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하루는 글러티나가 자리를 비우는가 싶더니 웬 뱀 한 마리를 잡아와 카이엔에게 선물했다.
청록색 비늘을 가진 뱀은 혀를 날름날름 거리며 얌전히 글러티나의 목이며 팔에 감겨있었다.
눈을 반쯤 뜨고있는 게 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카이엔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물었다.
“무슨 뱀이야?”
“검은 숲에서 사는 독사 중 하나. 아포피스.”
“그게 아니라…”
“선물. 당신은 몬스터와 말이 통하니까. 지금 뭐라고 말하는지도 알 수 있지?”
글러티나의 말대로 카이엔은 그녀의 몸에 감긴 아포피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뱀은 이 상황을 매우 귀찮아했다.
- 뭐야 이거… 밥 먹다가 이게 무슨 일이야.
“밥 먹던 애 잡아온 거야?”
“먹이로 유인했는데.”
“아.”
그런 거였구만.
그런데 잡혀온 놈 치고 태도가 상당히 유순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카이엔은 아포피스에게 말을 걸었다.
“너, 잡혀온 거야 네 스스로 온 거야?”
- 응? 너 말할 줄 알아?
“내가 말을 할 줄 아는 게 아니라 네 목소리가 나한테 들려.”
- 밥 먹다가 잡혔는데, 귀찮았어. 날 해치려하는 것 같지도 않아서 그냥 있었어.
귀찮아서 가만히 있었구나.
큰 뱀이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했다. 카이엔에겐 그 하품소리마저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그의 팔뚝만큼이나 두꺼운 뱀이었는데 글러티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뱀을 카이엔의 목에 걸어주었다. 아포피스는 얌전히 카이엔의 몸에 감겼다.
“으음, 너 괜찮아? 집으로 돌려보내줄까?”
- 네 맘대로 해.
“내가 이런 말 하긴 좀 뭐하긴 한데, 내가 몬스터 말을 들을 수 있어서 몇 마리 데리고 살거든. 너만 괜찮다면 너도 나랑 같이 살래?”
글러티나가 선물이라고 데려오긴 했지만 이런 데엔 본인의 의사가 가장 중요했다.
아포피스는 눈을 껌벅이더니만 혀를 쉭쉭거리며 말했다.
- 밥 줘?
“당연히 주지.”
- 집도 있어?
“응. 만들어줄게.”
- 그럼 여기 있을래. 그런데 난 계속 잠만 잘 건데.
“네 맘대로 해. 사람을 물거나 소금이를 잡아먹지만 않으면 돼.”
- 소금이?
“이따 보여줄게.”
글러티나에겐 몬스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므로 카이엔이 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무어라 말을 거는 것만 들을 수 있었다.
이야기가 잘 끝난 것 같아서 그녀가 슬쩍 물었다.
“어때?”
“나랑 같이 살아도 좋대. 뱀은 어떻게 길러야하는지 모르겠는데… 테이블 하나 큰거 가져다놓고 유리 수조를 만들어서 흙이랑 풀을 깔고 주기적으로 교체해주면 되겠지. 바깥 구경하고 싶어 하면 데리고 나가면 되고.”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어. 그런데 넌 내 목에 뱀이 감겨있어도 아무렇지도 않다?”
“위험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대부분의 몬스터는 말이 통하면 왕자님을 신기하게 여겨 공격하지 않는 것 같고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포피스는 카이엔이 마음에 든 건지 그의 팔을 칭칭 감았다.
이녀석도 릴리시아에게 보여줘야 하는데 촉수랑 비슷한 매끈한 몸통을 가지고 있어서 릴리시아가 동질감을 느낄지도 몰랐다. 물론 서로 말은 통하지 않겠지만.
같은 종의 몬스터와 만나게 하면 둘이서 말이 통하겠지만 만티코어와 알라우네를 하나씩 더 들이기엔 무리가 있었다.
몸에 뱀을 감은 채로 카이엔이 영주성을 활보하자 하인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비명을 지르면서 들고 있던 물건을 떨어뜨리기도 했고 아예 바짝 굳어서 움직이지 못하고 눈동자만 굴리기도 했다.
얌전히 있으면 그래도 징그럽진 않은데. 카이엔이 아포피스의 머리 윗부분을 슥슥 문지르며 말했다.
“다들 네가 무서운가 봐.”
- 당연하지. 난 몬스터인걸!
묘하게 인간들을 겁먹였다는 것에 자부심을 보이는 녀석이었다.
이제 졸음이 완전히 달아난 건지 녀석은 활기차게 카이엔에게 말을 걸었다.
- 여긴 인간들이 참 많다.
“너 인간도 알아?”
- 한번씩 봐. 난 얌전히 내 갈 길만 가거나 자고 있어서 다들 그냥 지나쳐. 괜히 독사를 건드리고 싶진 않을 테지.
“아, 너 독사였어?”
