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새 식구가 생겼으니 당연히 거쳐야 할 통과 의례가 이어졌다.
사트로누스가 냄새를 확인하고 릴리시아가 관찰하고 허공에 들어보는 일이었다.
카이엔에게 설명을 듣긴했어도 커다란 변종 알라우네가 촉수로 들어올려서 둥기둥기하는 것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릴리시아는 촉수로 마검도 툭툭 쳐보더니만 곧 흥미를 잃은 듯 촉수를 거두었다.
자리를 비웠던 카이엔이 어느날 떡하니 다크 엘프 한 명을 데리고 왔지만 다들 궁금해하면서도 자세한 사정을 묻지 않았다. 그저, 어딜 갈때마다 이것저것 주워오게 되버리는 왕자의 버릇같은 것이라고 여겼다.
남작에게 부탁해 엔베인이 쓸만한 방과 필요한 물건을 구비해주면서 바이스가 기사 제복을 마련해서 건네주었다.
“검은 쓰실 수 있죠?”
“아, 네…”
“그럼 됐습니다. 에빌 씨만으로는 역시 좀 걱정이 되었으니 기사 한 명 더 있는 것도 나쁘지 않죠. 입고나서 왕자님 서재로 오세요.”
“네? 서재는 어디에-”
그러나 엔베인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바이스는 나가버렸다.
멀뚱히 손에 들린 제복을 바라보고 있다가 엔베인은 천천히 옷을 갈아입었다.
처음에는 그의 신체에 달라붙어있었던 마검은 어느 순간부터 (아마 카이엔과 만난 그때부터) 손에서 떨어져 하나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기사 제복은 검회색에 붉은색 장식이 되어있는 단순한 디자인이었다.
제대로 입은 게 맞는 건지, 이대로 카이엔을 만나러가도 되는 건지 한참 동안 거울 앞에서 서성이는 엔베인에게 마검이 외쳤다.
- 됐으니까 얼른 나가라!
“그치만…”
- 괜찮다니까!
그 외침에 엔베인은 마검을 가지고 방에서 나왔다.
카이엔의 서재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발 가는대로 걸어볼 생각이었다.
가면 안 되는 곳은 누군가가 앞을 지키고 있을 테고 운이 좋다면 카이엔이 있는 서재 밖도 누군가가 지키고 있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차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인간은 자신과 다른 모습을 한 존재를 두려워하거나 경멸하며 멀리한다고 들었다.
그는 일평생 더스크라이즈에서 나오지 않았지만 다른 동포들은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렇게 따지고보니 카이엔은 굉장히 특이한 사람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마검을 만지질 않나 그의 구속을 풀어주지를 않나…
‘하긴. 몬스터도 기르는 마당에 내가 신기할 리가 없겠지.’
언어가 통하는 다크 엘프니까.
제복을 입고 걷는 그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허리춤의 마검이 신경쓰지 말라고 하는 소리도 들렸다. 엔베인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빨리 찾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는 청력이 좋아서 주변의 인간들이 소곤거리는 소리도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잘 들렸다.
“와, 저분이 바로 이번에 왕자님이 데려오신…”
“다크 엘프래. 나 엘프 처음 봐.”
“제복? 기사로 오셨나? 멋지다.”
“되게 잘생겼다.”
수군거림이 아닌 호의적인 말들에 저절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결국 엔베인은 걷는 것을 포기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향해 주변 사람들의, “달려가네?” “바쁘신가 보다.”라는 말들이 이어졌다.
여기 인간들은 카이엔을 제외하고도 상당히 이상했다!
- 너 왜 그러냐?
“모, 몰라!”
- 왕자 찾아야지.
“큽…”
- 얼른 가야하지 않나? 그 집산지 시종인지 하는 녀석은 성깔이 장난 아닐 텐데.
마검의 말에 엔베인은 도망치다가 멈춰섰다.
그러나 카이엔의 서재가 어딘지 모르는 이상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면서 움직여야만 했다.
붙임성 없는 성격이 이럴 때 발목을 잡는구나. 엔베인은 파르르 떨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대로 길 한복판에 서있을 수만은 없었다.
“저, 저기…!”
