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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왕자는 조용히 살고싶다-36화 (37/219)

-36화

“뭐래는 거야.”

인어왕의 외침에 슬로세이가 툭 하고 내뱉듯 말했다.

그녀는 한숨을 푹 쉬곤 카이엔의 팔에 팔짱을 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런 거 아냐! 얘가 나 구해줬어. 그러니까 보상 줄래!”

“뭐…?”

“나 납치됐었어. 그리델라가 나 구하려고 애 쓰던 와중에 인간 왕자가 구해준다고 해서 나 도와줬거든. 그래서 여기까지 데려왔어요.”

“그게 무슨…”

“어, 그게 사실이긴 해요. 인어에 대한 소문이 퍼져서 나쁜 놈들이 슬로세이를 잡아갔거든요.”

도중에 그리델라가 슬쩍 끼어들었다.

인어왕은 그 말에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는 단순히, 막내딸이 또다시 호기심이 도져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느라 집을 비운 줄 알았다.

이번에는 꽤 오래 돌아오지 않기에 오기만 하면 크게 혼을 낼 생각이었는데 납치를 당했다니.

게다가 인간 왕자가 도와줬다고 한다. 전설로 전해져내려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것과는 조금 달랐지만 아무튼 인어왕은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충분히 알겠다.”

“다행이다~ 내가 괜찮다고 했지? 그치?”

“어… 그래. 알아줬으니 됐어. 그러니까 나 이제 집에 갈래.”

“응. 보석만 챙겨주고 보내줄게.”

자기 보물도 아니면서 슬로세이는 당당하게 인어왕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빠. 보상.”

“허어어…”

인어왕 페레우스는 아직도 철없는 막내딸의 행동에 한숨을 푹 쉬었다.

하지만 옆의 인간도 얼이 빠져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의 딸의 고집 때문에 억지로 바닷속으로 온 모양이었다. 방금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집에 간다고.

그는 카이엔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내 딸을 구해줘서 정말 고맙네.”

“어… 아뇨. 일단 저는 한 게 없는데요. 다른 사람들이 다 해줬지…”

“에이, 왕자님이 돕겠다고 해서 다들 도와준 거지!”

“맞아. 왕자라며.”

어째서 왕자를 강조하는 걸까.

나쁜 인간도 있지만 왕족이자 권력자인 왕자는 그렇지 않으니 참작을 해주라는 의도에서일까.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카이엔이었지만 두 사람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인어왕의 명령으로 신하들이 무거운 궤짝 두 개를 짊어지고 와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안엔 금화와 진주, 산호 등 보물이 꽉 차있었다.

금화나 보물의 경우는 난파선에 있던걸 가져온 걸 테고 진주와 산호는 바닷속에서 구할 수 있는 귀중품이었는데 귀한 것인건 둘째치고 이걸 다 가지고 갈 수 있을 리 없었다.

보상을 바라고 도운 게 아니라 카이엔은 손사래를 치며 보물을 거절했다.

“필요없어요. 그리고, 들고가지도 못 해요.”

“바깥에 사람들 있잖아!”

“못 옮겨!”

“치잇…”

“그럼 여기서 가장 값진 것만이라도 골라주겠네.”

그리 말하고 인어왕은 궤짝의 절반 크기의 상자에 갖가지 진주와 산호, 보석등을 담아주었다.

“인간 왕자가 인어를 도와주다니. 이곳 인어들을 대표해 고맙다고 말하고 싶네.”

“당연한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저보단 그리델라가 더 고생했죠. 팔자에도 없는 괴도 노릇도 하고…”

“엥? 괴도?”

“그리델라에게 들어.”

“으헙, 왕자님 나 숨 참기 힘들어. 얼른 지상으로 가자!”

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는지 방금까지 잘 있던 그리델라가 팔을 휘저으면서 외쳤다.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에 인어왕도 긴말하지않고 그들을 놓아주었다.

배웅하고 오겠다는 슬로세이에게 조심히 돌아오라며 단단히 당부하며 그가 말했다.

“다음에 또 오게나. 귀빈으로 대접할 테니까.”

“아 네…”

다시 올 일은 없을 거다.

