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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왕자는 조용히 살고싶다-54화 (55/219)

54화

오전은 사촌 동생들과의 티타임으로 보냈다. 그 후엔 별일 없을 거라고 여긴 카이엔이었지만 정오가 지나고 나서 바이스가 그를 찾아왔다.

그런데 그가 꺼낸 말의 첫 마디에 카이엔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왕자님. 잠시 본가에 다녀오도록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응? 본가? 수도에 있었어? 너 지방 귀족 출신이라면서!”

“탄신연에는 참석한 걸로 압니다. 아직 타운 하우스에서 영지로 돌아가지 않은 모양이더군요. 빠르게 다녀오겠습니다.”

“어… 그래. 천천히 다녀와도 돼.”

“에빌 씨는 왕자님의 시중을 들지 못 하잖습니까. 늦기 전에 오겠습니다.”

글라스는 지금 박쥐로 변해있으니 시종 대리를 맡길 수 없었다.

카이엔은 천천히 다녀와도 좋다고 말했지만 바이스는 몇 번이고 괜찮다고 대답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오겠습니다.”

“더 늦어도 돼.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는 걸 텐데.”

“글쎄요. 파혼했다고 머리채나 잡히지 않으면 다행이지 않을까요?”

“아, 맞다. 그랬었지.”

“다녀오겠습니다.”

웃는 얼굴로 바이스는 카이엔의 방에서 나왔다.

바이스가 저런 식으로 어딜 간다고 말한 건 참 오랜만이라 카이엔은 가만히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이 휴가 내고 어디 가는 모습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번 기회에라도 가족을 만나게 되면 좋겠지.’

바이스도 어렸을 때 그를 찾아와서 단 한 번도 고향에 돌아간 적이 없었으니까.

이미 에빌에게도 말해뒀었기에 바이스는 방으로 돌아가 가방에서 외투 하나를 꺼내 위에 걸쳤다. 이대로 돌아다녀도 왕자의 시종이란 걸 아는 사람은 없을 거다.

당당히 성문을 통과해 밖으로 나온 그는 마차에 탔다. 마부에게 위치를 알려주니 잘 알고 있는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가려니 감회가 새로웠지만 그뿐이었다. 가족을 만날 생각을 하니 설렌다거나 그립다거나 하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본가는 왕성과 인접해있었기에 마차를 타고 그리 오래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높은 철문 앞에서 마차가 멈춰섰고 바이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마차에서 내렸다.

“흠.”

바뀐 건 없어보였다.

녹 하나 슬지 않게 잘 관리해온 철문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는 문을 두드렸다.

달려나온 문지기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기겁을 하면서 문을 열어주었다.

첫 대면에 카이엔에겐 단순히 지방 귀족이라고 자기를 소개했던 바이스였지만 그가 도착한 저택은 전혀 지방 귀족이 소유하고 관리할 수 있는 곳으로 볼 수 없었다.

카이엔이 지내고 있는 세자르의 영주성보다 세배는 넓은 저택과 연결되는 길을 걷는 그의 앞을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집을 떠난 시간이 꽤 길었는데, 그를 못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기분이 이상했다.

그대로 저택에 도착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기억을 더듬으며 저택의 주인이 있을 법한 장소로 향했다.

집 떠난 지 거의 십 년이라 가물가물 할 법도 한데 바이스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마주치는 사용인들 모두 그에게 고개만 숙일 뿐 제지하지 않았다.

똑. 똑.

도착한 문 앞에 서서 노크를 한 뒤, 대답도 듣지 않고 그는 문을 열어젖혔다.

세자르 영주성에 있는 카이엔의 서재보다 몇 배는 넓은 서재 안에 한 사람이 서있었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채 미동도 하지 않는 사람을 발견한 그는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후작님.”

***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후작이라 불린 중년의 남성이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대놓고 발소리를 흘리며 들어온 침입자의 존재를 모를 리가 없었다.

인상을 찌푸린 채 저택의 주인인 가르실 바이올로스 후작은 아무렇지도 않게 개인 공간을 침범한 불청객을 응시했다.

그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이스가 말했다.

“거의 십 년만인가요? 참 길었네요.”

“허… 할 말이라곤 그것뿐인 거냐?”

바이올로스 후작이 내뱉은 말에 바이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더 있냐고 묻는 듯한 행동에 후작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참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놈 치곤, 태도에서 여유가 묻어나왔다.

그 긴 시간 동안 잘 놀다온 아들을 보는 눈이 고울 리가 없었다. 알면서도 바이스는 모르는 척 했다.

말 한마디 주고받지 않는 부자 사이에 침묵이 짙게 내리깔렸다. 먼저 입을 연 건 후작쪽이었다.

“네가 밖에서 나돌아다닐 동안 네 두 동생들은 많이 컸고 제 세력도 길러나가고 있는데 넌 대체 뭘 한 거냐?”

“없습니다. 제가 이룬 게 있을 리가요.”

바이스는 순순히 없다, 라고 대답했다.

너무나도 당당한 대답에 후작이 할 말을 잃은 순간 바이스가 빠르게 한마디 덧붙였다.

