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파티는 저녁에 있었다.
그전까지 카이엔은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산책이라도 하러 다닐 법 했는데 바이스의 제안에 카이엔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다니면 다들 불편해할 거 아냐.”
다른 귀족들도 비슷한 거 아니냐며 카이엔이 대꾸했다.
그러나 방에 있다고 해서 내내 쉰 것도 아니었다. 바이스가 파티 때 어떤 머리모양이 좋을지 모르겠다면서 이것저것 실험해봤기 때문이다.
대충 하라는 말도 통하지 않았고 에빌과 방 안이라 박쥐에서 사람으로 모습을 바꾼 글라스도 합심해서 바이스가 가져온 악세사리며 머리 장식들을 유심히 관찰하며 어떤 게 카이엔에게 잘 어울릴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보통 이런 자리에서 귀족들은 인맥을 쌓고 사교를 하며 운이 좋으면 미래를 함께할 반려자를 얻기도 하지만 카이엔에겐 하등 상관없는 일이었다.
세상 어떤 귀족이 미쳤다고 힘 잃고 쫓겨난 왕자에게 귀한 딸을 시집보내려 한다는 말인가. 까딱 잘못하면 없던 죄 같이 뒤집어쓰고 죽을지도 모르는데.
“하아…”
어차피 말해봤자 듣지도 않을 터. 카이엔은 얌전히 의자에 앉아서 세 사람이 그의 머리에 리본이며 장식을 가져다 대보는 것을 내버려뒀다.
“왕자님한테는 역시 강한 색이 어울리셔요. 준비해온 옷도 검은색에 적색이니 역시 붉은 보석으로…”
“더 강렬한 건 없어요? 머리카락이 까만색이라 무슨 색이던지 다 어울릴 것 같은데.”
“돌아가면 좀 더 많은 장신구를 수집해야겠습니다.”
왜 아쉬워하는 건데.
카이엔이 가지고 있는 악세사리가 적다는 것에 바이스는 진심으로 분해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분하면 눈물이라도 떨굴 기세였다.
결국 카이엔은 한마디 하고 말았다.
“대충해. 이게 뭐가 대수라고…”
“무슨 말이야! 카이엔 너 파티에 한번도 참석해본 적 없다면서!”
“응? 맞는 말이긴 한데 그게 왜?”
“이런 건 첫 인상이 중요한 거야. 네가 엄청 멋지게 하고 나와야 다들 입을 쩍 벌리고 너만 볼 거 아냐? 큽, 그 모습을 볼 수 없다니…”
에빌은 뭐가 그리 분하고 원통한지 주먹쥔 손으로 가슴을 퍽퍽 치고 있었다.
에빌이 유난떠는 건 옛날부터 그랬던 거라 그러려니 하고 넘기려니 옆에 선 글라스도 동의한다는 듯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얘네 뭐야.
친하게 지내더니 성향이 비슷해진 모양이다.
엔베인도 저렇게 되면 안되는데.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해야 하나?
카이엔이 그런 고민을 하고 있으니 바이스가 부드럽게 그의 머리카락을 감싸쥐며 말했다.
“일단 하나로 땋고 장식하기로 했습니다. 서둘러 준비하죠. 주접 떠느라 시간을 너무 낭비했습니다.”
“주접이라는 건 알고 있었구나.”
“왕자님에 대한 건데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죠.”
멀쩡한 얼굴로 헛소리 하는 건 바이스가 제일이었다.
바이스가 카이엔의 머리손질을 시작하자 에빌과 글라스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일찌감치 예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던 터라 카이엔은 힐끗 시계를 쳐다보았다. 지금부터 준비해도 늦지 않았다.
풍성한 검은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땋은 다음 바이스는 머리카락 끝을 리본으로 고정시켰다. 그 위에 작은 보석이 붙은 장식을 덧붙이고 삐져나온 머리카락이 없게끔 정돈했다.
그러나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가방에서 꺼낸 건 귀부인이나 영애들이 쓸 법한 화장 도구였다.