- 난 지옥뱀이라구.
“그래. 못 알아봐서 미안하다. 네 이름은 어떻게 하지? 네 이름이 뭐야?”
- 이름이 뭐야?
없구나.
이거 엄청난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며 카이엔은 고민에 빠졌다.
바이스는 그가 소금이의 이름을 ‘소금’으로 지었다는 것에 당시 큰 충격을 받고는 왜 하필 소금이냐면서 물어댔었다.
이녀석은 청록색 지옥뱀이니까 이름을 뭘로 지으면 좋을까?
고민 끝에 카이엔은 평범한 게 제일이라면서 아포피스를 ‘루브’라고 부르기로 했다.
사트로누스에 비하면 짧고 릴리시아처럼 거창하지도 않고 소금이처럼 바이스를 충격에 빠뜨릴리도 없는 아주 바람직한 이름이었다. 게다가 두 글자라 외우기도 쉬웠다.
뱀을 감은 채로 카이엔은 세자르 남작을 만나러 갔고 남작은 카이엔의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서 펄쩍 뛸 정도로 크게 놀랐다.
“와, 왕자님 그 뱀은…!”
“글러티나가 선물이라고 잡아왔어. 자기 입으론 지옥뱀이래. 루브라고 이름짓고 키우기로 했어. 얌전해. 안 물어. 그치?”
- 응.
“안 문대. 내 방에서 잘 키우려고.”
“으음, 그렇군요…”
“독사인데 맨날 잠만 잘 것 같아.”
“그건 좀… 왕자님을 지켜야죠.”
“나랑 친해지면 지켜주려고 하겠지. 얘도 키워도 돼?”
“이미 키우기로 마음먹으셨잖습니까. 잘 돌봐주십시오.”
“고마워.”
어느 날 아들이 떠돌이 개나 고양이를 주워와서 기르고 싶다고 떼를 쓰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카이엔은 커다란 뱀, 그것도 몬스터를 주워와서 기르고 싶다고 말했다.
남작은 말릴 수 없기에 그저 허허 웃으면서 허락을 해줄 수 밖에 없었다.
카이엔과 말이 통하는 몬스터들은 다들 이성이 있고 카이엔의 의견에 잘 따라줬기에 지금까지 사고 한 번 치지 않았다.
이 뱀도 다른 몬스터들과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믿고 남작은 새 식구로 성인 팔뚝만 한 굵기의 아포피스를 받아들여주었다.
바이스는 카이엔의 요구사항대로 곧바로 루브가 지낼 집을 마련해주었다.
유리로 된 거대한 수조에 검은 숲에서 퍼온 흙과 풀, 돌을 채워넣었는데 루브는 꾸물꾸물 기어가니다가 똬리를 틀고 곧바로 잠들었다.
식사는 한 달에 한 번이면 충분하다고 말하면서 잠든 모습을 보고 카이엔은 혀를 찼다.
먹고 자고 먹고 자는 것을 반복하면 나중에 돼지뱀이 되는 건 아닐까. 여기서 더 두꺼워지면 수조를 금방 갈아치워야 되는 건 아닐까. 고민에 빠졌다.
웬 뱀이 떡하니 방에 자리잡자 라스도 눈이 동그래졌다.
“왕자님, 괜찮으시겠어요? 뱀이라니…”
“으음. 일단 말은 통하고 애도 착한 것 같으니까 같이 지내보려고. 솔직히 내 눈에 닿는 곳에 둬야 그나마 안심이라.”
“그 말도 맞군요.”
“쟤 이름은 루브라고 지었어. 아무리 큰 뱀이라도… 늑대를 잡아먹으려고 하진 않겠지?”
“그렇지 않을까요? 그 정도로 입이 커보이진 않습니다.”
그러나 소금이는 한 입에 꿀꺽 삼킬 수 있는 사이즈였다. 얼른 인사를 시켜줘야 할 텐데. 안절부절 못하며 카이엔은 주변을 서성거렸다.
다행히 그날 저녁 루브는 눈을 떴고 잠자는 환경이 바뀌어서 깊게 못 잘 것 같다면서 수조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마침 잘 됐다며 카이엔은 루브에게 소금이를 소개해주었다.
“자, 루브. 여기가 소금이야. 소금아, 얘가 새 식구다.”
“찍.”
- 여어 반갑다. 난 소금이다.
- 얘가 뭐래?
“반갑대. 루브, 소금이는 절대 잡아먹으면 안 된다.”
- 안 먹어.
“정말?”
- 너무 작아.
작아서 먹어봤자 간에 기별도 안 간다는 뜻이다.
어찌됐던 밥은 잘 챙겨줄 테니 루브가 소금이를 먹을 일은 없을 거다. 이렇게 한 식구라고 단단히 인식을 시켜줬으니 싸우지도 않을 테고.
소금이가 아무리 찍찍대도 루브가 귀찮아서 상대해주지 않을 거다.
