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카이엔 일행이 에이들러와 함께 세자르를 향해 열심히 이동하고 있을 때.
왕실에서는 왕자의 부재를 삼일이나 지난 뒤에 눈치챘다.
레이지가 일인이역을 제대로 소화해낸 덕분이었는데, 삼일 동안 딸이 방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말에 왕비가 직접 공주의 방 앞까지 찾아왔다.
불러도 대답이 없자 문을 부수라는 왕비의 명령이 떨어졌고 시종들이 쩔쩔매면서 문을 부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제야 왕비는 무슨 일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고 에이들러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레이지.”
“윽.”
평소 국왕 일가는 함께 식사 자리를 갖는 일이 거의 없었다.
왕은 왕대로 일하느라, 왕비는 왕비대로 일하느라, 자식들인 왕자와 공주 또한 공부하면서 제 일정을 소화해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가까운 시종, 시녀들은 레이지와 에이들러에게 단단히 입막음을 당했기에 한마디도 하지 못 했다.
현장을 들킨 레이지는 순순히 제 잘못을 시인했다.
차가운 시선에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고는 있는 거니?”
왕비가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장소를 바꿔서 서로 마주 보며 앉은 모녀의 사이에선 훈훈한 분위기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왕자는 사라졌고 동생인 공주가 그인 척 연기를 하고 있었다.
두 아이가 함께 계획을 짠 것이었다. 그리고 현재, 에이들러가 어디에 있는지는 레이지밖에 알지 못 했다.
“에이들러는 어디에 있지?”
레이지가 오빠이자 경쟁자인 에이들러를 제거하기 위해 손을 썼을 거라고 생각하긴 어려웠다. 아직 어린애였고 후계자는 제대로 정해지지도 않은 상태였으니까.
허나 결혼의 이야기가 나와버렸으니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도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레이지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쳐들었다. 어머니인 왕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녀가 외쳤다.
“결혼하기 싫단 말이야! 에이들러는 그 오빠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놀러 가라고 보냈어! 자기도 간다고 했어! 늑대 구경하러 간다고 했단 말이야!”
“레이지, 너-”
“그렇게 걱정했으면서 어떻게 삼일이나 지난 뒤에야 안 건데? 다들 바보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레이지는 응접실에서 빠져나와 제 방으로 달려갔다.
문이 부숴져서 왕비가 방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잠금장치가 멀쩡한 오빠의 방으로 달려가는 것도 이상했다.
길게 길러서 땋아올릴 수 있을 정도였던 머리카락은 에이들러처럼 짧게 잘라 목 언저리에서 흔들렸다. 좀 더, 오래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 어린 그들 남매인지라 레이지가 에이들러인 척 연기하는 건 쉬웠다. 게다가 쌍둥이였고.
방 침대에 엎드린 채 레이지는 베개에 얼굴을 문질렀다.
‘에이들러도 곧 잡혀오겠지.’
카이엔을 따라갔다고 했으니 아마 당장 가서 잡아오지 않을까?
바보 같은 오빠는 그래도 바깥공기를 쐬고 와서 좋다고 말할 게 분명했다.
에이들러가 돌아오면, 다음 번에 이런 식으로 일을 저지를 땐 좀 더 제대로 계획을 짜서 실행에 옮기자고 요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레이지는 한숨을 푹 쉬었다.
왕비인 유라세는 에이들러의 가출 소식을 즉시 왕에게 전했다.
제 발로 카이엔을 따라나갔으니 그게 가출이 아니고 뭐겠는가. 절대 납치는 아니었다.
왕비에게 이야기를 전해들은 왕은 이마를 짚었다.
아직 철없는 아들이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거람. 돌아오면 따끔하게 혼을 낼 필요가 있었다.
“그 아이도 바보는 아니니… 에이들러를 발견했으면 바로 오겠지.”
“그러겠죠.”
“3일이나 지났지만, 에이들러 녀석이 떼를 써서 주변을 구경시켜주고 있는 걸지도 모르고.”
“하루만 더 기다려보죠.”
