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어느새 날이 저물고 있었다.
붉은 빛이 창문 안으로 들어와 새하얀 복도를 붉게 물들였다.
밖에서 바이스는 카이엔의 망토며 외투를 툭툭 털었다. 먼지와 고양이 털을 세심하게 제거하면서 그가 입을 열었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걱정할만한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
“절 믿으세요.”
카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심각하게 생각해봤자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일단 그곳에 가서 직접 보고 느끼는 게 중요했다.
그제야 바이스는 평소와 똑같은 차림인 것을 깨닫고 그가 물었다.
“넌? 안 꾸며도 돼?”
“에빌 씨에게 왕자님의 곁을 지키게 하고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시종이 꾸밀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미리 에빌에게 말해둔 건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에빌이 나타났다. 계단을 올라온 그는 카이엔과 바이스가 복도에 서있는걸 보고 급하게 달려왔다.
“미안! 많이 기다렸어?”
“아니. 고양이 털 때문에 나온 거라서.”
“아.”
“바깥의 벤치에 계시거나 에빌 씨의 방에 같이 계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왕자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난 아무데나 상관없어.”
“늦지않게 빠르게 준비하겠습니다.”
바이스가 올 때까지 대충 1층이나 둘러보자면서 카이엔은 에빌과 함께 1층으로 내려갔다.
리만테스 궁을 지키는 기사들은 다들 밖을 경계하고 있었기에 1층은 조용했다.
저번에 그가 외출을 했을 때 가져갔던 등잔이 있던 위치에 새로운 등잔이 끼워진 걸 보고 카이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보니 그가 그 등잔을 어디에 두고 온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10분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바이스가 계단을 내려왔다. 옷만 바꿔입고 머리만 좀 더 단정하게 빗어넘긴 것 같았다. 그 시선을 읽고 바이스가 말했다.
“어차피 왕자님께서 가장 빛나실 텐데 시종과 호위가 꾸며봤자 뭐합니까?”
“맞아.”
“너 평소보다 머리를 더 뒤로 넘긴 것 같은데.”
안 어울리는 건 아니었다. 바이스도 허우대 멀쩡하고 잘생긴 얼굴이었으니 까치집을 해도 미남이었을 테고.
뭐가 문제냐는 표정에 카이엔은 더 이상 말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천천히 파티가 열릴 궁으로 가면 늦지 않을 터. 호위와 시종을 데리고 카이엔은 리만테스 궁을 나섰다.
밖에서 궁을 지키고있던 기사들이 그를 보고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미리 준비된 마차에 타니 마차는 바로 파티장으로 향했다.
탄신연에는 각 지방의 귀족들이 모두 모인다.
서로의 안부도 확인할 겸 세력을 주시할 겸 친분을 다질 겸. 카이엔은 그런 이유 중 어느 하나에도 해당되는 점이 없었다.
현 왕이 불렀다. 불렀으니 올 수 밖에.
그 자리엔 현 국왕부부와 그의 자식들이 함께할 것이다. 그제야 카이엔은 아, 하는 탄성과 함께 중얼거렸다.
“…그래. 걔들이 있었구나.”
현 왕의 자식들. 그의 사촌동생들.
그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별로 궁금하지 않아서 신경도 쓰지 않았던 정통을 잇는 직계 왕족.
떠오르긴 했지만 그리 알고 싶지 않아서 카이엔은 팔짱을 낀 채 마차 좌석에 몸을 기댔다.
파티가 열리는 홀 안은 수많은 귀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시종과 호위 동행으로 입장할 수 있는지라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개중엔 호위나 시종 둘 중 한 명만 데려오거나 둘 다 밖에 둔 채 들어온 자도 있었다.
인파가 몰리니 그들이 한마디씩만 해도 금세 홀 안이 시끄러워졌다.
카이엔보다 일찍 도착한 세자르 남작은 그 틈바구니 속에서 인접 영지를 다스리는 다른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전 모임에서, 카이엔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제 눈으로 확인한 자들이었다.
그중 한 명인 에피넬 백작이 주변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세자르 남작에게 물었다.
“그… 왕자님은 오시는가?”
“다 아시면서 물으시는군요.”
“허어 참… 심정이 복잡하실 텐데…”
에피넬 백작이 한탄조로 대답했다. 카이엔이 힘들어할 거라고 여긴 것이었다.
그 말에 반박하지 않고 세자르 남작은 말없이 다른 귀족들을 살폈다.