“…그걸로 뭘하게?”
“그곳에서 제일가는 미남으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왕자님은 본판도 훌륭하시니 이것들이 있다면 더 훌륭해지시겠죠.”
“야…”
“금방 끝납니다.”
“너 대체 이런 건 어디서 배워오는 거야?”
“목 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법이죠.”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파티가 뭐길래.
계속 말했다간 입에 분가루가 들어갈까 봐 카이엔은 꾹 참고 바이스가 그의 얼굴에 이것저것 바르는 것을 내버려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이스가 그의 얼굴에 장난질을 할 사람도 아니었고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는 게 그의 신상에 이로웠다.
화장이 끝나고 나서 거울을 봤지만 달라진 점은 크게 없었다. 바이스 역시 흠,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담당자를 붙이는 게 나을 듯합니다.”
“필요없어.”
그런식으로 주고 받으며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되었다.
밖에서 노크하는 소리에 에빌이 문을 열어주었고 세자르 남작이 왔다는 사실에 카이엔은 몸을 일으켰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모습에 세자르 남작이 웃으며 말했다.
“아주 멋지십니다, 왕자님.”
“다들 호들갑 떠는 것 같은데.”
“왕자님께는 첫 파티가 아니십니까. 다들 고만고만한 귀족들이니 괜찮을 겁니다.”
“설마, 회의 뿐만이 아니라 파티에도 와보라는 뜻에서 같이 가자고 한 거였어?”
“허허.”
남작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의도는 명백했다.
나쁜건 아니었기에 카이엔은 고개만 저을 뿐 남작을 혼내지 않았다.
파티라는건, 어렸을 적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그때의 그는 아주 어렸기에 부모님의 옆에서 떨어진 적도 없었고 넓은 파티장을 구경만 했을 뿐이지만 지금은 어떨까. 지금도 옛날과 크게 다른 점은 없으리라 믿었다.
‘나한테 말을 걸 용기가 있는 녀석도 없을 테고.’
아무것도 모르는 얼뜨기라면 모를까.
허나 어제 그를 만난 귀족들이 그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다른 귀족들에게도 경고하듯 알렸을 테니 몸조심을 할 게 뻔했다.
그는 그저 그 안에서 시간을 보내다 잘 시간이 되면 빠져나오면 그만이었다.
파티의 규모는 작았다.
검은 숲을 방벽 너머로 둔 북부의 귀족들과 그 귀족들의 인접 영지에 속한 귀족들이 가족들을 데리고 참석한 파티였기에 사람의 수는 꽤 많았지만 그것뿐이었다.
영애들의 드레스는 화려했고 영식들 또한 치장된 옷을 자랑했지만 그것뿐이었다.
카이엔의 눈동자는 평온했다.
작은 파티인지라 입장하는 사람을 호명하는 식으로 시선을 끄는 일도 없었다.
조용히 파티장 안에 들어온 그들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보였다.
“와, 왕자님…”
“저분이 왕자님…”
“그런데 왕자님은 어리지 않아?”
“쉿, 조용. 수도의 그 왕자님 말고…”
이미 귀족들의 자제들에게까지 카이엔의 이야기가 퍼진 듯했다.
귀족들은 자기 자식들이 파티장에서 괜한 소란을 피울까 봐 염려해 두 번 세 번 강력하게 주의를 주었고 그 잔소리를 귀찮게 들으면서도 그들은 카이엔에 대해 기억했다.
함부로 대해서는 안될, 왕족의 존재였으니까.
아닌 척하면서도 힐끗힐끗 쳐다보는 시선에 카이엔은 인상을 썼고 마침 눈이 마주친 한 귀족 청년이 잽싸게 고개를 돌렸다.
“왕자님, 음료 한 잔 어떠십니까?”
“적당한 걸로.”
대답이 돌아오자 바이스는 술잔 대신 주스잔을 들고 파티장을 활보하는 시종의 넓은 쟁반 위에서 잔 두 개를 잡아 카이엔과 세자르 남작에게 하나씩 건넸다.