바닷속에서 숨을 쉴 수 없는 인간의 특성상 오래 있을 수 없기에 그들은 다시 물 위로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보단 올라가는 것이 더 쉽다면서 슬로세이는 한 손으론 카이엔의 손을, 다른 손으로는 그리델라의 손을 잡고 지느러미에 힘을 주더니 엄청난 속도로 헤엄쳐서 위로 올라갔다. 그녀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그리델라와 카이엔도 다리를 열심히 움직이며 물장구를 쳤다.

“푸핫!”

물 위로 떠오른 카이엔이 콜록거리며 기침을 했다.

바닷속에 있을 땐 몰랐지만 물 위로 나오고 나니 입 안 가득 짠 맛이 맴돌았다.

그리델라도 마찬가지인 모양인지 열심히 기침을 하고 있었다.

멀쩡한건 슬로세이 뿐이었는데 그녀는 고개를 내밀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다시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카이엔과 그리델라를 발이 닿는 깊이까지 데려다주고 나서 그녀가 말했다.

“자, 나는 여기까지. 저쪽으로 쭉 가면 돼. 보이지?”

“어, 보이네.”

“잘 가. 고마웠어, 왕자님.”

“왕자… 하… 아니다.”

슬로세이에게 깊은 사정을 설명해줄 시간이 없었다. 카이엔은 푹 젖은 꼴로 계속 물속에 있는 것이 점점 추워져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첨벙,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고 두 사람은 조심히 걸어서 물 밖으로 나왔다. 젖어서 딱 달라붙은 옷과 물기를 잔뜩 먹은 머리카락을 계속 짜내면서 모래사장에 발을 디디니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행이 바로 수건을 내밀었다.

“이런. 굉장히 많이 젖으셨습니다. 감기에 걸리실지도 모르겠어요.”

“지금은 괜찮아.”

“일단 오늘은 여관을 잡아야겠습니다. 그리델라 님은 어떻게 하실 거죠?”

“음? 아, 나는 이제 내 갈 길 가려고. 도와줘서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다음에 또 만날 일이 있으면 좋겠네.”

“많이 젖었는데… 괜찮겠어?”

자네인의 걱정에 그리델라는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이래 봬도 마녀라, 끄떡없어!”

“그럼 우린 먼저 가볼게. 너도 조심해.”

“당연하지. 잘 가-”

밝게 웃으며 그녀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근처의 마차로 가기 위해 카이엔은 수건으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붙잡고 걸어갔다. 그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물 때문에 발자국이 찍혔다.

으슬으슬 떨리는 몸을 보고 바이스가 카이엔의 뺨에 자신의 손등을 가져다댔다.

“이런. 서둘러 갑시다.”

“으으…”

물 밖으로 나오니 바람 때문인지 빠른 속도로 체온이 떨어지고 있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인어구나. 슬로세이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리는 없지만 바이스는 한숨을 쉬었다.

카이엔이 감기라도 걸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바이스는 카이엔이 마차에 오르자 바로 그 안에 있던 외투며 망토를 걸쳐주었다. 바닷물에 젖겠지만 세탁을 하면 나아질 테니, 일단 몸에 뭐라도 둘러줘야 했다.

***

다행히 바이스의 걱정대로 카이엔이 감기에 걸리는 일은 없었다.

여관을 잡자마자 따뜻한 물에 목욕부터 시키고 두꺼운 이불을 덮고 누워있게 한 덕분이었다.

갈레투아에서 하루를 보낸 뒤 그들은 다시 세자르로 돌아갔다. 다행히 이번 외출에선 아무것도 주워오지 않았다며 카이엔은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역시 이상한 일이 줄지어 일어나니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여긴건 착각에 불과했다.

슬로세이는 무사히 자기 집으로 돌아갔고 그리델라도 제 집으로 가지 않았는가.

그렇게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에 마음을 놓을 무렵, 영주성에 손님이 찾아왔고 그들은 카이엔이 익히 아는 얼굴들이었다.

“너희…”

“안녕, 왕자님!”

그리델라의 손을 잡고 온 슬로세이가 해맑게 인사했다.

