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다음 날 아침, 누군가가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글러티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사는 혈족의 성은 낮밤이 거의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어두침침한 곳에 있었던 것과 달리 이곳은 낮밤의 구분이 뚜렷했다.
커튼으로 가려놨음에도 방 안은 꽤 밝았다. 의자에 걸쳐놓은 외투를 입고 문을 여니 그리델라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 아, 뱀파이어한테 아침 인사 해도 되나?”
“그건 개인의 자유지. 무슨 일이야?”
“같이 아침 먹으러 갈까 해서. 어제처럼 다같이 모이진 않을 거라 나랑 슬로세이밖에 없지만.”
“슬로세이… 아.”
그리델라에게 가려져서 안 보였지만 뒤에 확실히 슬로세이가 있었다.
아직 잠이 덜 깬 건지 반쯤 그리델라에게 기대고 있는데다가 정돈하지 않은 곱슬머리가 부스스하게 떠있었다.
손으로 눈을 비비며 슬로세이가 하품을 했다.
“흐아암- 나 아침 안 먹어도 되는데…”
“잘 먹고 잘 자야 빨리 큰다? 너 빨리 키 크고 어른 되고 싶다면서.”
“칫. 어차피 나이 먹으면 크게 되잖아.”
“좀 더 잘 자라려면 노력해야 하는 법이야.”
보채는 슬로세이를 챙기면서 그리델라는 다시한번 글러티나에게 아침식사를 권유했고 딱히 할 일이 없던지라 글러티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젠 여러 명이 모인데다가 특별히 카이엔이 언급한 것이 있었는지 화려했던 저녁식사에 비해 아침 식사는 단출했다.
성에서 지낼 때도 식사는 간소하게 했던지라 글러티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빵에 잼을 발랐고 슬로세이는 식초에 절인 양배추를 씹어먹으면서 졸음을 물리치려고 애를 썼다.
자기 몫으로 덜어진 양배추 한 그릇을 다 먹고난 뒤에야 슬로세이는 기지개를 켜곤 스프를 들이켰다.
“아으~ 오늘은 뭐하지? 공부? 도서관?”
“이따 왕자님이 올 테니까 같이 산책이라도 하자고 해봐.”
“엥? 왕자님 오는 거야?”
“글러티나, 너 혹시 릴리시아 만나봤니?”
“음? 그게 누구지?”
“여기 정원을 지키는 몬스터인데, 영주성 안에 들어오게 되면 침입자가 아니라는 인식 절차를 거칠 필요가 있거든. 아마 그걸 위해서 왕자님이 오전 중에 널 찾으러 올 것 같아.”
“아아 그래?”
경비의 역할을 하는 몬스터라니, 굉장히 흥미로웠다.
그녀의 성에도 가고 일이라든가 마법으로 불러낸 사역마등이 있었기에 카이엔이 기르는 몬스터가 궁금해졌다.
그리델라의 말처럼 카이엔은 정오가 되기 전에 별채로 찾아왔다. 이미 그리델라에게 대략적인 설명을 들었기에 글러티나는 카이엔의 설명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고 함께 정원으로 걸어갔다. 재밌어보였는지 그 뒤를 그리델라와 슬로세이도 따라왔다.
마침내 도착한 정원. 거대한 말미잘 모습의 알라우네를 보고 글러티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게 무슨…”
“변종 알라우네야. 다른 알라우네는 이렇게 안 생겼다더라.”
“…애초에 알라우네가 맞긴 한 거야?”
“본인이 알라우네라니까 맞겠지.”
“으음.”
글러티나는 침음을 흘렸다.
그녀가 아는 알라우네는 생장기 땐 식물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있어도 점차 자랄수록 먹잇감을 유인하기 쉽게 모습을 바꾸었다.
개중에는 자신이 가장 많이 잡아먹은 생물을 모방하여 진화하는 종도 있었고 일부러 약해보이는 모습을 취해 포식행위를 하곤 했다.
그녀가 봤던 알라우네는 인간의 형상을 본따 제 모습을 바꾸었는데 카이엔의 정원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고있는 알라우네는 아무리 봐도 몬스터였고 아무리 봐도 말미잘에 가까웠다.
혹시 카이엔이 속은 건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저것이 자신의 정체를 착각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글러티나의 속내도 모르고 카이엔은 릴리시아에게 새 손님을 소개하느라 바빴다.
녹색 촉수가 글러티나를 향해 조심스럽게 내밀어졌다. 촉수를 향해 글러티나가 손을 내밀자 릴리시아는 악수를 하듯 그 손을 잡고 흔들었다.
이미 글라스를 봐서인지 같은 뱀파이어이자 가족인 그녀는 오래 확인할 것도 없다는 듯 이곳저곳 툭툭 쳐보기만 하고 촉수를 거두었다.
