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왕자는 조용히 살고싶다-37화 (38/219)

-37화

카이엔은 원치 않았지만 주변에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프라우디에와 자네인, 엔베인까진 어쩔 수 없었다. 라스도 본의 아니게 여기 오게 된 거니 이해할 수 있었다.

허나 그리델라와 슬로세이의 경우엔 제 발로 의탁을 하러 찾아왔다.

유학이니 뭐니 했지만 슬로세이가 하는 일은 정원 산책과 독서뿐이었고 그 외의 시간엔 놀기만 했다.

인어왕도 저 성격을 알고 있었겠지만 보호자로 그리델라가 따라오고 이전에 신세진 왕자에게 간다는 말에 하는 수 없이 허락했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나뭇자기를 휘두르면서 릴리시아와 소통하려는 슬로세이를 보며 카이엔은 고개를 저었다.

라스는 아직 늑대 인간임을 밝히지 않았기에 카이엔의 방에서 함께 지내고 있었고 그로 인해 그리델라, 슬로세이의 방은 엔베인 옆이 되었다.

평온하게 잘 지내고 있던 엔베인의 옆 방에 소란스러운 이웃이 생긴 것이었다.

자신과는 다르게 항상 이곳저곳 돌아다니고 카이엔에게도 스스럼없이 달려드는 슬로세이를 보고 엔베인은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나, 버려지는 건 아니겠지?”

프라우디에의 치료도 끝났으니 이제 그가 여기서 해줄 건 없었다.

그저 마검이랑 반쯤 동화되어 이종족이라고 쳐줄수도 없는 다크 엘프인 그는 더이상 쓸모가 없었다.

때 아닌 우울증에 시달리는 엔베인을 위로하게 된 건 마검이었다.

한 몸이라 떼어질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위로를 할 수 밖에 없었다.

- 넌 뭐가 문제라 이러냐!

“난… 쓸모가 없어…”

- 아이고!

왜 하필 이런 놈과 연결되어버린 건지 모르겠다며 마검도 괴로워했다.

슬로세이는 두 다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달려다니고 뛰어다녔다. 본래 모습인 지느러미를 가진 인어쪽이 더 편할 텐데 그러고 다니는 모습에 카이엔이 중얼거렸다.

“…인공 호수라도 하나 만들어야 하나?”

“만드실겁니까?”

“있으면 좋겠지.”

“예산안을 편성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중얼거림은 바이스로 인해 즉시 실현되었다.

남작과의 이야기 끝에 정원에 슬로세이 한 명이 뛰어놀 정도의 작은 인공호수를 만들기로 한 것이었다.

인부들이 정원의 땅을 파고 돌로 주변을 장식하며 물을 채워넣었다. 고인 물이 썩지 않고 흐를 수 있게 설비까지 마치게 되니 참으로 그럴듯한 호수가 하나 완성되었다.

슬로세이가 가져온 돈으로 만든 거였지만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게된 슬로세이는 뛸듯이 기뻐하며 카이엔을 끌어안았다.

“고마워! 고마워, 왕자님!”

“아니 어차피 네가 가져온 돈으로 만든 거야.”

“그래도! 날 위해서 만들어준 거잖아. 왕자님 진짜 좋아!”

가만히 두면 뽀뽀까지 할 기세였다. 두 눈 부릅뜨고 있던 바이스가 슬로세이를 떼어냈고 얼른 호수에나 들어가보라며 등을 떠밀었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안 그러는데 슬로세이에게만 은근히 냉정한 그 태도에 카이엔이 물었다.

“넌 슬로세이가 싫은가 보다?”

“좋진 않습니다. 몸 약한 왕자님을 데리고 바다속으로 들어갔잖아요.”

“아직도 그것 때문에 감정이 쌓인 거야?”

“그것도 있고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어… 그래. 네가 알아서 잘 하겠지.”

공과 사를 구분할줄은 아니까.

슬로세이는 호수에 첨벙거리며 들어갔다. 그녀가 잠수도 할 수 있을 정도의 깊이로 주문했기에 슬로세이는 물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것을 반복했다.

