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난 뒤, 에이들러는 카이엔의 방에서 하루만 자고 가기로 했다.
내일부턴 혼자서 자기로 단단히 약속을 하고 에이들러는 카이엔의 방을 구경했다.
왕성에 있는 그의 방에 비하면 작은 편이고 화려한 가구도 적었다.
루브가 들어있는 수조를 한 번, 소금이가 뛰놀고 있는 나무 놀이터를 한 번 쳐다보고 에이들러는 카이엔을 보았다.
여전히 목욕 가운만 입고 있는 그는 침대 머리에 몸을 기댄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많이 피곤한가 보다.’
그가 괜히 찾아온 걸까. 조금 미안해졌다.
카이엔에 비하면 그는 아직 멀쩡했으니까.
“형. 형.”
“음…?”
“졸리면 자도 돼요. 저도 일찍 잘래요.”
“아… 미안하다. 집에 와서 그런지 갑자기 피곤하네. 더 안 놀아도 되겠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날래요.”
“그래.”
베개를 가져오겠다며 에이들러는 쪼르르 문을 향해 달려갔다.
금방 베개 하나를 안고 돌아와서 침대 위에 가져온 베개를 올렸다.
카이엔 혼자 자기엔 넓었던 침대는 두 사람이 누워도 충분히 넓었다. 카이엔은 눕자마자 바로 잠들었지만 에이들러는 말똥말똥하게 눈을 뜨고 불 꺼진 천장을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옆에서 자는 건, 어렸을 적 이후론 처음이었다.
어렸을 땐 천둥번개가 치는 날 레이지랑 손을 꼭 붙잡고 같이 자곤 했었다. 지금은 둘 다 컸다고 같이 노는 건 상관없었지만 예전처럼 같이 잘 수는 없었다.
곤히 잠든 카이엔의 숨소리 말고 소금이가 나무를 갉작대거나 파바박소리를 내면서 노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도 카이엔은 깨지 않았다.
깜빡깜빡.
눈을 감았다 뜨는 것을 반복하며 에이들러는 몸을 뒤척였다.
그보다 열 살 가까이 많은 사촌형제의 등이 보였다.
이곳에서, 카이엔은 어떻게 지냈을까.
몬스터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왕자를 두려워해 다들 그를 먼 곳까지 쫓아내버린 걸까?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기에 에이들러는 아무것도 몰랐다. 모든 인과를 짜맞춰서 해답을 도출해낼 정도로 추리력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렇게 다정한 사람이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행여 그의 귀에 비명소리가 들릴까봐 꽉 끌어안은 채 귀를 막아준 사람이었다.
난데없이 끼어든 불청객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싫은 기색 하나 내비치지 않았다.
카이엔을 위해 그는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말없이 눈동자를 굴리던 에이들러는 팔을 뻗어 카이엔을 끌어안았다. 넓은 등에 이마를 대니 따뜻한 체온이 전달되었다.
왕성에 있었을 땐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도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어머니는 엄격했고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의 뜻에 동의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괜찮지 않을까?
카이엔에게 있어서 그는 그저 어린 사촌동생일 뿐일 테니까.
허공에서 날개를 펄럭이며 커튼 사이로 드러난 틈으로 방 안을 들여다보던 글러티나는 조심스럽게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바이스는 만약에 대비해야 한다며 글러티나에게 감시를 부탁했다.
밤의 어둠에 몸을 가리고 그 어둠조차 꿰뚫어보는 눈으로 저택 안을 응시하고 있던 글러티나는 가만히 그 자리에 멈춰서서 비행했다.
어린 왕자는, 카이엔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
계속 감시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녀는 조용히 공중에 뜬 채로 날이 밝을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다음 날, 카이엔은 영주성의 다른 이들을 소개해주었다.
어제 인사를 나눈 릴리시아와 사트로누스, 방에서 만난 소금이와 루브를 제외하고 나니 남은 건 페이리 뿐이었다.
아침식사 후 카이엔은 에이들러의 손을 잡고 페이리의 다락방으로 향했다.
이미 소식을 들은 건지 페이리는 카이엔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아주 조금만 열었다. 눈만 보일 정도의 틈으로 그녀가 말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반가워요.”
“…페이리.”
“네?”
“밖으로 나와도 돼.”
“그치만 제 몸통은 거미인 걸요. 무서워할 거예요.”
쩔쩔매면서 페이리가 대답했다.
처음 그녀가 방벽을 넘어 영주성에 왔을 때, 이질적인 그녀의 모습이 대다수의 인간들에게 흉측해보인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여기 사람들이야 그녀에게 익숙해졌지만 아직 어린 아이가 보기엔 징그러울 게 뻔하다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허나 카이엔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연신 괜찮다고 말한 끝에 페이리는 한숨을 쉬면서 문을 조금 더 열었다.
…다리 두 개만 내민 채로.
“더는 못 나와요! 분명 무서워할 테니까요!”
“에이들러, 무서워?”
“아뇨 별로…”
“정말?”
“네.”