“사람이 참 많군요.”
“그러게.”
“왕자님이 파티를 즐기셨으면 합니다.”
“음악소리는 좋네. 말 소리에 거의 다 묻히지만.”
주스를 홀짝이며 카이엔이 대답했다.
젊은 귀족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했고 나이든 귀족들도 친분이 있는 자들끼리 둥글게 서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 사이에 있는 그들은 외딴 섬과 같았다.
세자르 남작도 아는 사람이 있을 테니 그들과 이야기하면 좋을 텐데. 카이엔이 쳐다보자 세자르 남작이 웃으며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저도 파티는 참 오랜만이군요.”
“…아. 하긴, 나 돌봐야 했으니까 자리 비우기 힘들었겠네.”
“가끔은 이런 시끌벅적한 곳도 좋죠.”
“마을 시장도 충분히 시끄러운데.”
카이엔은 조용히 파티장의 안을 살폈다. 확실히, 어렸을 때 봤던 광경들과는 조금 달랐다.
다들 즐겁게 교류를 하고 있는데 혼자 동떨어진게 조금 이상해 보이겠지만, 저들이 부럽진 않았다.
개중엔 그처럼 아무와도 어울리지 않고 벽쪽에 붙어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교성이 없는 건지 이따금씩 중앙의 사람들을 부러운 듯한 눈으로 쳐다보는 자들이었다.
부모인 듯한 귀족에게 등짝을 맞으면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라면서 혼나는 이들도 있었다.
‘이쪽은 평화롭구만.’
세자르 남작은 카이엔이 말없이 서있는 것만으로도 기쁜 모양이었다.
카이엔이 주스 한 잔을 다 비우자 바이스가 빈 잔을 받아 다시 시종의 쟁반 위에 올리고 다른 잔을 가져와 건네주었다.
계속 주스를 마실 생각은 없었기에 카이엔은 가만히 잔을 들고만 있었다.
그들 사이의 고요함이 깨진건 파티의 주최자이자 올해 회의를 담당했던 에디트 남작이 나타나면서부터였다.
이미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하고 온 모양인듯한 그는 카이엔에게 고개숙여 인사하며 말을 붙였다.
“왕자님께서 참석해주시다니 영광입니다. 파티는 어떠신가요?”
“파티? 음, 괜찮아 보이는데.”
“음식은 입에 맞으신지요.”
“그럭저럭.”
“부디 파티를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크고 화려하게 진행했을 텐데…”
“이 정도로 충분하다. 조용히 있다가 갈 테니 에디트 남작, 그대도 마저 친우들과 어울리도록.”
“아 그럼… 세자르 남작, 잠깐 이쪽으로…”
“다녀오겠습니다 왕자님.”
“어.”
아무래도 검은 숲을 가까이에 둔 귀족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다.
세자르 남작이 가고 나니 카이엔의 옆에는 바이스만이 남았다.
음식 이야기가 나와서인지 바이스는 빈 접시에 이것저것 덜어와서 카이엔에게 건넸다.
“이게 저녁식사입니다. 조금이라도 드시지요.”
“너는?”
“저도 잘 챙기겠습니다.”
“네 것도 가져와.”
“명령이신가요?”
“먹을 때 같이 먹고 멀뚱히 있을 때 같이 서있게.”
“하하.”
여기가 세자르의 영주성이었다면 무슨 바보같은 소리냐며 쏘아붙였을 바이스는 얌전히 카이엔의 말에 따랐다.
시종과 대화하며 음식을 먹는 카이엔을 보던 귀족들의 시선이 하나둘 떠나갔다.
소문의 왕자는, 폐세자는.
몬스터와 말이 통하는 괴짜에 어렸을 적에 부모인 선왕부부를 잃은 불쌍한 사람이었다.
그 세월동안 많이 삐뚤어지고 몬스터와 어울리면서 괴물이 됐다는 괴담도 있었지만 실제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선왕을 기억하는 사람은 카이엔을 보고 그를 떠올렸다.