후드를 눌러써 귀의 지느러미를 가리고 있던 슬로세이는 카이엔의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후드를 벗었다. 함께 온 그리델라는 차마 카이엔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그… 미안. 어쩌다보니 이렇게 됐네.”

“바다로 돌아간 거 아니었어? 물 위가 위험하단 건 너도 알잖아.”

“아니까 왔어. 인간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서. 그리고 허락도 받았어!”

아버지인 인어왕에게 바깥으로 나가도 좋다고 허락까지 받고 왔다면서 슬로세이는 당당히 말했다.

그러나 카이엔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 찼다. 이번엔 아무도 안 주워왔는데, 당당히 제 발로 영주성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델라야 슬로세이가 고집부리니 어쩔 수 없이 같이 온걸 테고.

눈앞이 깜깜해져서 카이엔은 한숨을 푹 쉬었다.

“점점 늘어나는데… 안 되는데…”

“으음, 나 유학하는 셈치고 온거라 돈도 많이 가져왔어.”

“그 문제가 아냐. 내 위치는 굉장히 위태로워. 호칭만 왕자일뿐이고.”

“상관없어. 얌전히 있을게.”

“그게 문제가 아니야.”

마른 세수를 하며 카이엔은 깊은 탄식을 흘렸다.

새 식구로 찾아온 게 인어와 마녀라니.

몬스터의 뒤를 이어 이번엔 이종족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었다. 물론 저택 사람들은 신경쓰지 않을거다. 신기하네, 라고 여기고 그냥 넘어가겠지. 여긴 그런 곳이었으니 말이다.

남작도 놀라긴 하겠지만 그를 찾아온 손님을 쫓아내지 않을 것이다.

“어쩌지…”

갈레투아에서 세자르까진 거리가 꽤 있었다. 여기까지 함께 오는데에 굉장히 많은 고생을 했을텐데도 슬로세이는 해맑기 그지 없었다.

이 대책없는 어린 인어 공주를 이대로 바다에 돌려보낼 수도 없어서 카이엔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공부하다 가라. 언제든지 돌아가고 싶으면 말하고.”

“응! 고마워!”

허락이 떨어지자 슬로세이는 쪼르르 달려가서 카이엔을 끌어안았다. 아직 어린아이라 그런지 남한테 스스럼없이 달라붙는 모양이다.

카이엔은 가만히 있었는데 제지를 한 건 바이스였다. 바이스는 슬로세이를 떼어내며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함부로 왕자님께 달라붙지 마십시오.”

“에에?”

“안 됩니다.”

“으응… 왕자님 혹시 아내가 있는 거야?”

“그건 아닌데.”

“그럼 괜찮지 않아?”

“괜찮지 않습니다.”

딱 잘라 단호하게 대꾸한 바이스는 슬로세이를 요주의 인물로 취급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카이엔에게 달라붙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지만 슬로세이는 처음부터 카이엔에게 묘한 호감을 보이고 있으니, 그가 잘 감시해야 했다.

글라스를 시켜서 두 사람에게 묵을 방을 안내해주게 시키고 나서 바이스는 조용히 카이엔에게 말했다.

“왕자님이 어린 아이를 좋아할 리는 없지만 제가 잘 주시하겠습니다.”

“어… 그래.”

“왕자님 취향은 저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내 취향? 나도 모르는 걸 네가 어떻게 알아?”

“키 크고 검도 잘 쓰고 강한 사람 아닙니까?”

“그런가?”

이전에 카이엔이 보였던 모습을 아는지라 바이스는 술술 대답했지만 카이엔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조차 모르는 그 모습에 바이스는 눈물을 닦는 시늉까지 했다. 역시 아직 왕자님에겐 그가 꼭 필요했다.

역시나 새로온 식구들을 다른 몬스터들에게 소개시켜주는, 늘 있던 일이 반복되었다.

릴리시아조차 이번엔 새로 온 사람들이 많다며 촉수를 흔들었고 사트로누스는 관심없이 하품만 했다.

아예 그들이 사는 건물을 따로 마련해주면 어떠냐는 남작의 물음에 카이엔은 여건이 된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면서 함께 공사 예산에 대해 이야기하며 머리를 짜냈다.

