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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왕자는 조용히 살고싶다-28화 (29/219)

-28화

다행히 그가 더 짜증이 나기 전에 바이스가 옷을 들고 도착했다.

엔베인이 입을만한 것까지 가져오느라 늦었던 건지 그는 엔베인에게 옷을 건네고 카이엔에게 말했다.

“프라우디에 님의 연구실에 있는 욕실을 빌리는 게 좋겠습니다. 씻고 주무세요.”

“그래도 될런지 모르겠네.”

“괜찮습니다. 자, 어서 이쪽으로.”

“네가 방 주인같다?”

“저번에 왕자님도 방구경 하셨으니 위치는 아실 거 아닙니까.”

투닥거리면서도 카이엔은 얌전히 욕실로 따라갔다.

바이스가 금방 따뜻한 물을 채워주고 목욕하는 것을 도왔다.

여행을 하는 동안엔 침대도 딱딱하고 잘 씻을 수도 없었기에 돌아와서 긴장도 풀렸겠다, 따뜻한 물로 씻고나니 욕실에서 나올 때 카이엔은 반쯤 졸고 있었다.

그런 그를 부축해서 프라우디에가 쓰는 침대에 눕혀놓은 다음 바이스는 욕실을 정리하고 욕조에 새 물도 받아둔 다음 엔베인에게 가서 말했다.

“엔베인 씨도 욕실을 쓰시죠. 청소는 잘 해놨습니다.”

“어…”

“괜찮습니다. 프라우디에 님이 그런 걸로 뭐라고 하시는 분도 아니시고 청소만 잘 해주면 혼내지도 않을 거예요. 자, 어서. 땀도 많이 흘렸잖습니까.”

엔베인을 끌고간 바이스는 그를 욕실에 집어넣고 문을 닫았다.

따뜻한 물이 차있는 욕조를 보고 엔베인은 허리춤에 찬 마검을 보며 물었다.

“너 물에 들어가도 돼?”

- 글쎄.

“으음… 몸에서 떨어뜨려놓는다고 해서 죽지는 않나?”

- 내가 부러지면 너도 죽는다. 그것뿐이야.

“그럼 일단 욕조 옆에다 둬야 하나…”

인간들이 쓰는 도구에는 익숙하지 않지만 물이 채워져있으니 이곳에 몸을 담그는게 맞을 것 같았다.

충분히 피곤할만도 했지만 이상하게 정신은 또렷했다. 마력을 썼을 때는 기운이 빠져서 흐물흐물거렸지만 지금은 그새 마력이 조금 회복된 건지 아까보다 훨씬 나았다.

몸에 묻은 땀과 먼지를 씻어내며 그는 수면에 비치는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검은 피부.

은색 머리카락.

붉은 눈.

눈동자마저 색깔이 바뀌었다는 것에 그는 실소를 흘렸다.

몇 번을 봐도 이 얼굴에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더스크라이즈를 나오고 나서 잔잔한 수면이든 거울이든 얼굴을 비춰볼 일은 많았다.

허나 단순히 머리색과 눈동자 색이 바뀐 것뿐일 텐데 항상 낯선 이를 보는 것만 같았다.

분명히, 자신의 얼굴임에도.

***

엔베인은 프라우디에의 곁에서 계속 검은 마나를 공급해주었다.

주변에 죽음의 기운이 있다면 훨씬 모으기 쉬운 마나는, 엔베인이 가지고 있는 마검의 영향인지 더스크라이즈와는 달리 생명이 넘치는 땅에 왔어도 수월하게 회복할 수 있었다.

여차하면 근처 묘지라도 알아보려고 했다는 바이스의 말에 엔베인은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제가 회복을 잘 못했다면… 저는 묘지에서 살아야 했을까요?”

“어… 글쎄?”

카이엔은 확답할 수 없었다.

엔베인은 자신의 바뀐 외모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원래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였는데 난데없이 은발에 눈동자는 붉어졌으니, 그럴만도 했다.

나중에 다른 다크 엘프들을 만난다고 해도 워낙 많이 바뀌어서 못 알아보는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걱정도 들었다.

세자르에 머물면서 엔베인은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마검에 관한 실험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마검과 그를 떼어놓는 것은 어려웠다. 얼마나 떨어지면 연결이 끊어지는지 실험을 하기 위해 마검을 바닥에 꽂아둔 채 엔베인이 점점 뒷걸음질을 치며 거리를 가늠해보았지만 부질없는 행동이었다.

