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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왕자는 조용히 살고싶다-46화 (47/219)

-46화

“커헉…!”

충격적인 광경에 잠시 굳어버린 그녀를 향해 검이며 창과 같은 날붙이가 쏟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죽지 않았다.

남은 힘을 짜내 공격한 자들을 모조리 튕겨내고 글러티나는 가쁜 숨을 쉬었다.

저들의 정체도 목적도 알아내지 못했다. 다만 알 수 있는 점은, 바닥에 드리워진 저 그림자. 저게 있는 곳에서 죽었다간 그녀 역시 똑같이 흡수당할게 뻔했다.

어느 순간부터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마치 살아있는 이는 그녀 혼자뿐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오직 괴성만이 가득한 그들의 땅에서.

글러티나는 도망쳤다.

비겁하고 이기적이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적들은 도망치는 그녀를 득달같이 뒤쫓았다. 개중에 활을 쏘는 자가 있었는지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검상을 입은 상처에서 피가 줄줄 새어나갔다. 억지로 틀어막고 지혈하면서 글러티나는 그녀에게로 날아온 화살을 검으로 후려쳤다.

정신없이 도망치던 그녀의 앞에 낭떠러지나 다름없는 협곡이 나타났다.

강도 흐르지 않는, 이미 말라버린 지 오래인 협곡.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그 아래로 몸을 던졌다.

몬스터들이 상당수 출몰하는 지점이라 주기적으로 사냥을 나가는 곳이었건만 지금 사냥당하는 쪽은 몬스터가 아니라 그녀였다.

‘모두 뱀파이어였다.’

‘게다가 제정신이 아니었어.’

‘누군가가 조종하는 거라면, 이미 다른 혈족들은 모조리 당했다는 것.’

‘누군가가 뱀파이어를 노리고있다.’

하나뿐인 남동생이 성을 떠나있다는 사실이, 이렇게나 안도감을 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허탈한 웃음을 지은 채 그녀는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살아있는 자를 찾아 뱀파이어들은 좀비처럼 방황했다.

그런 그들 사이를 유유히 걸어다니는 남자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졌다.

모든 땅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해진 그림자에 시체가 닿자 그림자는 그것을 집어삼켰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한 때 누군가가 있었다는걸 알리는 핏자국뿐이었다.

터벅터벅.

느린 걸음으로 검은 망토를 두른 남성은 성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로비에, 계단에, 복도에.

곳곳을 걸어다니며 그는 시신을 회수했다. 그렇게 천천히 성 한 바퀴를 다 돌고나서 맨 꼭대기 층에 도착한 뒤에야 그는 긴 숨을 내뱉었다.

이걸로 목적은 달성했다.

‘가주는…’

있었던가, 없었던가.

살짝 고개를 기울이고 그는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모든 뱀파이어를 없애버렸다.

그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림자가 지나간 자리에는 오직 꺼림칙한 핏자국만이 남아있어서.

한 때, 이곳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흔적이 되었다.

***

힘없이 날개를 퍼덕이는 박쥐에게 누구하나 관심을 주지 않았다.

멀리서 본 자들은 새인가 보다, 라고 생각했고 가까이에서 본 자들은 대낮에 박쥐가 다닌다고 신기해할 뿐이었다.

박쥐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날아갔다. 중간에 몇 번이고 추락할뻔했지만 억지로 날개를 움직여 날아간 박쥐는 영주성의 울타리를 넘어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배회하던 그것을 잡아챈 건 굵은 촉수였다.

멍하니 일광욕을 하고 있는 릴리시아가 움직이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래서 정원 주변의 잡초를 제거하고 있던 하인은 평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잡초를 뽑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쉭하는 소리와 함께 릴리시아가 촉수를 꺼내자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리,릴리시아? 착하지? 무슨 일 있어? 여기 잡초 뽑지말까?”

하인은 릴리시아와 말이 통하지 않았건만 일단 진정시켜야 한다고 생각한 건지 양 손을 머리 위로 들어올린째 쩔쩔맸다.

그런 그에게 릴리시아는 천천히 촉수를 내밀었다. 정확히는, 촉수로 잡아챈 무언가를 보여주었다.

“어… 박쥐?”

다른 촉수가 슬며시 합류해 위아래로 흔들거렸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카이엔을 불러와야 할 것만 같아서 하인은 잡초뽑던 바구니를 내버려두고 부리나케 달려갔다.

상황 설명을 듣자마자 카이엔은 정원으로 향했다.

여느때나 다름없이 그의 곁은 바이스가 지키고 있었지만 박쥐라는 말에 글라스까지 불러와서 함께 정원으로 달려갔다.

그새 릴리시아는 박쥐를 풀밭에 내려놓은 상태였다. 힘없이 바닥에 누워있는 박쥐를 보며 카이엔이 중얼거렸다.

