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다른 이들을 불러올 것을 명령받은 바이스가 빠르게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한 건지 식당으로 가는 길에 프라우디에와 자네인을 만날 수 있었다.
티아마티스는 더 이상 프라우디에를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지만 자네인 스스로 프라우디에의 곁에 있고 싶어했기에 두 사람은 자주 함께 다니곤 했다.
방도 가깝기도 했고.
“왕자님!”
카이엔을 발견하고 프라우디에는 활짝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자네인은 기사답게 절도있게 인사를 했는데 그런 두 사람 다 카이엔의 옆에 처음 보는 사람이 있자 눈이 동그래졌다.
“손님이신가요?”
“응. 글라스의 누나.”
“처음 뵙겠습니다.”
“저도요. 잘 부탁드립니다.”
글러티나는 프라우디에, 자네인과 악수를 나누었는데 무언가 이상한 점이라도 느낀 건지 자신의 손바닥을 빤히 쳐다보다가 두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지 입술만 우물거리다가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인간이 아니군.”
“아, 네.”
“맞습니다.”
긍정의 답변이 돌아왔다.
인간보다 먼저 이종족을 만나게 된 글러티나는 다시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뱀파이어 혈족 중 하나, 모스피아의 당주 글러티나 모스피아입니다.”
“프라우디에 독스예요. 호문쿨루스입니다.”
“자네인 마스퀘이어입니다. 으음… 독룡인입니다. 이 세계 유일의 드래곤이신 티아마티스 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자네인은 추가 설명을 덧붙여야만했다.
드래곤이라는 말이 나오자 글러티나는 화들짝 놀랐지만 이내 진정하고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 채로 오래 이야기를 할 수 없었기에 네 사람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바이스 그녀석은 대체 얼마나 빠르게 일을 처리한 거야?”
급하게 여러 명이 식사를 하게 되었다고 알렸을 텐데 하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테이블 세팅을 마친 참이었다.
상석에 앉은 카이엔은 에빌과 글라스, 바이스, 페이리를 위해 자리를 비워놓으려고 식기의 수를 세어보다가 인상을 썼다.
하나가 부족했다. 라스는 늑대모습이니 식탁에 앉지 않을 것을 상정해도 부족했다.
바이스의 성격상 주인인 그와 같은 식탁에 앉으려고 하지 않을 테니 그럴만도 했다.
일단 양쪽으로 두 자리에 하나 더 자리를 비워놓기로 하고 글러티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른 자리를 지정해주었다.
프라우디에와 자네인은 글러티나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얼굴을 보고 대화하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저, 뱀파이어는 글라스 씨 말고는 처음 뵈어요.”
“다 그 녀석 같지는 않으니까… 혹시라도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어봐도 돼.”
카이엔과도 말을 놓기로 한 글러티나였다. 프라우디에는 경어가 더 편하다고 했기에 그녀는 말을 편하게 하기로 했다.
그녀의 대답에 프라우디에는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으으음~ 그럼… 뱀파이어는 관에서 자는 게 더 회복이 잘 되나요?”
“특수 처리를 한 관이라면 마력을 모으기가 더 쉽지.”
“왕자님, 글라스 씨에게도 관을 만들어줘야겠어요!”
“관을 만드는 장인이 따로 있어서 그 자의 비법이 필요해.”
“아쉬워요.”
그런 관이 있다면 꼭 한 번 보고 싶었다며 프라우디에는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네 사람이 자리 잡고 나서 뒤이어 식당으로 들어온 건 그리델라와 슬로세이였다.
슬로세이는 카이엔의 옆자리가 비었다는 것에 얼른 달려가려고 했지만 카이엔이 제지했다.
“여긴 다른 애들이 앉을 거야.”
“칫.”
“어라, 새 손님?”
“글라스의 누나인 글러티나 모스피아라고 합니다.”
“아아 그 뱀파이어? 만나서 반가워! 난 그리델라. 마녀야!”
“어, 종족도 말해야 해? 난 슬로세이. 인어.”
“마녀와 인어라…”
굉장히 난해한 조합이었다.