눈앞에서 카이엔과 페이리가 말다툼 하는 걸 목격한 에이들러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반신은 인간, 하반신은 거미인 아라크네라는 설명을 미리 들었기 때문에 몇 번 상상한 모습 그대로였다.
거미를 자세히 관찰해본 적은 없지만 페이리의 몸통과 다리는 날렵했다.
새까만 다리는 끝으로 갈수록 뾰족해졌다. 저걸로 몸을 지탱하고 걸어다니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에이들러는 페이리를 정면으로 응시했고 페이리는 결국 문을 완전히 열고 밖으로 나왔다.
“정말이지… 이런 면을 보면 왕자님도 점점 바이스 씨를 닮아가는 것 같단 말이에요.”
“내가 그 녀석을? 끔찍한 소리 마.”
“어떤 생물이던 양육자의 성격을 따라가는 법이니까요. 제가 제 모습을 본 인간들의 반응에 민감하다는 거, 아시잖아요.”
“괜찮을 것 같았어.”
“에휴… 제가 뭐라고 더 말할 수 없네요. 안녕하세요, 작은 왕자님? 세자르 남작님의 영주성에서 신세지고 있는 아라크네, 페이리예요. 만나서 반가워요.”
“으응… 나도.”
페이리가 살며시 손을 내밀자 에이들러는 얼른 그 손을 잡고 악수하듯 흔들었다.
인간과 다른 모습을 한 채 인간들 틈에 섞여사는 페이리가 모습 때문에 많은 곤경을 겪었다는 걸, 그녀의 말만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난 안 무서우니까 걱정하지 마!”
“다행이네요. 카이엔 왕자님이랑 친하게 지내주세요.”
“내가 애냐…”
“어렸을 때부터 봐왔는 걸요.”
웃으면서 페이리가 대답했다.
그녀는 독서를 하던 중이었기에 카이엔과 에이들러는 페이리의 개인적인 시간을 더 이상 방해하지 않기로 하고 물러났다.
손을 잡고 함께 계단을 내려가며 복도를 걷고, 두 사람은 저택 밖으로 나왔다. 정원을 산책하면서 한번 더 릴리시아와 인사를 나누었고 사트로누스도 만났다.
카이엔의 손님들이 묵고 있는 별채로 가니 마침 밖에 나와있던 슬로세이가 가장 먼저 손을 흔들면서 달려왔다.
“왕자님~!”
“어.”
“도착하자마자 바로 만나러 왔어야지, 너무해! 선물은?”
“없어. 급하게 왔거든.”
“에엥? 정말? 남작님만 먼저 돌아와서 걱정했다구!”
“그런 사람이 선물부터 입에 담냐?”
“멀쩡히 돌아왔으니까.”
웃으면서 슬로세이는 슬쩍 카이엔에게 다가갔다.
한 손은 에이들러가 잡고 있었기에 비어있는 다른 팔을 확 끌어안으며 슬로세이는 헤실헤실 웃으면서 카이엔에게 매달렸다.
“그래도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다! 왕자님은 나 안 보고 싶었어?”
“별로.”
“진짜 너무하네.”
“형, 누구예요?”
“인어. 식객…이라고 하기엔 돈 내고 지내고 있으니 손님이라고 해줘야겠지?”
“인어라니… 전설에만 나오는 줄 알았는데.”
“무려 난 인어족 공주님이라구!”
뽐내듯 살짝 턱을 치켜들고 슬로세이가 말했다.
허나 자랑하기엔, 옆에 있는 사람 둘 다 왕자였다. 전혀 부러움을 살만한 장점이 아닌 것이었다.
에이들러는 멀뚱히 슬로세이를 쳐다보았다.
곱슬거리는 물빛 머리카락이 슬로세이가 움직일 때마다 파도가 치는 것처럼 흔들렸다.
보기 드문 머리색에 길고 짙은 속눈썹을 가진 굉장히 예쁜 소녀였지만 에이들러는 조금 놀라기만 했다.
그저, 자기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누나뻘되는 인어가 그의 사촌형과 굉장히 친해보여서 경쟁심이 들었다. 게다가 인어공주라고 하지 않는가!
인어공주에 관한 동화 정도는 알고있었기에 슬로세이를 쳐다보는 에이들러의 눈동자에 경계심이 슬그머니 더해졌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그리델라는-”
“으음, 그건 이따 이야기하자.”
그리델라는 에이들러가 있을 동안에는 고양이 모습을 하고 있어야 했다.
라스도 정체를 숨기고 늑대인 척 해야 하니 남은 건 글러티나와 엔베인, 비셰였다.
엔베인이 어디에 있을까 곰곰히 생각한 끝에 카이엔은 에이들러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슬로세이가 그의 팔을 붙잡은 걸 놓지 않고 계속 졸졸 따라왔다.
“어디가?”
“다른 사람들이랑도 인사시키려고 그래. 아, 혹시 엔베인 어딨는지 알아?”
“으으음- 오늘은 못 봤어!”
“그래? 글러티나는?”
“방에 있지 않을까?”
