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바이스는 리만테스 궁으로 돌아왔다.
밖으로 나갈 땐 괜찮았지만 다시 성문을 통과할 때 시간이 지체되었다며 그는 한숨을 푹 쉬었다.
늦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겠다며 부산을 떨다가 카이엔이 식사를 다 마치고 나자 차를 준비하며 바이스가 입을 열었다.
“의절하고 왔습니다.”
“…뭐?”
그 탓에 카이엔은 놀라서 막 들었던 찻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찻잔은 쨍, 하는 소리를 냈고 찻물이 테이블에 엎질러졌다. 다행히 카이엔이 화상을 입진 않았다.
바이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엎어진 찻물을 닦아내고 새 잔을 찾아오겠다며 방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의절 같은 단어를 입에 올리는 불량 시종을 보고 카이엔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도대체 가서 뭘 하고 왔길래 의절하고 온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본가 다녀온다면서.”
“네. 다녀왔습니다.”
“파혼했다고 의절이래?”
“그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야, 계속 가문과 접점이 있다면 왕자님 곁에 있을 수 없었으니까요.”
어느새 자세를 고쳐서 똑바로 선 채로 카이엔을 묵묵히 바라보던 바이스가 입을 열었다.
“제 본명은 페르세이지 바이올로스 입니다. 바이올로스 후작가의 장남이자 예정된 후계자였습니다만 이제 상관 없는 이야기죠.”
“…그래. 평범한 놈은 아닐 줄 알았어.”
“놀라지 않으십니까? 분명 싫어하실 줄 알았는데.”
“난 매번 네가 뭘 할 때마다 놀라서… 더 놀랄 기운도 없다.”
한숨을 푹 쉬며 카이엔은 소파에 몸을 묻었다.
바이올로스 후작가의, 심지어 장남이란다. 그런 놈이 왜 그의 곁에 있었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평소 하는 행동을 봐선 좀 이상한 녀석이라 가문에서도 모난 돌이어서일까,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예정된 후계자라니 그 추측도 틀렸다.
한 번 더 한숨을 내쉬고 카이엔은 눈동자를 굴려 바이스의 표정을 확인했다. 겉으로 볼 땐 문제 없었다.
‘바이올로스 후작가는…’
현 왕비의 가문이니 그와 바이스도 따지고 보면 피는 안 섞였지만 친척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가문이 그를 좋게 볼 리가 없었다. 일찍 싹을 잘라두려고 했다면 모를까… 상념에 잠기려는 그를 끄집어내려는 듯 바이스가 말했다.
“카이엔 님의 적과 언제까지 한통속일 수는 없으니까요. 말이 의절이지, 저는 끊어내려고 해도 아버지인 후작님은 절 포기하지 못할겁니다.”
“…그래. 그러겠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게 투덜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가히 충격적일만한 정체를 제 입으로 발설했음에도 불구하고 카이엔은 인상을 쓸지언정 그를 다그치고 왜 시종 따위로 위장하여 옆에 있었는지 캐물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왜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며 혼란스러워할 뿐이었다.
의심하지 않는 건 기쁘지만 역시 너무 유순하게 키운걸까, 좀 더 냉정하게 자랄 수 있도록 가르쳐야 했던 게 아닐까.
바이스 또한 잠시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마 카이엔은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고 그걸 그에게 전부 말해주는 건지조차 모를 거다. 그가 그렇게 키워버렸으니까.
***
“왕자에게 가겠습니다.”
당시 십대였던 그는 당당히 후작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냐는 아버지의 물음에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 어린 왕자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간섭하다보면 저희 뜻대로 이용할 수 있는 자가 늘어나는 것일 테니까요.”
“…꼭 그 이유만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어차피 감시할 사람을 보낼 거잖아요. 제가 가겠다는 말입니다.”
동생들이 존재했지만 그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기에 이미 그는 예정된 후계자였다.
허나 그것을 알면서도 페르세이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이용할 수 있으면 이용하고, 쓸모가 없으면 제 손으로 처리하겠다는 식으로.
못 미덥다는 표정을 짓는 후작이었지만 결국 그의 고집을 들어주는 수 밖에 없었다.