그러나 하루가 지나도 에이들러는 돌아오지 않았다. 에이들러가 왕성을 떠난 지 사일째. 뭔가 이상했다.
“…이쪽에서 사람을 보낼 줄 알고 기다리는 건가?”
생각이 엇갈린 걸지도 몰랐다.
그러나 카이엔이 세자르로 돌아갔다는 소식이 퍼진 이상 왕실에서 에이들러를 데려오기 위해 제대로 된 기사단을 꾸려서 보낸다면 멀쩡히 잘 살아있던 폐세자를 제거하려고 군대를 보내는 거라고 보일지도 몰랐다.
이도 저도 못하고 왕은 골치 아파했다.
카이엔이 에이들러를 발견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식하나 없는 건 연락하는 걸 깜빡했거나, 그 아이를 데리고 세자르로 가려는 것 둘 중 하나일 테고.
레이지의 말에 따르면 에이들러는 카이엔이 기르는 애완동물들에게 크게 관심을 보였으니 카이엔이 북부로 돌아간다고 하니 좋다고 따라간다고 떼를 썼을지도 몰랐다.
아직 어린애니 후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에이들러가 세자르에 도착한다면 거기 심어놓은 사람이 있으니 왕자로 추정되는 아이가 있다고 연락을 취할 거다. 그곳에서 구경할 걸 다 구경하고나면 에이들러도 순순히 집으로 가겠다고 할 테니…
‘세자르로 갈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뜬금없이 사고 친 아들 덕분에 시름이 깊어진 국왕, 바르바스였다.
그가 전해 들은 대로, 본 대로 카이엔이 이 자리에 미련도 욕심도 없다면 자기를 쫓아온 에이들러를 귀찮게 여길지언정 위험에 처하게 두진 않을 것이다.
폐세자와 현 왕자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구설수에 오를 수 있으니까.
불안해하면서도 왕은 걱정을 덜려고 애를 썼다
.
반면, 왕비는 다른 의미로 카이엔과 함께 있을 에이들러가 걱정되었다.
바이스의 고모인 그녀는 현재 카이엔의 시종으로 있는 자가 페르세이지란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조카인 그 녀석의 성격상, 무슨 사상을 애한테 주입시켜놓을지도 몰랐다.
카이엔은 멀쩡히 자란 것 같지만 혹시 몰랐다.
‘괜찮아야 할 텐데.’
페르세이지는 어렸을 때부터 보통이 아니었다.
바이올로스 후작가 출신인 그녀 역시 어렸을 때 만만치 않은 인성의 소유자였지만 성장하면서 조금씩 고쳐나갔는데 페르세이지는 다 자라기도 전에 후작가를 나가서 독립된 생활을 해버렸으니 그 성격이 더 비틀어지지 않았다면 다행일 정도였다.
녀석이 카이엔을 왕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면. 그래서 어린 왕자를 이용하려고 해 왕성을 떠난 그 아이에게 헛된 바람이라도 집어넣는다면.
“후우…”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파져서 왕비는 편지를 한 통 쓰기로 했다. 받는 이는 그녀의 오라비인 바이올로스 후작이었다.
겉치레 인사는 생략하고 제발 아들 관리 좀 똑바로 시키라는 경고의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적어놓고 나서야 그녀는 후련해져서 편지를 봉투에 집어넣었다.
***
폐세자가 늑대를 데리고 다닌다는 소문은 탄신연 이후로 귀족들 사이에 쫙 퍼졌다.
카이엔은 리만테스 궁에서 나오지 않았지만 그를 주시하던 자들은 어떻게든 그에 대해 알아내려고 애를 썼다.
물론 알게 된 건 카이엔이 몬스터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긴 하지만 수도에는 애완동물만 데리고 왔다는 것뿐이었다.