그와 카이엔은 함께 수도까지 왔고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카이엔이 이곳에 왔다는 소문이 퍼졌을 것이다.
단순히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만해도 제 동료들에게 그 이야기를 했을 테니까.
카이엔의 존재는 비밀이 아니었다. 다들 입조심을 하긴 했지만 입에 담아서는 안될 이야기도 아니었으니.
“그런데 자네는 왜 왕자님과 같이 오지 않은 건가?”
“왕자님은 왕성에 계시니까요. 아마 곧 오시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으음…”
“실은 오실지 안 오실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겠지. 다들 왕자님 이야기는 들었을 테지만 긴가민가 하고 있을거야.”
“에피넬 백작님은 어떠신가요? 왕자님이 오셨으면 하십니까?”
“글쎄…”
그는 말끝을 흐렸다.
솔직히 말하면 그는 이런데 오지 않는 것이 카이엔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왕성에서 쫓겨나다시피한 게 벌써 십 년 전. 젊은 귀족들은 선왕에게 자식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게다가, 그 자식이 아직 살아있을 것이라고 여기지도 않을 테고.
카이엔은 훤칠한 청년으로 자랐지만 그에게 힘을 실어주는 배경이 존재하지 않았다.
핏줄은 누구보다도 고귀했지만 그 고귀함만 있어서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한쪽에서 검은 숲을 인근에 둔 영지의 귀족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다른 귀족들의 무리에서도 카이엔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십 년 전 밀려난 왕자가. 이제 폐세자나 다름없는 왕자가 탄신연에 참석한다.
출처가 어딘지는 그들도 잘 모르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겼는지 저마다 입을 움직이기에 바빴다.
과연 어떻게 자랐을까.
그것이 그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몬스터와 말이 통한다고 했지? 정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보게, 그쪽 영지에선 이미 유명하다던데?”
“그렇습니까? 그럼 몬스터를 애완용으로 키운다는 말도…”
“무섭구만…”
“하지만 그런 능력이 있어서 그때 살아남으신 거 아닌가?”
이 자리에 아직 카이엔이 없었기에 그들은 그의 이야기를 하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그 사건을 아는 자들은 쫓겨나다시피한 왕자에게 주목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정보를 캐내고 싶었지만 그 시도가 빈번히 실패하니 저절로 손을 떼고 관심을 거둘 수밖에 없었는데 본인이 직접 나타난다는 말을 들으니 저절로 흥미가 생긴 것이다.
아내 혹은 자식과 함께 온 귀족들은 혹시라도 자식들이 카이엔에게 불경이라도 저지를까 급하게 행동에 주의를 주어야만 했다.
현 왕이 카이엔을 이곳에 초대한 목적을 모르기에, 몸을 사릴 필요가 있었다.
파티장의 웅성거림에 섞여 우려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모두의 이목이 은근히 홀의 입구를 향해있을 때, 홀 앞을 지키며 입장하는 사람을 확인하는 역을 맡은 시종의 외침이 홀 안에 울려 퍼졌다.
“카이엔 이디에우스 왕자님, 입장하십니다!”
그 목소리에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 소리에 이끌려 동시에 입구로 시선을 향했다.
그리고,
“허…”
“정말로…”
“오셨어.”
“저렇게 자라시다니…”
훤칠하게 자란 왕자를 보게 된 그들의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반면 시종의 외침과 그가 나타나자마자 쏠리는 시선에 카이엔은 인상을 썼다.
“하? 왕자?”
삽시간에 조용해진 홀 안에 찬물이 끼얹어졌다.
자신은 적힌 대로 부른 것뿐이라 잘못이 없었지만 카이엔이 표정을 구기자 시종은 급하게 고개를 숙였고 카이엔의 옆에 서있던 바이스가 슬며시 그의 등을 톡톡 치며 조용히 말했다.
“그렇게 부르라고 했겠죠. 들어갑시다.”
“…그래.”
카이엔이 홀 안으로 들어서자 안을 채우고 있던 귀족들이 저절로 뒤로 물러나 카이엔이 앞으로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차마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힐끗힐끗 쳐다보기만 하는 그 시선에 카이엔은 혀를 찼다.
그는 정말 별 이유없이 참석한 건데 저들은 머릿속에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게 뻔했다. 착각할만도 했다. 그 역시 현 왕의 의도를 모두 파악할 수는 없었으니까.
어디까지 가야하는지 몰라 카이엔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고 그런 그에게 바이스가 방향을 알려주었다.
“저 앞이라고?”
