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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왕자는 조용히 살고싶다-47화 (48/219)

-47화

글라스는 며칠 내내 누나인 글러티나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누나가 아직 가주로서는 미숙하다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사람임은 분명했다.

그런 누나가 혼자서. 그것도 심각하게 다친 채로 왔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모스피아는 다른 가문들에 비해 혈족을 늘리는 걸 좋아하지 않고 한군데 조용히 처박혀 은둔하기를 즐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습격인가?’

고작 몬스터에게 당할 그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습격이라고 해도 짐작가는 곳이 없었다.

뱀파이어들은 다들 제 잘난 맛에 사는 작자들이고 사는 곳도 죄다 따로따로라 미치지 않는 이상 그 먼 길을 대군을 이끌고 진군할 리도 없었다.

‘그냥 미친 건가?’

글라스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눈에 보이는 상처는 소독했고 출혈이 있는 곳은 지혈했다.

인간에게 쓰이는 약이 뱀파이어에게도 유용할지는 의문이라 적당히 약초를 써서 그가 조합한 약을 이용했다.

인간보다 치유력이 높은 뱀파이어라고 해도 출혈이 꽤 많았기에, 글러티나가 언제 눈을 뜰지는 그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눈을 뜬 건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뒤였다.

보다 창백해진 얼굴로 정신을 차린 그녀는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아있던 남동생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님!”

“난 가야 한다. 너한테 그 사실을 전했으니 다시 성에…”

“진정해! 다시 가서 뭘 어떻게 하려고?”

“남은 이들이 있는지 알아야 해. 성이 무너지고, 다들 흩어졌을 거야. 나…”

글러티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만 남았을 리가 없어…”

힘없이 고개숙인 그녀를 부축하며 글라스는 조심스럽게 누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 역시, 그렇다고 믿고 싶었다.

누나는 그가 여기에 있는 것을 알기에 위험을 알리러온 것이고 다른 이들은 저마다 잘 도망쳐서 몸을 숨겼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 말을 입에 담는 대신 글라스는 이렇게 말했다.

누님이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

“정말이에요.”

“글라스, 나는-”

“뭐 필요하신 건 없어요? 일단 물이라도 드세요. 누님이 깨어나는 걸 왕자님도 기다리고 계셨어요. 습격자에 대해 묻고 싶은 게 있으신가 봐요.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거든요.”

“뭐?”

“누군가에게 의해 일족이 공격당해 오게 된 사람들도 있어요.”

글러티나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뱀파이어 말고도 그런 일을 겪은 자가 있단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곳에 있는 손님들은 거의 이종족. 그렇다면 이종족만을 노리고 공격을 가하는 미친놈이 존재한다는 말이었으니까.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에게 물이 든 잔 하나를 쥐어주고 글라스는 몸을 일으켰다.

“왕자님께 누님이 깨어나셨다고 전할게요. 바로 이야기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아니면 좀 더 쉬시는 게…”

“멀쩡하다. 바로 이야기하겠어.”

“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모습이 꽤 절도있어보였다.

베개를 등쪽에 가져다놔 몸을 기댄 채로 글러티나는 카이엔이 오기를 기다렸다.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까. 그녀역시 적의 정체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영토를 침입한 자들이 뱀파이어였으며 겉으로 봐서는 다른 세 가문이 동시에 그들을 공격해온 것처럼 보였다.

허나 그들은 괴성을 지를 뿐 말을 하지는 않았다. 작전을 짜서 덤벼든 것도 아니고 무작정 많은 수로 밀어붙였다. 마치 짐승처럼.

그리고…

‘기척을 감추는 마법을 썼다고 생각하긴 어려워. 하지만 시체처럼 보이진 않았어.’

그들을 베었을 때 튄 피의 온도가 어땠지?

적의 피부색은?

몸싸움을 벌였을 때 살갗의 감촉은?

점점 기억이 흐릿해져갔다. 그것이 부상으로 인한 건지 너무나도 긴 시간이 지나버린 탓인지 알 수 없었다.

모스피아의 영토에서 이곳까진 굉장히 멀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비행했어도 한 달은 걸린 것 같았다. 부상 때문에 속도가 느려진 탓도 있겠지만.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도 봤던 얼굴에 글러티나는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폐를 끼쳤네.”

“나야말로. 방금 눈을 떴다는데 찾아와서 미안하다.”

“들어야할 이야기가 있다면서. 어쩔 수 없지.”

“습격자에 대해 말해줄 수 있어?”

숨길 것은 없었기에 글러티나는 그녀가 아는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라스와도 엔베인과도 다른 사정에 카이엔은 살짝 당황했다.

정체불명의 습격자는 라스 때와 같았지만 글러티나의 혈족들은 뱀파이어처럼 보이는 다수의 적들과 싸웠다고 했다.

