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카이엔은 남작이 읽어보라고 건넨 수십가지의 서류를 천천히 읽었다.
이미 확인이 다 끝난 일들이었는데 남작은 카이엔에게 안목을 기르기 위해 이런 것도 한 번쯤은 봐두는 게 좋다며 그를 설득했다.
이러다가 한 번씩 시험하듯 별거 아닌 일거리를 끼워주곤 했는데 카이엔은 이걸 무시할까 해볼까 고민하다가 마음 내키는 대로 하곤 했다.
바이스가 그에게 금고의 존재를 알려준 뒤로는 세금이 나오는 영지의 자료도 넘겨주곤 해서 공부하다가 싫증이 나면 한번씩 읽어보곤 했다.
대리인은 땅을 잘 다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전해지는 보고며 서류의 내용으로 봐선 그러했다.
‘정말로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직접 찾아가기엔 꽤 멀었다.
물론 더스크라이즈는 더 멀었지만 거긴 꼭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으니깐.
‘그나저나 내가 외출한 걸 알았을 텐데 아무 이야기도 없네.’
분명, 국왕은 그가 세자르를 떠나 다른 곳에 다녀온 것을 알 것이다.
다크 엘프인 엔베인을 데리고 왔으니 더스크라이즈란 걸 알 테고 그들이 쉽게 국경을 넘어갈 수 있었던 건 에빌라이 공작인 티아마티스의 도움 덕분이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 연결고리를 알아차렸을 텐데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까?
옛날같이 걱정을 가장해 떠보려는 편지조차 보내지 않고.
‘에빌라이 공작이 내 편을 든다고 생각한 건가?’
그가 세자르로 갈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그 사람이, 그가 성장한 지금 현 왕가와 그를 저울질한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원체 의심이 많은 사람이니.
국왕이 에빌라이 공작을 주시하고 있다면 반대로 그에게는 아무 신경쓰지 않을 것 같았다.
내내 중립이었던 공작이 혹시라도 딴맘을 먹을까 봐 전전긍긍한다면 모를까.
불필요하게 신경쓸 필요 없을 것 같다며 카이엔은 마저 서류를 읽어나갔다.
이미 일처리가 끝난 서류에 남작이 붉은 잉크로 주석을 달아놓은 것을 읽으니, 서류 작업하는 사람들의 고충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말장난과 숫자장난질을 치는 놈들은 꼭 엄벌에 처해야겠다는 생각이 새록새록 들었다. 어디서 남의 돈을 꿍쳐 먹으려고 들어.
…백수인 그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엔베인은 글라스와 에빌이 잘 챙겨주고 있어서 점점 저택에 적응해나가고 있었다.
페이리와도 친하게 지냈는데 페이리가 더스크라이즈에 대해 궁금해해서 그 나라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모습이 종종 목격되었다.
물론 아직까지 저택의 인간들이 말을 걸면 부끄러워했지만 저것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것이었다.
아무튼, 나갈 때마다 사람을 한 명씩 주워오게 되니까 앞으론 절대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살고 싶은데 잠잠해진다 싶으면 하나씩 사건이 터지곤 했으니.
그러나 그런 카이엔의 마음도 모르고 저녁 식사 자리에서 남작이 이런 말을 꺼냈다.
“왕자님. 이번에 북부 모임이 열리는데 함께 가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뭐?”
깜짝 놀라서 카이엔은 들고 있던 포크를 떨어뜨릴뻔했다.
가까스로 손에 힘을 줘서 포크를 붙잡은 그는 얼떨떨해서 남작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남작은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유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검은 숲과의 방벽을 지키는 북부 귀족들의 모임입니다. 회의와 사교파티가 함께 있는데 어떠십니까?”
“안 갈래. 내가 세력을 키운다고 여겨질지도 모르잖아.”
“검은 숲에는 왕자님도 관심을 많이 가지고 계신 거 압니다. 다른 지역의 몬스터 발생상황과 특이소견을 알 수 있는 기회입니다.”
“사교파티도 있다면서.”
“별거 아닌 일입니다. 그저 자기 자식들 자랑하면서 좀 더 가벼운 이야기를 나눌 뿐이지요.”
남작에겐 자식이 두 명있었지만 둘 다 독립한 지 오래였다.
함께 데려갈 자식도 동행할 아내도 없으니 혼자 가기가 쓸쓸한 거려나.
