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잠시 카이엔이 회복할 시간을 주고 비셰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는 어떻게든 자신의 무해함을 어필해야만 했기에 점점 말이 길어졌다.
“그치만 저희 가게 직원들은 죄다 몽마거든요. 흔히 인간들이 물장사니 여자장사니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인간 직원이 아예 없는 건 아닌데 다들 주방일이나 청소, 짐정리 같은 것만 하거든요. 유흥업소로 위장하면 사제들이 올 일도 없고 몽마인걸 들킬 일도 없고…”
“어… 그래. 제국에 그런 게 있든 말든 내가 상관할 건 아니지만 넌 왜 제국에서 여기까지 온 거야? 누가 쫓아와?”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높으신 분 눈에 들어서 조금 곤란한 상황이거든요. 잡혀가면 몽마인 걸 들킬지도 모르고 몽마인게 들키면 잡혀서 박제되어 벽에 장식될지도 몰라서 도망쳤어요…”
박제가 취미인 귀족에게 찍힌 모양이다.
대충 봐도 잘난 외모에 인간들을 상대로 장사하려면 말솜씨도 좋아야 할 테니 손님들 입장에선 꽤 매력적이었겠지. 일단 외모만 봐도 훌륭했으니.
자기 밑천을 다 드러낸 비셰는 소파에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선 카이엔을 올려다보았다.
“밥값하면서 잘 일할 테니 제발 거둬주세요!”
“하아- 그러니까 네가 일하는 곳은… 불법적인 업소로 위장한 몽마들 소굴이었다 이거지?”
“네! 인간들이 아예 없진 않지만 주로 창고정리, 요리, 설거지, 청소 등등 잡일만 합니다!”
“몽마들은 접객?”
“접객 이후도 있다고 인간들은 생각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사기죠. 꿈에 침투해서 원하는 환상을 보여주고 정기를 빼먹으니까요.”
“양쪽 모두 만족할 수 있는 결과를 내는 걸 보면 사기…까진 아닌 모양인데.”
카이엔은 착잡했다.
엄청난 사정이 있어서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제국에서 여기까지 건너온 모양인데 몽마라니.
이야기를 들어선 작은 가게도 아니고 나름대로 규모가 큰 곳일 텐데 비셰는 어떻게 잘 빠져나온 모양이다.
애초에 몽마가 인간들을 낚으려고 만든 곳일 테니 인간을 피해 도망가는 비셰에게 잘 다녀오라고 손이나 흔들어줬겠지. 같이 엮여서 정체가 밝혀지면 그날로 풍비박산이 날 테니까.
이대로 보냈다간 길에서 객사할지도 몰라 카이엔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탁하러 온 거면 조용히 지내라. 그나저나 밥값이라… 그러면 일을 해야 할 텐데 넌 뭘 할 줄 알지?”
“으음… 거기서는 손님들 대화상대를 주로했고 마술같은 마법이랑 바텐더 일 조금…”
“여기선 쓸모가 없는 능력인데.”
“어, 어떻게든 안 될까요?”
“지금 손이 모자란 곳이 어디지?”
“저택 하인이나 주방 쪽으로 보내면 될 듯합니다.”
옆에서 바이스가 첨언했다.
“그래. 시종 대리론 이미 글라스가 있으니까 주방으로 가는 걸로 할까? 요즘 별채 식구가 늘어서 주방장도 힘들 테고.”
“왕자님…”
조용히 있던 글라스는 카이엔의 한 마디에 감동했다. 시종 대리가 이미 있으니 비셰에겐 다른 일을 맡긴다는 말이었다.
그 말인 즉슨, 그를 인정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뒤에서 감동하는 글라스를 무시하고 카이엔은 비셰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곰곰히 생각하던 비셰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더니 물었다.
“어, 저 여성형으로 바꿀 수도 있는데 여성체로 바꾸면 전속 시녀 삼아주시는 건가요?”
“이런 불성실한 정신상태를 가진 자는 시녀로 못 둡니다. 얌전히 가서 요리나 배우세요.”
“…라고 하는데. 일단 주방 보조로 들어가는 걸로 하자.”
