”
“개인차가 있는 법이니까요. 주눅 들지 않으셔도 됩니다.”
“레이지는 재미 없는 공부도 참고 잘 하는데, 전 왜 이런지 모르겠어요.”
“원래 어린애들은 놀면서 크는 법입니다.”
괜찮다며 바이스는 에이들러를 위로해주었다.
카이엔은 사촌 동생인 에이들러를 신경 쓰면서 어느정도는 챙겨주려고 했지만, 같은 사촌지간임에도 바이스는 에이들러를 특별 취급하지 않았다.
지금 에이들러의 옆에 있는 것도 카이엔이 그에게 부탁해서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적당히 대하면서 넘겼을 것이다.
그가 바이올로스의 장자라는 것을 밝힌 건 어디까지나 경계심을 낮추고 이 어린 왕자가 그에게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함이었다.
현 왕의 아들. 아무리 공주가 뛰어나다고 해도 그들은 왕자 쪽을 후계자로 삼고 싶어 할터.
아직 어린 지금 이 아이에게 카이엔이 위협적이지 않다는 걸 제대로 못 박아둬야 나중에 에이들러가 자란 뒤에 카이엔에게 칼을 들이밀지 않을 것이다.
이건 그 밑작업에 불과하다며 바이스가 입을 열었다.
“궁금하신 게 있다면 뭐든지 물어보셔도 됩니다. 공부 외의 것들도요.”
“정말요?”
“네. 전 어른이니까요. 제가 어린 시절에 사고 쳤다면 벌써 왕자님만한 자식이 있을지도 모르죠.”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뭐, 그 정도로 제가 어른이라는 뜻입니다.”
어깨를 으쓱하곤 바이스는 에이들러에게 한 번 더 말했다.
알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물어보라고.
그 아이가 궁금해할만한 것은 한정되어 있었고 바이스는 그것을 알려줄 마음이 있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에이들러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더니 바이스에게 소파를 가리켰다. 앉아서 이야기하자는 뜻이었다.
서로 마주보게 소파에 앉아서 에이들러는 살짝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바이스는 빙긋 웃었다.
“그… 형은 왜, 의절한 거예요?”
“아. 저 말입니까?”
“네.”
“그야 후작님과 의견이 갈라져서죠. 전 카이엔 왕자님의 편입니다. 보통 귀족들은 현 왕에 충성해야 하니 제가 예뻐보일 리가 없죠.”
“그렇구나…“
바이올로스 후작가라면 외가다.
후작은 몇 번 만나보긴 했지만 굉장히 냉정하고 무서워보였다.
물론 어머니와 함께 있을 땐 어쩐지 좀… 많이 혼나는 것 같긴 했지만.
바이올로스 후작가에는 그의 사촌 형제가 세 명 있었는데 그 중 두 사람은 파티같은 행사에서나 볼 수 있었다.
그 외에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은 없었다. 다들 어른이었으니까.
바이스는 카이엔보다도 어른이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대해주었다.
그건, 현재 그는 ‘페르세이지’가 아니라 ‘바이스’로서 이 곳에 존재하기에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곰곰이 후작가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던 에이들러의 생각이 다른 곳으로 튀기 전에 바이스가 말을 이어나갔다.
”그것도 있고, 제가 없으면 카이엔 왕자님은 바로 죽을 수도 있거든요.”
“네?”
“그야, 선왕의 자식인데다가 지금은 이렇게 멋지게 자라지 않았습니까. 현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라고 여겨지는 거죠.”
“아…”
에이들러가 어리긴 했지만 완전히 바보는 아니었기에 바이스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레이지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도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이 있으니까.
선왕의 자식.
그제야 에이들러는 카이엔이 왜 이곳에 있는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
입을 꾹 다물었다가 에이들러는 바이스를 바라보았다.
의중을 알 수 없는 눈이었다. 눈이 마주치면 웃어보였지만 에이들러는 그 눈동자 안에 아무 감정도 깃들어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긴가민가했었지만 이젠 확실해졌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바이스는 그랬다.
자신을 바이올로스 후작의 장자라고 소개하면서. 그들 두 사람이 친척 관계라고 하면서. 그 말을 꺼내면서 반가워하고 신기해하는 게 아니었다.
그의 반응을 살피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바이스는 철저한 사람이니까 아마 그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대놓고 신호를 주고 있는 것이라고, 에이들러는 생각했다.
방에는 그들 둘 밖에 없었다.
‘물어봐도 되는 걸까.’
바이스는 그가 물어보는 걸 바라는 것 같았다.
카이엔이 왜 이곳에 있는 건지. 그에게 도대체 어떤 일이 있는 건지.
물어보면 모조리 대답해주는 걸까?
닫혀있던 입이 열리면서 에이들러가 목소리를 냈고 바이스는 기다렸다는 듯, 그 물음에 답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