먼 옛날 전설처럼 떠돌던 이야기를 떠올린 글러티나의 미간에 살짝 골이 패였다.
뭐, 그건 머나먼 과거의 이야기고 지금은 지금이니. 두 사람도 반갑게 인사를 하며 자리를 잡았다. 그리델라는 붙임성있게 글러티나의 옆에 앉아서 뱀파이어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서 다시 식당의 문이 열렸다.
바이스가 나머지 인원을 모두 데리고 함께 왔는데 그는 카이엔이 네 자리를 비워놓은 걸 보고 바로 다른 사람들의 자리를 배정해주었다.
글라스는 글러티나의 옆에 붙여놓고 페이리의 자리의 의자를 살짝 옆으로 치웠다. 에빌과 엔베인을 앉히고 다른 의자에 라스를 앉게 하려고 하니 카이엔이 한숨을 쉬었다.
“바이스 넌?”
“전 서있어도 됩니다만.”
“식사는?”
“감히 왕자님과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없습니다. 자, 라스 씨. 의자에 올라가세요.”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데 개 짖는 소리를 내야 하는지 사람 목소리를 내야 하는지 몰라 라스는 도와달라는 눈으로 카이엔을 바라보며 앞발을 흔들었다.
저절로 입에서 곡소리가 흘러나왔다. 카이엔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라스, 말 해도 돼. 네가 늑대 인간인 거, 여기 사람들한테만은 말해도 될 것 같다.”
그와 바이스, 에빌을 빼곤 죄다 이종족이었다.
카이엔의 허락이 떨어지자 라스는 바로 입을 열어 목소리를 냈다.
늑대의 입에서 인간의 언어가 나오자 라스가 카이엔의 애완 늑대인 줄로만 알고 있던 모두 깜짝 놀랐다.
“그… 이렇게 밝힐 줄은 몰랐군요. 라스 울피어라고 합니다.”
“늑대 인간?!”
“진짜?”
“난 늑대인 줄 알았는데… 미안해!”
물 묻은 손으로 막 만지고 위에 올라타려고 해서 미안하다며 슬로세이가 재빠르게 사과했다.
라스는 앞발로 눈을 가렸고 카이엔은 허허하고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아무튼 여기서 인간 모습으로 변할 수는 없기에 라스는 바닥에 있겠다고 했다.
결국 한 자리가 남게 되었고 바이스가 남은 식기를 슬로세이의 앞으로 옮겨뒀다.
자신의 앞에 접시며 포크, 나이프 등이 없다는 것에도 신경쓰지 않았던 슬로세이는 식기류가 앞에 놓이자 그것을 들고 이리저리 흔들어보았다.
다들 자리에 앉고나서 소란이 진정되자 바이스가 요리사와 식당 보조들에게 요리를 가져올 것을 요청했다.
급하게 준비했을 텐데 테이블을 채우는 음식의 가짓수는 꽤 많았다.
단호박 스프, 구운 버섯과 양파를 곁들인 소고기 스테이크, 향신료를 뿌린 송어구이, 둥근 빵, 소시지와 베이컨을 넣은 감자 파이, 닭고기 스튜, 치즈를 얹은 닭가슴살 요리, 절인 대구 튀김, 완두콩을 넣은 야채 샐러드, 훈제 연어 오믈렛 등.
여럿이서 함께 식사한다는 말에 요리사들은 내일 식사용으로 손질한 재료까지 모조리 쏟아부은 것 같았다. 그 정도의 만찬이었다.
특히 생선 요리는 슬로세이의 앞에 중점적으로 놓여졌다.
인어인 슬로세이가 육류보단 해산물을 더 선호했기에 스테이크 대신 생선 요리를 가져다준 것이었다.
바다와 멀리 떨어진 세자르 지역의 특성상 민물고기 혹은 절인 생선 뿐이었는데 다행히 입맛에는 맞는 모양이었다.
식사를 하는 내내 바이스는 카이엔의 뒤에 서있기만 했다. 물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카이엔이 편식을 하려고 하면 바로 옆에서 편식하지 말라고 소곤거리는 게 그의 주 업무였다.
