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왕자님. 손님이 찾아오셨다는 군요.”
“응?”
해 질 무렵, 갑작스런 손님의 이야기에 카이엔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이야기를 전달한 건 바이스였는데 그는 담담한 얼굴로 카이엔의 대답을 기다렸다.
또 무슨 일인 건가 싶었지만 일반 귀족이었다면 바이스가 쫓아냈을 게 뻔했다.
그 말인 즉슨, 일반인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일단 만나러 가자.”
이번에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등을 타고 기어오르고 있었다.
세자르 남작에게 찾아오는 손님이 적어서 이젠 그의 전용이 되어버린 것 같은 응접실 안으로 들어가니 안에 있던 여성이 목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긴 은발에 검은 망토를 두르고 있었는데, 그녀는 카이엔의 얼굴을 보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글러티나 모스피아.”
짧게 입에 담은 이름이 어딘가 익숙했다.
카이엔은 짧은 탄성과 함께 이렇게 물었다.
“글라스의…?”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글러티나가 대답했다.
그러나 딱 봤을 때 그 두 사람이 혈연이라는 걸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두 사람은 닮지 않았다.
글라스는 붉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이었고 글러티나는 눈동자는 글라스 만큼이나 붉었지만 머리카락의 색이 선명한 은빛이었다. 게다가 풍기는 분위기조차 달랐다.
뱀파이어라면 단순히 남매가 아니라 부모 혹은 친척관계일 수도 있기에 카이엔은 글러티나의 외모를 살피는 것을 그만두고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가족인 건가?”
“가문의 당주이자 친누나지. 하아… 뜬금없이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이마를 짚고 글러티나는 카이엔에게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골치가 아픈지 손을 떼지 못하면서 그녀는 하소연하듯 입을 열었다.
“솔직히, 인간을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 내가 아무리 뱀파이어 가문의 당주라고 하지만. 당신, 인간 왕자라면서?”
“왕자면서 왕자가 아니니 편하게 대해도 돼. 나도 그렇게 할 테니.”
“그럼 말은 놓을게. 한심한 동생 때문에 폐 끼쳐서 미안하다.”
“난 괜찮은데… 글라스는 여기서 시종 대리로 일하고 있어.”
“대리?”
“응. 바이스, 일단 글라스를 좀 데려와야 할 것 같은데.”
“못 도망치게 꽁꽁 묶어서라도 대령하겠습니다.”
“적당히 해.”
친누나가 보고있는데 묶어서 끌고 올 생각인 거냐.
바이스가 글라스를 데려오기 전까지 앉아서 이야기나 하자며 두 사람은 나란히 마주보고 소파에 앉았다.
글라스는 어딘가 굉장히 허술해보이고 명랑한 반면 누나인 글러티나는 칼 같이 매서운 느낌이 들 정도로 예리했다.
그래도 가주까지 하고 있는 사람이 동생이 걱정되서 먼 길 떠나 인간의 영토까지 온 걸 봐선 가족 사랑이 지극한 모양이었다.
창백하고 흰 피부는 뱀파이어라는 종족의 특성인 건지, 글러티나는 얼굴뿐만이 아니라 망토 밖으로 드러난 손 역시 하얬다. 석고상만큼이나 희고 예쁜 손이었다.
다른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건 실례라 카이엔은 손에서 눈을 떼고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글라스를 데리고 다시 성으로 가는 건가?”
“아마도. 녀석이 안 간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안 간다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여기에 친구가 워낙 많아서.”
“이쪽으로 오면서 느낀 게 있으니 나도 알겠어. 도대체 여긴 뭐길래… 이렇게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는 거야?”
“이상한 기운?”
“몬스터 울음소리도 들리고 죽음의 기운도 약간… 미세하게.”
“아.”
프라우디에가 흑마법을 배우고 있는데다가 엔베인이 가지고 있는 마검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전에 더스크라이즈에서 만났던 사제들도 이상한 기운을 쫓다보니 엔베인과 같이 있던 그들을 발견했으니까.
이걸 설명해줘야 하나 그냥 둬도 되는 건가 카이엔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반면 글러티나는 별 뜻없이 입에 담은 말이었는지 말없이 카이엔을 관찰했다.
글라스가 편지에 써놓고 간, 은혜를 갚아야 하는 대상이 바로 눈앞의 인간 남성일 텐데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인간과 이런 식으로 얼굴을 마주보며 대화한 적이 처음이었다.
