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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왕자는 조용히 살고싶다-45화 (46/219)

-45화

모스피아 혈족의 성은 검은 숲 깊숙한 곳에 있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영토와 근접한 그곳에 자리잡은 드넓은 숲을 보고 그 땅에 '숲'의 이름을 붙였지만 그 광활한 땅에 숲만 있는 게 아니었다.

협곡이며 절벽, 황무지.

넓은 만큼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곳이 바로 검은 숲이었다.

모스피아의 성은 메마른 대지에 있었다.

온갖 기암괴석이 즐비한 절벽지대.

우뚝 솟은 검은 성은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살풍경한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일족의 터에서 벗어나지 않는 모스피아의 혈족 뱀파이어들은 그들의 영토 안에서 태어나 영토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따금 바깥으로 나가는 자들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의 뱀파이어들은 고요히 그림자에, 어둠에 정체를 감추고 살아가는 것을 택했다.

그런 폐쇄적은 성향 탓에.

다른 혈족과는 주기적인 모임과 회의에 대한 소식만을 나눴기에.

그들은 다른 뱀파이어들이 무슨 상황에 처했는지 알지 못 했고 그들과 같은 길을 밟게 되었다.

다수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지 못 했다.

그저 흐릿한 기운만이 느껴졌을 뿐이라 글러티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침입자일 가능성이 있기에 정찰대를 파견했다.

멀리서부터 접근하는 적도 없었으며 영지에 발을 들인 건 단 한 명뿐이었건만.

그녀는 정찰대가 침입자와 마주치는 순간 폭발적으로 늘어난 이질적인 기운에 흠칫 놀랐다.

분명 한 명뿐이었건만.

순식간에 열 배, 백 배, 천 배로 늘어나는 기척들과 사라진 정찰대의 반응.

혈족을 지배하는 로드인 그녀에게 정찰대의 생명반응이 끊어졌다는 신호가 도착했고 글러티나는 그 자리에서 달려나갔다.

‘대체 무슨 일이지?’

이 성을 알고있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다른 혈족을 다스리는 로드들이나 연락망 구축을 위해 알고 있을 뿐인 이 성에 누군가가 침입했다. 그것도 상당히 많은 적을 이끈 채로.

분명 침입자의 존재감은 하나 뿐이었지만 폭발적으로 늘어난 적의 수를 고려해보면 한 가지 예상가는 존재가 있었다.

‘네크로맨서인가…’

하수인을 소환하는 방식이라면 갑자기 나타난 수많은 존재감이 이해가 갔다.

무슨 목적으로 뱀파이어의 성을 습격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고작 언데드 따위에게 질 정도로 나약하진 않았다.

로드의 부름에 성 안의 모든 혈족이 집합했다. 아직 침입자들이 성에 도착하기 전이기에 글러티나는 빠르게 습격을 알리고 진형을 짰다. 로드인 그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다만,

“여기에 무슨 볼 일이 있다고 온 건지 모르겠군요.”

“네크로맨서일 가능성도 있지만 다른 존재일 수도 있다고 여기고 싸우겠습니다.”

워낙 황폐한 땅이고 모스피아는 부귀영화에도 관심이 없기에 쌓아놓은 재물 또한 거의 없었다.

만약 네크로맨서의 습격이라면 그 자가 원하는 건 딱 하나뿐일 터였다.

시체. 뱀파이어의 시체와 영혼.

힘든 싸움이 되겠다며 다들 각자 무기를 손에 들고 지정된 장소를 향해 달려갔다.

빠른 작전 회의 후, 글러티나는 성의 꼭대기로 올라갔다.

아슬아슬한 위치에 서서 그녀는 고개를 숙여 지상의 상황을 관찰했다.

그 사이 적은 꽤 가까운 곳까지 다가왔다. 까만 점처럼 보일 정도로 많은 숫자였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주동자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제 존재감을 지운 건지 쉽게 파악할 수 없었다.

적의 위치를 확인하고 글러티나는 그 자리에서 뛰어내렸다. 로드인 그녀는 적의 앞에서 누구보다도 강한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적이 누구든 그녀는 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건만, 적진의 선봉에 선 자들은 그녀에게 기묘한 위화감을 주었다.

“…뱀파이어?”

마치 언데드처럼 배회하고 있는 자들은 모두 뱀파이어였다.

드문드문 보이는 익숙한 얼굴에 글러티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적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짜증 나는 놈인게 분명했다.

어차피 언데드가 살아있었을 적만큼의 힘을 발휘할 수는 없을 터. 그녀는 손에 든 검을 휘둘렀다.

깔끔하게 절단된 적의 몸뚱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철벅!

…피와 살덩이로 이루어진 것이 낼 수 없는 소리였다.

바닥에 떨어진 상반신은 검게 물들어 지면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무슨…!”

글러티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물론 놀란 건 잠시뿐이었다.