연못 언저리에 팔을 내밀고 꼬리 지느러미를 파닥이는 그 모습은 이제 완벽한 인어였다.

그러나 호수를 만들고 난 뒤 작은 사건사고가 생겼다.

슬로세이는 욕조보다 큰 물에서 헤엄치는 것도 좋아했지만 둥둥 떠다니는 것도 좋아했다.

문제는 그녀가 하늘을 바라보며 물에 떠있는 게 아니라 뒤통수가 보이게 물에 떠다닌다는 것이었다.

인어가 물에 빠질 일은 없겠지만 그 광경을 본 하인이 기겁을 하면서 급하게 카이엔에게 알린 일이 있었다.

주의를 줘도 슬로세이가 낮잠을 자다가 몸을 뒤집기 일쑤라서, 최후의 수단으로 카이엔은 호수 옆에 커다란 팻말을 설치했다.

물에 떠다니는 게 시체가 아니라 인어니까 놀라지 말라는 경고문을 적어놓은 팻말이었다.

하루에도 서너 명은 슬로세이의 그 모습을 보고 기겁을 하니 어쩔 수 없이 써놓은 말이었다. 그 문구의 내용을 보고 그리델라는 배를 잡고 웃었다.

“그래도 이렇게 해놓으면 안 놀라겠다. 왕자님 머리 좋네!”

“하아…”

인어는 저런 식으로 둥둥 떠다닐 수 있구나. 처음 그 모습을 봤을 땐 카이엔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허나 슬로세이는 너무나도 멀쩡히 고개를 들었고 놀라서 달려온 사람들에게 제대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 외에도 슬로세이는 이미 많은 보물들을 가져다줬음에도 밥값을 해야한다며 고집을 부렸다.

인어의 눈물은 진주, 그중에서도 아주 양질의 진주가 되니 선물하겠다며 호숫가에 상반신만 내밀고 양파를 까며 눈물을 흘렸다.

그 기괴한 모습에 카이엔이 아무리 하지 말라고 해도 슬로세이는 꿋꿋히 그녀가 만들어낸 진주 중에서도 흠이 없는 것만 한움큼 카이엔에게 내밀었다.

“크흥-”

“이럴 거면 하지 마.”

“그치만, 돈 많으면 좋은 거잖아.”

“하아…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이거 팔아서 사다줄게.”

“에헤헤.”

어린 아이의 모습이여서 카이엔도 강하게 말할 수 없었다.

프라우디에는 겉은 어린애같아도 속은 의젓했는데 슬로세이는 프라우디에와 정 반대였다.

살아온 세월을 생각해보면 인공 생명체인 호문쿨루스보다 인어인 그녀가 더욱 오래 살았을 텐데.

개성 넘치는 새 식구 때문에 엔베인이 겉도는 것 같아 카이엔은 걱정했다.

다행히 에빌과 글라스가 잘 챙겨주는 듯 했지만 엔베인은 꽤 소심했다.

영주성에 사는 왕자의 손님 중에 인어와 마녀, 다크 엘프가 있다는 사실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자주 모습을 보이는 사트로누스와 소금이, 그리고 애완 늑대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외부인이 오면 더욱 신이 나서 그 이야기를 해주었다.

검은 숲으로 들어가려는 모험가며 용병, 사냥꾼은 끊이지 않았다.

개중에선 고용된 사제도 포함되어있었는데 젊은 사제는 영주성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에 의아해했다.

검은 숲과는 또다른 기운에 그는 여관에서 같이 온 일행에게 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 말했다.

“아~ 여긴 원래 그래! 넌 외국인이니 가르간트에 대해 모르겠구나?”

“네?”

“여기 사는 왕자님이 말야, 몬스터 말을 알아들어! 그래서 그 왕자님이랑 말이 통하는 재밌는 놈들이 같이 저기서 살고 있거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 마을 명문이라니까! 그렇죠?”

동의를 구하듯 일행의 용병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러자 여관의 단골 손님들이 각자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다 말고 화답하며 호응했다.

“물론! 거리까지 나와 산책하고 가는 커다란 만티코어가 있지.”

