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왕자는 조용히 살고싶다-27화 (28/219)

-27화

하루가 멀다하고 카이엔의 귀환을 기다리던 남작은 마차가 도착했다는 소식에 읽던 서류조차 내팽겨치고 카이엔을 보러 달려나왔다.

안절부절못하던 남작은 바이스가 마차의 문을 열고 카이엔이 제일 먼저 내리자 카이엔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왕자님! 몸은 어떠십니까?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으신가요?”

“나 괜찮아! 오가는 길이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이제 돌아왔으니 푹 쉬어야지. 걱정할 거 없어.”

“정말로 다행입니다… 잘 도착했다는 편지도 없어서, 왕자님이 무사히 도착하셨는지조차 알 수 없었어요.”

“몰래 다녀오려고 한 거니깐… 물론, 내가 자리를 비웠단 걸 눈치 못 채는게 바보일 정도로 오래 걸렸지만.”

하루이틀도 아니고 두 달 가까이 카이엔은 세자르에 없었다.

아직도 그를 걱정하고 있는 남작의 어깨를 토닥이며 카이엔은 남작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이러고 있는 모습을 보면, 꼭 진짜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된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화제를 돌리기 위해 카이엔이 물었다.

“프라우디에는? 페이리가 잘 돌봐주고 있지?”

“물론입니다. 함께 연구하고 있는 게 있다면서 페이리 씨의 다락방에서 나오질 않으시는군요. 밤 늦게까지 불이 켜있는 일이 허다합니다.”

잘 지내고 있다면 다행이었다.

카이엔이 남작과 반갑게 인사를 하는 사이 자네인과 에빌이 마차에서 내렸다. 미리 구해놓은 망토의 후드를 뒤집어쓰게 해 검은 피부와 긴 귀, 얼굴을 감추게한 엔베인이 어색하게 그들 사이에 서있었다.

남작의 시선이 순간 엔베인을 향했지만 남작은 수상한 사람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많이 피곤하시겠습니다. 어서 들어가서 쉬시죠.”

“응. 고마워.”

남작은 먼저 가보겠다며 인사를 하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가고 나서 카이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릴리시아에게 엔베인을 보여주는 건 나중으로 미루기로 하고 그들은 서둘러 페이리의 다락방으로 향했다.

문을 두드리며 이름을 부르자 페이리가 살짝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왕자님!”

“우왓!”

카이엔의 얼굴을 확인하고 페이리는 활짝 웃으면서 문을 더 열고 밖으로 나와 카이엔을 끌어안았다.

이렇게 페이리의 품에 폭 안기는 건 어렸을 적 이후로는 처음이라 카이엔은 당황하며 페이리의 팔을 붙잡았다.

버둥거리다가 혹시라도 그녀를 때려버릴까봐, 카이엔은 머뭇거리다가 그냥 팔을 뻗어 페이리를 마주 안아주었다.

“미안. 힘든 일 맡겨서 미안해. 어땠어?”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그치만 프라우디에의 상태가…”

“많이 안 좋아?”

“왕자님이 떠나시고 삼일 뒤, 의식을 잃었어요. 숨은 쉬고있지만 아무래도 버티기 힘들었던 모양이에요.”

“시간이 많이 흘러버렸는데… 다락방은 좁을 테니, 연구실로 가자.”

“네.”

페이리가 담요에 꽁꽁 싸맨 프라우디에를 넘겨주었다. 자네인이 조심스럽게 프라우디에를 안았고 그들은 좀 더 넓은 프라우디에의 연구실에 가서 그의 상태를 살피기로 했다.

가는 도중에 하인들과 마주쳤지만 그들은 고개 숙여 인사할뿐 카이엔의 걸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여러명이 함께 어디로 가는 걸로 봐선 중요한 일이 있는가보다, 라고 여길뿐이었다.

엔베인은 낯선 장소에서 혹시라도 그들을 놓칠까 봐 카이엔의 뒤통수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프라우디에의 연구실에 도착해서, 어디에 그를 뉘여야 할지 고민하다가 자네인은 실험대에 프라우디에를 눕혔다.

치료를 하려면 주변 공간이 넓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몸을 감싼 담요를 치우자 훤히 열린 가슴 사이로 보이는 라이프 베슬이 나타났다.

엔베인이 깜짝 놀라 물었다.

“이건…!”

“난 몰랐는데, 저 안에 있는 게 리치왕의 라이프 베슬이래. 라이프 베슬이 무엇인지 알아?”

“더스크라이즈는 죽음의 기운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래서 간혹 깊숙한 곳까지 그 기운을 얻고자 들어오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럼 이 아이는…”

“호문쿨루스래.”