“네?”
마침 저 앞에 지나가는 사람이 한 명 있어서 엔베인은 용기를 내어 하인에게 말을 걸었다.
“왕자님의… 서재가 어디에 있는…나요?”
“아-”
하인은 알고 있는지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저택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 입구로 들어가셔서 4층으로 가세요. 몇 년전에 사트로누스가 발톱으로 긁어놓은 자국이 아주 선명한 문이 왕자님 서재예요.”
“가, 감사합니다…”
“뭘요. 왕자님이 부르셔서 가시는걸 텐데 어서 가세요.”
하인의 도움으로 엔베인은 서재를 찾아갈 수 있었다. 4층에 문은 수없이 많았지만 사트로누스의 발톱자국이 남아있는 문은 단 하나였다.
아마 그것을 알기에 하인도 왼쪽에서 몇 번째 방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말해주지 않았을 터였다.
너무나도 선명한 손톱 자국에 엔베인은 문을 몇 번이고 확인한 뒤 노크를 했다.
똑똑.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문이 열리더니 바이스가 고개를 내밀었다.
“꽤 오래 걸리셨군요. 길을 잘 찾아오신 듯해서 다행입니다.”
“네…”
“저택 안내를 누구에게 맡길지 고민했거든요. 들어오시죠.”
바이스가 문을 더 열었고 엔베인은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책상 위에는 두꺼운 책들이 쌓여있었다. 책을 앞에 두고 끙끙거리고 있던 카이엔은 이마를 만지작거리다가 엔베인을 발견하고 미소를 지었다.
펼쳐놓은 책에 책갈피를 끼워 놓고 닫아 옆으로 밀어두며, 그가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라는 뜻이었다.
“제복 잘 어울리네.”
“가, 감사…합니다.”
“여기 생활에 적응하려면 역시 시간이 좀 걸리겠지? 다들 좋은 사람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네가 다크 엘프여서 신기하게는 여길 테지만 차별하진 않을거야.”
사트로누스와 릴리시아에게도 친절했던 사람들이니까.
나쁘게 대하면 바로 그들이 카이엔에게 일러바칠 수 있다는 것도 한몫했을 테고. 카이엔은 몬스터인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으니까.
페이리의 경우는 너무나도 인간을 닮았지만 하반신이 거미라는 것에 적응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꽤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익숙해졌다.
엔베인은 피부색만 다를 뿐 인간과 그리 다른 점이 없으니 다들 금세 익숙해지리라. 가만히 엔베인을 바라보던 카이엔의 눈이 마검을 향했다.
“그래서, 마검 이름은 뭘로 짓지? 역시 엑스칼리버가 낫지 않을까?”
- 싫다.
“유감이네.”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었기에 카이엔은 피식 웃었다.
단호하게 거절의 의사를 표현하는 마검에게 표정이 있었다면, 엄청 질색을 하고있을 게 뻔했다. 이번에는 엔베인을 바라보며 그가 물었다.
“나는 네가 여기서 지냈으면 좋겠는데, 네 생각은 어때?”
“더스크라이즈로는 못 돌아갑니다. 그런 피해를 입힌 마검과 한 몸이 되어버린데다가 떼어낼 수도 없으니까요. 또 언제 이성을 잃을지도 모르고…”
“괜찮을 거야. 무슨 일 있어도 여기에는 제압해줄 사람도 많아.”
“이곳은, 굉장히 독특한 곳인 것 같습니다. 이종족이 너무나도 인간들과 잘 어울리고 있어요. 몬스터도…”
엔베인을 새 식구로 받아들이면서 카이엔은 가까운 모두를 불러모아 이야기를 했다.
엔베인이 마검과 합쳐져버린 다크 엘프라는 말에도 다들 조금 놀란 것 같긴 했지만 꺼리는 기색은 없었다.
프라우디에는 호문쿨루스였고 자네인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드래곤의 피로 세례받은 몸이었으며 글라스는 뱀파이어였으니까.
다크 엘프의 존재는 신기하긴 했지만 그 정도뿐이었다.