벌써부터 제 아비를 향해 이를 드러내는 짐승 같은 장남에게, 세상이 꼭 그의 뜻대로 돌아가진 않을 거라는 것도 알려줄 겸 좌절을 맛보게 하는 것도 좋을거라 여긴 탓이었다.
그리고 그는 본명을 버리고 가짜 이름과 정체성을 정해 왕자의 시종이 되겠다고 정했다.
어려운 점은 없었다.
그는 유능했고 명망 높은 귀족가의 후계자인 도련님이었지만 시종들이 무얼 하는지 잘 알고있었다.
하지만 세자르에 도착하고 나서는 그의 예상대로 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쫓겨난 왕자가 그보다 훨씬 어리단 건 알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쉽게 손이 나가지 않았다. 이용할 수 없다면 즉시 처리하고 돌아가면 된다고 여겼건만.
어째서 그런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이, 그 얼굴이. 어째서인지 이전보다도 훨씬 눈에 박혀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갸냘프고 연약하기 그지 없었지만, 그 시절과는 달리 우울에 잠긴 왕자를 보게 되니,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곁에 있을 수 있게 되었고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가 해야할 일을 명확히 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전까진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행동들이건만, 쉽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식사에 독을 타라는 것을 거절했다. 독은 몰래 빼돌려서 병째로 땅에 묻었다.
암살자를 매수하라고 온 돈은 여러모로 유용한 곳에 잘 썼다. 이런 시골에서 암살자 따위를 구하라고 돈을 보낸 놈이 멍청이라고 생각했다.
사고사로 위장하라고 했지만 구해냈다.
자는 사이에 목을 졸라 죽이라고 했다. 이런 쉬운 것도 못하진 않겠지, 라는 비아냥거림을 무시했다.
한참 동안 카이엔이 자는 모습을 지켜보았었다.
잠든 어린 왕자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넘겼다. 잠에서 깰 법도 한데 얼굴만 찡그리면서 잠투정을 할 뿐 깨지 않았다.
죽이는 건 참으로 쉬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가 돌보고 그가 키워냈다. 그가 살려냈다.
늘상 남 위에 군림하고 피 튀기는 것을 즐겼던 바이올로스의 페르세이지는 여기 없다.
남을 발밑에 두는 것을 좋아하고 가학을 가했던 바이올로스의 장자는 여기 없다.
처음부터 이름을 감추고 정체를 숨기고 왕자에게 접근했다. 정확한 목표는 없었다.
일단 옆을 맴돌면서 어떻게 할지 결정하고 싶었다.
미소 띤 얼굴로 친절한 척 하면서 다가갔다. 곁에 있기 위해선 경계심을 허물 필요가 있었다. 허나 막상 가까워지니 이전에는 머릿속으로 수십번도 그려왔던 것들을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다.
소년은 잠든 왕자의 침대에 엎드렸다.
갸냘픈 숨소리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아서 손으로 더듬어 심장 부근에 손을 가져다댔다. 그걸로도 모자라 귀를 가져다댔다.
살아있다. 살아있구나.
그것에 안심하고 나서야 그 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
품 속에서 꺼낸 단검을 들고 어딘가로 향했다. 지붕 위에 숨어있던 암살자들의 목숨을 미련없이 끊어냈다. 시체 처리를 할 방도가 없어서 그대로 아래로 집어던졌다.
고요한 어둠 속에 무게를 지닌 무언가가 땅에 떨어져 부딪치고 무언가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해가 뜨면 시체는 발견될 것이고 영주성이 소란스러워질 것을 알면서도 그는 시체의 뒷처리를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제거해야 할 대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 그는 지붕 위에서 내려왔다.
짙은 어둠 속에서,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텐데 그는 미끄러지듯 지붕을 타고 내려와 안전하게 근처의 발코니에 착지했다.
한번 더 왕자의 침실에 가야 할까. 망설이면서 문 앞을 서성이던 걸 몇 번이고 반복한 끝에 뒤돌아섰다.
피 냄새와 예리한 살기에, 어린 아이가 놀랄까 봐 우려했다.
그는 어렸을 적, 훨씬 어렸던 왕자와 만난 적이 있었다.
제 어머니의 품에 안겨있었던 왕자가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낯을 가리면서 제 어머니에게 달라붙는 것을 보았다.