카이엔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바이스가 끼어들었다.
바이스가 반대하니 카이엔이 그렇게 하자고 할 수도 없었고 비셰는 주방으로 가기로 했다.
별채의 다른 이종족 식객들과 달리 그는 처음부터 밥값을 언급했기에 바로 저택의 사용 인력으로 투입되기로 했다.
다행히 하인 숙소에 빈자리가 있어서 비셰는 그곳에서 지내기로 했다.
짐을 풀라고 했지만 풀 짐도 없어서 바로 옷부터 갈아입고 주방장과 면담부터 하게 했다.
씻을 때 말고는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힐 것 같은 귀티 나는 청년이 오늘 새로 왔고 내일부터 주방에서 일하게 될 거라는 말을 듣고 주방장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반응에 바이스가 주방장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주방 보조를 시킬 거니까 제대로 가르쳐주세요. 아, 신입은 재료 손질과 설거지부터죠?”
“그렇긴 하지만… 혹시 왕자님 손님이신가요?”
“남작님이 아니라 왕자님이 돌봐주시긴 할겁니다만 막 부려먹으셔도 됩니다. 제 입으로 밥값을 한다고 했으니까요.”
“끄으응-”
주방장은 비셰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저런 얼굴이라면 감자 껍질을 깎고 있어도 설거지를 하고 있어도 명화의 일부처럼 보일 가능성이 높았다.
마른 근육이 있긴 하지만 힘이 세보이진 않으니 무거운 걸 턱턱 들게할 수도 없고.
비셰에게 뭘 시켜야 할지 고민하던 주방장은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식칼을 쓰는 걸 봐서 재료 손질을 시키든, 설거지를 시키든 잘 가르치겠습니다.”
“네. 그럼 비셰 씨, 이쪽이 당신의 상사가 될 겁니다. 열심히 일하세요.”
“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부족한 게 많지만 열심히 할게요.”
“아암, 그래야지. 그나저나 바이스 씨, 왕자님 손님이라면 이 청년도…”
“이종족입니다. 어떤 종족인지는 비밀이예요.”
“아 역시. 뭐, 별거 있겠습니까. 이종족이든 아니든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으니까요.”
이미 글라스와 엔베인 등의 선례가 있었으므로 주방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주방 식구들과도 인사를 마친 다음 비셰는 당장 내일 새벽 다섯시부터 출근하라는 말을 듣고 바이스를 따라 주방에서 나왔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바로 다음 날부터 일하셔도 힘들지 않으시겠어요?”
“으음… 일단 해보려구요. 그리고 주방에서 일하면 모습을 감추기에도 편할 테고요. 왕자님을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좋은 마음가짐입니다.”
바이스는 비셰의 착실한 자세가 마음에 들었는지 열심히 하라는 말을 던졌다.
카이엔은 몽마가 뭔지에 대해 관심도 없고 알아보려는 생각도 하지 않는 모양이지만 비셰가 성실하게 일만 잘 한다면 바이스 역시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몽마는 인간을 유혹해 정기를 빼먹는 마물.
비셰도 몽마이니 그런 식으로 정기를 섭취할 필요가 있겠지만 지금은 두고 볼 생각이다. 본인이 힘들면 도움을 요청할 테니까, 얼마나 버티는지 확인도 해볼 겸.
카이엔은 비셰의 종족에 대해 다른 이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를 만나고 새롭게 저택에서 일하게 된 사람이 있단 걸 알고 다들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카이엔은 몰라도 된다며 일축했다.
그런 배려 속에서 비셰는 열심히 주방 보조로 일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에게 중요한 일을 맡길 수 없기에 주로 하는 일은 식재료 다듬기와 설거지였다.
요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진 않았지만 잘 아는 분야가 술과 술에 어울리는 음식들뿐이었으므로 술을 입에 대지 않는 카이엔의 식단에는 맞지 않았다.
게다가 비셰는 식칼은 커녕 작은 과도를 다루는 데에도 미숙해 재료 손질을 하다가 다쳐 피를 보는 게 일쑤였다.