“제 모든 것은 왕자님의 것이니까요.”

“너…”

“물론, 여기서 말하는 왕자님은 카이엔 님이십니다.”

활짝 웃으며 바이스가 말했다. 그 대답을 들은 순간 후작은 검을 빼들었다.

자신에게 겨눠진 검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이스는 후작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맞서 싸우고 싶다는 뜻이 없다는 걸 알리려는 듯이 뒷짐을 지고 선 채로 그가 말했다.

“이 말을 하려고 온 겁니다. 국왕께서 카이엔 님께 공주님과의 결혼을 제안하셨다는데 누구 머리에서 나온 건지 궁금하네요. 그런 결혼 따위, 하게 둘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페르세이지!”

“바이스라고 새로 이름을 지었답니다. 카이엔 왕자님의 시종인 바이스라고 불러주세요.”

검을 쥔 후작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당장이라고 눈앞의 말 안 듣는 아들을 베어버리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는 모양이었다.

반면 바이스의 눈동자는 떨림 하나 없었다. 그는, 이 말을 전하려고 후작을 찾아왔다.

카이엔은 왕이 될 생각이 없었다. 조용히 북부에서 지내면서 이종족과 교류하고 몬스터를 기르면서 살고 싶어 했다.

허나 그 말을 순수하게 믿어줄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눈앞의 후작만 해도 믿지 못해서 검까지 빼들지 않았나.

물론 후작이 화가 난 건 카이엔 때문이 아니라 변심한 아들 때문이었지만 바이스는 알면서도 다른 적당한 이유를 대며 상대방의 행동을 정당화시켰다.

카이엔을 처음 만났을 때, 그 어린 왕자는 뜬금없이 시종을 하겠답시고 찾아온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이였지만 좋다, 싫다의 확실한 의사표현도 하지 않고 거대한 만티코어의 몸통에 파고 들어 넓은 등에 몸을 뉘이며 그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함께 긴 시간을 보낸 만큼 꽤나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앞에 선 아버지가 노발대발하든 그를 붙잡고 말리든 그는 멈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알아두십시오. 제가 여기 다시 찾아올 일은 없을 겁니다.”

“후회하지 않을 거냐?”

“물론이죠. 더 가치 있는 걸 찾아버렸거든요. 그럼 가보겠습니다. 앞으론 저 찾지 마세요. 쓸데없이 사람을 보내 접촉하게 하지도 말고요.”

굉장히 불쾌하다며 바이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뒤돌아섰다.

무기를 든 상대에게 등을 보이며 그는 성큼성큼 서재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인 후작이 대화를 길게 끌지 않아서 다행이라며 그는 품 안의 회중시계를 확인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허나 그가 저택 밖으로 나가니 무장한 기사들이 대문으로 향하는 길을 막아선 채였다. 아마, 후작이 그가 저택에 들어왔다는 말을 전해 듣자마자 준비한 모양이었다.

작게 혀를 차며 바이스는 차분히 적의 수를 가늠했다. 후작도 생각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 그가 그렇게 나올 줄은 충분히 예상한 모양이었다.

대장으로 보이는 기사가 먼저 검을 뽑아들며 외쳤다.

“이 앞으론 가실 수 없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후작님의 명령이십니다.”

“흠.”

나를 모르나?

바이스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알았으면 저렇게 나오진 않았을 거다.

수상하게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날붙이를 챙겨오지 않아서 마땅히 손에 들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없으면 만들면 그만이지 않나? 가만히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치다가 바이스는 자리를 박차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대장격인 기사가 아닌 다른 기사에게 덤벼들어 순식간에 검을 빼앗고 그대로 발로 차서 뒤로 넘어뜨렸다. 방심하고 있던 몇 명이 함께 뒤로 넘어졌다.

그의 돌발행동에 대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공격!”

그 외침에 다른 기사들 역시 일제히 검을 뽑아들었다. 명령은 생포, 였지만 한군데쯤은 부러지고 다쳐도 된다는 말을 들었기에 그들은 눈앞의 상대를 적당히 손봐줄 요량이었다.

고작 한 명을 상대로 서른 명이 덤벼드는 꼴이 우습지만 명령이 그랬으니 어쩔 수 없었다.

자신에게 덤벼드는 기사의 검을 쳐내며 바이스는 앞으로 나아갔다.

쩡하는 소리와 함께 단 한 번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은 검을 놓치거나 여전히 붙들고 있다고 해도 검을 타고 내려온 충격에 손이 찌르르 울리는 것을 느꼈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날붙이를 교묘하게 피하며 그는 기사들에게 상처를 입혔다.

그래도 나름 귀족가 기사니 눈에 띄는 심한 외상을 입힐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치명상을 입혀 베어 넘어뜨리지 않으니 계속해서 덤벼들어 점점 귀찮아졌다.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청아하게 들리기는커녕 합이 안 맞는 악기 연주 같았다.

못마땅한 눈으로 들고 있던 검을 힐끗 쳐다보고 바이스는 횡으로 길게 검을 휘둘렀다.