손을 멈췄다간 저 정체불명의 괴물들이 성 안까지 들어올 것이다.

전투 능력이 없는 혈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적의 수를 줄여야 했다.

그녀가 먼저 달려나온 탓에 근처에 있던 다른 뱀파이어들도 주변으로 합류했다.

찌르고 베고 무너뜨리고.

언데드로 추정되는 적의 무리는 쓰러지는 족족 검은 빛에 물들어 힘없이 쓰러졌다.

저항이 적은 것이 너무나도 이상했다.

물론 그들처럼 손에 무기를 들고 휘두르는 놈들도 있었지만 실력은 그리 좋지 않았다. 대부분이 좀비처럼 앞으로 내민 팔을 휘저을 뿐이었다. 마치 제 몸을 던져 방패역할을 하는 것만 같았다.

이상함을 느끼고 글러티나가 뒤로 물러나려고 할 때였다.

쿠웅!

굉음과 함께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정문뿐만이 아니라 후문과 그 외 부분에도 다른 이들이 지키고 있었을 텐데. 이상할 정도로 저항이 적은 정문의 적을 확인하고 글러티나가 외쳤다.

“상황을 알아보고 와라!”

“네!”

그 말에 뒤쪽에서 지원을 하고 있던 기사 한 명이 뒤돌아서 달려갔다. 그러나 그는 몇 걸음 떼지도 못하고 장창에 몸이 꿰뚫려서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빠른 속도로 쏘아진 창.

글러티나의 시선이 다시 정문을 향했다.

앞서 보낸 것들은 그저 눈속임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은.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는 인영들이 서서히 다가왔다.

“그워어어-!”

마치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

글러티나는 눈앞의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어째서…”

저중에 익숙한 얼굴을 한 자가 있었다.

다른 혈족의 로드며 그 휘하의 전사들이 있었다. 검게 물든 눈이며 핏줄이 불거진 상태로 봐서 정상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잘 보니 저들 말고도 다른 혈족의 인물들도 있었다.

고유 마력을 개방하고 능력을 쓰면서 전진하는 뱀파이어의 무리가.

“무슨… 무슨 짓이냐!”

그녀가 지켜야 하는 혈족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는 자의 앞을 가로막으며 글러티나가 외쳤다.

비교적 온화한 성품을 지니고 있는 그녀의 혈족과는 다르게 난폭한 성향을 띄어 사사건건 부딪치기 일쑤였던 혈족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식으로 습격을 할 줄은 미처 몰랐다. 그저, 늘 있었던 투닥거림이라고 여겼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저들의 공통점이라곤, 하나같이 제정신이 없어보인다는 것 뿐이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것 같았다.

모스피아는 다른 혈족들과 깊은 관계를 맺지 않았다.

피길로, 플라익, 세르포그. 다른 세 혈족 또한 무슨 문제가 있을 때나 제 혈족 외의 뱀파이어 일족에게 도움을 요청할뿐. 그들에게 있어서 같은 피를 나눈 혈족만큼 중요한 건 이 세상에 없었다.

그러나.

저기서 제 몸체를 부풀리며 미친듯이 날뛰는 놈들은 피길로의 혈족이었고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재빠른 움직임을 자랑하며 허를 찌르는 놈들은 플라익의 혈족이었으며

묵묵히 독을 뿌리면서 전진하는 놈들은 세르포그의 혈족이었다.

“로드시여!”

“글러티나 님!”

고유 능력을 보고 난 다음에야 그녀의 혈족들 역시 적의 정체를 파악한 듯 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에 글러티나는 입을 열었다.

“적이 누군지 그 정체 따윈 상관없다! 침입자는 모조리 참해라! 우리의 가명 대로, 정도를 벗어난 자들의 목숨을 이 손으로 취해라!”

그 명령에 모두의 눈에 결의가 깃들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로드가 최전선에서 그들과 함께 있으니, 이대로 물러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그들의 수십 배나 되는 병력을 앞에 두고도 그들은 침착하게 검을 휘둘렀다. 베어 넘어지는 놈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발밑이 시체로 깔려 걸음을 내디기가 힘들 정도였다.

맨 앞에 선 글러티나 또한 시체에 발이 걸려 넘어지지 않게 주의하며 앞으로 전진했다.

위화감이, 또다시 든 순간이었다.

저들의 옷차림은 모두 달랐다.

일족의 전사와 같은 모습을 한 자들 사이사이에 민간인과 같은 모습을 한 자들이 끼어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나도 늦어버리고 말았다. 눈앞의 적을 쳐부수는데 온 신경을 집중한 그 순간, 더 큰 재앙이 그들을 향해 내려왔다.

콰과광!

우레와 같은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성으로 향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짓누른 것처럼.

어린아이가 모래성을 눌러 부수는 것처럼.