그러나 카이엔은 남작의 자식도 친척도 아니었다. 그저 어쩌다가 맡게된 왕자였고 분명 그가 가면 다들 술렁술렁거릴 게 뻔했다.
개중엔 이상한 오해를 하는 녀석들도 있을 테고.
차라리 여기 남아있는게 낫다고 여겼는데 옆에서 가만히 서있던 바이스가 입을 열었다.
“가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너까지 그러는 거야? 둘이 언제 머리라도 맞대고 작전 짠 거야?”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왕자님이 멀쩡히 잘 살아계신다는 걸 보여줄 필요는 있습니다. 왕자님에 대한 소문이 바깥에는 얼마나 괴상하게 퍼졌을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무슨…”
“시골에 틀어박혀서 몬스터나 기르고 있지 않습니까? 음침하다고 여겨질 테죠. 그러니까 왕자님이 번듯하고 훤칠하게 잘 자랐다는 걸 다른 귀족들에게 각인시켜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뭐야.”
“왕자님도 슬슬 이미지 관리를 하셔야죠. 모두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건 어린 시절의 왕자님 뿐입니다. 슬슬 그 이미지를 바꿔줘야죠.”
“그 말이 맞습니다, 왕자님.”
옆에서 남작도 한마디 거들었다.
덕분에 카이엔은 식사를 하다가 말고 머리를 붙잡고 고민에 빠졌다.
저 말이 맞긴 한데 그는 절대 나가고 싶지 않았다. 왠지, 이번에 또 외출을 하게되면 혹이 하나 딸려올 것만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따르면, 저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을 확률은 백퍼센트에 가까웠다.
끙끙거리는 그의 옆에서 바이스가 소곤거렸다.
“갑시다, 왕자님. 당신이 멀쩡히 잘 살아있고 왕위에 관심이 없다는 모습도 보여주면 그만 아닙니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잖아.”
“왕자님도 여기에만 틀어박혀있을 게 아니라 다른 이들과 만나보셔야 합니다. 저번에 만난 건 ‘에빌라이 공작’이 아니라 ‘티아마티스 님’이었으니까요.”
“…하아. 알겠어. 갈게. 언젠데?”
“사흘 뒤에 출발할 겁니다. 그래도, 가까운 곳이라서 오래 걸리진 않습니다.”
“그래.”
카이엔이 가겠다고 말하자 남작의 표정이 밝아졌다. 카이엔의 동행으로는 바이스와 호위 기사로 에빌이 갈 테니 마차를 하나 더 준비하겠다며 남작은 이렇게 말했다.
“미리 준비해두길 잘한 것 같습니다.”
“뭐?”
“왕자님은 아무 걱정 마십시오.”
“그렇게 말하니까 불길한데…”
카이엔은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그 불길함은 바이스가 방에 돌아가자마자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준비해놨다면서 꺼낸 맞춤 예복으로 인해 더욱 커졌다.
분명 회의 말고도 사교 파티가 있다고 했는데.
떨리는 손가락으로 예복을 가리키며 카이엔이 물었다.
“그거… 뭐야?”
“왕자님이 입으실 옷이죠. 예전에 치수 재어논 걸로 만들었는데 안 맞으면 안 되니까 어서 입어보시죠.”
“너-”
“어차피 가시기로 하셨잖습니까. 저는 왕자님이 그 자리에서 누구보다 빛났으면 합니다.”
“필요없어!”
“거지꼴로 가시는 것보단 낫죠. 그리고, 왕자님이 건재하신 모습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다들 알아서 설설 길 테죠.”
“난 그런거 바라지 않아.”
“아뇨. 그들은 당신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래야 더더욱 허튼 짓을 하지않을 테죠. 겉보기에 유약하고 이용하기 편해보이면 제멋대로 조종하려고 들 테니까요. 자, 고집부리지 마시고요.”
싫은 기색이 역력한 카이엔이었지만 결국 고집을 꺾고 바이스가 시키는 대로 예복으로 갈아입었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에 맞춘 예복의 바탕은 검은색이었다. 금실로 촘촘하게 수놓은 자수와 장식해놓은 붉은 태슬은 외투가 펄럭거릴 때마다 함께 흔들렸다.
가넷으로 장식된 타이를 걸어주며 바이스가 말했다.
“잘 어울리시네요.”
“…어.”
“어울리지 않는 색이 없으십니다.”
“난 모르겠는데.”
“어린애도 아니고, 이런걸로 토라지신 건 아니죠?”
“넌 말을 좀 아끼는게 좋겠어.”