선왕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번듯한 미남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그가 몬스터를 데려오지 않은 걸로 봐선 몬스터와 말이 통한다는 게 헛소문인건 아닐까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물론 카이엔은 글라스를 데려왔지만 지금 글라스는 새장 안에 있었고 밖에서 에빌과 함께 있었다.
졸지에 왕자의 애완 박쥐와 함께 밖에서 대기하게된 에빌은 박쥐를 신기하게 여기면서 한마디씩 말을 붙여오는 기사들과 이야기를 하느라 바빴다.
밖은 어두웠지만 파티장 안은 불빛으로 인해 환했다.
찬란하기까지 한 샹들리에의 불빛. 카이엔은 느긋하게 파티의 분위기를 느꼈다.
잔잔한 음악소리와 크고 작은 인간들의 목소리. 세자르 영지에서는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사교 파티였지만 아무와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은 채 카이엔은 말 그대로 사람구경만 했다.
이따금씩 그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어서 우물쭈물하는 귀족들도 있었지만 곧 포기하고 일행에게 돌아갔다.
대화를 마친 건지 세자르 남작이 돌아왔다.
별 이야기 아니었는데 다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며 허허 웃는 그를 보며 카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이라곤 하나도 깃들지 않은 행동에 세자르 남작이 물었다.
“아무것도 안 물어보시나요?”
“별 이야기 안 했다면서.”
“그건 맞지만요.”
“그럼 된 거지. 지루한데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나?”
“조금만 더 있다가 가죠. 사람 구경은 많이 하셨나요?”
“응. 뭐, 보이는 사람은 그게 그거지만.”
별거 아닌 파티일 텐데도 다들 화려하게도 차려입고 나왔다.
그에 비하면 그의 옷은 너무 수수한 건가 싶어서 보고 있으니 바이스가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다음엔 훨씬 멋진 옷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왕자님에겐 뭐든지 잘 어울리시지만 좀 더 멋진 옷을 입는 게 좋죠.”
“아니… 별로…”
“제 안목을 믿어주세요.”
“너라서 걱정하는 거야.”
대체 얼마나 화려한걸 들고 오려고.
카이엔은 질색했지만 바이스는 진심인 모양이었다.
앞으로 이런 자리에 두번다시 오지 말아야겠다고 카이엔은 다짐했다. 그 순간, 반짝이던 샹들리에의 불이 일제히 꺼졌다.
파티장의 벽과 천장을 밝히던 수십 개의 불빛이 한꺼번에 점멸했고 파티장 안은 소란에 휩쓸렸다.
쨍그랑!
놀라서 휘두른 팔에 유리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졌으며,
우당탕- 쿵!
누군가는 걸려 넘어진 건지 요란한 소리를 냈다. 테이블이 엎어지면서 엉망진창으로 접시가 깨지는 소리도 들렸다.
혼란에 찬 웅성거림이 사방에서 울려퍼졌다.
카이엔 역시 당황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는데 누군가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가만히 계십시오.”
“바이스?”
“암살자는 아닌 모양입니디만…”
바이스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찾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아무리 그의 신체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사방이 어둠인 파티장에서 무언가를 찾는다는 건 쉽지 않았다.
혼란은, 어둠 속에서 밝은 빛이 켜지더니 샹들리에를 비춘 뒤에 절정에 달했다.
갑자기 밝은 빛이 샹들리에로 쏟아졌고 모두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
높은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 위에는, 누군가가 서있었다.
금발에 챙이 넓은 모자, 검고 하얀 원피스를 입은 가면 쓴 여성이 그 위에 발을 디디고 서있었다.
영문을 몰라 입을 떡 벌린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샹들리에에 위풍당당하게 서있던 여성이 입을 열었다.
“괴도 등장이요! 보물들은 내가 가져간다!”
그 외침에, 아까까지만 해도 평온했던 카이엔의 표정도 순식간에 황당함으로 물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