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왕자는 조용히 살고싶다-56화 (57/219)

56화

제 정체를 털어놓았으니 더 이상 숨길 것도 없다며 바이스는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카이엔에게 알려주었다.

수많은 암살시도와 사악한 계략에 대해 알게 되어도 덜 충격을 받을 만큼 카이엔이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던 사실에 카이엔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바이스가 몇 번이고 자기를 죽일뻔했다는 것에 가슴을 쓸어내려야만 했다.

“네가 손에 힘만 줬어도 난 목이 부러졌겠네.”

“그렇지만 전 그렇게 재미없는 방식으론 안 죽입니다.”

“…….”

“농담입니다.”

“그런 농담은 하지 마.”

몇 번의 살인 미수를 고백하는 녀석치곤, 표정이 너무나도 산뜻했다.

본인 입장에선 꽁꽁 숨겨왔던 진심을 마구 풀어헤칠만한 기회겠지만 듣는 입장에선 죽을 맛이었다. 게다가 다 그의 생명에 관련된 문제가 아닌가.

바이스의 표정이 밝아질수록 카이엔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져만 갔다.

두 사람이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라스와 그리델라는 방 한 구석에서 몸을 말고 언제 대화가 끝나나 기다렸다. 중간중간 들리는 대화에는 저절로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

“바이스 씨 무섭네. 무서운 사람이라곤 알고 있었는데.”

“그러게…”

“왕자님이 지금까지 살아있는 게 용하다.”

그리델라의 말에 라스는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스가 카이엔을 살리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다면 카이엔은 이미 어린 나이에 흙으로 돌아가버렸을 테니까.

바이스의 말을 계속 들어주다간 악몽을 꿀 것만 같아서 카이엔은 손사래를 쳤다.

“그만! 더 안 들을래.”

“아직 많이 남았습니다만.”

“어차피 일어나지도 않은 일 아니면 있었는데 네가 해결한 일이잖아. 어휴….”

“그럼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다음도 있어?”

“네. 제가 의절하고 나왔으니 붙잡히기 전에 얼른 핑계대고 세자르로 돌아가죠. 후작가에선 무사히 빠져나오긴 했지만 작정하고 절 잡으려고 든다면 꽤나 골치아플 테니까요.”

“너 무슨 사고를 치고 온 거야?”

“깔끔하게 처리했습니다. 왕자님의 편에 서겠다고 했거든요.”

“…그거 선전포고 아냐?”

현 왕비가 바이올로스 후작의 여동생이니 후작가는 왕비를 지지해야 하는데 가문을 물려받아야 할 장자가 뜬금없이 폭탄을 터뜨리고 간거나 마찬가지였다.

카이엔의 반응에 바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여동생도 있고 남동생도 있습니다. 후계자 문제는 없습니다.”

“너한테 집착하는 이유가 있지 않아?”

“제가 좀 뛰어난 인재긴 하죠.”

재수 없지만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 없었다.

카이엔은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였다.

“아… 그럼 내일이라도 당장 짐 싸고 떠나면 되겠네. 세자르 남작은 먼저 돌려보냈으니 우리만 얼른 떠나면 되겠어.”

“그러는 게 나을 겁니다.”

바이스는 ‘페르세이지 바이올로스’로서 그의 곁에 있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 가짜 신분인 ‘바이스 크라이머’로 그의 시종으로 남아있었다.

후작가 쪽에서 바이스의 신상이 조작되어서 안전을 위해서라도 카이엔에게서 떨어뜨려놔야 한다고 주장하고 왕실 쪽에서도 조카의 안위를 위해서 조사해야 한다고 붙잡고 늘어지면 답이 없었다.

물론 바이스가 잡혀간다고 해서 얌전히 끌려갈 사람은 아니었지만 보는 눈이 많으면 몸을 사려야 할 테니까.

‘아니… 그냥 죄다 해치우고 돌아오려나?’

그럴 수도 있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으니까.

바이스를 바라보는 카이엔의 눈빛이 수상해지자 바이스는 웃으면서 말했다.

“절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는 아주 잘 알겠습니다.”

“어… 그래.”

“다음 날 당장 떠나도록 하죠. 짐을 챙기겠습니다. 어차피 들고온 것도 없으니 금방일 겁니다.”

다른 이들에게도 알려주고 돌아오겠다며 바이스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인사를 한 뒤 카이엔의 방에서 나갔다.

그가 나가자 라스와 그리델라가 카이엔에게 다가왔다.