엔베인이야 더스크라이즈에 떡하니 떨어진 마검의 주인은 알 수 없으니 논외로 둔다고 쳐도. 같은 점이라곤, 이종족이 습격당했다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늑대 인간도 뱀파이어도 그 거처는 물론이고 다수를 전멸시키는데엔 상당한 힘이 필요할 텐데.

‘원한? 그게 아니면 단순한 힘자랑?’

늑대 인간의 경우엔, 산 자도 죽은 시체도 가져갔다고 했다. 허나 바이스는 다수의 살아있는 늑대 인간이나 그 시신에서 나온 부속품이 거래된 적은 없다고 말했다.

뱀파이어는?

뱀파이어를 죽여서 얻는 이득이 뭐지?

“누군가가 너희를 공격할 이유같은 건 있나?”

“글쎄. 같은 뱀파이어의 피를 마셔서 힘을 강화시키는 일이 있긴 하지만 보통 그런 경우는 아귀다툼이 되기 마련이고, 적들 중 그 누구도 피를 빠는 행동을 하지 않았어.”

“성은… 무너졌댔지.”

“응.”

“피도 아니고 재화도 아니고… 그럼 시체?”

“네크로맨서라면 눈독을 들일만도 하지. 허나 그렇게 많은 망자를 다룰 정도로 실력있는 자가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어. 조용히 지냈을 리가 없으니.”

“늑대 인간의 시체를 가져갔다는 놈이 있으니 그쪽이 가능성이 높긴한데… 프라우디에한테 물어봐야 하나?”

아직 햇병아리긴 하지만 그래도 이전에 망령의 대이동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프라우디에에게도 글러티나의 일에 대해 조언을 구해보기로 하고 카이엔은 그녀에게 동의를 구했다. 아직 초보인 흑마법 견습생이란 말에 글러티나는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일 터였다.

“그럼 가볼게. 쉬고 있어. 글라스 넌 당분간 글러티나 좀 도와주고.”

“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고. 뭐… 별일은 없겠지만. 다 나으면 소개해줄 애들 많으니까 바로 알려줘.”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정말로 필요한 이야기만 듣고 카이엔은 돌아갔다. 글러티나에게 휴식시간을 주기 위함이었는데 며칠만에 깨어난 누나를 보며 글라스는 어른스럽게 말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좀 더 쉬지 않아도 돼?”

“멀쩡하다.”

“출혈이 심했어. 피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고.”

“으음…”

“동물 피로도 괜찮지? 내가 잘 골라올게.”

“…그래.”

글러티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글라스는 안도했다.

흡혈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많은 출혈이 있었으니 뭐라도 먹는 게 차라리 나았다.

다만, 걸리는 점이 여전히 있었다.

“나까지 여기 있을 수는 없어. 위험해질 거야.”

“왕자님이 괜찮다고 하셨잖아. 누나가 없어도 이미 여기 사는 사람들이 많아서 위험한 건 마찬가지일걸?”

“날 추적할지도 몰라.”

“잊어버렸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나도 멀쩡히 있잖아. 안 그래?”

“너야 진작부터 성을 떠나있었잖아.”

“그치만 대규모 인원으로 쳐들어온 그 습격에, 난 왠지 우리 성에서 누군가가 첩자 역할을 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걸? 우리쪽이 그렇게 쉽게 무너질 리 없잖아.”

“나 혼자 마음 편히 지낼 수는 없어.”

“지금도 그렇게 편해보이진 않는데…”

글러티나가 인상을 쓰자 글라스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지금 저 몸으로 성으로 가봤자 혹시 남아있을지 모르는 잔당들에게 처치당할 뿐이었다.

조금이라도 회복하고 힘을 길러서 찾아가는 게 나았다. 정보수집도 할겸.

모스피아에 비하면 세르포그같은 가문은 인간들과 접촉하는 일이 빈번해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

글러티나는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고 나서 방에서 나왔다.

이미 구면인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나니 그녀가 성으로 돌아간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여기서 살게 된 비셰와의 인사만이 남았다.

다른 이들과 달리 일거리를 찾아온 건지 주방에서 일하고 있다고 안내 받아서 가니 열심히 양파를 까고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흐읍… 아, 안녕하세요…”

“…우는데?”

“양파 때문인가봐요. 오늘 저녁에 양파로 뭘 만드려고 이렇게 많이 준비하는 거예요?”

“어… 양파 스프?”

아무래도 주방장에게 메뉴에 대한 건 따로 듣지 못한 모양이다.

그 표정에 글라스는 비셰를 가리키며 말했다.

“가장 최근에 들어온 신입이예요.”

“비셰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누님이셔요. 존함은 글러티나 모스피아.”