“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보통 왕족들이 저 정중앙의 자리에 위치하니 왕자님은 앞에 계셔야죠. 그리고 가까이에서 봐야 그들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행여나 누가 들을까봐 목소리를 잔뜩 줄인 채 말하니 속삭이는 것과 비슷했다. 반쯤 알아듣고 카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국왕 일가의 자리가 마련된 곳과 가장 가까운 테이블의 앞에 카이엔은 멈춰섰다.
그런 그에게 바이스가 물이 담긴 잔 하나를 내밀었다. 뭐라도 들고 있으라는 뜻이었다.
“흠.”
“꾸민 보람이 있군요. 다들 쳐다보고 있으니까요.”
“내가 거지꼴로 있어도 쳐다는 봤겠지.”
“우와, 되게 숨막힌다. 카이엔 넌 괜찮아?”
에빌역시 목소리를 낮추고 카이엔에게 물었다.
카이엔이야 거의 십 년동안 모습을 감추고 산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올해 바로 기사학교를 졸업한 신인인데다가 어머니인 라이오트 백작을 따라 여기저기 얼굴 비춘 적이 많으니 부담스러울만도 했다.
혹시 저 시선 중에 어머니의 것도 있을까봐 에빌은 조심스럽게 주변인들을 살폈다. 그런 그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면서 바이스가 말했다.
“대놓고 봐도 됩니다. 당신은 왕자님의 호위기사 아닙니까. 주눅들지말고 당당하게 행동하세요.”
“아, 네.”
“그리고 여기 라이오트 백작이 있다면 지금쯤 질문 세례에 휘말려서 바쁠 테니 당신을 보고있을 리 없죠.”
“그렇네요.”
바이스의 말에 에빌은 긴장을 풀기로 했다. 애초에 어머니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그가 카이엔에게 가는 것을 허락해 준 게 바로 어머니였으니까.
가만히 손에 든 물잔을 빙빙 돌려보던 카이엔은 고개를 돌려 주변의 다른 이들을 살폈다.
바이스야 당연히 걱정할 필요 따윈 없었고 에빌도 조금 진정한 것 같으니 남은 건 그뿐이었다.
그는, 평온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 자리에서 현 왕이 쓸데없이 그에게 말을 붙인다고 해도 과연 멀쩡히 대답할 수 있을까.
그것이 조금 걱정되었다.
그의 입장 이후로도 속속 귀족들의 입장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괘종시계에서 탄신연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와 함께 입구에서 현 왕실 일가를 소개하는 쩌렁쩌렁한 외침이 퍼졌다.
“바르바스 이디에우스 국왕폐하, 유라세 이디에우스 왕비님, 에이들러 이디에우스 왕자님, 레이지 이디에우스 공주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카이엔이 등장했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다른 점은 그들이 걸어갈 길을 만들기 위해 기사들이 앞서 달려 나와 누군가가 함부로 그들에게 접촉할 수 없게끔 길 양옆을 지키고 섰다는 점이었다.
카이엔은 별 감흥 없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십 년만에 얼굴을 보게 된 작은 아버지는 그때보다 많이 늙어있었다. 작은 어머니는… 작은 아버지보단 덜 늙었다.
그 뒤를 따라서 들어오는 어린 남매를 보며 카이엔은 그제야 그 아이들이 그의 사촌임을 알게 되었다.
‘어리네.’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는 게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들이 맨 앞에 놓인 의자에 자리 잡고 앉고 나서야 탄신연이 시작되었다. 현 왕이 말하는 말들을 반쯤 흘려들으면서 카이엔은 벽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탄신연에 와준 모두에게 인사를 건네던 국왕이 갑자기 카이엔을 언급했다.
“이렇게 좋은 날, 내 조카 카이엔까지 축하를 해주러 왔다. 건강한 모습을 볼 수 있어서 기쁘구나.”
“어…”
뜬금없이 국왕이 그에게 말을 걸자 카이엔은 굳어버렸다. 잔을 떨어뜨릴뻔한 걸 바이스가 붙잡아 쥐여주었고 카이엔은 현 국왕인 작은 아버지를 보며 입을 열었다.
“마찬가지, 입니다.”
그 짧은 대답만으로 만족했는지 현 국왕 바르바스 이디에우스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카이엔의 귀에 그 말들은 들리지 않았다. 그저, 대놓고 그에게 말을 건 저자의 심리에 대해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바이스는 조용히 그런 카이엔의 옆을 지키면서 주변 사람들을 관찰했다.
그 누구도, 섣불리 카이엔을 향해 다가오지 못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