보다 안전한 길을 이용해 세자르로 돌아가기로 하며 카이엔은 올 때와 다른 경로를 택했다. 마부 또한 마땅한 병력이 없는 일행을 걱정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듀라벨 백작의 영지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검문을 받을 때 경비병이 마차에 탄 늑대와 고양이를 보게 되었고 그 이야기가 전해진 건지, 검문을 통과해 영지 안을 지나던 마차를 향해 백작이 보낸 사람이 급하게 달려왔다.
사람이 많은 곳에 차마 왕자님이라고 외칠 수는 없었던 건지 잠시만 멈춰달라면서 쫓아오는 모습에 마부는 마차를 멈추고 카이엔에게 의견을 구했다.
“왕자님, 어떻게 할까요?”
“쫓아왔다니 이야기나 들어보자.”
마차 문이 열리고 카이엔을 대신해 바이스가 마차에서 내려 듀라벨 백작이 보냈다는 시종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피곤하게 움직이기보단, 이곳에서 하루 쉬다갈 수 있게끔 모시고 싶다는 뻔한 이야기였다.
고개를 기울이며 생각에 잠긴 바이스는 힐끗 마차를 쳐다보았다.
카이엔은 둘째치고, 백작은 에이들러의 얼굴을 알 가능성이 컸다. 이대로 백작의 성에 간다면 무슨 오해를 살지 모르기에 잠깐의 고민 끝에 바이스가 대답했다.
“나쁘지 않겠군요. 안내해주시겠습니까? 천천히 따라가겠습니다.”
시종에게 대답을 해주고 바이스는 마차에 올랐다. 카이엔에게 백작의 초대를 알리니 귀찮아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혼자였다면 아무렇게나 지내도 상관없었지만 에이들러는 귀하게 자란 어린애였기에 최대한 노숙은 피하고 싶었다.
다만, 걸리는 점이 한 가지 있었다.
“듀라벨 백작이 얘 얼굴을 알고 있으면 어쩌려고?”
“변장을 하면 됩니다.”
“변장?”
“준비해둔 게 있죠. 원래는 프라우디에 님에게 필요할까 봐 준비한 거였지만요.”
어쩐지 뒷말에 심히 불안해진 카이엔이었다.
마차의 좌석 아래에서 가방을 꺼낸 바이스는 그 안에서 가발과 드레스를 한 벌 꺼냈다. 그 외에 변장에 필요한 것들을 꺼내 늘어놓고는 에이들러를 향해 손짓했다.
“변장을 하셔야 합니다. 여기서 들켜서 왕성으로 돌아가긴 싫죠?”
“에? 들키면 집에 가야 하는 거예요? 싫은데…”
“그러니까 왕자님인 걸 들키면 안 됩니다. 마차는 천천히 움직이도록 해놨으니 옷부터 갈아입죠.”
“네!”
여기까지 오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걸렸는데 세자르는 구경도 못 해보고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에이들러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고 카이엔은 바이스를 사기꾼 보듯 쳐다보았다.
아직 어린아이여서인지 옷을 바꾸고 가발을 씌우고 꾸며놓자 그 나이대의, 예뻐 보이고 싶어 치장한 소녀로 보였다.
마차는 덜컹거리긴 했지만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기에 옷을 갈아입고 꾸미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금빛 머리카락의 가발을 보고 카이엔이 입을 열었다.
“프라우디에에게 쓰려고 했다면, 자네인과 자매인 척 위장시키려고 했었던 거야?”
“네.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지만요.”
다 됐다면서 바이스는 에이들러를 앉혀놓고 무릎 위에 그리델라를 올려주었다.
“왕자님과 같은 마차에 탄 이유는, 고양이와 놀고 싶어서라고 해두죠.”
“그래.”
백작이 보낸 시종을 따라 움직이던 마차는 곧 듀라벨 백작가에 도착했다.
마부가 마차의 문을 열자 맨 먼저 바이스가 내려 주변을 살폈고 카이엔이 내린 뒤, 고양이를 안은 에이들러가 내릴 수 있게 도왔다. 라스가 마지막으로 내리자 마부가 마차의 문을 닫았다.