드높이 우뚝 솟아있던 첨탑이 무너지고 검은 성이 부서져내렸다. 저 안에는 전투를 할 수 없는 일족이 사역마들과 함께 남아있었다. 글러티나는 옆에서 덤벼드는 적의 양 팔을 순식간에 도륙하고 성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그녀가 성에 채 닿기도 전에 검은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성의 그림자가 아니었다.

마치 거대한 구멍처럼 생겨난 그것에 통째로 성을 감쌌다.

형성된 반구체는 그 무엇도 통과시키지 못 했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림자는 점점 길어졌다.

성을 집어삼킨 그것이 그들의 발밑까지 확장되었다.

마치 시체를 온전히 보관하려고 하는 것처럼.

그동안 너무 평화에 익숙해져 있었던 걸까.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만으론 전투의 감을 일깨울 수 없었던 걸까.

사방에서 달려드는, 그들과 같은 뱀파이어들을 상대하는건 상당히 까다로웠다.

무기가 부딪치면서 내는 쇳소리가 점점 거세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좀비처럼 움직이던 것들의 움직임에 속도가 붙었다. 피를 탐하는 괴물처럼 이지를 상실한 것들이 아군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으억!”

“이자식들이…!”

“글러티나 님, 피하십시오!”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어서 이놈들을 다 처리하고 술사를 찾아야 한다!”

그들의 수는 적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었다.

다른 가문들에 비해 혈족을 늘리는데 관심이 없었던 게 여기서 발목을 잡은 것이다.

바닥에 즐비한 적들의 시체 사이에 아군의 시체 또한 묻혀있을 게 뻔한 상태에 글러티나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놈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수십, 수백번의 휘두름으로 날이 상해버린 검이었지만 다행히 아직 제게 맞서는 놈을 두동강낼 정도의 예리함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끝이 없었다. 바닥에 쓰러진 시신이 일어나는 일은 없었지만 적은 끊임없이 몰려오고 있었다.

- 도망쳐라.

혈족들과의 링크를 통해 글러티나가 전음을 보냈다.

이대로 다같이 맞서싸우다가 멸족될 수는 없었다.

누구 한 명이라도 살아남는다면 배후를 밝혀내 복수할 수 있겠지. 아우성치는 혈족들의 외침을 무시하고 글러티나는 다시 한 번 전음을 보냈다.

- 성이 무너졌다. 한 명이라도 살아남는 게 우선이다.

그들은 아직 적이 누군지도 파악하지 못 했다.

다른 뱀파이어 혈족들이 그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연합을 한 건지, 그게 아니라면 누구에게 조종당하는 건지.

이런 불확실하고 위험한 상황에 모두를 남겨둘 수는 없었다.

습격의 이유가 전자라고 한다면 그들에겐 모스피아를 없앨 이유도 있었다.

그들의 고유 능력은 다른 이들에게 충분히 위협이 될만 했으니까.

적들은 제 몸이 터져나가는 것에도 신경쓰지 않고 능력을 써대는지라 더더욱 위험했다. 게다가 다수. 그들이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그러나 그녀가 도망치라는 의사를 전달했기 때문일까. 적의 공세가 점점 격해지기 시작했다.

“큭!”

부러진 검의 파편이 그녀의 이마를 스치고 날아갔다.

바닥에 떨어진 누군가의 검을 잽싸게 잡고, 글러티나는 적의 손톱을 막아냈다.

괴이할 정도로 본래 모습과 동떨어진 수준의 신체변형. 피길로의 고유 능력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가 모스피아의 로드인 것은 맞았다. 그러나, 전투 경험은 적었다.

애초에 이 평온한 땅에 뱀파이어끼리 전투를 벌일 일 따윈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게다가 싸움이 나도 굉장히 사소한 일들 뿐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몬스터를 상대하는데에는 능해도 다수의 인간형 적을 상대하는 건 익숙치 않았다. 비명소리에 고개가 저절로 움직였다. 다른 뱀파이어에게 물린 혈족의 몸이 축 늘어졌다.

글러티나는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가 혈족을 붙잡은 놈을 억지로 뜯어냈다.

“그, 글러티나 님…”

입에서 흘러나오는 피거품의 색이 짙었다. 독을 품고 사는 세르포그의 혈족에게 물린 탓이었다.

“당신이라도 어서…”

“너…”

“당신만 있다면, 모스피아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부디…”

말을 마치지 못하고 젊은 뱀파이어의 몸이 축 늘어졌다.

세르포그의 독에 당한 자들의 시신은 급속도로 독성을 띄기 시작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글러티나는 쉽게 그 사체를 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시신은 사지부터 검게 물들어가더니, 마치 그녀가 베어버렸던 적처럼 그래도 녹아 대지로 흡수되었다. 발밑까지 자라난 그림자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시신을 삼켜버렸다.

무슨 마법이 걸린 게 아닌 이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글러티나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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