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뜬금없는 그 외침만 아니었더라도 덜 당황했으리라.
파티장의 모두는 갑자기 꺼진 불에 한 번, 샹들리에 위에 서있는 사람에 한 번, 그 사람이 외치는 소리에 한 번, 총 세 번 당황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린 사람들을 놀리듯 자칭 괴도는 몸을 날려서 샹들리에의 위에서 점프,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파티장의 창문을 깨고 도주했다.
그제야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고 도둑이 들어왔다며 외쳤다. 괴도가 도망치자 파티장의 불빛이 하나둘 켜졌고 그들은 보석들이 사라졌다는 걸 눈치챘다.
“내, 내 목걸이!”
“내 반지가아-!”
그 와중에 평온한 건 카이엔 뿐이었다.
애초에 값진 걸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만, 어떤 미친놈인지는 모르겠는데 대체 누가 대놓고 괴도라고 외치고 도망간 건지 모르겠다며 의아해했다.
보물만 조용히 훔쳐서 달아난 게 아니라 일부러 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은 가면으로 가리고 있었지만 백금발에 여성이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현상수배를 할 수 있었다.
소란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바깥 마차며 시종들도 모조리 털렸습니다!”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바이스가 있었다.
불이 켜지자마자 밖으로 달려나갔던 바이스가 파티장 안을 향해 외친 것이었다.
그 말에 귀족들은 너나할 것도 없이 밖으로 달려나가 마차를 살폈다.
시종들 역시 파티장 안에 갑자기 불이 확 나간 것과 동시에 바깥 조명 역시 꺼졌기에 우왕좌왕하다가 도둑질을 당한 모양이었다.
인파에 치이지 않게 한참 뒤에야 나온 카이엔은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리던 에빌과 만났다.
에빌 역시 귀중품은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도둑맞은 건 없었지만 착잡한 눈으로 다른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이… 왕자님은 괜찮으세요?”
“들고온 게 딱히 없어서 괜찮아.”
“저도 그렇긴 한데…”
듣는 귀가 있기에 에빌은 잽싸게 호칭을 수정했다.
바이스는 유심히 주변인들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그 소란에 바이스가 가장 먼저 바깥을 확인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카이엔이 물었다.
“넌 뭐 잃어버린 거 있어?”
“그…”
“있나 보네.”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는 걸 보니 있긴 있었나보다.
왕자가 아닌 시종이 털리다니 대체 뭘 가지고 있었던 거람. 그게 아니라면 괴도가 아무거나 털어갔을 수도 있었다.
딱 봐도 비싼 보석을 도둑맞지 않은 사람도 있었고 회중시계나 보석이 장식된 담배갑이 사라진 사람도 있었으니까.
카이엔은 한숨을 푹 쉬었다.
“잡을 수 있을까? 잡으러 가자!”
“네?”
“글라스. 마법으로 도둑을 추적할 수 있으면 해줄래? 세자르 남작, 난 도둑을 쫓겠다.”
“왕자님?”
“금방 올게. 바이스, 마구간 위치 알아?”
“이쪽입니다.”
“가자.”
잃어버린 게 있으니 손놓고 있을 수 만은 없었다.
에빌이 새장의 문을 열자 글라스가 파닥거리며 빠져나와 밤하늘을 날아갔고 세 사람은 함께 마구간에 가서 마차를 끌고왔던 말에 올랐다.
정작 바이스는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카이엔은 캐묻지 않았다. 쉽게 말 못하는 거 보니 부모님 유품이라든가 추억이 담긴 물건이라 그런 걸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글라스의 신호는 텔레파시처럼 카이엔에게 닿았다. 다행히 괴도는 멀리 가지 못한 모양이었다.
- 찾았어요! 챙 넓은 모자에 빗자루를 타고…
“빗자루?”
갑자기 왠 빗자루?
빗자루를 타고 난다고?
애들 동화에서나 나오는 마녀가 떠올라 카이엔은 인상을 찌푸렸다.
글라스가 알려준 방향대로 세 사람은 말을 타고 추적했지만 하늘을 올려다봐도 보이는 게 없었다.
