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그로부터 삼십 분 뒤, 별채의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붉은빛이 도는 머리카락에 금색 눈을 가진 남성은 머뭇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그… 왕자님.”
입고있는 셔츠는 조금 작은 감이 들긴 했지만 보기 이상할 정도는 아니었다.
익숙한 목소리에 카이엔은 그가 바로 라스임을 알아차렸다.
덜 말린 머리카락은 아직 물기가 남아있었다. 눈꼬리가 치켜올라간 모습이 호전적인 인상으로 보였지만, 그보다도 훨씬 키도 크고 체격도 좋은 녀석이 그와 눈을 못 마주치고 있자 카이엔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왜 그렇게 긴장해? 다 아는 사람들이잖아.”
“크흠. 이 모습으로 보려니 기분이 이상하군요. 늑대일 땐 모두를 올려다봤었는데.”
“그러고보니 되게 키 크다. 바이스 씨보다도 커요.”
“정말이군요. 늑대 인간들은 모두 키가 크나요?”
“높다!”
“아뇨 다 개인차가 있어서… 하하.”
말을 하다 말고 라스는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이렇게 보니 다들 자기보다 작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고 여전한 태도도 좋았다.
슬로세이가 그의 주위를 빙빙 돌면서 팔을 찔러대고 있으니 그리델라가 얼른 뒤로 잡아끌면서 주의를 주었다.
늑대로 있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겨우 도망쳐서 목숨을 구한 그가 아직 살아있다는 게 적에게 밝혀질 리가 없으니까.
인간 모습으로 돌아오면 어색할 줄 알았는데 다른 이들이 먼저 다가와주니 마음을 놓는 것이 한결 나아졌다.
함께 대련이라도 하고온건지 나란히 검을 든채 걸어오던 에빌과 엔베인이 그를 발견하고 눈이 동그래져선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다급하게 외쳤다.
“라스!?”
“라스입니까?”
“아, 응.”
“우와, 너 되게 잘생겼었잖아! 늑대 인간은 다 이래?”
“아니 우리도 인간이랑 크게 다를 점은 없는데…”
“너 오랫동안 아팠다면서 근육은 하나도 안 줄어든 거 아냐? 아니, 이게 줄어든 건가?”
“에빌…”
라스는 늑대로 지낸 시간도 길었고 카이엔이 자주 산책을 시키거나 운동을 시킨 것도 아니라 에빌의 의문은 일리가 있었다.
다만 대답하기가 좀 애매했는지 라스는 어색하게 웃음으로 얼버무렸고 엔베인은 자기가 말한 것도 아닌데 에빌의 옆에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창피해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카이엔은 라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지만 영주성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면 카이엔이 돌보던 늑대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별채에서 살기 시작한 걸 보고 나름대로 눈치를 챌 것이다.
라스는 별채에서 지내면서 다른 이종족들과 어울리면서 개인적으로 훈련을 하고 하인들의 일을 도와주기로 했다.
계속 신세만 지고있을 수는 없으니 자기도 일을 하고 싶다는 의견을 바이스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다만 손님을 정식으로 하인으로 고용할 수는 없고 도움이 필요하면 요청하기로 정했다.
글러티나 역시 늑대 인간인 라스를 흥미로운 눈으로 보았다.
과거 뱀파이어들 중에서 인간과 유사하지만 변신을 할 수 있고 수명도 인간에 비해 긴 그들과 계약을 통해 주종관계를 이루었다는 말도 살짝 했다.
아주 오래 전 일인 건지 라스는 모르는 눈치였다.
새로운 사람이 생겼으니 이젠 가야 한다고 느낀 걸까. 다음날 글러티나는 혈족에게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글라스가 일하는 모습은 얼추 봤어. 자기 딴에는 노력하고 있으니 조금은 더 내버려둬도 될 것 같고. 모자란 동생을 잘 부탁드립니다.”
“너도 조심히 가.”
“글라스같이 박쥐로 변해 날아다니다가 떨어질 일은 없지만.”
“누나…!”
“후후 농담이다. 그리고 카이엔.”
“응?”
친해져서인지 글러티나는 거리낌없이 카이엔을 이름으로 불렀다.
그녀는 조용히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넌 인간이지만 주변에 이종족이 참 많아. 이종족도 이종족이지만 어둠의 종족이 이렇게나 많은데 너무나도 멀쩡해. 신기하긴 하지만 건강 조심해. 인간이 어둠을 가까이해서 좋을 건 없으니까.”
“조심할게. 충고 고마워.”
“내가 걱정해주지 않아도 네 주변엔 널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참 많지만. 잘 있어. 다음엔 좋은 소식으로 만나면 좋겠네.”
가벼운 악수를 나누고 글러니타는 검은 숲으로 돌아갔다.
주변 인간들의 눈을 피해 날아서 방벽을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이번엔 문을 통해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여겨 카이엔이 마차를 빌려주었다.