“비셰는 주방에 있을 테고…”
그런데 비셰를 소개해줘도 되나? 카이엔은 순간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인간의 정기를 흡수하는 몽마가 나쁜 건 아니었지만 과거 이야기를 하다보면 비셰가 스토커 때문에 제국에서 건너왔다는 것과 제국 내에 몽마가 법과 불법의 경계에서 줄타기하는 사업 이야기가 나올지도 몰랐다.
어차피 바쁠 테니 얼굴만 보여줘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카이엔은 엔베인부터 찾기로 했다.
다행히 엔베인은 별채 뒤뜰에서 마검 대신 목검을 든 채 허수아비를 때리고 있었다.
진검 대신 연습용 목검을 들고 훈련을 하는 모습에 카이엔은 엔베인을 불렀다.
“엔베인!”
“…아. 왕자님.”
그의 목소리를 듣고 엔베인은 바로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다크 엘프를 보고 에이들러는 입을 딱 벌렸고 카이엔은 그런 사촌동생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싶었다.
“오셨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많이 피곤하진 않으세요?”
“어제 일찍 자서 괜찮아. 넌 그 동안 어땠어? 슬로세이가 귀찮게 굴지는 않았어?”
“왕자님! 나 바로 옆에 있거든?”
“너도 엔베인 괴롭힌 거 아니지?”
“안 괴롭혔어!”
억울하다며 슬로세이가 목소리를 높였지만 엔베인은 슬그머니 카이엔의 시선을 피했다.
귀찮게 굴었구나. 그게 분명하다며 카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은 건지 슬로세이는 안 괴롭혔다면서 주먹쥔 손으로 열심히 카이엔의 옆구리며 등을 두드려댔다.
그 모습에 에이들러는 경악했다.
“혀, 형…”
왕족인데! 왕자인데!
아무리 상대가 인어공주라고 해도 무례한 행동이었다. 에이들러가 뭐라고 말하려고 하자 카이엔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슬로세이, 그만. 우리야 이런게 익숙해도 에이들러는 그렇지 않으니까.”
“칫… 나 진짜 별 거 안 했는데.”
“그래, 그래. 엔베인 너도 괜찮았어? 이곳에 무슨 일이 생기진 않았었고?”
“으음… 남작님 혼자 돌아오셨을 땐 정말 놀랐지만, 사정을 전해 듣고 나선 안심하기로 했습니다. 바이스 씨가 같이 가셨으니까요.”
“그럼 다행이고. 지금은 훈련 중?”
“훈련이라고 할 것도 못 돼요. 마검은 경험을 쌓으려면 실전을 겪어야 한다면서 검은 숲으로 들어가자고 맨날 말하거든요.”
“혼자는 위험하니까 가려면 다른 이들과 동행해. 같이 갈만한 사람이… 흠. 글러티나 밖에 떠오르지 않네.”
“혹시라도 가게 된다면 미리 말씀드릴게요.”
“응. 아, 이쪽은 내 사촌동생이자 현 1왕자인 에이들러.”
“안녕하십니까.”
“어… 어어…”
이야기를 하다보니 꽤 늦은 자기 소개가 시작되었다.
고개 숙여 인사하는 엔베인을 보고 에이들러는 얼떨떨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크 엘프들이 더스크라이즈에 산다는 건 그 역시 역사공부를 해서 들은 적이 있었다. 허나, 직접 눈으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더스크라이즈는 그 드넓은 땅의 이름이었고 그 안에서 사는 다크 엘프들은 나라를 이루지 않고 작은 마을을 이루면서 산다고 했으니까.
도대체 카이엔은 어떻게 다크 엘프와 만나게 된 걸까?
분명히 그는 상상도 못할 멋진 이야기가 있을 거라며 에이들러는 존경스럽다는 눈으로 카이엔을 바라보았다.
“혹시 글러티나 봤어?”
“아. 오늘은 피곤하다면서 방에만 있을 거라고 했어요.”
“그래? 그럼 글러티나는 내일 만나야겠네.”
“왕자님, 그럼 그 다음은 혹시 비셰야?”
“응. 너도 가려고?”
“아니. 난 안 갈래.”
뺨을 부풀리며 슬로세이는 카이엔에게서 떨어지더니 반 바퀴 빙 돌아섰다.
“맨날 내가 놀러갈 때마다 간식먹고 싶어서 온 거냐고 물어본단 말이야. 물론 주니까 받긴 했지만…”
“친해졌나 보네.”
“내가 놀아주는거야!”
“그래. 비셰한테도 그렇게 전해줄게.”
“다른 사람도 또 있어요?”
“응. 그러니까- 몽마라고, 꿈에 간섭할 수 있는 종족.”
“우와.”
“여기서는 요리 배우고 있어.”
“…엥?”
꿈과 요리라니, 전혀 연관성이 없었다.
에이들러의 얼굴을 보고 카이엔은 작게 웃었다.
“바이스가 요리나 하라고 그쪽으로 보냈거든.”
“페… 바이스 형이요?”
“에? 형? 바이스 씨한테 형이라고?“
깜짝 놀라 묻는 슬로세이의 말에, 카이엔과 에이들러는 그들이 말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