말을 타고 가는 것보다 괴도가 빗자루를 타고 날아가는 속도가 훨씬 빠른 모양이었다.
글라스는 추적을 하면서 열심히 카이엔에게 괴도에 대한 정보를 읊어주었지만 갑자기 그 목소리가 뚝 끊기고 말았다.
‘자, 잡혔나…?’
괴도도 바보가 아닐 테니 웬 박쥐가 자기를 계속 쫓아온다면 눈치채고 후려치거나 붙잡았을 게 뻔하다.
목소리가 들리지않는 걸로 봐선 기절이라도 한 모양인데. 카이엔은 달리는 것을 멈추고 말을 진정시켰다. 카이엔이 멈추자 에빌과 바이스도 달리는 걸 멈췄다.
“왕자님?”
“왜 그래?”
“아무래도 글라스가 잡힌 것 같아…”
“엥? 그럼 이제 어쩌지?”
“밤이라 더 움직이기도 어렵군요.”
사위를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어두운 밤이었다.
글라스야 박쥐로 변해서 넓어진 감각으로 괴도를 발견했을 테지만 인간인 그들에겐 무리였다.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무작정 말을 타고 달려나왔기에 그들은 발을 돌렸다. 일단 돌아가서, 장비부터 점검해야 했다.
글라스가 무사하다면 다시 연락을 할 테니 그걸 믿을 수 밖에 없었다.
‘미안해…’
괜히 도둑 잡겠다고 나서서 글라스만 위험에 처해버렸다.
***
- 끄으응…
앓는 소리를 내며 글라스는 게슴츠레하게 눈을 떴다.
살짝 열린 시야 너머로 보이는건 낡은 오두막집의 내부였다. 천장에 약초같은 게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건 프라우디에의 연구실과 같았지만 느낌이 달랐다.
모닥불이 타들어가는 소리. 그리고 무언가 박쥐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별을 박아놓은 것 같은 푸른 눈동자를 가진 마녀가 박쥐를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흐으음~”
그녀에게 있어서는 끈질기게 뒤를 쫓아온 이 박쥐가 정말 신기했다.
누군가의 사역마라고 하기엔 그런 끈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씨익 웃으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얘를 말려서 보관할까 끓여서 보관할까 절여서 병에 넣어둘까~”
“끄아악!”
“오오. 말하네?”
“전 박쥐가 아니에요!”
“뭐래. 딱 봐도 박쥐잖아. 말하는 박쥐! 너 누구 사역마구나? 주인이 누구니?”
쾌활하게 묻는 마녀를 보며 글라스는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인간의 모습이 되었다.
충분히 놀랄만한 일임에도 마녀는 깔깔 웃기만 했다.
참 성격 이상한 사람이라며 글라스가 외쳤다.
“도둑 잡으러 왔습니다! 무슨 문제 있어요?”
“푸하하핫! 그 도둑한테 잡힌 박쥐주제에! 너 뱀파이어야? 와, 나 뱀파이어는- 아, 처음본 건 아니구 예전에 약장수 할 때 만난 적 있어!”
양손으로 그를 가리키면서 마녀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또 웃기 시작했다.
웃음 포인트를 알 수 없는 마녀를 빤히 쳐다보며 글라스는 한숨을 푹 쉬었다.
죽이지않고 살려준 건 고마운 일이었지만 감성을 알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이어지던 웃음소리가 조금 잠잠해지자 글라스는 다시 한 번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왜 도둑질은 한 거예요? 그, 제 직장 동료분도 무언가를 도둑맞았는데 그것만 돌려주시면 안될까요?”
“안 돼. 그게 뭔데?”
“어… 그건 몰라요.”
“뭐야. 모르면 더 못 주지. 내가 이번에 털어온 거 보여줄까?”
그렇게 말하며 마녀는 옆에 있던 작은 보따리를 풀었다.
바닥에 깔아놓은 담요 위로 보따리의 내용물을 쏟아내자 그 안에서 목걸이며 반지, 머리장식, 팔찌, 지팡이 등등 별의별 것이 쏟아져나왔다.