“나 좀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아니기를 같이 빌어드리겠습니다.”

바이스의 헛소리를 무시하며 카이엔은 조심스럽게 박쥐에게 손을 내밀었다.

살짝 손끝으로 툭 건드니 박쥐가 파르르 떨며 고개를 들었다.

변신이 풀리면서 박쥐가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허나 그 모습은 박쥐보다 더욱 처참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데 하나 없는 글러티나의 모습에 글라스가 화들짝 놀라 그녀에게 다가갔다.

“누, 누님! 이게 대체…”

“큭… 글라스, 잘 들어라. 혈족의 성이 공격당했다. 다들… 생사를 확인할 수 없어.”

“네?”

“적은 뱀파이어를 노리는 듯했다. 다른 일족들도 당했어. 너 역시 타겟이 될 수 있으니 경고하려고 온 거야.”

비틀거리며 글러티나는 몸을 일으켰다.

피투성이인 몸을 억지로 움직이며 그녀는 카이엔에게 고개를 숙였다.

“동생을 부탁한다.”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다시 박쥐로 변해 날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날아가기가 무섭게 바이스가 박쥐로 변한 그녀를 잡아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글라스와 카이엔의 눈이 동그래졌다.

“야, 너, 너 뭐하는 거야?!”

“흠? 왕자님도 당연히 잡으라고 하실 줄 알았습니다만?”

“부상자인데 그렇게 잡아채면 어떻게 해?”

“아무리 다쳤다고 해도 이 정도로 기절할 리는 없지 않습니까. 보십시오, 멀쩡합니다.”

박쥐로 변하자마자 글라스의 손아귀에 잡혀버린 글러티나는 낑낑거리며 벗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그대로 인간으로 변해도 되겠지만 그랬다간 바이스의 손이 다칠 테니 이도저도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뻔뻔한 바이스의 태도에 카이엔은 한숨을 푹 쉬었다.

“놔줘. 글러티나, 나랑 이야기 좀 하자. 너 그 몸상태로 어디로 가려고? 그 상태론 돌팔매에 맞아도 죽겠다.”

“나는-”

“어차피 여긴 위험한 놈들 천지니까 괜찮아. 여기있어. 지켜줄 테니까.”

카이엔의 말에 글러티나는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박쥐에게 이런 말 하는 게 우스웠는지 카이엔은 팔짱을 끼며 선언했다.

“여기서 지내라. 내가 지켜줄 테니까.”

“와, 왕자님?!”

“뱀파이어를 노린 공격이라며. 여기 그런 애들 많아. 라스도 그렇고 엔베인도 그렇고. 이번엔 뱀파이어라니, 대체 무슨 기준인 건지 모르겠네.”

라스 또한 정체불명의 마법사의 공격으로 동족들을 잃었고 엔베인은 마검으로 인해 고초를 겪었다.

늑대인간, 다크엘프 그 다음은 뱀파이어.

공통점이라곤 이종족에 그들이 인간을 멀리하며 숨어살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뭐가 있어.’

최근에는 프라우디에마저 망령들이 어딘가로 줄지어 날아가는 모습을 봤다고 하지 않았는가.

굉장히 짜증나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미 글라스도 데리고 있는데 그 누나인 글러티나까지 데리고 있는 게 어려울 리가 없었다. 카이엔은 바이스를 보며 손을 저었다.

“얼른 놔줘. 숨막히겠다.”

그 말에 바이스는 얌전히 쥔 손을 풀고 제 양 손바닥 위에 박쥐로 변한 글러티나를 올려두었다.

그를 바라보는 까만 눈동자가 마치 소금이같다고 생각하며 카이엔이 입을 열었다.

”“분명히 뭐가 있는데 짐작가는데가 없으니 원. 가르간트 뿐만이 아니라 곳곳에 사람을 파견하던가 정보수집이라도 해야겠어.”

“저도 돕겠습니다. 그런데 왕자님, 눈에 띄기 싫다면서요?”

“어쩔 수 없지.”

카이엔은 다시 한 번 길게 한숨을 쉬었다.

“글라스.”

“네!”

“글러티나를 데려가서 방도 내어주고 상처도 치료할 수 있게 도와줘. 네 누나니까 너한테 맡기겠다. 도움이 필요하면 다른 이들에게 부탁하고.”

“그럴게요. 누나 일단 이쪽으로… 변신은 가서하자. 부상당한 사람이 부축받고 돌아다니면 다들 쳐다볼 테니까.”

바이스가 글라스에게 박쥐로 변한 글러티나를 넘겨주었다. 글라스가 별채로 가는 것을 확인하고 카이엔은 릴리시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몸통을 쓰다듬어주었다.

“잘했어, 릴리시아.”

- 헤헤.

“다치지 않게 잘 잡았더라. 힘 조절 하느라 고생많았어.”