“그 위에 타고 있는 조그마한 쥐도.”

“그 햄스터가 만티코어를 타고 다닌다니까, 세상에! 가끔은 왕자님 어깨나 머리 위에도 기어오르더군.”

“내 사촌의 조카가 영주성에서 일하는데 거기엔 거대한 육지 말미잘도 있다나봐.”

“뭐? 그건 거짓말 아냐?”

분위기는 금세 떠들썩해졌다.

이곳에 처음 온 사람들은 어리둥절했지만 마을 사람들과 검은 숲에 자주 찾아오는 용병이며 사냥꾼들은 그 대화의 흐름이 아주 익숙했다.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바로 몬스터와 대화하는 왕자였고 그가 세자르에서 산지도 어언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눈을 뗄 수 없는 게 왕자가 몬스터를 데리고 산책을 나오는 일이었다.

저 먼 영주성 일은 그들도 모른다. 허나 마을까지 데려오는 만티코어며 햄스터, 몬스터가 아니라 진짜 늑대라 실망하긴 했지만 어찌됐든 왕자의 애완동물로 자리잡은 늑대는 마을 주민들의 흥미를 끌었다.

그들이 욕을 하는 것도 아니고 왕자님의 칭찬을 하고 그 능력에 대해 떠들어대는거니 잡혀갈 일도 없었다.

초행길인 사람들에게 꼭 왕자가 몬스터를 데리고 산책하는 모습을 봤으면 좋겠다고 하는 말은 이젠 덕담이나 다를 게 없었다.

물론, 카이엔은 그 사실을 몰랐다.

***

엔베인은 조용히 혼자 있는 시간을 즐겼다. 그러다가 심심해지면 나무 조각을 얻어와서 이리 깎고 저리 깎고 다듬으면서 무언가를 만들어냈다.

방에서 작업하다가 답답하면 밖에 나와서 나무를 깎던 그가 만들어낸 조각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음새를 만들어놔서 조립까지 끝낸 다음 엔베인은 그것들을 가지고 카이엔을 찾아갔다. 늘 가는 곳이 정해져있는 카이엔답게 서재로 가자 바로 만날 수 있었다.

“왕자님, 이거…”

엔베인이 카이엔에게 내민건 나무를 깎아만든 소금이의 새 집과 놀이기구였다.

소금이가 들락거릴 수 있도록 충분히 넓게 만든 터널과 미끄럼틀, 쳇바퀴 등등. 단조로운 지금의 소금이 집보다 훨씬 나은 모습에 카이엔은 크게 놀랐다.

“네가 만든 거야?”

“네. 조금 심심해서요.”

“대단하다. 엄청 잘 만들었어. 공간도 넓고… 이정도면 소금이가 살이 더 찐다고 해도 괜찮겠는걸?”

혹시라도 소금이가 도중에 터널에 낄까 봐, 터널의 길이는 짧고 여러 개가 길로 연결된 형식이었다.

중간중간 만들어놓은 이음새로 인해 다른 나무 조각들을 연결해서 길이를 늘릴 수도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카이엔은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당장 가서 소금이에게 보여줘야겠다면서 카이엔이 몸을 일으켰다. 조립한 소금이의 새 집은 바이스가 들고 뒤따라갔고 엔베인도 함께 갔다.

소금이 역시 새 집을 보고 팔짝팔짝 뛰며 좋아했다.

이전의 집은 단순히 자는 곳이었지만 새로 생긴 집은 올라갔다 내려갔다 자유롭게 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데다가 뭐가 많다며, 정말로 좋아했다.

찍찍 소리를 내는 소금이의 말을, 카이엔이 해석해주었다.

“소금이가 정말 고맙대.”

“맘에 든다니 다행이에요.”

“고맙게 잘 쓰겠대. 그런데 자기가 이가 가려우면 막 갉아먹을 수도 있대.”

“괜찮아요. 허술해지면 다시 만들면 되니까요.”