“카이엔에겐 형이겠구나. 먼 친척쯤 되겠지만. 어머, 후후. 부끄럽니?”
고작 두 살 정도였던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단어를 내뱉으며 입을 우물거리는, 태어난 지 몇 년 되지 않은 아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그 누구보다도 고귀한 자리에 오르게 될 아이였다.
그때부터 피와 폭력을 즐겼던 페르세이지 바이올로스는 그 작은 아이의 목을 붙잡고 싶었다.
그 순진한 눈동자는 그의 거짓된 모습을 비추고 있었고 그것을 똑바로 바라보기 어려웠다.
그 떨림을 눈치챈 어머니는 그의 손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어린 왕자는 수줍어 하면서 제 고모의 조카인 그에게 환히 웃어보였다.
그 모습이 뇌리에 각인되었다.
시간이 지나 큰 사건이 일어났고, 그 아이가 먼 곳으로 쫓겨나다시피 하게 되자 좀 더 가까운 곳에서 보고 싶어졌다.
같잖은 변명으로 아버지인 후작을 설득해 무턱대고 세자르로 향했고 다시 만나게 된 왕자는, 그 아이는.
그때보다 조금 더 성장한 뒤였고 그때 보였던 웃음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우울한 표정을 지은 채 무기력하게 만티코어의 몸에 기대 잠에 빠져있었다. 너무나도 나약해서 단숨에 그 목을 꺾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당신을 죽이고 싶었습니다.”
길고도 짧은 회상 끝에 바이스가 담담히 목소리를 냈다.
조금 잠겨서, 평소보다 낮아진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순진한 아이를 없애버리고 싶었다.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더럽고 추악하고 끔찍한 본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 아이는 그와는 전혀 달랐기에.
“동시에, 당신을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과연 너는 내 진위를 알아차릴 수 있을지 궁금했다.
“타인의 위에 군림하는 것만이 모든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이 피에, 이 몸에 그것이 새겨져있습니다. 나보다 밑이란 계산이 끝난다면 힘을 쓰는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쫓겨난 왕자 따윈, 가문의 명이 없더라도 재미삼아 괴롭히고 끝내 제거해버렸을 수도 있었다.
“다시 만나게 된 당신은 너무나도 약했고… 어째서인지, 그것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자기보다 훨씬 큰 만티코어의 보살핌을 받으며, 멀쩡한 침대를 놔두고 그 털뭉치에게 기대어 잠들어있는 모습이.
보랏빛 짐승의 털 투성이가 되어서 작은 숨소리를 내며 누워있던 그 모습이.
곤란해하는 남작의 옆에 서있다가 걸어갔다. 잠들어있던 왕자를 깨웠다.
가라앉은 눈동자를 응시하며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만티코어란 것도, 개나 고양이처럼 털이 아주 많이 빠지는 모양입니다. 제가, 왕자님의 몸에 붙은 털을 떼어내도 되는지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이미 그날 갈갈히 찢겨버린 마음을 과연 추스렀을까. 이미 피투성이인 당신을 또다시 해칠 정도로 내가 모질지는 못했던 걸까.
바이스는 진심을 털어놓고 카이엔은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결국 하고 싶은 말 중에서 고르고 골라서 카이엔은 이렇게 물었다.
“…나 죽이고 싶었다는 말을 내 앞에서 하는 거냐?”
“그땐 그랬다, 라는 걸 전달하고 싶었거든요.”
“지금은 아니지?”
“물론이죠.”
“하하…”
믿어도 되려나. 믿어도 되겠지?
의절까지 하고 왔다는데 믿어주지 않는 건 좀.
어색하게 굳은 표정에 바이스는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달라지지 않았으니까요.”
“너도 참… 이상한 놈이구나.”
“이상하다라기보단 제정신이 아니란 말을 많이 듣고 살았습니다. 멀쩡한 후계자 자리 내팽겨치고 시골로 간 왕자님을 쫓아갔을 정도니까요.”
“나 죽이려고 쫓아온 거잖아.”
“아뇨. 지켜보고 판단하려고 했습니다.”
“그거나 그거나.”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카이엔 역시 그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지 않을 것임을 바이스는 알 수 있었다.
그야, 그가 돌보고 키우고 목숨 붙여놓은 어린아이였으니 그 정도쯤이야 쉽게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