저녁인데다가 손님이 왔다는 말 때문인지 평소 식사보다 좀 더 힘이 들어간 모양새에 카이엔은 피식 웃었다.
식사가 끝나면 요리사의 공로를 치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자리에 모여서인지 다들 활발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 중에 인간은 고작 셋이고 죄다 이종족이었으니까.
페이리는 몬스터과로 분류되는 듯했지만 그녀가 단일개체라서 그렇지, 그녀같이 언어구사능력이 있는 아라크네 무리가 발견된다면 더 이상 그녀를 몬스터라고 칭할 수는 없을 것이다.
“늑대 인간이라니 완전 신기하다! 인간 모습 보여주면 안 돼?”
“여기서는 곤란합니다만…”
요리사는 라스의 몫으론 큼지막한 돼지 뒷다리를 살짝 구워서 줬다.
까드득 뼈 씹는 소리를 내던 라스는 정말 곤란하다며 도리질을 했다.
지금까지 완벽한 늑대 연기를 해온 그에게 다들 감탄했고 라스는 이대로 있다간 영영 인간 모습으로는 못 변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카이엔 역시 언제 그의 정체를 드러내도 좋을지 가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만간 결정해야 할텐데. 걱정스러운 마음이 접시 위의 아스파라거스를 쿡쿡 찌르는 행동으로 변하자 바이스가 속삭였다.
“찌르지만 마시고 어서 드세요.”
“으…”
하여간 바이스는 예나 지금이나 그가 편식하는 꼴을 두고보지 않는다.
글러티나는 만나기도 어려운 다양한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이종족이 많다고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심지어 다크 엘프에 인어, 늑대인간이라니.
이들은 뱀파이어 만큼이나 자신들의 거주지에서 벗어나지 않는 종족이었다. 완벽히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는 아라크네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워낙 많아서인지 저녁식사는 시끌벅적했다. 주로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건 그리델라와 에빌이었는데 분위기가 처지지 않게 사교성을 있는 대로 끌어모아 대화를 진행해나갔다.
술이 없어서 다행이다. 카이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술판이 벌어졌다면 더 난리가 났을 게 뻔했다.
디저트로는 체리 콩포트를 곁들인 쉬폰 케이크가 나왔다. 각자 취향에 맞는 차와 음료를 앞에 두고 다들 한숨 돌렸다.
그리델라는 술을 찾았지만 카이엔이 단호하게 안 된다고 했다.
“쳇. 이럴 땐 술 마셔야 하는데.”
“애들 앞에 두고 그러지 마라.”
“하긴. 슬로세이는 애니깐-”
“아냐! 나 말고도 저기 또 있잖아!”
키가 비슷한 프라우디에가 지목당했다.
아직 성인이 아니었기에 프라우디에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프라우디에의 앞에는 밀크티가 놓여있었다.
“오늘 이렇게 모이라고 한 건 다름이 아니라, 새 손님이 찾아와서 그런 거야. 소개도 해 줄 겸 다같이 모이는 자리가 있었으면 해서. 솔직히 너희는 남작의 손님이 아니라 내 손님에 가까우니까. 프라우디에는 처음엔 공부하러 온 거였지만…”
“이제 사정이 좀 달라졌죠.”
“독스 백작에게선 아직 연락 없나?”
“네. 그래도 티아마티스 님이 잘 해주실 거라고 믿고 있어요.”
살포시 미소 짓는 모습에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만 같았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하던가. 어차피 독스 백작은 프라우디에를 자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이대로 가만히 두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자네인도 당분간은 떠날 생각이 없어보이고 엔베인과 라스는 이제 갈 곳이 없고 그리델라와 슬로세이는 애초부터 신세지려고 온 거였으니.
‘더 늘어나지만 않으면 돼.’
올해는 무슨 마가 낀게 분명했다.
십여 년간 살아오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건 난생 처음이었다.
“다들 친하게 지내고. 이런 인연이 엮이기가 쉽지 않다는 건 다들 알 거 아냐.”
“하긴…
“그 말도 맞네요.”
“처음보는 애들도 있었고.”
