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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왕자는 조용히 살고싶다-53화 (54/219)

53화

“아, 대체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나보다 열 살 가까이 많은 사람이잖아! 결혼이라니!”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공주, 레이지 이디에우스는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지만 아까 그 자리에서 바로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그녀가 놀란 정신을 부여잡을 동안 카이엔이 먼저 말도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인 덕분이었다.

만약 그 자리에서 그녀 또한 카이엔에게 호응하며 절대 싫다며 난리쳤다면 어머니에게 나중에 크게 혼이 났겠지만. 그래도 혼나는 것보다 결혼이 더 싫었다.

그녀가 팔다리를 휘저으면서 침대 위에서 난동을 피우고 있으니 의자에 앉아있던 쌍둥이 오빠이자 왕자인 에이들러가 힐끔 문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레이지, 계속 시끄럽게 하면 시녀들이 들어올 거야. 어머니한테 혼날지도.”

“씨이… 자기 일 아니라고! 넌 좋겠다!”

아직 둘 다 어린지라 같은 궁을 나눠쓰고 방도 가까워서 이런 식으로 자주 왔다갔다 하곤 했었다.

짜증이 머리 끝까지 오른 그녀와는 달리 오빠에겐 아무런 일도 없어서 레이지는 뺨을 부풀렸다.

난리를 친 덕에 머리가 잔뜩 헝클어지고 산발이 되어버려서 에이들러는 레이지의 모습에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그 반응에 레이지가 달려들어 그의 머리카락도 마구 휘저어서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으악!”

“흐흐… 이제 똑같지?”

“아, 진짜!”

“난 지금까지 사촌 오빠가 있는지도 몰랐는데 대체 이게 뭐람. 넌 들은 거 있어?”

“나도 없어. 그런데 되게… 우리랑은 다르게 생겼더라.”

그들 남매는 아버지를 닮아 갈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촌 오빠인 카이엔은 단정한 검은 머리였다.

열아홉이면 거의 어른에 근접해있었다. 지금까지 친척이라곤 외가 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게다가 걸리는 건 하나 더 있었다.

“아버지 쪽 친척이면 왕족이라는 거잖아. 그런데 왜 우린 몰랐지?”

“맞아. 좀 가르쳐주라고 할까?”

“알려주려나 모르겠다. 사촌 오빠가 존재했다는 것도 이번에 알게 된 건데.”

“그러게. 안 알려주겠다.”

괜히 또 혼날지도. 남매는 거의 동시에 한숨을 푹 쉬었다.

그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시녀가 방으로 들어왔다.

“공주님, 왕비님께서 전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으응. 뭔데?”

“내일 카이엔 왕자님을 만나러 가라고 하셨습니다.”

“…뭐?”

“꼭 다녀오라고 몇 번이고 강조하셨습니다.”

“어…”

“응! 알았어! 나도 안 잊어버리고 레이지한테 말할게. 가봐.”

레이지가 말문이 막혀서 입만 벌리고 있으니 옆에서 에이들러가 손짓을 하며 시녀를 내보냈다.

시녀가 나가자마자 레이지는 옆으로 픽하고 쓰러졌다.

“아, 진짜 뭐야! 나 진짜 결혼시키려고? 미쳤나봐!”

“그, 그러게… 나도 같이 갈게. 그러니까 걱정 마.”

에이들러가 같이 간다고 해도 못미더운 오빠를 그녀가 챙기는 모습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레이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보단 둘이 가는 게 차라리 나았다.

왠지 그들 두 사람과 대면할 카이엔의 얼굴 표정이 상상이 가서 레이지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식사 후 남매는 카이엔을 찾아갔다. 하기 싫은 일이라면 얼른 해치우는게 낫다는 레이지의 판단하에 에이들러는 얌전히 따라갔다.

허나 방문에 대해 들은 게 없는 카이엔은 계속 방에 있는 것도 답답해서 라스와 그리델라를 데리고 산책을 나왔다가 마차에서 내리는 두 사람과 마주치게 되었다.

“응? 무슨 일로 온 거야?”

“그… 어머니가, 만나러 가라고 해서요.”

레이지는 솔직히 대답했다. 숨길 게 없어서 내뱉은 말에 카이엔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부모님이 시키셨으면 어쩔 수 없지. 차라도 마시면서 시간 때우다가 가라.”

남매를 문전박대하지 않고 카이엔은 안으로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목줄도 없이 다니는 늑대를 보고 남매는 살짝 긴장했고 그걸 눈치챈 라스는 그들에게 관심이 없다는 티를 팍팍 내며 카이엔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 모습에 레이지가 먼저 카이엔을 따라갔다.