100미터가 채 되기도 전에 엔베인이 픽 쓰러지는 것을 글라스가 받아냈고 다시 마검을 가까이 가게하자 정신을 차렸다. 본인은 어느 순간 의식이 끊어졌지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고 있었다.

위험하니 마검은 검집에 넣고 허리춤에 잘 차고 다니기로 했다.

검이 부러지면 그도 죽는다. 그 말이 이전보다 훨씬 피부에 와 닿았다.

처음 이틀간은 카이엔과 바이스, 엔베인이 프라우디에의 연구실에 있으면서 프라우디에의 상태를 살폈지만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교대로 돌아가면서 프라우디에를 살피기로 했다.

엔베인이 연구실에 상주하면서 마력을 주입해주었고 카이엔은 저녁시간에 들러서 자기 전까지 있다가 돌아갔다.

상처는 치유했지만 프라우디에가 눈을 뜨지 않았기에 모두의 불안감이 한계점까지 치닫고 있었다.

그러기를 일주일째.

드디어 프라우디에가 정신을 차렸다.

“어…”

눈을 뜬 프라우디에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무슨 일이 있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차가운 감촉에 그가 누워있는 곳을 더듬어서 확인하니 실험대였다.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킨 프라우디에는 소파에 앉아있던 엔베인과 눈을 마주치고 화들짝 놀라 외쳤다.

“누, 누구세요?!”

“어… 깨어났네.”

“엘프? 왜 여기에…”

“아, 잠깐. 나는 제대로 설명을 못해. 그- 왕자님을 불러와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아직 다른 사람들이 오기엔 시간이 좀 필요한데…”

하필 엔베인 혼자 있을 때 프라우디에가 눈을 뜨고 말았다.

당황하던 그는 일단 프라우디에를 실험대에서 내려주었다. 깨어난 건 다행이었지만 그는 말주변이 없어서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다행히 프라우디에도 갑자기 비명을 지를 정도로 판단력이 흐린 게 아니었기에 일단 옷부터 걸치고 오겠다며 걸어갔다.

조금 비틀거리긴 했지만 프라우디에는 용케 넘어지지 않고 걸음을 떼었다.

연구실과 연결된 방으로 가 옷장에서 셔츠 하나를 꺼내 입고 나오니 소파에 다시 앉아있는 엔베인을 볼 수 있었다.

눈이 마주치니 엔베인이 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곧 점심 때니까, 누가 올 거야.”

“네.”

다른 소파에 앉아서 프라우디에는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렸다.

허리춤에 검을 찬, 은빛 머리카락의 다크 엘프는 낯설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그 기운만큼은 익숙했다.

자신도 모르게 가슴께를 어루만지던 프라우디에의 눈이 살짝 가라앉았다.

“…저를 도와주신 거군요.”

“음?”

“아주 아팠던 것이 기억나요. 하지만 지금의 전 멀쩡하잖아요. 실험대에 누워있기도 했고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냐. 그나저나… 그 피 말이야…”

“피요?”

“네 몸에 독룡의 피가 흐른다고 해서 자네인이란 사람의 피를 뽑아 넣었거든. 몸은 좀 어때?”

“아… 멀쩡해요.”

“다행이다.”

저번에 바이스가 인간은 수혈 잘못 받으면 죽는다고 해서 카이엔이 경악을 하지 않았던가. 그러다가 프라우디에가 죽으면 어쩔 거냐고.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기에 엔베인은 안도했다.

12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색한 기류가 잠시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그리고 잠시 후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고 연구실 안으로 들어왔다.

“엔베인 씨! 좀 어떠세… 우왓!”

바구니를 들고온 글라스는 엔베인과 프라우디에가 나란히 소파에 앉아있는 모습에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손에 든 바구니를 떨어뜨릴뻔한 그는 우물쭈물하다가 바구니를 엔베인에게 건네주고 외쳤다.

“왕자님께 바로 알릴게요!”

쏜살같이 달려나가는 뒷모습을 한 번, 건네받은 바구니를 한 번 보고 엔베인은 바구니를 열어보았다.

오늘 점심은 샌드위치와 샐러드, 고기 파이인 모양이었다. 샌드위치를 프라우디에에게 건네며 엔베인이 말했다.