“걱정마세요. 거기서도 이러진 않을 테니까요. 제 주인을 욕먹게 할 정도로 못난 시종은 아니랍니다.”
예복으로 갈아입고 나서 카이엔은 전신 거울의 앞에 섰다.
훌쩍 자란 키와 어렸을 적에 비하면 넓어진 어깨. 잘 자르지 않아서 허리 근처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
바이스가 그의 머리카락을 가리키면서, 외출을 할 땐 잘 묶겠다고 덧붙였다.
다행히 예복은 카이엔의 몸에 꼭 맞았다.
“치수는 대체 언제 잰 거야?”
“이전에 재놓은 것에 제가 관찰한 부분을 첨삭했는데 다행히 맞았군요.”
“뭐?”
“저야 항상 왕자님의 몸을 보지 않습니까. 목욕 시중도 들고 옷도 입혀드리니까요. 키가 좀 크신 것 같아서 그 부분을 참고했죠.”
“어… 그래.”
눈썰미가 좋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딱 들어맞으니 무섭기까지 했다.
다시 예복을 벗고 잠옷으로 갈아입으면서 카이엔이 슬쩍 말을 꺼냈다.
“안 가면 안 되겠지?”
“안 됩니다.”
***
동행은 시중을 들 바이스와 호위 기사 역할을 할 에빌로 정해졌다.
그런데 바이스가 가만히 있다가 글라스를 보더니 물었다.
“글라스 씨는 박쥐로 변할 수 있으니 박쥐로 변신시켜서 데리고 가죠.”
“뭐?”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사고에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말한다면야… 글라스 넌 어때?”
“전 괜찮아요. 그치만 박쥐 모습이면 왕자님 옆을 졸졸 따라다닐 수 없고 인간 모습으로 변할 수도 없을 텐데 괜찮을까요?”
“계속 박쥐로 계시면서 감시하면 됩니다. 왕자님을 방에서 지켜주실 분이 필요하니까요.”
“그럼 문제 없겠네요.”
그렇게 글라스도 함께 가기로 정해졌다.
올해의 회의는 바로 옆의 에디트 남작령에서 하는 것이라 마차를 타고 하루 반 정도 달리면 도착할 수 있었다.
남작도 따로 시종과 기사와 동행해서 가기에 마차 두 대에 나눠서 탔고 호위 병력과 함께 그들은 에디트 남작령으로 향했다.
마차를 타고 가는 와중에 카이엔은 이상한 점이 떠올라서 바이스에게 물었다.
“그런데… 내가 세자르에서 지낼 동안 다른 귀족들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동안 세자르에선 회의를 하지 않은 건가?”
“그렇죠. 왕자님이 계셨으니까요.”
“으음…”
“북부 모임이라고 해서 모든 영지가 검은 숲과 방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회의에서 만날 귀족들은 기껏해야 세 명정도일 테고요. 개중에 나트폰트라 변경백은 대리인을 보낼 겁니다. 그곳은 제국과도 국경을 마주하고 있으니 거길 지켜야 하니까요.”
“파티엔 다른 귀족들이 더 많을 거란 말이지?”
“네. 왕자님은 그냥 가만히 서계시면 됩니다. 겁 없이 다가오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벽의 꽃이란 거구나.
옆에서 다들 그러면 될 거라고 하고 있으니 카이엔은 점점 기분이 이상해졌다.
에빌과 바이스는 거기서는 저택에서 카이엔에게 하던 것처럼 하면 안 된다며 의지를 굳히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보고있으니 더욱 기분이 미묘해졌다.
‘평소에나 좀 잘하지.’
그런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는듯 옆의 새장에서 글라스가 찍찍하는 소리를 냈다.
박쥐가 원래 찍찍거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소금이를 따라하는 것 같았다.
그냥 말해도 된다며 카이엔이 새장을 쓰다듬었다.
- 어, 그런가요?
“응. 잘 들리네.”
- 박쥐는 음파를 쏘니까요. 신기하네요.
“괜찮을지 모르겠네.”
- 바이스 씨는 유능하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그럼 에빌만 걱정하면 된다는 건가.
이 녀석도 바보는 아니니까 사고는 치지않겠지만 글라스의 말을 듣고나니 바이스보다 에빌이 더 걱정되었다.
카이엔의 타는 속내도 모르고 두 사람은 열심히 말투며 행동거지를 점검했고 지루한 마차행이 끝나고, 그들은 에디트 남작령에 도착했다.