그리델라는 괴도로 등장해서 훔쳐갔던 보석들을 어떻게 처분할지 몰라서 인어왕에게 몽땅 선물로 줬다고 했다. 귀중품을 도둑맞은 사람들에겐 미안하지만 돌려줄 방법이 없어서였다.

그 말에 카이엔은 바이스를 쳐다보았고 바이스는 괜찮다며 웃었다.

“어차피 약혼 반지에, 지금쯤이면 파혼했을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파혼 안 했다면 제가 나서서 파혼하겠습니다.”

“…가만히 있어.”

남의 인생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카이엔은 바이스가 고작 그런 이유로 파혼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도난당한 물건들은 바닷속에서 수십 년 수백 년의 시간을 보내며 물 위로 나올 일이 없을 것이다.

그 보석들과 맞바꿔서 그리델라는 금화를 잔뜩 얻어온 건지 카이엔에게 잘 부탁한다면서 그 금화들을 내밀었다.

신세지는 입장이지만 그래도 돈은 내고 싶다는 뜻이었다.

“나야 집이 있긴한데 원래 떠돌아다녔고… 짐도 잔뜩 챙겨와서 이제 다 정리했거든요. 이제 신세지는 입장이니 예의를 차릴게요. 잘 부탁드려요 왕자님.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말해주세요. 저는 수십 수갈래로 뻗어있는 마녀의 피를 이은 자들 중 바람의 마력을 타고난 마녀, 그리델라 아우레우스라고 합니다.”

“마녀도 계파가 많나?”

“네. 무지 많지만 다들 숨어살고 떠돌이라 만날 일은 없을 거예요.”

“그렇군.”

“어? 나도, 나도! 슬로세이 스네이지! 바닷속 인어왕국의 인어왕 페레우스 스네이지의 자식 중 막내야.”

“너에 대해선 대충 알아. 가서 봤잖아.”

“그런가?”

“아무튼, 난 조용히 지내고 싶으니까 너희도 소란만 안 피우면 돼.”

“응!”

문제없다며 슬로세이는 단칼에 대답했다.

귀 대신 달린 지느러미 말고는 인간과 전혀 다를 것 없는 그녀는 물속에서만 인어의 모습으로 바뀐다고 하였다. 저 모습만 봐서는 그 누구도 그녀를 인어라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 카이엔은 한시름 놓기로 했다.

저택 안은 안전할 테고 밖에 나가고 싶다고 하면 다른 이를 옆에 붙여두면 그만이었다.

그날 밤, 바이스는 순찰을 돌고 있었다. 물론 성에 고용된 기사와 경비병이 따로 있었지만 카이엔의 안전을 위해 개인적으로 바깥이며 영주성 안을 순찰하는 것이었다.

그런 그의 앞에 그리델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마치 별처럼 반짝였다.

“뭡니까.”

그녀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던 건지 바이스는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물었다.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그리델라는 조용히 바이스에게 목걸이를 건넸다.

수많은 보물을 인어왕에게 넘겼지만 그녀는 그 목걸이만은 가지고 돌아왔다.

은으로 만들어진 로켓 목걸이에는 정교한 문양이 새겨져있었다.

“당신의 정체는 대체 뭐야? 스파이?”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닙니다.”

“말하진 않을게. 그치만, 도와준 건 고마워도 난 왕자님 편 할 거니깐.”

“저도 마찬가지예요. 제게도 카이엔 님뿐이랍니다.”

웃으면서 바이스는 그리델라가 내민 목걸이를 받아 품 속에 집어넣었다.

그 보석들, 귀중품들에 비하면 볼품없는 형태였지만 깃든 의미는 남달랐던 목걸이. 그리델라는 그것을 주인을 알고 있었다.

몰래 밤에 전달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잘 지내고 있는 카이엔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더 할 말이 없었기에 그리델라는 돌아갔고 바이스는 목걸이를 집어넣은 상의의 가슴 주머니 위에 말없이 손을 올렸다.

잃어버려도 상관없는 물건이긴 했지만 그의 손으로 다시 돌아오다니.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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