“배고프지?”

“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한테 점심을 주시면 엔베인 씨는요?”

“난 적게 먹어도 돼.”

솔직히 배가 그리 고프지 않았다. 더스크라이즈에 있을 땐 이곳저곳 정찰하면서 뛰어다니고 사냥하느라 상당히 많이 움직였지만 그가 여기와서 한 일이라곤 마력이 채워지면 프라우디에에게 넘겨주던 것뿐이었으니까.

움직임이 적으니 먹는 양이 적어지는건 당연했다.

샌드위치를 오물거리는 프라우디에를 구경하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않아서 발소리와 함께 다른 사람들이 연구실 안으로 들이닥쳤다. 다들 달려온 모양인지 머리모양이 말도 아니었다.

“프라우디에…!”

“왕자님! 잔느…!”

벌떡 일어나서 프라우디에는 그들에게 달려갔다.

그가 깨어난 것에 다들 안도하며 기뻐했다. 엔베인은 소파에 앉은 채로 그 모습을 부드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가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프라우디에는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인 엔베인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깍듯이 인사하는 모습에 엔베인이 별거 아니었다며 손사래를 쳤다.

훈훈한 인사와 자기소개 시간 뒤에는 사건의 전말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다들 소파에 옹기종기 앉아서 그날 있었던 일을 입에 담았다.

프라우디에가 가슴 속의 라이프 베슬이 드러날 정도로 다치고 나서 티아마티스가 보인 태도와 이중인격마냥 등장한 리치왕의 인격.

그 이야기에 프라우디에가 살며시 손을 들었다.

“그때 이후로 그런건지… 저, 그 사람과 교대할 수 있어요.”

“엥?”

“리치왕의 인격…이라고 치면 되겠군요.”

“네.”

“그럼 그녀석에게 엔베인에 대해 묻고 싶어. 마검에게 침식당했는데 어떻게 분리할 방법 없는지.”

“잠시만요.”

프라우디에는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눈을 떴을 때, 눈빛부터가 달라져있었다.

‘리치왕’은 엔베인을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이 잡종은?”

“말이 심하잖아…”

“다크엘프에 마검? 허? 게다가 반쯤 동화 됐어? 이런 미친.”

“떼어낼 수 있겠냐?”

“둘 다 반쪽나도 괜찮다면야 떼어낼 수는 있지.”

“…안 되겠네.”

어쩐지 첫 마디부터가 까칠했다.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자세부터가 프라우디에가 아니라는 걸 온몸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으음, 프라우디에가 억지로 널 내보낸 건 아니지?”

“그건 아니지만… 하아… 과거 기억이 없어. 내가 누군지 전혀 모르겠다. 위대한 존재란 것 밖에 몰라.”

“왜 내 주변엔 이렇게 자칭 위대한 존재가 많지?”

소금이도 그렇고 마검에 리치왕까지.

카이엔은 혼잣말 하듯이 중얼거렸지만 이곳에 그 말을 못 들은 사람은 없었다. 들어도 모르는 척 할 뿐…

리치왕 역시 그 말을 들었지만 한숨을 쉬며 푸념하기 바빴다.

“내 심장을 넣었는데 만들어진건 새로운 인격이야. 굉장히 흥미롭지만 연구할 수가 없어. 일단 내 몸이고.”

“하긴 그렇겠군요. 정보를 수집하긴 쉽겠지만요.”

“그리고 내가 깨어남으로서 검은 마나에 대한 면역이며 친화도가 대폭 늘었어. 그래서 그 드래곤도 검은 마나가 필요하다고 했을테고. 이젠 연금술사 말고 흑마법사나 네크로맨서 쪽으로 진로 잡고 키워야 해. 어디서 스승 하나 데려다놔라.”

“네가 키우면 되지. 리치왕이니 잘 알 거 아냐.”

“아까 내가 기억이 없다고 말했을 텐데.”

“가르쳐주다보면 기억나겠지.”

카이엔의 말에 리치왕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듯한 흑마법사 스승을 구할 수 없다는데에는 동의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마무리짓고 리치왕이 다시 눈을 감았다. 교대해서 나타난 프라우디에는 대화를 다 들은 모양인지 열심히 배우겠다며 작은 주먹을 꼭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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