카이엔이 그 말을 다시 전달하자 소금이는 정말로 좋아했다. 카이엔이 엔베인의 손을 잡고 소금이에게 내밀게 하니 소금이는 그 작은 두 손으로 엔베인의 손가락을 잡고 흔들었다.

작은 햄스터라 그 힘은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소금이의 마음이 전해지는데에는 충분했다.

바로 우다다 달려가는 소금이를 보고 카이엔은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엔베인. 난 해준 것도 없는데…”

“아뇨. 절 돌봐주시고 계시잖아요.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요.”

“네가 여기서 잘 지냈으면 좋겠다. 필요한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해. 마검이랑은 잘 지내고 있지?”

“네. 요즘은 별 말도 없어요.”

“조용한 걸 보니 그런 것 같네.”

할 말은 태산같았지만 마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이엔의 칭찬에 눈에 띄게 기뻐하는 엔베인을 보며 마검은 작게 한숨만 쉬었다.

녀석도 나름 전사였는데 여기와서 하는거라곤 얌전히 책이나 읽고 사람들이랑 어울리거나 나무 깎는 일뿐이었다.

이제 소금이의 집도 완성했으니 나무를 깎을 일은 없겠지만 마검은 이 일상이 너무 재미가 없었다.

애초에 파괴를 위해 만들어진 마검이기에, 좀이 쑤셨다.

카이엔과 헤어져 엔베인이 방으로 돌아오자 마검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 너, 그러지 말고 강해지기 위한 수련이라도 해라. 여기서 내 힘을 끌어내면 여기저기 부숴지고 난리가 날 테니 방벽을 넘어 검은 숲으로 가자.

“갑자기 왜?”

- 거긴 엄청 넓으니까 짐 싸서 수련하게 떠나자고! 며칠 다녀오는 건 나쁘지 않잖아.”

“싫어. 여기 있을거야.”

엔베인은 단호하게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마검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손이 달린 것도 아니니 요구 조건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해서 마검이 제 발로 도망갈 일은 없었다. 소리를 지르면 시끄럽긴 하지만 그 정돈 참을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주변인이 점점 늘어나면서 카이엔이 골치아파하니 엔베인은 조용히 카이엔의 뜻에 따라주고 싶었다.

사고치지 않고 조용히 지내는 것 정돈 잘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집안 사람들이 조용하다고 해서 카이엔에게 고난과 시련이 찾아오지 않는 건 아니었다.

콰자작!

요란한 소리를 내며 손에 쥐어진 종이가 구겨졌다.

주변에 있던 사용인들은 모두 고개를 들지 못 하고 눈앞의 주인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긴 은발을 뒤로 쓸어넘기면서 붉은 제복차림의 여성이 신경질적으로 숨을 내쉬었다.

“하! 그래서 아무도 못 말렸다, 이거 아냐?”

으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뒤이어 들렸다. 사용인들은 뚫어져라 바닥만을 응시했다.

구겨진 종이를 휙 던지니 그것은 빨려들어가듯 모닥불 안으로 들어가 땔감의 일부가 되었다.

싸늘한 시선이 모닥불을 향했지만 곧 창문을 향했다.

보름달이 선명한 밤하늘이 유독 밝았다.

“다녀오겠다. 직접 잡아오겠어.”

“허나 가주님.”

“내가 가는게 낫다.”

호통치듯 외친 말에 집사로 보이는 노년의 남성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뱀파이어 일족의 가주 글러티나 모스피아는 철없는 남동생이 남기고 간 편지의 내용을 떠올렸다. 웬 인간에게 도움을 받아서 은혜를 갚고 싶다고 써있긴 하지만 십중팔구 인간들 사는 모습이 재밌어보여서 나간 게 뻔했다.

그녀가 잠시 결계를 손보고 그 너머의 경계를 살피러 먼 길을 떠난 사이에 편지만 두고 훌쩍 떠나버린 못난 놈을 떠올리니 저절로 이마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이번에 잡아오면 다시는 못 돌아다니게 단단히 혼을 내리라. 그렇게 다짐한 그녀는 성을 떠날 채비를 했다.

물론, 멍청한 동생놈이 신세를 지고있는 인간에게도 제대로 사과를 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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