“몬스터는 다들 어쩌다보니 기르게 된 거긴 하지만. 생각하니까 되게… 되게 이상하네. 내 의지가 아닌 일들이야. 소금이도 그렇고.”
“왕자님이 스스로 불러온 고난과 역경도 있습니다.”
“아… 이래서 밖에 나가기 싫어. 밖에만 나가면 하나씩 데려오게 되버려. 엔베인 네 이야기는 아니니까 신경쓰지 마. 그 외출은 애초에 너를 데리러 나갔던 거였으니까.”
“아, 네…”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고개를 숙이는 카이엔을 보니, 아무래도 몬스터를 기르게된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 모양이다.
조금 궁금하긴 하지만 물어보면 카이엔이 곤란해 할까봐 엔베인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얌전히 의자에 앉아서 카이엔이 골머리를 썩히는 걸 멀뚱히 바라보고있으니 바이스가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왕자님. 사람을 불러왔으면 이야기를 제대로 하셔야죠.”
“응… 엔베인 너도 누가 시비걸거나 못되게 굴면 바로 나한테 말해. 혼자 끙끙거리지 말고.”
- 들었냐?
“…네. 명심하겠습니다.”
“명심까진 할 필요없고. 아무튼 간에… 여기 사람들이 검은 숲을 끼고 살아서 그런지 적응력이 되게 뛰어나. 너한테도 나쁘게 대하진 않을거야. 엘프라서 신기하게 여길 수는 있겠지만.”
뱀파이어인 글라스는 겉보기에 인간과 다른 점이 없기에 다들 긴가민가 하고 있을 거다.
반면 엔베인은 딱 봐도 다크 엘프니까 다들 아닌 척 하면서도 신기해서 힐끔힐끔 쳐다볼 테고.
안 그래도 마음 약한 녀석인데 상처받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카이엔은 괜찮다는 말만 연신 늘어놓았다.
옆에 선 바이스도 카이엔의 말에 한마디씩 보탰다.
“괜찮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몬스터를 기르는 왕자님께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미 십여 년 전에 모두 일을 그만두고 나갔으니까요.”
“어…”
“그야, 저택 안을 당당하게 활보하고 다니는 만티코어에게 적응 못하면 자기가 일을 그만두는 수 밖에 없죠. 남은 사람들은 죄다 강심장에 저택이 몬스터 투성이란걸 알면서도 지원한 거니 문제없을 겁니다.”
“네에…”
어쩐지 위로라곤 전혀 되지 않는 말이었다. 말하는 사람이 바이스라서 그런가?
더스크라이즈에서 가르간트로 오는 도중에 볼 수 있었던 바이스의 행동 탓인지 엔베인은 살짝 주눅이 들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강한 몬스터만큼이나 무서웠다.
인간 귀족이니 왕족이니 하는 사람과 만난 건 카이엔이 처음이었지만 바이스가 카이엔에게 하는 행동을 봐서는 신분도 별거 아닌 게 아닐까,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엔베인이 그런 오해를 하는 걸 모르는 카이엔은 그 심각한 오해를 정정해줄 수 없었다.
“이제 가봐도 돼. 이상한 이야기 들어주느라 고생 많았어. 가서 쉬어도 되고 저택을 구경해도 되고… 아, 에빌이나 글라스를 붙여줄까? 안내받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두 분 중 한가하신 분을 불러오겠습니다.”
“아무나 데려와.”
카이엔의 지시에 바이스는 고개 숙여 인사하고 서재에서 나갔다.
둘만 남게 되었는데도 카이엔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엔베인은 안절부절 못하며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마검을 툭툭 건드렸다. 마검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 뭐? 왜?
“뭐, 뭘 어떻게 해야 하지…?”
- 그걸 나한테 묻냐?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난 검이라고, 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지가 없던 검이었는데 내가 뭘 알겠냐?
날카로운 지적에 엔베인은 고개를 푹 숙였다.
마검의 말은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우왕좌왕하다가 검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거절까지 당한 그의 신세가 너무 한심해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카이엔은 마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분명 그들의 대화도 들었을 거다.
당연히 그 대화를 들은 카이엔은 턱을 괸 채 엔베인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애가 많이 소심했다.