바이스는 막 부려먹으라고 했지만 주방장은 허우대 멀쩡하고 잘생긴 젊은이가 청승맞게 주방 구석에 쪼그려 앉아 감자 껍질을 깎는 모습을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없었는지 한가할 땐 쉬라며 비셰를 주방 밖으로 내보냈다.
상사가 허락한 휴식이었지만 비셰는 땡땡이라도 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주방 밖으로 나가도 건물 옆에 서있거나 하는 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에휴…”
확실히 해본 적 없는 일이라 힘에 부치긴 했다. 그래도 그를 배려해서 어려운 일을 맡기지는 않았지만 힘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별채의 식구가 늘어나면서 요리사들의 부담감을 줄이기 위해 주방의 구역을 나누어서 제 1주방장과 제 2주방장이 생기게 되었다. 한쪽은 남작과 카이엔의 식사를 전적으로 담당하고 후자는 별채 손님들을 담당하는 역할이었다.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의 식사는 양쪽이 번갈아가면서 준비하는 편이었다.
다른 손님들과 달리 비셰는 일을 하고 있었고 출퇴근을 하는지라 별채 쪽 이종족들과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가끔씩 누가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기분 탓으로 여기기로 했다.
***
프라우디에는 자신의 안에 잠든 리치왕의 인격과 소통했다. 이름이 있어야 좀 더 확립된 자아를 갖추지 않을까 싶어서 이름을 지어주려고 했다.
오직 자네인만이 부르는 애칭이긴 했지만 프라우디에는 한번씩 ‘프라우’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래서 뒤에 남은 '디에'를 그에게 줄까 물어봤는데 리치왕은 뚱한 반응이었다.
- 맘대로 불러. 어차피 딴놈들은 다 리치왕이라고 부를 테니까.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할게요.”
- 됐어. 이대로가 나아.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플라스크에서 배양해낸 세포로 만들어진 몸 안에는 재앙의 심장이 들어있었다.
리치왕이 깨어남으로서 프라우디에는 라이프 베슬의 마력을 끌어낼 수 있었다. 거의 천 년간 봉인당한 심장이건만 아직도 상당량의 마력을 품고있었다.
마력을 조절하고 다스리기 위해 꼬박 이틀 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체내에 흐르는 마력을 온 몸 구석구석으로 돌리는 것을 반복했다.
마법을 써도 신체가 터져나가지 않다는 확신이 생길 때까지 리치왕은 프라우디에가 마력을 흘려보내고 몸 안에 쌓는 것만을 할 수 있게 연습시켰다.
기초부터 차근차근 가르칠 필요가 있다. 그는 이전에도 제자를 키워본 적은 없었지만 프라우디에의 실력을 생각해 쉬운 일부터 하자면서 재촉하지 않았다.
흑마법의 불꽃은 어두운색을 띠고 있었다.
리치왕의 라이프 베슬은 검보라색이었고 자연스럽게 프라우디에가 쓰는 마력의 색은 어두운 보라색이었다. 그 불꽃도 불이라며, 어둠 속에서 환한 빛을 냈다.
음산한 불꽃이 무섭지도 않은 건지 프라우디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이 만들어낸 마력의 불꽃을 바라보았다.
아직 어린 흑마법사는 천천히 심연으로 발을 내디뎠다.
리치왕은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기억이 흐릿했기에 떠올린 마법들을 우선적으로 프라우디에에게 가르쳐주었는데 흔히 흑마법사, 하면 떠오르는 시체나 무덤 같은 걸 이용하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카이엔의 입장을 고려하면서 연구실 혹은 저택에서 할 수 있는 마법들을 전수했다.
흑마법은 다른 마법과 달라서 예민한 자들은 쉽게 그 기척을 느낄 수 있다.
쫓겨난 왕자가 사는 곳에 흑마법의 기운이 느껴진다? 카이엔을 곤란하게 만들기 딱 좋았다.
“아.”
잠깐 방심한 사이에 지팡이를 감싸며 일렁이던 마력이 촛불이 훅 꺼지듯 사라졌다.
잠시라도 집중을 놓으면 이렇게 쉽게 해제되어버리는 게 마력이었다. 연습이 더 필요하다며 리치왕이 말했다.