소금이가 수조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을 테니 밖에서 찍찍댈 수 밖에 없고, 당분간은 안심이라며 카이엔은 소금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금이 너도 친구랑 잘 지내.”
- 누가 친구냐! 저놈은 내 부하다.
“너 진짜…”
- 나 잘래. 자도 돼?
“어. 밥은 언제 줄까?”
- 배고프면 말할게.
“그래. 언제든지 말해.”
그 말을 끝으로 루브는 다시 눈을 감았다.
카이엔에겐 어째선지 새근새근 잘도 자는 그 숨소리까지 들렸다.
소금이를 다시 제 집에 데려다주고 카이엔은 라스를 향해 손짓했다.
익숙하게 네발로 걸어와 그의 발 밑에 착 하고 엎드린 라스를 보며 카이엔이 입을 열었다.
“너도 슬슬, 인간 모습으로 지내도 될 것 같아.”
“괜찮을까요?”
“응. 손님용 별채를 하나 더 만들기로 했거든. 그래서 공사가 끝나면 다들 그쪽으로 방을 옮기거나 그쪽을 외부 손님용 별채로 쓸거야. 네가 쓸 방도 정해놨고. 옷은… 일단 사이즈를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이 상태에서 변해도 아무것도 안 입고 있진 않습니다. 다만 피투성이일 때 변신을 한 탓에 꼴이 지저분할겁니다.”
“그렇구나. 음, 내일은 너무 이르려나? 다들 네가 늑대 인간이라고 하니까 엄청 궁금해하더라.”
“기대를 배신할까봐 겁나네요.”
“너도 이제 편하게 지내도 돼. 그동안 늑대 연기하느라 고생많았어.”
“아뇨. 어차피 밖에도 잘 안 나갔는걸요. 괜찮습니다.”
몬스터와 짐승은 또 달라서, 늑대 모습으로 데리고 다니면 다들 신기하게 여기며 만지게 해달라고 할까봐 카이엔은 라스를 데리고는 밖에 잘 나가지 않았다.
내일부턴 라스도 인간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기로 약속하고 카이엔은 일찍 자기로 했다.
점점 방에서 기르는 애들이 늘어났지만 내일이면 한 명이 독립해 방이 좀 더 휑해질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식사 이후 카이엔은 라스를 별채의 방으로 데려갔다.
인간 모습일 때의 키나 체격을 몰라 바이스가 여러가지를 준비해뒀으니 그 중에 맞는 걸로 입어보고 나오기로 했다.
라스가 늑대가 아닌 인간의 모습일 때 어떤지 전혀 알지 못해서 카이엔도 살짝 긴장한 채 별채 건물 밖에서 라스를 기다렸다.
몰골이 말이 아닐 거라며 라스가 씻고 옷까지 갈아입고 나오는 걸 문 앞에서 기다릴 수는 없어서 햇볕도 쬘겸 밖으로 나온 거였다.
마침 산책을 하고있던 슬로세이가 빠르게 카이엔에게 달려와 몸을 던졌다.
“윽!”
“왕자님!”
“너, 달려들지 좀 마!”
“그치만 받아줬잖아.”
카이엔의 품에 안겨서 슬로세이가 방긋 웃었다.
엄청난 기세로 달려오길래 뭔가 했더니, 별일 없었던 모양이다.
슬로세이의 둥그런 머리통을 꾹꾹 누르며 카이엔은 그녀를 떼어냈다.
어쩐지 옆에서 바이스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난 힘이 약해서 넘어질지도 몰라.”
“에이-”
“진짜야.”
“그런데 왕자님은 여기서 뭐해? 나 보러왔어?”
“아니. 라스를 좀 만나려고. 이제 늑대 모습으로 있는 건 끝내기로 했거든.”
“와, 정말? 나도 보고 싶다! 어떻게 생겼을지 기대돼.”
“뭐가?”
“응?”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서 카이엔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빗자루를 타고 날고 있던 그리델라가 천천히 땅으로 내려왔다.
스커트 자락을 팔랑이면서 그리델라는 카이엔에게 바짝 붙으며 말을 걸었다.
“무슨 이야기 했어? 나도 알려줘.”
“라스 이야긴데…”
“늑대 인간? 나도 보고 싶어!”
“구경거리가 아니야.”
“그치만 앞으로 같이 살 거잖아? 당연히 기대되지. 어떻게 생겼을까? 그때 목소리 들었을 때 꽤 멋지던데.”
“그랬어?”
“보통 늑대 인간들은 다 체격이 좋더라.”
“이런. 더 큰 옷들을 준비할 걸 그랬군요.”
바이스가 옆에서 안타깝다는 듯 한마디 했다.
어쩌다보니 넷이서 함께 라스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햇볕은 따뜻하고 바람은 불지 않았다. 가만히 일광욕을 하다간 깜빡 졸아버릴 것만 같은 좋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