“돌려보내지 않아서 고마워요.”

“어쩔 수 없지. 그런데 나중에 돌아가고 나면 무슨 이야기 했는지 어땠는지 캐묻지 않을까?”

“으…”

“고생이 많네.”

바이스에게 다과를 내오라 이르고 카이엔은 정원에 티테이블을 마련하게 했다.

날씨도 좋으니 바람도 쐴겸 야외에서 앉아있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실은, 꽉 막힌 방에서 이야기했다간 더 답답해질 것 같아서 택한 것이었다.

레이지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먼저 마련된 자리에 카이엔이 앉으니 라스는 그의 발밑에 엎드려 누웠고 그리델라는 야옹거리는 소리를 내며 무릎 위에 몸을 말았다.

낯선 이를 봐도 이를 드러내지 않는 늑대에 레이지가 물었다.

“순하네요.”

“착한 애거든.”

“낯선 사람이면 경계해야 할 텐데.”

“똑똑해서 그래. 너희가 어린애라 더 그랬을 테고.”

카이엔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거짓말은 아니라며 그는 맞은 편에 앉은 쌍둥이 남매를 살펴보았다.

둘다 왕비보단 왕을 닮아있었다.

파티에 참석했던 어제보단 좀 덜 화려한 옷을 입었지만 잘 꾸며입은 건 다르지 않았다.

반면 카이엔은 힘이 팍 들어간 남매와 대조되듯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산책하러 나왔다 만난 것이기에 겉옷도 걸치지 않았으니까.

찻잔을 들어올리며 카이엔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얼마나 있다 갈 거지?”

“모르겠어요. 그냥, 만나고 오라는 말만 들어서요.”

“점심 식사 전에 돌아가면 되겠네. 식사까지 같이 하고 갔다간 너네 분명 체한다.”

작게 웃으며 카이엔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의 허리에 닿을까 말까한 사촌동생들은 아직 너무 어렸다. 그 아이들이 그에게 있었던 일을 알 리가 없었다.

그는, 저 아이들보다도 어렸을 적에 그런 일을 겪었음에도.

‘애들한테 그러는 건 화풀이지.’

그리고 그가 화를 내야하는 대상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레이지는 말없이 그를 살피고 있었다. 낯선 어른을 앞에 둔 어린애다웠다.

에이들러는… 힐끔힐끔 라스와 그리델라를 구경했다. 늑대와 고양이가 신기한 모양이었다.

실제론 애완동물이 아니라 동물로 변신한 늑대인간과 마녀였으므로 그가 만져도 된다고 허락해줄 수는 없었다.

그때 카이엔의 무릎에 있던 그리델라가 야옹, 하는 소리를 내더니만 폴짝 그의 무릎에서 뛰어내렸다.

“어제 작은 아버지가 너희에겐 따로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신경쓰지 마라. 나는 절대 어린애랑 결혼 안 해. 내가 뻗대고 있으면 포기할 테니까 걱정하지도 말고.”

“네. 저도 그런 건 싫거든요. 전 고작 열 살인데.”

“그러게 말이다.”

레이지는 맞은편에 앉은 사촌오빠를 바라보았다.

그들 남매의 아버지를 작은아버지, 라고 칭한걸로 봐선 그는 왕족임이 확실했다.

선왕은 아버지의 형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상하잖아.’

선왕에게 자식이 있었으니 자연스럽게 카이엔이 왕위를 이었어야 할 텐데.

무릎 위에 올라간 손에 힘이 저절로 들어갔다.

‘뭐야 이게.’

어른들 사정에 끼워넣지 말라고.

레이지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확실히 그녀는 아직 어리지만 세상 돌아가는 것쯤은 알고있었다.

부모님도 시녀들도 카이엔조차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 건만 그녀는 대강 상황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

마른 침을 삼키다가 그녀는 찻잔을 집어들었다.

독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때 발밑에서 들린 고양이 울음소리에 레이지는 흠칫 몸을 떨었다.

양말을 신은 것처럼 발목부터 발에 까만털이 있는 크림색 고양이가 남매의 발치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뭐, 뭐야…”

“괜찮아. 안 물어.”

“으으…”

“와, 고양이다!”

그녀의 심정을 모르는 에이들러는 고양이가 가까이 온 게 좋은 건지 의자 아래로 손을 뻗어 내밀었다. 그리델라는 고양이 연기를 하면서 에이들러에게 가서 작은 어린아이의 손에 머리를 가져다댔다.

고양이가 다가오자 에이들러는 활짝 웃으면서 레이지를 보았다.