여전히 늑대와 고양이 모습을 한 그들은 카이엔의 발밑에 엎드려서 고개를 들고 물었다.

“왕자님은 괜찮으십니까?”

“맞아. 바이스 씨 엄청 무시무시한 사람인데.”

“어쩌겠어… 나 살리겠다고 지금도 옆에 있다는데.”

내쫓는다고 해서 빈정 상한 바이스가 그의 목을 그어버리는 일은 없겠지만 옆에 있어서 나쁠 것 없는 사람을 굳이 쫓아낼 이유 또한 없었다.

그를 찾아온 목적이 상당히 불순했지만 지금까지 아무 일 없었으니까. 문제라면…

‘무슨 의도로 날 키운 건데…’

그들의 나이차는 일곱 살. 그가 바이스를 처음 만났을 때 바이스 또한 열여섯 살로 어린 편에 속했다. 아홉 살에 비하면 열여섯은 충분히 많았지만.

따로 가정 교사가 붙긴 했지만 대부분의 수업은 바이스가 진행했을 정도니 그 사상이 어린 그에게 고스란히 주입됐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카이엔 본인이 생각하기에 그의 인성과 사상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모르겠네. 생각하기도 귀찮다.”

“바이스 씨가 왕자님을 그렇게 키운 거 아냐? 왕자님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어… 살아있으면 된다?”

“뭐야 그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단 거야?”

“그 정돈 아니고… 아니, 맞나? 숨만 붙여놓길 원했으니까.”

“왕자님…”

“너무 기준이 낮잖아.”

라스가 탄식하듯 한마디했고 그리델라는 고양이 모습임에도 뺨을 부풀리면서 카이엔의 다리를 앞발로 툭툭 쳤다.

고양이 발 펀치에 카이엔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땐 정말 그랬어. 하도 사방에서 날 죽이려고 드니까 숨만 쉬고 있을 테니 건드리지 좀 말았면 했지.”

“바이스 씨가 그럼 잘 키웠네. 왕자님 진짜 숨만 쉬고 살고 있잖아! 아무것도 안 하고!”

“윽.”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정말로… 숨만 쉬고 사십니다. 몬스터를 기르면서요.”

“일도 안 하는 백수고.”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로 푹푹 찌르는 것 같았다.

그가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대는 인생을 살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다른 사람들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훨씬 더 충격이었다.

카이엔이 힘없이 축 늘어지자 그리델라가 카이엔의 무릎 위로 폴짝 뛰어 올라갔다.

“왕자님이 백수되고 싶어서 백수가 된 건 아닐…아닌가? 아니지? 돈 많은 백수는 모두의 꿈이잖아.”

“꼭 그런 건 아니지 않을까…”

“아무튼! 왕자님은 하고 싶은 일도 없어?”

“없는데…”

“바이스 씨도 참. 어린애한테는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 줘야 하는데.”

그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앞날이 화창하지 않았다.

원망해봤자 이미 늦었으므로 카이엔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는 어렸을 적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사트로누스와 대화하고 산책하고 그 외엔 방 밖으로도 나오지 않으려고 했다.

지금은 많이 나아진 축에 속했는데. 말해봤자 안 믿어줄 것 같았다.

“…일단은 세자르로 돌아가는 게 우선이니까. 나머지는 가서 생각하자.”

“왕자님이 꼭 좋은 길을 찾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맞아. 계속 우리랑 놀아주는 것도 좋긴한데 그렇게 된다면 왕자님 인생이 너무 심심할 거 아냐.”

“너희가 있어서 심심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솔직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심각한 일들이 많았었다.

카이엔의 말에 그리델라는 못 들은 척 고개를 홱 돌리더니만 그의 무릎에서 내려왔다.

뒤돌아 앉아선 그루밍하고 있는 모습에 카이엔은 피식 웃었다.

“빠르면 내일, 늦어도 모레 아침엔 떠날 테니까 일찍 자자.”

세자르에서 여기까지 그들이 탄 마차를 운전했던 마부도 내내 왕성에서 묵고 있었으니 준비만 일찍 끝난다면 돌아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모처럼 수도에 왔는데 기념품이라도 사가야 하나, 싶었지만 딱히 생각나는 것도 없고 여유도 없어서 빈손으로 가기로 했다.

어쩐지 슬로세이가 선물도 안 사왔냐며 떼를 쓸 것만 같은 모습이 눈에 선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선물 안 사가도 되겠지?”

“아마도?”

“이해해주겠죠.”

슬로세이는 어린애니까 선물을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셋이서 이야기하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에게 내일 떠날 거라는 이야기를 전달하러 갔던 바이스가 돌아왔다.