“존함…”

“아, 그럼 뱀파이어시겠네요! 전 몽마예요. 아직 아는 사람은 적지만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몽마?”

“어? 누님,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제국쪽에 몰려있다고 들었는데…”

“스토커를 피해서 왔어요.”

“고생이 많구나.”

해맑은 표정으로 도망친 이야기를 하다니.

또 이상한 녀석이 늘어난 걸 보니, 카이엔에게 올해 무슨 마가 낀 모양이었다.

그녀의 남동생도 그렇고 그 외에 수많은 이종족들 모두 올해부터 이곳에 살게 되었다니까.

일하고 있는 사람을 방해할 수 없으므로 두 사람은 몇마디 대화만 나누고 주방에서 나왔다.

글러티나는 이곳에 '손님'으로서 묵기로 했다. 본인은 일을 하고 싶어 했지만 마땅히 줄 자리가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날 저녁, 비셰가 손질하고 있던 그 수많은 양파는 캐러맬화 되어 스프로서 재탄생했다.

별채의 모든 손님들이 함께 모여서 하게 된 저녁식사 자리에 카이엔은 없었다. 글라스 역시 시종인지라 따로 자리가 있었기에 그곳에는 글러티나 혼자 앉게되었다.

간단히 스프와 소고기 스튜등으로 식사를 마치고 나니 다들 삼삼오오 무리지어 움직였다.

대충 식사를 마친 글러티나도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그런 그녀에게 프라우디에가 다가왔다.

“아, 글러티나 씨. 잠깐 괜찮을까요?”

“무슨 일이야?”

“왕자님께 전해들은 이야기가 있어서요. 그 사건이 흑마법과 관련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데 괜찮으신가요?”

“물론이지. 정원으로 가면 되나?”

“제 연구실 앞뜰이면 충분해요.”

자네인은 짧게 목례하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 두 사람과 함께 연구실 앞뜰로 가니 프라우디에가 가만히 땅에 손을 짚고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그 안에서 언제 묻어둔 건지 모를 쥐 시체가 비척비척 기어나왔다. 옆에선 뼈다귀들이 덜그럭거리며서 움직였다.

그 광경에 글러티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본 것과는 조금 달라. 뭔가 이질적인 기운이었거든…”

“그럼 흑마법은 아니려나요… 으음.”

또 무슨 가능성이 있을지, 프라우디에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아직 제가 미숙해서 그런걸지도 몰라요. 강한 흑마법사라면 아무것도 안 해도 수상한 기운을 풀풀 풍길 테니까요.”

“프라우디에 그건 좀…”

“아닐까요? 아직 세상엔 제가 모르는 게 많으니까요…”

한숨을 푹 쉬고 프라우디에는 다시 쥐 시체와 뼈를 땅 속으로 돌려보냈다.

쥐 시체의 겉모습이 깨끗한 걸 봐선 아마 오늘 이 실험을 위해 한 마리 잡아서 묻어둔 모양이었다. 뼈도 깨끗하던데, 아무래도 프라우디에가 쥐를 두 마리 잡아서 하나는 그냥 묻고 하나는 깨끗하게 뼈만 발라서 묻어둔 것 같았다.

“도움이 되지 못해서 죄송해요.”

“아냐. 금방 밝혀지진 않을 것 같았어. 신경 써줘서 고마워.”

글러티나는 휴식을 위해 방으로 돌아갔고 그 자리엔 프라우디에와 자네인만 남았다.

말없이 고개를 숙여 땅을 바라보며 프라우디에는 발끝으로 땅을 툭툭 쳤다.

실은, 그는 글러티나에게 흑마법을 보여준 것 말고 다른 방법 또한 시도해보았다.

라스가 속한 늑대 인간 무리와 글러티나의 혈족들이 누군가의 공격으로 흩어지고 사망자가 발생했기에, 그는 망자의 영혼을 불러오려고 했다.

보다 정확한 영혼을 불러내기 위해 라스에겐 사전 동의하에 머리카락과 피를 조금 얻어냈고 글라스, 글러티나에게선 바이스가 몰래 하나 뽑았다면서 머리카락을 내밀었기에 가능했다.

허나 소환은 실패했다.

끔찍하게 죽은 영혼은 원한에 사로잡혀 명계로 흘러가지 못 하고 지상에 남아있을 텐데. 그는 단 하나의 영혼도 불러올 수 없었다.

그 말이 의미하는 건. 누군가가 그들의 영혼마저 붙잡고 있다는 뜻이었다.

‘왕자님에겐 말했지만…’

글러티나에게 말해도 되는 걸까.

결국 그녀에겐 말하지 못했지만 프라우디에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고민에 빠졌고 자네인은 그런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말없이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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