“음…”

엔베인은 입가에 손을 가져갔다.

아마, 이 아이를 낫게하기 위해 카이엔이 더스크라이즈에 와서 다크 엘프인 그를 데려온 것이리라.

죽음의 땅에 살아가는 다크 엘프인 그들은 죽음의 기운을 품은 마나를 다루는데 익숙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땅에서 살아 숨쉴 수 없었다.

그의 마력으로 상처를 이어붙이고 봉합하면 될 테지만, 그 정도로는 모자랐다.

“저는 의사가 아니지만… 그래도 마력만으로 이 아이를 깨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아이가 호문쿨루스라면 분명히 만드는데 쓴 재료가 있을 텐데, 다른 것은 없습니까? 비어있는 부분을 채우기위해 필요합니다.”

“재료?”

“재료라면…”

“저한테 있습니다. 제 피를 뽑아서 프라우디에에게 주입하면 될 겁니다. 티아마티스 님께서 말하셨던 대로라면, 이 몸에 흐르는 독룡의 피가 리치왕의 라이프 베슬의 존재를 가리고 있었을 테니까요.”

“그럼 피는 얼마나 뽑아야 하지?”

다들 연금술은 커녕 의학적 지식도 일반인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외부인인 연금술사나 의사를 끌어들일 수 없어서 고민하고 있는데 근처 서랍장이며 찬장을 뒤지던 바이스가 몇 가지 도구를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그는 의자 하나를 끌어오더니만 말했다.

“자네인 님이 이쪽에 앉으시죠. 제가 피를 뽑겠습니다.”

“어… 너 할 수 있어?”

“제가 잡다한 지식이 많거든요. 요컨대, 뽑아서 주입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래도 되는 걸까? 걱정되는데…”

“타인의 혈액을 잘못 주사하면 죽어버릴지도 모르지만 프라우디에 님은 일단 호문쿨루스니까요. 게다가 독룡의 피라고 하니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엄청 걱정되는데…”

“티아마티스 님도 그걸 알고 자네인 님을 두고가신 게 아닐까요?”

묘하게 설득력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수혈은 좀 더 생각해보기로 하고 일단 피부터 뽑아놓기로 했다.

한쪽에서 자네인이 수혈을 위한 피를 뽑는 동안 엔베인은 검은 마나로 프라우디에의 찢긴 살을 기우기 시작했다. 마력은 마치 바늘과 실처럼 한땀한땀 프라우디에의 빈 부분을 채워나갔다. 너덜거리는 살점을 이어붙이고 봉합했다.

그동안, 프라우디에는 단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움찔거림조차 없이 미약한 숨만을 내뱉었다.

촘촘하게 꿰매는 작업은 두 시간정도 걸렸다.

마력을 쓰는 작업인지라 마지막 한 땀을 놓고 나서 엔베인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땀을 뻘뻘 흘리는 그의 이마에 카이엔이 손수건을 가져다댔다.

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건드렸다가 집중을 흩어지게 할까 봐, 일부러 손대지 못 했었다.

손이 후들후들 떨리는 그를 부축해서 소파에 앉게하니 바이스가 뽑은 피라면서 아직 따뜻한 피가 담긴 유리병을 건넸다.

“…이걸 어떻게 주입하지?”

“제가 하겠습니다.”

“네가 어떻게 이런 걸 다 알아?”

“예전에 프라우디에 님이 실험할 때 본 적이 있거든요. 도구에 대해 물어보니 잘 알려주시더군요.”

아마 프라우디에는 자기 몸이 실험 대상이 될 줄도 모르고 열심히 설명해줬을거다.

부디 저 피가 잘못 주입되어서 프라우디에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빌며 카이엔은 엔베인의 옆에 앉았다.

그가 준 손수건을 꼭 쥔채 엔베인은 고개를 숙이고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미안. 멋대로 끌고온 걸로도 모자라서 도착하자마자 힘든 일부터 시켰어.”

“아닙…니다. 제 도움이 필요하셨고 위급한 상황이었잖아요.”

“쉬어. 나도 프라우디에가 깰 때까진 여기 있을 테니… 아. 에빌이랑 자네인, 글라스는 돌아가서 쉬어도 좋아.”

“엥? 나도 여기 있을게 카이엔!”

“아냐. 쉬어. 나 따라다니느라 고생 많았다. 여긴 나랑 엔베인, 바이스만 있어도 될 것 같아.”

“왕자님, 저는 여기 있고 싶습니다. 프라우디에가 깨어나는 걸 보고 싶고… 제 피가 더 필요할지도 모르니까요.”