영주성에 도착하자 바이스가 먼저 마차에서 내려 카이엔이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왔다.
안내를 맡은 하인이 꾸벅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어서오십시오, 세자르 남작님. 옆의 동행 분은…”
“왕자님이시네.”
“네?”
“카이엔 왕자님이시네. 듣지 못 한 건가?”
“어…”
하인의 눈동자가 거세게 떨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몰랐던 모양이다.
카이엔은 아무 생각없이 정면만을 쳐다보았고 하인은 곧 정신을 차리고 그들을 안내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짐은 이쪽으로…”
대기하던 다른 하인들이 짐을 들고 그들의 뒤를 따라왔다.
보통 이런 건 집사가 하는데 하인이 온 걸로 봐선 아무래도 바쁜 일이 있는 모양이다.
하긴, 여기 온 귀족이 몇 명인데. 아마 집사는 지금쯤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을리라.
남작이 미리 동행이 있다는 것을 알렸기에 하인은 나란히 붙어있는 방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하나는 남작이 쓰고 다른 하나는 카이엔이 쓸 용도였다.
하인의 방은 바로 아래층의 같은 위치에, 표식을 붙여놨다는 말에 바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회의 시간에 다시 오겠습니다.”
하인은 깊게 허리 숙여 인사하고 부랴부랴 다른 일을 하러 달려갔다.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바이스가 입을 열었다.
“젊어서 그런지, 왕자님을 모르는군요.”
“응?”
“어느정도 나이가 든 사람은 왕자님의 사정을 알고 있습니다. 저자는 아마 어려서 몰랐던 모양이군요.”
“너 정도는 되보이던데.”
“무례한 행동은 하지 않았으니 괜찮습니다만, 또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제가 화를 낼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용히 있어.”
바이스의 옆구리를 찌르면서 카이엔이 타박했다.
다른 영지까지 와서 굳이 소란을 저지를 필요는 없었다.
“왕자님. 쉬고 계십시오. 회의가 시작되려면 아직 한참 남았습니다.
“일찍 온 건가? 알았어.”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너무 지루해서 휴식은 환영이었다.
카이엔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걸터앉으니 바이스는 곧바로 짐정리부터 시작했다.
가방을 열어 필요한 물건이며 옷가지부터 꺼내놓더니 그 다음엔 방을 샅샅히 뒤지기 시작했다. 수상한 물건이 있는지 찾는 모습에 에빌도 덩달아서 수색을 시작했다.
새장의 횃대에 거꾸로 매달려있던 글라스가 물었다.
- 뭘 하시는 걸까요?
“글쎄. 어디에 폭탄이라도 숨겨져있다고 여긴 걸까.”
바이스는 침대 밑도 수상하다면서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했고 이불 속과 베개 안까지도 샅샅히 뒤졌다.
수상한 물건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안심했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바이스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야, 에디트 남작은 왕자님이 오실 거라고 예상했을 테니까요. 세자르 남작님이 동행으로 데려올만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오래전에 독립한 자식들을 데려올 리도 없고요.”
“아.”
“다행히 딴맘을 품은 것 같진 않지만요. 하지만 지켜볼 필요는 있습니다.”
“어… 네가 알아서 잘 하겠지.”
“네. 맡겨만 주세요.”
굉장히 결의에 찬 모습을 보고있으니 그 불꽃을 꺼뜨리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도 평소처럼 가만히 있으면 될 것 같다며 카이엔은 침대에 드러누웠다. 바이스가 검사도 끝냈으니 멀쩡할 테고 회의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다니까, 좀 누워있어도 될 것 같았다.
그가 눕자 바이스는 한술 더 떴다.
“주무십니까? 외투는 벗고 누우세요.”
“안 자. 누워만 있을래.”
“그래도 외투는 벗으십시오. 자, 몸만 옆으로 뒤집어보세요. 벗겨드리겠습니다.”
“혼자서 할 수 있어.”
누굴 애로 아나. 카이엔은 꼼지락거리면서 외투를 벗어서 대충 옆에 내려놓았다.
아마, 그가 회의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면 대충이나 짐작하고 있던 에디트 남작말고 다른 놈들은 놀라지 않을까, 싶었다.
검은 숲을 뒤에 둔 영지들을 다스리는 게 누구였더라. 곰곰히 떠올려보다가 카이엔은 눈을 감았다.
어차피 오래 알고 지낼 사이도 아닌데, 일일히 기억하고 떠올리는 건 너무나도 귀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