다크 엘프라고 해서 다 저런 성격은 아닐 텐데 엔베인은 유독 타인과 어울리는 것에 서툴렀다.
‘혹시 저래서 희생양된 거 아니야?’
반쯤 강제 당했다거나.
여기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게 둘 수 없으니 친구를 만들어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다행히 바이스를 빼고는 다들 성격이 좋으니 엔베인과도 좋은 친구가 되어줄 수 있을 거다.
좀 더 정확히 알아볼 필요성을 느끼고 카이엔이 입을 열었다.
“엔베인.”
“네?”
“너, 더스크라이즈에서 친구 없었어?”
“네에?”
뜬금없는 질문에 엔베인이 당황해서 되물었다.
그 반응에 카이엔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니… 너, 인간들이 어려워서 그러는 건지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궁금해서. 아니면 마검이랑 동화되면서 그렇게 된 건가?”
- 후자는 아니다.
“음. 검의 생각은 저런데 네 생각은 어때?”
“그… 원래, 이런 것 같습니다. 친구는 있었지만, 어렸을 적부터 함께 어울리던 애들이었고요.”
“너무 긴장할 필요 없어. 내가 왕자님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실은 왕자도 뭣도 아니란 거 너도 알잖아. 편하게 대해. 에빌이랑 바이스 보면서 느끼는 점 없어?”
“확실히 그 두 사람은 정말 너무 당신을 편하게 대하고 있는 것 같긴 합니다.”
“하하… 밖에서도 그러면 안 되는데 말이야.”
물론 다른 귀족들 앞에선 깍듯이 예의를 갖출거다. 그들이 따르는 주인인 카이엔이 얕잡아 보이게 두지 않을 테니까.
문제는 다른 귀족들을 만날 일이 없으니 그 두 사람이 그럴 일이 없다는 것뿐…
드문드문 이어지던 대화는 바이스가 문을 두드리는 걸로 끝났다.
에빌과 글라스 둘 중 더 한가했던 사람은 글라스였던 모양이었고 다크 엘프와 뱀파이어라는 독특한 조합이 탄생했다.
“그럼 글라스. 엔베인한테 저택 안내 좀 해줘. 자주 가는 곳 같은데. 내 방이라든가 서재, 너희들 방이랑 바이스 방-”
“제 방을 알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다른 분들이 올 일이 없으니까요.”
“아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다른 사람들 방이라면 모를까, 바이스 씨의 방은 그냥 두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함정이라도 설치되어있는 거야?”
“그건 아닌데…”
“일할 때마다 얼굴 마주치는 것도 힘든 직장 상사의 방까지 굳이 찾아올 필요는 없죠. 제가 필요할 때마다 다른 분들을 찾아가면 그만입니다.”
“그래… 그건 너희들 알아서 해라.”
바이스가 오지 말라고 하면 이유가 있겠지.
아무튼, 엔베인이 길을 잃지 않게 잘 안내해주라는 말에 글라스는 활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서재에서 나오자마자 글라스는 엔베인에게 활기찬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자, 그럼 얼른 가자! 아, 말 편하게 해도 되지? 여기 꽤 넓고 방도 많아서 구별하기가 어려워. 특히 왕자님 방의 경우엔 표식조차 두지 않거든. 암살자가 쉽게 방을 찾아낼까 봐.”
“아…”
“다크 엘프는 되게 오랜만에 만나보는 것 같아. 물론 그 사람도 여행하던 사람이어서 엄청 특이한 부류였지만. 넌 어때? 뱀파이어 만나본 적 있어?”
없어.”
“음, 그럼 뱀파이어의 이미지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가 잘 해야겠구나. 으으음~ 아마 , 한 명 더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여기 뱀파이어가 또 있어?”
“가주님이 날 잡으러 온다면 다른 한 명 더 보는 거지 뭐.”
“…가출했어?”
“비슷해.”
글라스에게도 말 못할 사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직 어쩌다가 여기에 식객으로 함께하게 되었는지 엔베인에게 말해주지 않은 글라스인지라 웃으면서 엔베인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가 안내를 맡은 이상 기필코 엔베인이 이 저택의 지리를 숙지할 수 있게 도울 의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