귀중품으로 보이지 않는 안경같은 것도 있었는데 마녀는 손으로 대충 물건들을 훑으며 말했다.
“나라고 해서 이것들이 다 필요하진 않아. 아, 내 이름은 그리델라야. 넌?”
“글라스예요. 그런데 왜 도둑질을 하는 거예요? 괴도같은 이상한 소리나 하고 정체도 드러내고…”
“찾는게 있어서 그래. 그런데 영 찾기 어렵네. 아, 이거 괜찮겠다!”
탄성과 함께 그녀가 보석들 틈에서 꺼낸 건 작은 로켓 목걸이었다.
귀족가의 문양이 새겨진 그 목걸이를 글라스에게 보여주면서 그리델라가 말했다.
“이게 뭔지 알아?”
“몰라요.”
“뭐야. 너 아까 그 파티장에 있던 거 아니었어? 귀족가문들 문양도 몰라? 마녀인 나도 아는 건데.”
“그, 그런 건 아직 안 배웠는데…”
“한심해. 으음, 난 가르간트에서 열리는 비밀 경매에 참여할 수 있는 신분증을 원해. 그래서 파티장을 털면서 유명한 집안의 상징을 모으고 있어. 그걸 가지고 가면 귀족인 줄 알고 통과시켜줄 거 아냐.”
그리델라는 그렇게 말하며 로켓 목걸이를 열었다. 안은 텅 비어있었고 주인의 이름조차 적혀있지 않았다.
다시 목걸이를 닫고 그녀가 글라스에게 말했다.
“이건 바이올로스 후작가의 문양이 새겨져있어. 네 동료의 물건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만 아니라면 좋아. 난 그 경매에 무조건 참여해야 하니까.”
“마녀인 당신이 꼭 가야 할 이유가 있나요?”
“응. 있어. 거기 내 친구가 납치되어서 잡혀갔거든.”
“네? 마녀를요?”
“걔는 마녀 아냐. 좀 특이한… 인어지.”
상대방이 인간이 아니라 뱀파이어란걸 알게 되어서인지, 그리델라는 글라스를 경계하지 않았다.
쓸모없는 보석들을 한쪽으로 쓱 밀어놓고 그녀는 주름진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풀었다.
팔짱을 끼니 저절로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리델라의 눈꼬리가 아래로 축 처지더니 그녀는 맞지도 않는 괴도 노릇을 한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 애, 바다 위로 자주 모습을 드러내곤 했거든. 나랑도 그러다가 친해졌어. 그러다가 재수없게 인간들한테 잡히고 만 거야. 경매장에 숨어들어가서 깽판치고 걔 데리고 도망칠 거야.”
“그런 거라면 저희 왕자님이 도와주실 수 있을지도 몰라요. 폐세자지만…”
“폐세자? 아아, 말 많은 그 왕자님이구나?”
“저희 왕자님에 대해 아세요?”
“이야기는 조금 들어봤지. 도와줄 수 있다는 말은 사실이야?”
“일단 여쭤보는 게 우선이지만요…”
“그럼 내가 직접 찾아갈게.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
“네.”
그리델라와 약속을 한 후 글라스는 오두막 밖으로 나왔다.
어느 쪽으로 가야 에디트 남작령이 나오는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그에게 그리델라가 방향을 알려주었다.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니 이쪽을 쭉 가면 된다는 말에 글라스는 고개 숙여 인사하고 이번에는 박쥐로 변하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하늘을 날아갔다.
밤새 비행을 계속한 글라스는 아침 무렵이 되어서야 에디트 남작령에 도착했다.
근처에서 박쥐로 모습을 바꾸고 카이엔이 쓰는 방을 애써서 기억해내 창문을 두드리니 마침 깨어있었던 카이엔이 창문을 열어주었다.
“글라스! 무사해?”
- 일단은요…”
“미안. 괜히 나 때문에…”
- 아녜요. 문제 없었어요. 일단 그 괴도가 왜 도둑질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듣고 왔고요.
“무슨 사정이 있었나 보네.단순히 돈이 없어서 그랬을 리는 없을 테고.”
- 네. 그게 실은…
글라스는 그리델라에게 들은 이야기를 카이엔에게 전달했다.