한 병 가득 피를 뽑았음에도 자네인은 힘들지도 않은 건지 담담하게 말했다.

그 눈빛에 카이엔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려고 하지 않는 건 글라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수혈 준비를 마친 바이스가 손을 닦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에빌 씨와 글라스 씨는 돌아가서 쉬십시오. 왕자님 시중 드는건 저 혼자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푹 쉬시고, 내일 다시 오십시오.”

“그치만…”

“아. 그렇다면 저녁 식사라도 가지고 와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저녁까지 함께 먹고 잘 때 방으로 돌아가는 건 괜찮죠?”

“으으음…”

“쫓겨나실래요, 잘 때 얌전히 방으로 돌아가실래요?”

“저녁밥 가져오겠습니다.”

반 협박조의 목소리에 에빌과 글라스는 냉큼 꼬리를 숙였다.

연구실의 한편에 마련된 식탁에서 식사를 한 뒤 글라스와 에빌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방으로 돌아갔다. 가려고 하지 않는 걸 바이스가 거의 쫓아내다시피했다.

그런 다음 바이스는 자네인도 씻고오라면서 쫓아냈다.

“전 왕자님 옷을 가져오겠습니다. 엔베인 님이 입으실만한 것도 찾아오겠습니다. 쉬고 계세요.”

“응. 다녀와.”

바이스까지 가고나면 곁을 지킬 사람이 한 명도 없건만 카이엔은 태평했다.

미소를 지으며 바이스는 금방 오겠다며 프라우디에의 연구실에서 나갔다. 느긋하게 하품을 하고 있는 그에게 마검이 말을 걸었다.

- …넌 뭐냐?

“갑자기 무슨 말이야?”

- 다들 널 왕자라고 불러. 들은 건 많지만 솔직히 확신은 안 가.

“왕자니까 왕자라고 부르지. 더 이상은 왕자가 아니지만.”

- 말장난을…

“진짠데.”

카이엔은 피식 웃었다.

이젠 이성과 지능이 있는 마검에게까지 그의 복잡한 과거사를 들려줘야 하는 건가 싶었다. 새식구가 되었으니 그 정도는 알려줘야 했지만.

특별할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부모인 국왕 부부가 죽어버린 다음 어린 왕자가 겪었던 온갖 사건들. 목숨을 위협당했던 일들. 아직도 끊이지 않는 암살자.

카이엔은 깍지낀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정말로,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였다. 이제와선 남의 이야기처럼 담담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흔한 이야기지?”

- …별로.

“흔한 건… 아닌데요.”

“그래?”

카이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평범한 일이었다.

실수로 위장해 몬스터를 풀어 죽이려고 했던 것도 독이 든 음료도 밤마다 찾아오는 암살자와 일부러 주변 환경이며 물건등을 허술하게 만들어 다치게 만드려는 움직임들이.

특히 암살자는 세자르 남작의 보살핌을 받으면서도 꾸준히 찾아왔다.

잠들지 못 했던 밤은 페이리가 식구가 되고 바이스가 시종으로 붙으면서 그 횟수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하루하루가 불안정했다.

“뭐, 난 끝까지 조용히 살거지만.”

- 보통 그쯤되면, 복수심이라도 품지 않나?

“글쎄… 모르겠어. 난 이대로가 좋아. 복수라… 글쎄…”

카이엔은 말끝을 흐렸다. 그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준 다음 마검이 하는 이야기가 복수라 조금은 재밌기도 했다.

“아무튼, 나를 어떻게 부를지는 너희들 자유야. 그냥 '카이엔 님'도 상관없는데 다들 왕자님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저도 왕자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 난 네놈을 부를 일이 딱히 없을 것 같은데.

“하하. 그 말도 맞네. 음, 왕자가 편하면 그렇게 불러. 이제 같이 살게될 테니까.”

“정말… 괜찮으신가요?”

“뭐가?”

“저를 받아주셔도…”

“문제 없을 것 같아.”

- 허어?

“마검도 말야. 말할 줄 아는 걸 보면 이성도 있고 지성도 있는 모양이니까 부숴버리는 건 좀 미안한데.”

- 이상한 인간이군.

“뭐하고 싶은지 생각해봐. 세계정복같은 거 말고. 난 그런 거 귀찮아서 싫어.”

하품을 하며 카이엔은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에게도 돌아오는 길은 고되어서 빨리 쉬고 싶었지만 바이스가 옷을 만들어오는 건지 상당히 늦었다.

이곳과 그의 방 사이의 거리를 생각하면 늦을 법도 하지만 피곤해서 그런가 괜히 심술이 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