“라스가 언제 인간 모습으로 변할지는… 아직 좀 더 고민해봐야겠어. 어떻게 식객으로 눌러앉게 해야할지도 더 고민해봐야겠고.”
“힘내세요 왕자님.”
“어.”
이제 저들이 그를 왕자라고 부르는 말에도 익숙해진 카이엔이었다.
시끌벅적한 저녁식사 후, 다들 인사를 나누며 해산했다.
카이엔은 방으로 돌아갔고 그런 그를 바이스, 에빌, 라스, 페이리가 따라갔다.
프라우디에의 연구실은 숙소로 내준 건물의 옆이었으므로 프라우디에와 자네인도 다른 사람들과 헤어졌다.
연못에 가고 싶어하는 슬로세이를 그리델라가 억지로 방으로 끌고갔고 글라스는 오랜만에 다시 만난 누나와 데면데면한 처지라 어색한 분위기에 일찍 발을 빼려는 엔베인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졸지에 팔을 붙잡혀 오도가도 못하게된 엔베인은 울상을 지었다.
“나도 방에 갈래…”
- 그렇게 말하면 누가 듣겠냐! 강하게 말해! 뿌리치면서!
마검의 말은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든 누나와 단 둘이 있게 되는 상황을 피하고 싶은 글라스또한 울상을 지으며 엔베인에게 눈빛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물론 그 도움 요청은 글러티나에게도 들켰다.
“글라스 넌,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철이 없어.”
“흑…”
“내 동생 때문에 미안하다.”
“아뇨… 괜찮습니다.”
“다크 엘프, 라고 했지? 직접 만난 건 처음이군. 너는 좀 특이한 것 같지만.”
“네?”
“머리카락의 색도 눈동자의 색도, 흔히 알려진 다크 엘프와 달라. 그렇다고 백색증이라고 하기엔, 피부색은 평범한 다크 엘프와 같지. 다크 엘프는 죽음의 기운이 서린 땅에 산다고 알고 있다. 그래선지 너에게도 그런 기운이 물씬 풍기고 있어.”
정확히는 마검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일 것이다. 그와 마검은 이심 동체이니 그렇게 느낄 법도 해서 엔베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에게 시시콜콜한 사정까지 다 털어놓을 수는 없기에 그 말이 맞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글러티나는 그 반응에 웃으며 말했다.
“그렇구나. 곤란한 질문이었을 텐데, 미안하군. 글라스와 나는 할 이야기가 있으니 먼저 들어가라. 내 동생이 크게 신세를 졌군.”
너무나도 쉽게 엔베인을 잡고 있는 글라스의 손을 떼어낸 글러티나는 글라스를 데리고 정원 쪽으로 걸어갔다.
질질 끌려가는 글라스는 마치 도살장으로 향하는 소나 돼지 같았다. 그 구조신호를 애써 무시하며 엔베인은 몸을 돌렸다.
남매 싸움에 끼어들 정도로 눈치 없진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어느새 밤이 깊었다. 달빛이 참 좋다며 글러티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의 하늘도 본성에서 볼 수 있는 하늘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글라스.”
“히익!”
“왜 그렇게 겁을 먹는 거지? 네가 잘못했다는 건 아나보구나.”
“미안해…”
글라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남동생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며 글러티나는 피식 웃었다.
그래도, 이상한 사람한테 코가 꿰어서 부려먹히는 게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녀의 눈에도 그 왕자는 꽤 좋은 사람같았다.
“네가 잘 지내고 있어서 다행이야.”
“나-”
“며칠간 더 지켜볼 거지만. 너도 너무 오래 놀다오진 말거라. 폐 끼치지 말고.”
“누난 내가 아직도 어린애인 줄 알아?”
“어린애지.”
툭 내뱉듯 한 마디 하고 글러티나는 걸어왔던 방향으로 향했다. 손님용으로 마련된 방으로 가는 그녀와 달리 글라스는 사용인 전용 숙소로 걸어갔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다. 글러티나는 직접 자신의 눈으로 남동생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기에 무작정 혼내기보단 지켜보는 것을 택했다.
다행히 이곳엔 인간만큼이나 이종족이 많아서 지내는데에는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