빠른 공격에 기사의 검은 공격을 완전히 막지 못하고 검과 검이 살짝 스칠 정도로 맞닿았다. 얕게 들어간 공격이라 피해는 입지 않았다.

그러나, 고작 스쳐 지나간 공격일 뿐인데 기사가 들고 있던 검이 두동강이 나버렸다.

“어…?”

당황하는 기사의 목을 그대로 붙잡아 바닥에 내팽겨치고 바이스는 검을 휘둘렀다.

제대로 맞지도 않는 공격,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것처럼 보였건만 닿지도 않는 공격에 기사들의 검과 갑옷에 잇달아 상흔이 남았다.

검을 부수고 갑옷을 베어버릴 정도의 예리함. 허나 바이스가 들고 있는 검은 그에게 맞서는 기사에게 빼앗아 휘두른 것이었다.

기사들의 검에는 그런 능력이 없었다.

시간을 끌수록 힘을 보태주기 위한 지원군이 속속들이 몰려왔다.

바이스는 혀를 차고 닥치는 대로 눈앞을 막아서는 자들에게 검을 휘둘렀다.

힘 조절을 잘못해서 갑옷을 쪼개버리고도 모자라서 결국엔 피를 흘렸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가 버리고 떠날 집안의 기사들이 아니었다.

일찍 온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카이엔과 한 약속을 어기고 싶지 않았다.

채앵!

그와 검을 맞부딪친 기사의 몸이 휘청거렸다. 도약해서 그 자를 발판삼아 바이스는 뛰어올랐다. 그런 식으로 다른 이들의 머리며 어깨를 발판삼아 그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으억!”

“뭐, 뭐야!”

덕분에 기사들은 혼란에 빠졌고 바이스는 그들을 따돌리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후작도 저들이 그를 붙잡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 혼날 일은 없을거란 생각이 들어서 미안하지도 않았다.

대문만 넘어서 밖으로 나가면 후작도 집안에서처럼 힘을 써서 그를 붙잡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대충이지만 집안 사정을 마무리 지었으니 이젠 더는 거리낄 것이 없다며 달려가는 그를 향해,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남녀 한쌍의 목소리였는데, 귀에 익은 것 같으면서도 어색했다.

“오라버니-!”

“형님!”

아. 동생들인가?

못 본 지 오래라 어색할만도 했다.

그를 그렇게 부를만한 사람은 두 명의 동생들뿐이었지만 바이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대문을 지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거대한 철문은 그를 막지 않았다. 문지기는 문을 열어줄 때와 비슷한 얼굴로 대문을 활짝 열어둔 채였다.

바이스가 밖으로 나가버리자 애타게 그를 부르며 그제야 저택의 밖으로 나온 남매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아주 어렸을 적에 함께 있었던 형제가 돌아왔다는 말에 기뻐하긴 이르다는 걸 알려주려는 것처럼, 바이스는 후작과 간단한 대화만 남기고 다시 떠나버렸다.

“가, 가버렸어…?”

“어째서…?”

멍하니 주저 앉은 남매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바이스가 떠나간 자리만을 응시했다.

그들이 그에 대한 감정이라곤, 어렸을 때 함께 있으면서 겪었던 추억에 관한 것 뿐이었다.

판단하건대, 그의 오라비가 형제가 후작가를 박차고 떠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제 손 안에 들고 휘두르려고 한다면 모를까.

친동생이라고 해도 엄연히 그의 발밑에도 미치지 못하는 그들을 남기고 그가 떠날 이유가 있는건가? 어차피 이 모든 권력도 재산도 모조리 그의 것이 될 텐데?

있다고 한다면, 빈손으로 쫓겨난거나 마찬가지인 폐세자인 왕자뿐이었다.

그가. 바이올로스 후작의 장자인 페르세이지 바이올로스가 제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선택할만한 가치가 있는 자가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누군가를 짓밟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면서.

“그 왕자가 대체 뭐길래…”

그 미친 인간이 여기까지 와서 집안을 뒤집어 엎고 간 건가.

같은 피를 가진 형제인 그들조차, 그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서재의 창문을 통해 바깥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바이올로스 후작은 헉, 하는 짧은 신음을 토하며 자신의 뒷목을 잡았다.

어렸을 적부터 재능이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가르치려고 붙여놓는 스승들을 족족 베어버려서 반쯤 포기했었는데. 세자르라는 시골구석으로 갔음에도 불구하고, 재능을 보다 확실하게 개화시켜줄 스승이 없음에도 미친 아들놈의 능력은 제대로 깨어난 듯했다.

검끝에 일렁이고 있던 미약한 오러는 상대에게 필요한 만큼의 부상을 입힐 수 있을 정도로 제어되고 있었다. 아마, 본인이 원한다면 훨씬 더 강력한 공격을 선사할 수 있었음에도 그 힘을 숨기려는 듯 바이스는 최소한의 오러 만을 사용했다.

‘저놈이 제대로 해낼 리가.’

도대체 어떻게 오러를 발현해냈고 다스릴 수 있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 검으로 폐세자를, 왕자를 베어버리지 않을 가능성 또한 미약했기에. 후작은 겨우 진정하고 긴 숨을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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