바로 문 밖까지 나와있던 듀라벨 백작은 카이엔을 보자마자 바로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어서오십시오, 왕자님. 모시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그런데 같이 내린 아이는…”
“일행에 속한 기사의 여동생이지. 내 애완동물들을 너무 좋아해서 말이야. 내가 없으면 말을 안 들을지도 몰라서 데리고 있었지.”
“아아 그랬군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저녁 식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괜히 국왕의 눈 밖에 나면 어쩌려고 이러는 거지?”
“탄신연에도 왕자님을 초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게 쉽게 내치진 않으실 겁니다. 부디 모시게 해주십시오.”
“…그래.”
떨떠름해하면서도 카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에서 알아서 모시겠다면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걸리는 점이 하나 있어서 카이엔은 바이스에게 손짓을 했다.
“…줄을 서려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가까운 곳에 두고 관찰하려는 것일수도 있죠. 하지만 상관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왕자님은 왕이 되실 생각이 없으신데.”
“그렇지.”
“그러니 하루라도 편히 쉬십시오. 제가 잘 감시하겠습니다.”
“네가 무슨 초인도 아니고. 밤은 글라스에게 맡겨. 박쥐인 척 하고있지만 밤에 깨어날 테니.”
혼자 밤에 일행을 지키게 하는 건 미안했지만 바이스와 자네인도 감이 좋고 귀가 밝으니 소란이 있으면 글라스가 깨우지 않아도 금세 일어나서 그를 도울 것이다.
다행히 듀라벨 백작은 에이들러를 못 알아보는 눈치라 카이엔은 안도했다.
일행에는 카이엔 말고도 그의 손님으로 프라우디에와 에이들러가 있었기에 백작은 두 사람의 자리를 더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백작의 오른편 자리에 누군가가 한 명 더 앉아있었다.
앉아있던 여성은 카이엔을 보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 숙여 인사했다.
“하하, 제 딸입니다. 탄신연에는 참석하지 못했는데… 왕자님의 이야기를 하니 궁금해하더군요. 같이 앉아도 될까요?”
“문제될 건 없지.”
이게 목적이었던걸까?
왕이 폐세자인 그를 탄신연에 초대해 호의적인 모습을 보였으니 가까이 해도 되겠다 싶었으려나?
아직 다른 귀족들에게 국왕 부부가 어린 공주와 그를 엮어보려고 했다는 소문이 퍼지진 않은 모양이었다. 만약 알았다면 듀라벨 백작이 저리 나서지도 않았을 테고.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바이스가 흥미진진해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역시나 식사를 하는 중에 백작은 카이엔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며 자신의 딸이 얼마나 좋은 아이인지 은근슬쩍 어필했다.
“왕자님보다 나이야 한 살 더 많지만 어디에 내놔도 부족함 없는 아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성도 곱고 머리도 좋은 아이죠.”
“…그런 것 같네. 이 자리가 굉장히 불편할 텐데.”
“아,아니에요. 불편하지 않아요.”
듀라벨 백작의 딸인 예니스 듀라벨은 카이엔의 말에 손사래를 쳤다.
주황색 곱슬머리의 아가씨는 힐끗거리면서 카이엔을 살피고 있었다. 그녀 역시 귀족 영애였으므로 폐세자에 대한 뜬소문을 굉장히 많이 접했을 테니 그를 신기해하는 게 이해가 갔다.
몬스터의 말을 알아듣고 그 괴물들과 소통하는 왕자 또한 세간에는 괴물같이 생겼다고 알려지지 않았을까.
물로 목을 축이며 카이엔은 에이들러를 보았다. 식사가 입에 맞는지 잘 먹고 있었다. 프라우디에도 묵묵히 식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나보다 한 살 많으면 스무 살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그도 나이를 꽤 많이 먹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내년에 스물이 될 테고 바이스는 곧 서른에 가까워지겠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혼이 급한 건 그가 아니라 바이스였다.
절연하고 왔다니까 파혼도 당연히 됐을 텐데 도대체 이 녀석은 그의 곁에서 뭘 하고 싶은 걸까.
딴생각에 잠긴 채 카이엔은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