문지기들은 그녀가 검은 숲으로 들어갈수 있도록 문을 열어줄 것이다. 대낮에 하늘을 나는 건 굉장히 눈에 띌 테니.
그녀도 글라스처럼 박쥐로 변할 수 있겠지만 왠지 그녀가 박쥐 모습으로 방벽을 넘어가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
글러티나가 떠나고 라스가 별채에 합류했다.
시종 대리라는 확고한 위치가 있는 글라스에 비해 별채의 다른 이들은 어디까지나 카이엔의 ‘손님’이었기에 마땅히 할 일 없이 개인 수련이나 취미 생활에 몰두했다.
프라우디에는 리치왕의 조언을 새겨들으면서 연금술 대신 흑마법을 익혔고 프라우디에의 연구실이 부러웠던 건지 그리델라는 자기 방도 그런 식으로 꾸미고 싶다면서 가구를 옮겨놓고 한쪽에 작은 실험실을 마련했다.
마녀의 주술과 비약 등을 만들기 위함이라고 했지만 선반 몇 개와 테이블, 화로와 냄비를 둔 것 뿐이었다.
슬로세이는 허구한 날 연못에서 물장구만 치고 있었다.
엔베인은 대인 훈련보다는 개인적인 수련과 정신 수양을 우선시했다.
마검을 들고 싸움에 집중하다가 누군가를 베어버리면 큰일이라면서 스스로를 제어해야겠다고 카이엔에게 말했었다.
그런 엔베인을 보면서 라스 역시 둔해진 몸을 풀기 위해 훈련을 해야겠다고 말했다.
“왕자님이 한량같은 생활을 하시니 손님들도 비슷하군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왕자님도 딱히 하는 일 없이 시간만 때우고 있지 않습니까.”
차마 반박할 수 없어서 카이엔은 입을 꾹 다물었다.
바이스는 매정하게도 그가 백수란 사실을 항상 상기시키곤 했다.
최근에 꽤 많은 일이 있어서 빈둥거리지도 않은 것 같은데.
좀 조용해지나 싶으면 일이 터지고 또 그게 해결되나 싶으면 다른 사건이 있었던건 단순히 기분 탓이었다는 말인가.
카이엔은 인상을 쓰며 바이스가 가져온 공부 자료를 확인했다. 어쩐지 날이 갈수록 영지 경영이나 세금, 법에 대한 공부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이런 거 조금 공부해봤자 별 소용 없을 텐데.
입 밖으로 불평을 냈다간 또 싸늘한 시선이 향할테니 카이엔은 얌전히 자료를 읽었다.
세자르 영지의 일이라 그나마 관심이 가서 읽기가 수월했다.
카이엔은 누가 그의 이야기를 하는지 신경쓰지 않았다. 가르간트는 물론이고 외국까지 그의 이야기가 퍼졌지만 정작 당사자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남들이 그에 대해 뭐라고 하든지 그가 알 필요가 없다고 여긴 탓이었다.
몬스터의 말을 알아듣는 왕자. 검은 숲을 바로 앞에 둔 영지에 사는 왕자가 기르는 애완 몬스터들.
덕분에 날이 갈수록 흉흉해지는 괴담처럼 카이엔의 이야기는 변질되고 변형되었다.
최근엔 카이엔을 찾아와서 식객으로 얹혀사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났다.
그 이야기도 퍼진 건지 카이엔을 만나고 싶다는 사람들이 줄지어 찾아왔다.
물론 바이스가 모조리 다시 돌려보냈고 개중에 정말로 카이엔이 만나볼 필요가 있는 사람만 허가를 해줬다. 백 명이 오면 한두 명 꼴로 허가를 받을 정도로 엄격한 처사였다.
오늘도 바이스는 그가 돌보는 왕자님을 만나고 싶다고 찾아온 사람들을 직접 상대하며 돌려보냈다.
누가 보낸 끄나풀인진 모르겠지만 그런 녀석들을 걸러내지 못할 정도로 무능력하지 않았다.
“흠.”
앞의 세 명을 돌려보내고 네 번째를 들여보내라고 일렀다.
면접관이 된 기분으로 바이스는 손님을 맞이했다. 흙먼지로 지저분한 망토를 입고온 사람은 머뭇거리면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후드를 눌러써 얼굴을 가리고 있기에 바이스가 입을 열었다.
“얼굴부터 보이시죠.”
“아, 죄송합니다.”
목소리로 판단하건데 남성이었다.
바이스의 말에 그는 후드를 벗고 얼굴을 드러냈다.
살짝 곱슬거리는 금발이 굉장히 화려한 미남이었다. 보라색 눈동자에 미묘하게 금색빛이 서려있었다.
외모만 봤을 땐 도저히 이런 시골에 찾아올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고 바이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왜 저희 왕자님을 만나고 싶다고 요청하신 겁니까?”
“왕자님께 부탁드릴게 있어서요. 몬스터의 말을 알아듣는 신기한 분이 있다는 말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사이비나 몬스터 장사하는 인간은 사양합니다.”
“그런게 아니에요!”