아까 그 시종에게선 느끼지 못 했던 이유 모를 친근감이 카이엔에게선 느껴지기에, 저절로 고개가 기울어졌다.
아마 이래서 글라스도 생명의 은인이니 뭐니 하는 말을 써놓고 집을 떠난 걸지도 몰랐다. 물론 이해한다고 해서 괘씸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이스가 글라스를 데려왔는데 그 꼴이 심히 이상했다.
마치 범죄자 연행하듯 끌고 온 모습에 카이엔이 황당해하며 물었다.
“왜 그렇게 붙잡고 온 거야?”
“다른 뱀파이어의 기척을 느낀건지 도중에 안 간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으허억…”
“그래도 여기까지 잡혀온 걸보니 진심으로 저항하진 않은 모양이네.”
“누, 누님 오랜만이에요…”
“너 그러려고 가출했니?”
오랜만에 만난 동생이 인간에게 붙잡혀있는 꼴에 글러티나 역시 눈에 띄게 동요했다.
안그래도 바보같은 녀석이란 건 알고 있었는데 인간들 틈에서 지내면서 뱀파이어의 멋진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할망정 바보짓이나 하고 있으니 더욱 속이 상했다.
바이스가 풀어주자 글라스는 자유의 몸이 되었는데 풀려나자마자 매서운 눈빛을 받아야만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글러티나는 바로 글라스의 등짝을 때리며 외쳤다.
“하여간!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나 없으면 네가 성을 관리해야 한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는데!”
“으악! 악! 미안해 누나!”
“평범한 남매군요.”
“어… 그러네.”
뱀파이어도 인간과 비슷하구나. 글라스가 여기서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혹시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긴 했는데 남매의 모습을 보니 확실히 그럴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어졌다.
글라스가 얻어맞는 소리가 응접실 안을 가득 채웠다.
짝 짝 울리는 소리에 바이스가 입가에 손을 가져다대곤 중얼거렸다.
“흠, 때리는 각도가 아주 전문적이군요.”
“그런 것도 전문, 비전문 따져?”
“잘 때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아…”
바이스의 감성을 이해할 수 없는 카이엔은 한숨만 쉴뿐이었다.
그렇게 한바탕 응징을 마친 뒤 글러티나는 입고있던 망토를 벗어 손에 들었다. 각이 잘 맞춰젼 양복은 구김하나 없었다.
반면 글라스는 반쯤 울먹이면서 누나인 글러티나의 발 밑에 엎드렸다.
“흐어어엉… 누나, 나 안 갈 거야… 나 여기 있을래…!”
“뭐?”
“나 여기 있을 거야! 있고 싶어!”
어린애처럼 떼를 쓰는 남동생을 보는 그녀의 눈빛이 달라졌다.
질색을 하며 그녀는 엎드린 글라스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힘을 상당히 뺀 수준이었지만 글라스는 억하는 소리를 내며 옆으로 뒤집어졌다.
“멍청한 소리 마! 우리가 왜 성에서 잘 나가려고 하지 않는 건지 모르는 거냐!”
“우리 혈족만 그렇지 다른 녀석들은 안 그러잖아!”
“그래서, 몇백 년 전의 뱀파이어 사냥같은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하려고?”
“여기 사람들은 안 그래!”
“뭐야?”
“애초에 사는 사람은 인간의 수가 월등하지만 왕자님 옆은 인간보단 이종족에 몬스터가 더 많단 말이야!”
못 간다며 난리인 글라스는 금방이라도 바닥을 굴러다니면서 떼를 쓸 것만 같았다.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라 글러티나는 이마를 짚었다.
남동생은 어렸을 적부터 이런 식으로 고집을 부리곤 했다.
그녀역시 이곳에서 인간의 기척이 아닌 다른 존재들의 기운을 느낀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하나뿐인 남동생을 여기에 두고 갈 수는 없었다
.
다른 뱀파이어라면 모를까, 글라스는 전투에도 미숙했고 빈틈투성이었다.
한 마디로, 어디가서 사기 당하거나 뒤통수 맞기 딱 좋았다.
인간계로 보내기 위해선 십수 년은 성에서 더 수련하고 공부시킬 필요가 있었는데, 잠시 눈을 돌린 사이에 이렇게 집을 나가버리다니.