납치되어 경매장으로 팔려간 인어 친구를 구하기 위해, 경매장에 잠입할 수 있는 신분을 증명할 물건들을 찾고있다는 말을 이해하는 카이엔이었지만 한 귀족가의 이름이 언급되자 단숨에 얼굴을 찌푸렸다.
- 어? 아시는 곳이세요?
카이엔이 귀족 가문에 관심을 둘만한 성격이 아닌 것을 잘 아는지라 글라스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 물음에 카이엔은 구긴 인상을 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알다마다. 바이올로스 후작가는 현 왕비의 가문이니까. 그런데 왜 그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목걸이 같은 게 북부 모임에 있었던 거지? 첩자라도 있었나?”
- 헉…
“이런걸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귀찮아졌다고 해야하나.”
카이엔은 한숨을 쉬었다.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목걸이를 아무나 들고 다닐 리도 없으니 그 모임에 그 가문의 입김이 닿은 사람이 있는 게 분명했다.
누가 감히 바이올로스 후작가를 사칭한다는 말인가. 저절로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바이스가 방으로 들어왔다.
“왕자님, 가실 준비가 다 되셨습니다. 음? 글라스 씨도 돌아오셨군요.”
“네.”
“바이스. 너 어제 뭘 잃어버렸던 거야?”
“아아- 반지입니다. 북부로 오기 전 약혼자와 나눠가졌던 반지죠. 어차피 형식적인 거라 그냥 가지고만 있었습니다. 제가 돌아오지 않으니 아마 파혼됐을 걸요?”
별거 아니라며 바이스는 웃었다.
“워낙 오랫동안 가지고 다닌 거라 살짝 당황하긴 했는데 찾지 않아도 될 정도입니다. 아, 글라스 씨는 도둑을 잡으셨나요?”
“그게-”
“사정이 기니 세자르로 돌아가서 말하자. 글라스 너도 새장으로 들어가. 마차 준비가 끝난 모양이야.”
“네.”
글라스는 얌전히 새장 안으로 들어갔고 카이엔은 새장을 천으로 감싸 빛을 막았다.
밤새 날았을 글라스가 좀 더 잘 수 있게끔 해주는 배려였다.
조금 자고 일어난 다음에 글라스는 세자르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모두에게 마녀인 그리델라와 만난 이야기를 해주었다.
다행히 그가 뱀파이어였기에 마찬가지로 이종족, 소수에 속하는 그녀가 이야기를 해준 것 같다고도 덧붙였다.
인어며 비밀 경매장의 이야기가 나오자 에빌이 인상을 찌푸렸다.
“와… 난 그런 건 괴담인줄 알았는데, 정말 이종족을 사고 파는 거야? 납치해서? 그런 게 가르간트에 있었다니 세상에!”
“찾아보면 다른 나라에도 있을 겁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까요.”
“직접 찾아온다고 해서 일단 세자르로 오라고 했어요. 죄송해요.”
“아냐. 나도 직접 얼굴 보고 이야기하는 게 편해. 그런 곳이 정말로 있다면 없애버려야 하고.”
문제는 그가 힘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델라는 난리를 쳐서 그 틈에 친구를 빼내려고 했으니 그들 역시 비슷한 계획을 짜야할 텐데.
아마 세자르 남작도 그쪽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를 테니 알아서 정보를 모아야 했다.
“그건 제가 하도록 하죠. 경매장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쉽게 찾을 수 없을 텐데.”
“누가 물어보면 왕자님께 귀한 몬스터를 사다주고 싶은 충심이라고 하죠.”
“으음…”
“왕자님이 몬스터에게 둘러싸여 육아일기 쓰느라 바쁜 하루하루를 보낸다고 하면 왕자님의 적들도 넙죽 정보를 갖다바치지 않을까요?”
“괴상한 농담이네.”
물론 바이스도 웃자고 한 말이겠지만 카이엔은 전혀 웃지 못했다.
키우랍시고 정말로 몬스터 새끼들을 한아름 안겨준다면 그는 그 몬스터들을 키우게 될 테니까. 정말 무서운 농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