청년이 황당해하며 외쳤다.
하지만 정말로 사이비 교인과 몬스터를 팔기 위해 온 상인이 왔던 적이 있기에 바이스는 무덤덤한 얼굴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사이비 교인은 나중에 몰래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런 바이스의 생각을 모르는 청년은 눈앞에 서있는 이의 반응에 울상을 짓더니만 입을 열었다.
“전 제국에서 왔어요… 왕자님께 제 신변의 안전을 부탁드리고 싶어서요.”
“이유가 있습니까?”
“…아실 거라고, 생각해요.”
왕자는 몬스터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고 몬스터를 기르고있다. 더불어, 그의 주변에 이종족이 늘어나고 있다.
청년은 직접적으로 제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왕자가 아닌 다른 이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바이스는 가만히 제 입가에 손을 가져갔다. 인간과 다르지 않은 외모를 가진 이종족이 많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라스만 해도 늑대 인간이었고 그리델라는 마녀, 글러티나는 뱀파이어였다. 그럼, 이 청년의 종족은 대체 뭘까?
그 혼자서 판단하고 결정해 내쫓을 수 없었기에 바이스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따라오시죠. 당신의 그 말이 거짓말이 아니길 바랍니다.”
“네.”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고 바이스의 뒤를 따라갔다.
바이스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인에게 무어라 소곤거리자 하인이 먼저 잽싸게 달려나갔고 바이스는 청년과 함께 조금 더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앞서 걸어가면서 바이스가 말했다.
“만약 거짓말이었다면 각오하는게 좋을 거예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어쩌다가 제국에서 가르간트까지 오게 되었나요?”
“무작정 도망치다가 왕자님에 대한 걸 떠올렸어요. 그분이라면, 어쩌면 괜찮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흠. 그렇군요.”
바이스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인을 미리 보내 카이엔에게 손님에 대한 걸 알렸으니 지금쯤이면 글라스가 시종 대리로서 카이엔과 함께 응접실에 있을 터. 바이스는 자연스럽게 청년을 데리고 응접실로 향했다.
역시나 카이엔이 먼저 와있었는데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의 정수리에 소금이가 자리잡고 있었다.
대체 뭐하다가 오신 거람. 바이스는 순간 일그러질뻔한 표정을 애써 바로잡았다.
“왕자님. 손님이십니다.”
“어.”
“이쪽으로 오십시오.”
청년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카이엔의 맞은편 자리에 앉은 그는 얼마나 긴장했는지 카이엔의 머리 위에 소금이가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 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러스티 비셰, 라고 합니다! 제국에서 왔고 그냥 비셰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그래서, 무슨 일로 날 만나러 온 거지?”
“저 좀 숨겨주세요!”
바이스에게 했던 말과 비슷하면서 달랐다.
카이엔이 바이스를 쳐다보며 눈짓하자 바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며 한 발자국 뒤로 내빼는 모습에 카이엔은 인상을 썼다.
저런 말을 하는 걸로 봐선 무슨 사정이 있단 거였고 바이스가 일반인을 데려왔을 리는 없으니 십중팔구 이종족이라는 말이었다.
겉만 봐선 종족을 구별할 수 없었다. 묘하게 달콤한 향기가 나는 건 향수인 것 같았다. 수상한 기운이라고 하기엔, 무언가 애매했다.
카이엔은 턱을 괸 채 다짜고짜 숨겨주라고 외친 청년, 비셰를 쳐다보았다.
그에겐 외모만으로 눈앞의 사람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관심법이 없었기에 비셰에게 물었다.
“인간은 아닌 것 같고… 정체가 뭐지?”
“몽마입니다. 남성체는 인큐버스, 여성체는 서큐버스라고 하는데 겉모습의 성별은 의미가 없어요. 본인 취향에 맞거나 움직이기 편한 모습으로 다니거든요.”
“…몽마?”
악마 계열인가? 하지만 오히려 마검보다 불길하고 어두운 기운이 덜했다.
카이엔의 의문에 비셰는 충분히 이해한다면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나갔다.
“전 그러니까… 제국의 한 가게… 아니, 카바레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실은 유흥업소로 위장한 몽마들의 소굴이고 방문한 손님들이 술에 잔뜩 취하면 정신에 간섭해서 정기를 빼내는 일을 하고 있어요. 인간들은 끝내주는 대접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줄 알아요. 사실은 직원들이 다들 몽마라 적당히 최면을 걸어서 착각하게 하는 것 뿐이지만요…”
“허어?”
생각지도 못한 정체였다.
비셰는 본인 입으로 말하면서도 창피한 부분이 있는 건지 횡설수설 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했다.
거대 카지노 옆에 붙어있으면서 주로 돈 많은 고객들을 관리, 일부 귀족들은 아예 대놓고 몽마들의 업소에서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다고.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알게된 카이엔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 반응에 비셰는 더욱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어… 괜찮으세요?”
“아니.”
단호한 대답이 돌아오자 비셰는 시무룩해져선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