- 싸울 때 저게 없어지면 바로 위험해져. 소드마스터가 오러를 쓰듯 마법사는 자신의 마력으로 무기를 강화하고 자신의 몸을 지켜야 한다.
“마법사는 멀리서 공격만 하는 줄 알았어요.”
- 나는 몸싸움도 했던 걸로 기억한다.
“으음.”
지팡이로 마구 때렸다는 걸까? 프라우디에는 살짝 인상을 썼다.
엔베인에게 부탁해서 급하게 만든 나무 지팡이는 기사가 검 한 번 휘두르면 잘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자신의 손목만큼이나 가느다란 지팡이를 보는 프라우디에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변했다. 보일 듯 말 듯하게 마력을 둘러놓을 수도 있을까, 하며 실험해봤지만 역시 금방 꺼져버렸다.
어느정도 유지를 할 수 있게 되야 엔베인이나 에빌에게 검 한번 휘둘러주라고 해서 막아볼 텐데. 아직은 무리였다.
“전 재능이 없나봐요.”
- 금방 배울 거다.
“흑마법은 어떻게 해야 잘 할 수 있을까요?”
- 세상의 모든건 재능과 운이 따라줘야 하는 거야.
리치왕의 조언에 프라우디에는 한숨을 쉬었다. 재능이란 건, 그와는 전혀 맞지 않는 말이었다.
그런 프라우디에를 바라보던 리치왕은 다른 마법을 알려주었다.
연구용으로 모아놓은 몬스터의 뼈를 맞추라는 말에 프라우디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일단 바닥에 뼈를 늘어놓아 맞춰보았다.
군데군데 빈 곳이 있었지만 퍼즐 맞추듯 하다보니 얼추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췄다. 완성된 모습을 보고 리치왕이 말했다.
- 마력으로 뼈를 잇는다. 근육이 붙어있는 것처럼, 네가 조종할 수 있게 해봐.
그 말에 프라우디에는 세심하게 마력을 이용해 평면에 맞춰놓았던 뼈를 들어 올렸다.
코볼트의 뼈가 마력으로 연결되어 그 자리에 서서 마치 스켈레톤처럼 보였다. 리치왕의 목소리에 따라 프라우디에는 뼈를 조작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작은 뼈들이 움직였다. 인형극을 하는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뼈의 움직임은 어설펐지만 조종하는 프라우디에의 이마에는 땀이 흘렀다.
마력의 양은 많아도 다루는 실력과 경험이 모자란 탓이었다.
- 연습 많이 해야겠다.
“에헤헤…”
- 시간은 많으려나… 그럼 좋겠다만.
작은 마법부터 배우고 규모가 크거나 위험한 건 검은 숲 안에 들어가서 시험해보면 된다.
흑마법사는 영혼을 다루는 마법을 쓰는지라 제 힘을 늘리기위해 타인을 희생시키고 그 영혼을 잡아먹으며 소모시킨다. 허나 프라우디에는 원체 가진 마력의 양이 많아서 다른 생명을 잡어먹을 필요까진 없었다.
‘나는 어땠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리치왕은 인상을 썼다. 기억에 구멍이 숭숭 나있는 게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 과거의 일은 떠올리고 싶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게 봉인 탓인지 무의식이 밀어내고 있는건지 알 수 없었다.
흑마법의 대부분이 어두침침하고 불길해보이는 것 뿐이라 프라우디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못 보여주겠다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마법을 잘 다루게 되면 다른 이들에게 선보이고 싶었던 모양이다. 혀를 차며 리치왕은 핀잔을 주었다.
- 불꽃이라도 보여주든가.
“그치만 별로 안 멋있어요.”
- 정말 멋있는 걸 보여주고 싶으면 거대한 소환수를 불러내거나 뼈와 살로 만들어내는걸 해야지.
“그것도 별로 안 멋있어요.”
시체를 좋아할 사람은 없을 거라며 프라우디에는 한숨을 쉬었다.
노는 게 아니란 걸 보여주고 싶었지만 보여줄 것이 없다는 게 그를 우울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