“아, 끝이야? 이번에도 들어올릴 줄 알았는데.”
- 문제없어. 어차피, 금방 갈 거라며.
“그런가?”
- 괜찮을 것 같아.”
릴리시아의 말에 카이엔은 알겠다며 그녀의 몸통을 쓰다듬었다.
마침 밥 시간이라 잘 먹으라는 인사까지 마치고 뒤를 돌아서니 글러티나가 조심스럽게 카이엔에게 말을 걸었다.
“그… 알라우네는, 포식 행위를 하지 않나보군. 사냥이라던가 유인 같은 거.”
“아, 응. 먹일 때가 되면 밥을 주고 있는데.”
“그래서인가…”
“응?”
“보통 저런 식물형 몬스터는 사냥에 적합한 형식으로 진화하기 마련인데, 너무 이질적인 생김새여서. 사냥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먹을 게 굴러들어오니 그런 것 같아.”
“아.”
“그렇지?”
“네 말이 맞아. 처음 릴리시아를 데려왔을 때도 이 정돈 아니었으니까.”
너무 잘 먹이고 잘 키워서 저렇게 거대한 말미잘 모습이 되버렸다는 말이다.
릴리시아가 이상한 게 아니라 그의 양육방식이 잘못됐음을 깨닫고 카이엔은 순간 눈앞이 아찔해졌다.
하지만 이제와서 릴리시아가 사냥을 해서 먹이를 충당할 수 있게 할 수는 없었다.
이곳은 검은 숲도 아니고 주변에 돌아다니는 건 인간 뿐이었다.
살아있는 가축을 데려와서 사냥법을 알려주는 것도 꽤 기괴한 장면이 될 테니 당분간은 이런 식으로 밥을 줄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자랐 건 그가 돌보고 있는 몬스터였으므로 카이엔은 애써 슬픔을 감추려고 애를 썼다. 그가 잘못해서 릴리시아가 저렇게 되어버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글러티나는 글라스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글라스는 어디까지나 시종 '대리'였으므로 바이스가 있는 동안은 하는 일이 거의 없었고 다른 하인들의 일을 도와주거나 영주성의 규칙을 숙지, 분위기를 파악하며 적응하고 몬스터들과 친해지는데에 주로 시간을 보냈다.
바이스 대신 글라스에게 덜컥 시종 일을 해보라고 넘길 수 없는 이유는, 아직 그가 시종일에 미숙하기 때문이다.
배우고 있는 입장인데 다 배우기도 전에 실전을 겪게 하면 없는 자신감도 떨어져나간다.
그것에 대해 충분히 대화를 나누었기에 글러티나도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글러티나는 뱀파이어 혈족 가문 하나의 수장이었기에 카이엔은 그녀와 좀 더 깊이있는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오후의 티타임. 차와 디저트를 앞에 두고 두 사람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카이엔은 뱀파이어에 대해 알기를 원했고 글러티나 역시 점점 검은 숲으로 발을 들여놓는 인간들에 대해 궁금해했기에, 의견이 일치했다.
“아무리 인간들이 먼 곳까지 들어가도 너희 영토에 닿는 건 무리가 있겠지만.”
“맞아. 특히 모스피아의 성은 아주 깊숙한 곳에 있으니까. 나도 인간을 직접 본 건 너희가 처음… 은 아니지만. 아주 예전에 본 적이 있긴 하니.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대화를 나누진 않았지만.”
“다른 뱀파이어들도 있나?”
“뱀파이어는 크게 네 파로 나뉘어져있어. 검은 숲 말고도 다른 곳에 상주하고 있기도 하지. 나는 모스피아라는 성을 쓰는 혈족의 당주이며 소속원이 바깥으로 불필요하게 나도는 것을 제지하고 우리의 땅에서만 살게끔 관리하고 있어. 모스피아는 관리자니까.”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묘한 자부심이 묻어나왔다.
글라스는 그 분위기가 답답해서 몰래 빠져나온 모양이지만 대부분의 뱀파이어들은 제 땅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약점도 제각각이지. 은에 영향을 크게 받는 객체도 있고 흐르는 물을 건너지 못 하는 자도 있어.”
“그렇군. 힘든 체질도 많겠네. 뱀파이어의 수명은 인간보다 길지?”
“훨씬 길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족 번식에 대해 별 생각이 없는지라 지금도 줄어들고 있는 추세고. 저들끼리 혼인하여 자손을 볼 수도 있고 인간을 물어뜯어 기운을 불어넣거나 제 피를 먹게해서 혈족으로 만들 수도 있지. 인간과의 혼혈로 담피르가 태어나기도 하지만 태어나자마자 죽는 게 부지기수야. 몸을 구성하는데 필요한 것이 부족해서 무너지고 말거든. 아, 첫 번째 경우 말고는 당주의 허락없이 혈족을 늘리는 게 불법이야.”