그는 카이엔과 두 마리 동물들이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이야기 하십니까?”

“선물 때문에…”

“왕자님이 몸 멀쩡히 돌아온 걸 선물이라고 합시다.”

“으음….”

“오오, 그 방법이!”

“그리델라 너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그럴 수도 있지!”

야옹거리면서 그리델라는 홱 뒤돌아서 가버렸다.

옆에 있던 라스는 어색하게 짖는 소리를 내며 그런 그리델라를 따라갔다.

“아무튼, 다른 분들께도 전달하고 왔습니다.”

“그래.”

“내일 인사만 하고 가죠.”

“인사?”

“간다고 말은 해야할 테니까요.”

“…하기 싫은데.”

“그럼 제가 전달하러 갈까요?”

“아니. 내가 갈게.”

바이스가 가서 무슨 말을 하고 올지 상상만 해도 두려웠다.

그때,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카이엔이 물었다.

“그런데 네가 페르세이지 바이올로스란 걸 몇 명이나 알고 있는 거야?”

“일단 저희 가족은 알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아마 왕비님이신 고모님도?”

“그 외엔 없어?”

“널리 알려서 좋을 건 없으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네.”

“내일 떠날 테니까 왕자님도 이만 쉬시죠. 아침 일찍 떠나진 않을 테지만요.”

과연 바이스의 말대로였다.

다음 날 정오 무렵, 카이엔은 국왕이자 작은 아버지인 바르바스를 만나러 갔다.

원래 아침에 일찍 접견을 하면서 떠나겠다는 의사를 전달하려고 했지만 국왕은 이른 아침부터 할 일이 굉장히 많은 모양이었다.

덕분에 정오가 되어서야 그가 인사할 수 있는 자투리 시간이 생겼다.

바쁜 사람의 시간을 오래 뺏을 시간도 없고 오래 얼굴을 마주하고 있을 생각도 없으므로 카이엔은 세자르로 돌아가기 전에 인사하러 왔다면서, 정말로 빠르게 그 말만 건네고 알현을 마쳤다.

혹시라도 누가 붙잡을까 봐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는 걸음을 재촉했다.

“가자!”

“네.”

미리 준비하고 있던 프라우디에와 자네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둘 다 리만테스 궁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몰라 몸을 사렸다는 말에 카이엔은 괜히 미안해졌다.

사람이 탄 마차가 둘, 짐마차가 하나. 올 때와 구성은 같았다.

가는 길에 필요한 식수와 식량 등은 더 필요하면 왕성 밖에서 충당하면 된다고 바이스가 말했다.

“…충분한 것 같은데?”

“털어갈 것도 없으니 먹을 거라도 가져와야죠.”

“왕성 주방이라도 털었어?”

“떠나야 하니까 식재료 좀 넉넉히 주라고 했죠. 어차피 남는게 음식들일 텐데.”

“그래, 절약하면 좋지.”

대충 겉에만 힐끗 보고 카이엔은 마차에 탔다.

반면 바이스는 마차 바퀴에 문제가 있지는 않은지, 몸체에 부서진 곳은 없는지 꼼꼼히 살폈다.

매달아놓은 짐이며 짐마가 안까지 살핀 다음에 그 역시 마차에 올랐다.

이대로 움직인다며 저녁무렵에는 수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확인할 게 많은 거야?”

“달리는 도중에 마차 바퀴가 부서지기라도 하면 사고납니다.”

“으음…”

“왕자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지.”

“문제는 없었습니다. 출발하죠.”

마부에게 출발하란 말을 하자 바로 마차가 움직였다. 덜컹거리면서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 길을 떠나면 또다시 멀미가 올지도 몰라서 카이엔은 편한 자세를 잡으려고 애를 썼다.

“드디어 집에 간다!”

“꽤 길었습니다.”

“그래도 무슨 일 없어서 다행이에요.”

그리델라와 라스에 이어 깨어있던 글라스도 한마디 했다.

글라스는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불상사에 대비해 낮에 자고 밤에 깨어있는 생활을 반복했는데 혼자 보초 서는 게 심심했다면서 푸념을 늘어놓았다.

“물론 위험한 일이 생길 바엔 지루한 게 낫지만요. 암살자의 그림자도 없다는 건 조금 신선했어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라고 여긴 걸지도 모르죠.”

“나 좀 내버려 뒀으면 좋겠다.”

한숨을 푹 쉬며 카이엔은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어떻게 더 조용히 살아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