- 나 잘했어?

“엄청 잘했어.”

릴리시아에게 칭찬을 해주고 카이엔은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는 바이스에게 그가 말했다.

“그리델라는 마녀지. 마녀들도 뿔뿔히 흩어져서 살고 있으니 위험할지도 몰라. 그 이야기 전달하고, 정보 수집할만한 연락망이 있는지도 알아보고.”

“네.”

“어쩌다보니 또 식구가 늘었네.”

눈에 띄는 건 싫었지만 그렇다고 부상자를 내쫓을 수도 없었다.

글러티나에겐 듣고 싶은 게 많았다. 라스와 같은 자에게 습격을 받은 걸 수도 있으니 그녀의 치료가 끝나면, 바로 대화를 나누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물론! 그 정돈 해줄 수 있지!”

카이엔의 요구사항에 그리델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흩어져서 지내는 마녀들의 사정상 정보망이 따로 존재한다면서 비밀스러운 이야기또한 서슴없이 해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카이엔의 눈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마녀들도 곳곳에 숨어살고 있으니까 자기 몸 지키려고 주변 상황 파악하는데에는 능해. 그치만…”

“왜 그래?”

“그… 마녀들이다보니까 보석같은 뇌물이 좀… 정보비도 그렇고.”

“하아… 구해올게.”

“미안.”

“어차피 세상에 공짜는 없잖아. 바이스, 보석 좀 구해둬.”

“흠. 어느정도 가치가 있으면 되겠습니까? 마녀들은 보석에 까다롭습니까?”

“주술의 재료로 쓰이기도 하니까 가공하지 않은 원석도 좋아요.”

“몇 가지 샘플부터 구해서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리델라와의 이야기는 원만하게 진행되었다.

세간에는 폐세자가 보석 모은다는 이야기가 떠돌겠지만 카이엔은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그 보석들은 정보비로 마녀들에게 바로바로 지불할 테니까.

글러티나가 새 식구가 되었다는 소식에는 다들 기뻐했지만 그녀와 그녀의 혈족이 누군가에게 공격을 당했다는 말엔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비슷한 일을 겪은 라스는 그때가 떠오른 건지 주먹쥔 손에 힘이 들어가 손등이 새하얘질 정도였다.

당분간 글러티나의 치료와 요양은 남동생인 글라스에게 맡겨두기로 하고 카이엔은 최근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 정리해보았다.

그와는 관련이 없는 일들이지만 그 사건들로 인해 그의 곁에 오게된 사람들은 많았다.

라스와 엔베인에게 있었던 일의 흔적조차 찾지 못한 상태였다.

무리지어 살았을 적에도 라스는 무리에서 이탈한 적이 없었던 건지 자신이 어디쯤에 살았는지조차 짚어내지 못했다.

엔베인의 경우는 더욱 심했다. 애초에 더스크라이즈에 뚝 하고 떨어진 마검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으니, 범인을 찾는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마검에게 말을 걸어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카이엔은 이마를 짚었다.

“으, 역시 나한테는 무리야.”

“글러티나 님이 깨어나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도록 합시다. 다른 이들보다 아는 게 많을 테니까요.”

“내가 지금 가장 걱정되는 건, 범인을 유추할 수 있어도 내가 못 잡을까 봐야. 난 힘이 없으니까.”

“그 말도 맞군요. 지금도 이 저택 안에 몇 명의 첩자가 숨어계시는지도 모르시니까요.”

“…몇 명인데?”

“맞춰보십시오.”

마치 오늘 디저트로 나올 쿠키 수가 몇 개일지 맞춰보라는 듯한 태도였다.

카이엔이 인상을 쓰자 바이스는 조용히 손가락으로 탁자 위에 글자를 썼다.

그 손짓과 시선에 카이엔은 가만히 입을 열었다.

“누가 듣고 있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죠.”

“그걸 아는 녀석이…”

“왕자님이 조용히 살고 싶다면서요. 그러니까 정말 눈에 띄는 짓을 한 놈이 아니면 안 잡았어요. 다음부턴 잡을까요? 이미 다 전달됐겠지만요.”

“상황봐서.”

“잘 처리하겠습니다.”

최근에 손님으로 받아들인 건 한창 주방에서 일을 배우고 있는 비셰와 부상되어 온 글러티나였다.

인간이 아닌 뱀파이어인데다가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건 비밀이라 부상의 치료는 글라스에게 맡겨두었다. 같은 뱀파이어니까 다쳤을 때 어떻게 처치하는지 정돈 알 거라고 여겼다.

지금으로선 글러티나가 눈을 뜨는 걸 기다릴 수밖에 없어서 카이엔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알려진다고 해서 나쁜 일이 벌어질까? 다들 중구난방해서…”

“하긴. 잡다한 조합이긴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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