담피르는 주로 유산되거나 사산된다고 한다.
다만, 뱀파이어 여성과 인간 남성 사이에 태어난 담피르의 경우엔 모체로부터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어서 생존확률이 보다 높고 반대의 경우에도 다 죽는 건 아니라고 덧붙였다. 어디든 예외는 있는 법이라면서.
카이엔은 조용히 글러티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외관은 비슷할지 몰라도 종족이 다르다는 건 꽤 많은 차이점을 보여주곤 했다.
어쩌다보니 인간 대표가 되어서 뱀파이어 당주와 이야기 하게된 카이엔은 한마디 한마디를 조심히 하려고 애를 썼다.
“뱀파이어에 대한 소문이 퍼진다면 인간들은 난리가 나겠군. 보다 젊은 모습으로 오래 살고 싶어 하는 종족이니까.”
“다들 그런 건 비슷할지도 몰라. 하지만 인간에 비하면 우리는 강하지만 소수니 위험하긴 하겠어. 외진 곳에 있는 우리 성을 발견하려면 백년도 넘게 걸리겠지만 다른 뱀파이어들과는 쉽게 접촉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해줘도 되려나, 라고 중얼거리며 글러티나가 입을 열었다.
“이곳 말고도 몬스터가 사는 지역은 많지. 대표적인 그곳, '통곡의 원'. 그곳에서 뱀파이어 혈족이 하나 살고 있어. 우리와는 다른 성질을 가진 자들이지.”
통곡의 원이라…”
“들어본 적은 있지? 그쪽 녀석들은 인간들과 교류하기도 하니까 어딘가엔 소문이 퍼졌을지도 몰라. 물론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인간들이 보이면 십중팔구 잡아먹히거나 실험재료 같은 걸로 쓰이겠지만 말이야.”
“위험하네. 난 통곡의 원에 갈 일이 없으니 다행이고.”
“인간들은 수가 많은 만큼 복잡한 것 같아. 네 이야기를 들어보니 왕이라고 해서 만인을 지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쪽으로 보면 차라리 소수가 낫구나.”
한쪽은 인간의 왕자, 다른 한쪽은 뱀파이어 혈족의 당주.
그러나 두 사람은 종족간 화합의 장을 위해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엄밀히 따지고 들자면 누나가 남동생의 직장 상사와 면담 비슷한 걸 하는 것이었고 카이엔의 뒤에 바이스와 함께 서있는 글라스는 연신 마른 침을 삼켜야만 했다.
카이엔에게 뱀파이어의 이야기가 흥미로운 것처럼 글러티나 역시 카이엔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몬스터와 말이 통하는 왕자는 굉장히 신기했고 그런 인간은 세상에 그 한 명뿐이라는 것에는 저절로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머무는 동안 인간의 역사서를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고 바이스가 도서관을 안내해주기로 했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쩌다 카이엔이 글라스와 만나게 되었는지도 말하게 되었는데 박쥐로 변한 동생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는 말에 글러티나는 황급히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으려고 했다.
덕분에 글라스는 얼굴이 새빨개져선 눈을 질끈 감았다. 귀도 막고 싶었지만 카이엔이 있는데 차마 그럴 수도 없어서 울상만 지었다.
옆에서 바이스가 위로하듯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어쩐지… 이 바보가 어쩌다가 인간과 만난 건가 싶었어. 설마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아, 흔한 일은 아닌건가?”
“제 몸 하나쯤은 챙길 줄 알아야 하는 법이야. 게다가 햄스터에게 맞았다니. 너 정말…”
남동생을 바라보는 글러티나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아무리 다친 상태에 박쥐 모습이었다고 해도 주먹보다 작은 햄스터에게 맞았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어디가서 뱀파이어 망신이나 시키고 있는 볼썽사나운 모습에 다시 성으로 데려가야 하는 충동이 샘솟을 정도였다.
물론 소금이는 평범한 햄스터가 아니라 햄스터 몬스터였고 본성은 아주 사납고 무시무시한 악의 화신이었지만 글러티나는 그런 세세한 부분까진 알지 못 했다.
“소금이는 사나운 햄스터니까 어쩔 수 없었을 거야.”
“흐음.”
“나중에 보여줄게. 물론 통역은 내가 해야하지만.”
“얼마나 사나운지 설명만으로는 모르겠어.”
소금이가 아무리 무시무시한 말을 해봤자 그걸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카이엔뿐이었고 남들 눈에는 그저 귀엽게 앞발을 흔들고 있을 뿐이라는 걸, 카이엔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글라스가 소금이에게 맞았다는 건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으니 주워담을 수도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소금이의 흉폭함과 사나움을 강조해 글라스가 맞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대는게 가장 현명하다고 생각해 카이엔은 열심히 글라스를 변호했다.
정작 당사자에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카이엔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기에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