절대 못 간다면서 우는 남동생과 뒷목을 잡기 일보직전인 누나를 보고 카이엔이 조심스럽게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 으음, 글라스가 나한테 은혜 갚는다고 와서 살고 있긴 한데 나도 도움을 받고 있어. 쓸모가 없는 건 아니니까…”
“폐끼치지 않는 거야?”
“응.”
“아무리 그래도 여기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데.”
“여기 사람들은 글라스가 뱀파이어란 걸 알아도 별 신경 안 쓰고 있으니 괜찮아. 영주성 사람들만 알고 있지만.”
“하아, 정체까지 다 밝히고 이 녀석이…”
“히익.”
“며칠 동안 글라스가 일하는 걸 지켜보는건 어떨까? 여긴 다른 이종족들도 많아서 글라스가 잘 하고있는지 물어보는 것도 좋고.”
“흐음…”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한 사람 몫을 해내려면 아직 먼 남동생이 타지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가 걱정되기도 했으므로 글러티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글러티나가 며칠간 묵기로 했으므로 카이엔은 서둘러 그녀에게도 쉴 곳을 내어주기로 했다.
글라스도 평범한 방을 썼으므로 글러티나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 안내를 해줬는데 글러티나 역시 방에는 별로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래 있다갈 것도 아니고 며칠 동안 글라스가 잘 지내는지만 보고 돌아가려는 것이었기에 방을 쉬는 공간 정도로 취급한 것이다.
검은 숲의 본인의 영토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굉장히 고생을 했을 텐데 글러티나는 바로 글라스가 일하는 것을 보고 싶다고 요청했다.
“누,누나. 힘들지 않아? 난 처음 왔을 때 되게 힘들었는데…”
“이정도는 힘든 축에도 끼지 않는다.”
“그,그래도…”
글라스가 눈동자를 굴리며 도움을 요청했다. 그 눈빛에 카이엔은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저녁이라 업무도 끝날 시간이야. 함께 저녁 식사라도 하면서 이야기하지. 바이스, 오늘 저녁식사는 다른 이들과 함께 할테니 남작에게 미리 말해줘야겠다.”
알겠습니다.”
“식사는… 일단 올 수 있는 사람은 다 불러올까? 접객용 테이블이 제 2식당 구역이지? 프라우디에, 자네인, 에빌, 엔베인, 그리델라, 슬로세이랑… 아, 라스도 불러오자. 늑대 모습으로 있겠지만 일단 다 모이면 한 마디쯤은 해줘야겠어. 슬로세이가 라스가 진짜 늑대인줄 알고 멍멍이 대하듯 하니까 주의를 좀 줄겸. 사트로누스는 낮에 소개시켜주기로 하고 페이리는 올 수 있다고 하면 데려와줘. 식사는… 간단한걸로해. 갑자기 모이라고 한거니까.”
“네.”
“왕자님, 남작님께는 제가 말씀을 전달해도 될까요?”
“그럼 너희 둘이 다녀와라.”
“네.”
어색한 상황에 있는걸 피하고싶었던 글라스는 냉큼 뒤돌아서 남작에게 카이엔의 말을 전달하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바이스는 한번 더 고개숙여 인사하고 빠르게 퇴장했고 카이엔은 글러티나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우린 먼저 가 있도록하자. 잘 안 쓰는 곳이라고 해도 최근 손님들이 늘어나면서 그쪽에서 식사를 하고 있으니 청소는 잘 해놓거든.”
“그래. 멋대로 찾아와서 미안하군.”
“아냐. 요즘엔… 그런 손님들이 너무 많아서.”
글러티나 쯤이야, 이해할 수 있었다. 뜬금없이 찾아온 것도 아니고 동생을 잡으러 왔을 뿐이니까.
언젠가는 글라스의 가족이 올거라는걸 예상하고 있었기에 충격이 덜했다.
카이엔은 여성을 에스코트하는 방법을 몰랐고 글러티나역시 별 생각 없었기에 두 사람은 내민 손으로 악수만 하고 나란히 복도를 걸어갔다.
“그런데 놀랄지도 몰라. 특이한 사람들이 많거든.”
“놀라지 않게 준비를 해야겠군.”
“그런 준비도 할 수 있어?”
“조금쯤은? 뭐가 나타나도 놀라지 않게 노력하겠다.”
남매라고 해도 글라스와는 완전히 성격이 달랐다. 어떻게 이런 누나 밑에서 그런 남동생이 자라난 것일까.
형제가 없는 카이엔으로선 이해하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