‘저 바보가…’

뭐라고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카이엔이 앞에 있어서 차마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헤실헤실 웃으면서 고양이를 쓰다듬는 오빠를 노려보았지만 에이들러는 눈치채지도 못 했다. 고양이에 정신이 팔려서 의자에서 내려올 기세였다.

사람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오는 고양이와는 달리 늑대는 얌전히 카이엔의 발치에 엎드린 채 하품만 하고 있었다.

바로 앞에서 일어나는 일인지라 카이엔은 남매의 표정변화를 볼 수 있었다. 어린애들이라 그런지 아직 감정을 숨기는데 미숙했다.

쌍둥이 남매라.

왕이라면, 아들인 왕자쪽을 후계자로 삼을 생각일 게 뻔했다.

에이들러가 앉아있는 의자 주변을 맴돌며 야옹거리던 그리델라는 충분히 놀아줬다고 생각한 건지 다시 카이엔에게 달려갔다. 그러더니 라스 옆에 자리잡고 그대로 그 옆에 누웠다.

고양이가 멀어지자 에이들러는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레이지는 그런 오빠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윽…”

“가만히 좀 있어.”

“미안…”

“사이 좋아보이네.”

“제가 누나같지 않아요? 그러니까…”

“맘대로 불러도 돼.”

이름은 알고 있으려나. 카이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작은 아버지 부부가 자식들에게 그의 이야기를 했을 것 같지 않았다.

“카이엔 이디에우스다.”

“레이지예요. 성은 같으니까 제외.”

“에이들러예요.”

“나도 굳이 공주님, 왕자님 붙여서 부르진 않을 거니까.”

“그렇게 안 해도 돼요. 어색하니까요.”

“어, 그럼 전 형이라고 부를래요.”

에이들러가 반색을 하면서 외쳤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이 가지고 싶었던 모양인지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저런 시선은 또 처음이라 카이엔은 슬며시 그 눈빛을 외면했다. 쌍둥이 남매인데 성격은 극과 극이었다. 지금 모습만 봐선 레이지가 누나 같았고.

“그런데 형은 어디서 살아요? 같이 살면 좋을 텐데.”

“아, 난 좀 멀리서 살아. 몬스터랑 말이 통해서 기르고 있는 애들이 꽤 많거든. 얘네는 평범한 동물이지만.”

역시 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레이지는 얼마 없는 단서로 갈피를 잡은 모양이었지만 에이들러는 그 나이대 어린애답게 천진난만했다.

나쁘게 말하면 눈치가 없는 거였지만 어린애니 당연했다.

애들한테 짜증을 낼정도로 인성이 나쁘진 않았기에 카이엔은 순순히 대답해주었고 레이지는 가시방석에라도 앉은 것만 같은 표정을 지었다.

‘우습지. 방해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면 차라리 죽여버리는 게 나았을 텐데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살려놓기나 하고.’

그래놓고선 얼굴이나 보자고 불러와선 뜬금없이 제 딸과 결혼시키려 하다니.

물론 그를 죽이고 싶어도 죽일 수 없었을 것이다. 사트로누스가 그를 호위했으니까.

그 후엔 페이리와 만나게 되었고 그녀가 밤중에 내내 천장이며 비밀통로에서 그를 감시하며 지켜주었다. 물론 바이스도 곁에 있었다.

에이들러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한 건지 레이지는 찻잔에 남은 차를 그대로 들이켰다. 다 식은 차를 단숨에 마시고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귀찮게 굴어서 죄송해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어? 벌써 가게? 나-”

“얼른 와.”

“으응… 담에 또 봐요, 형아. 나 늑대도 만져보고 싶었는데-”

아쉬움을 떨치지 못하는 에이들러를 반쯤 잡아끌며 레이지는 걸음을 옮겼다.

말리지 않고 카이엔은 손만 흔들어주었다.

귀여운 쌍둥이 동생들이구나.

카이엔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과연 저 녀석들은 나중에 제 부모와 똑같이 그를 위험으로 여겨 제거하려고 들까? 그런 생각을 하니 서글퍼지긴 했지만.

‘저대로만 커주면 좋을 텐데.’

허나 사람 인생은 알 수 없는 법이었다. 그도 이렇게 커버렸으니까.

역시 어린애가 자라는 데는 주변 환경과 가르쳐주는 사람의 인성과 성격이 중요한 법이었다. 그런고로, 아마 쌍둥이 남매는 제 부모님과 비슷하게 자라날 테고 국왕 부부는 왕자를 왕으로 삼고 싶어 하겠지만 그 자리는 공주의 차지가 될 것이다.

바이올로스 후작가 출신인 왕비를 꼭 빼닮은 게, 바로 공주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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