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다그닥 다그닥.
규칙적으로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분위기를 더욱 차분하게 만들었다.
엔베인과 마주보고 앉은 채로 카이엔은 창 밖을 내다보았다.
에빌은 이 어색한 분위기가 답답하다면서 마부석의 글라스와 자리를 바꿨다.
글라스는 글라스대로 자기가 타면 자리가 좁다면서 박쥐로 변해 새장 안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새장을 검은 천으로 덮어줬으니 아마 자고있으리라.
카이엔의 옆에는 자네인이 앉았는데 그녀 역시 말이 많은 성격이 아닌지라 조용히 정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고요한 마차 안에서 소금이만은 찍찍거리면서 카이엔에게 말을 걸었다.
- 저놈은 또 뭐하는 녀석이냐!
“어, 다크 엘프야. 옆은 마검.”
“저… 혹시…”
“응. 여기 이 햄스터도 몬스터야.”
엔베인은 깜짝 놀라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열심히 찍찍거리는 소금이를 반쯤 무시하며 카이엔은 피곤한지 하품을 했다.
바로 정면에 마검에게 반쯤 기생당한 다크 엘프가 있음에도 하나도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카이엔이 아무것도 묻지 않기에 엔베인도 입을 다물었다. 마검 역시 엔베인에게 말을 걸지 않고 어디에 있는 건지 모를 눈으로 카이엔을 응시했다.
‘이상한 사람.’
‘이상한 인간.’
둘 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햄스터 몬스터라는 녀석이 뽈뽈 기어다니면서 그의 옷 위로 기어올라가도 카이엔은 아무렇지도 않게 멍하니 창 밖만 바라보았다.
다시 가르간트로 돌아가기 위해 숲을 통과하던 그들은 올레이스 백작의 영지와 더스크라이즈를 가르는 방벽에 도착하기도 전에 또다시 사제 일행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들은 멀리까지 가지 않았던 모양인지 마차를 발견하자 당황하면서도 또다시 인사를 했다.
“돌아가시는 길입니까?”
“아, 네. 약간의 단서는 발견했는지라. 여러분은 수확이 있던가요?”
“그것이 좀 이상합니다. 기운을 쫓았는데 어쩌다보니 여러분을 다시 만나게 됐군요. 처음 만났을 땐 그렇지 않았는데.”
사제의 말에 바이스가 에빌에게 눈짓을 했다. 그 신호에 에빌은 마부석과 연결된 마차의 창문을 똑똑 두드리고 문을 열었다.
“카이엔, 사제님 일행이랑 다시 만났어. 그런데 좀 문제가…”
“문제?”
“불길한 기운을 쫓다가 우리를 만났대. 어떻게 말할까?”
“보여줘도 되지 않나?”
“네?”
“안될 건 없지. 저들도 사실은 알아야 할 거 아냐. 그리고 그 불길한 기운은 저 마검을 말한 게 아닐까? 하늘에서 떨어졌다면서.”
“일리가 있군요.”
“나가볼게.”
카이엔은 소금이를 새장에 넣고 자네인에게 건네준 뒤 마차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오자 구면인 사제는 고개숙여 인사했다.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희는 이제 다시 가르간트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그렇군요. 찾으시던 건…”
“조금 걱정되는 상태긴 하지만 찾았습니다.”
“네?”
“이상한 마검에 반쯤 침식되어있어서 영지 내의 마법사에게 보여줄 생각입니다. 그 다크 엘프가 희생양이 되어서 홀로 파괴된 마을에 묶여있었으니 치료하고 보살피고자 합니다.”
“그런 일이…”
“아마 여러분이 느낀 그 기운이 마검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지금은 흉흉한 기운도 없고 얌전하더군요. 다크 엘프 분도 멀쩡하고.”
카이엔의 말에 사제 일행은 한곳으로 모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카이엔을 믿을 수 있을지에 대한 상의일 것이다. 직접 보여줘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하고 있으니 마차가 삐걱이는 소리가 나더니만 엔베인이 마차 밖으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제 문제이니,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네가 잘못되면 큰일인데.”
“괜찮을 겁니다.”
엔베인은 카이엔의 옆에 나란히 섰다. 도움을 준 사람에게 그 역시 도움이 되고싶어서 한 행동이었는데 사제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그를 보고 깜짝 놀라며 외쳤다.
“머,머리카락이 은색이라니…!”
“네?”
“어? 너 은발 아니었어?”
“아뇨, 평범한 검은색이었…”
그러나 엔베인은 서둘러 자신의 머리카락을 대충 손가락으로 빗질해 걸려나온 머리카락의 색을 확인하고 기겁하고 말았다.
거짓말이 아니라, 그의 머리색은 원래 카이엔과 마찬가지로 검은색이었다. 그러나 손가락에 감긴 머리카락은 여길 봐도 저길 봐도 선명한 은색이었다.
놀라다 못해 경악한 엔베인의 얼굴에 일행의 중심에 서있던 성기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본인도 놀라는 겁니까?”
“이, 이럴수가…”
“마검 때문에 이렇게 됐을지도. 반쯤 먹히다가 정신 차렸으니까.”
“충격을 받으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건 정말…”
“왕자님은 괜찮으신 겁니까? 마검에게 침식된 엘프라니 그건-”
“괜찮을 겁니다. 말도 통하고. 아, 이 소문은 듣지 못 하셨으려나요? 가르간트의 쫓겨난 왕자가 “몬스터와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그건…”
“그게 정말입니까?”
“마검과도 말이 통해서, 일단 데려가서 조사해볼 생각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지만 카이엔도 속으로 긴장했다.
쫓겨난 왕자.
그런 사람이 힘을 원해서 이종족을 포섭해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여겨질지도 모르니까.
다행히 사제는 그를 의심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사제는 말없이 품에서 유리병을 하나 꺼내 카이엔에게 건넸다.
“성수입니다.”
“호오. 이거 뿌려봐도 되나?”
“아, 네.”
- 이, 이놈!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거냐!
엔베인은 냉큼 마검을 내밀었고 카이엔은 마검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을 무시하고 성수를 조금 떨어뜨렸다.
그러자, 마검은 엄청나게 시끄러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 크아아아악! 이노오옴-!
“윽…”
“어? 너도 아파?”
“아뇨, 그냥 마검이 시끄러워서요.”
“그럼 됐네. 아예 마검을 성수에 담가놓으면-”
- 내가 죽으면! 이 놈도 죽는다! 크아악!
“안 되겠네.”
“도움이 되시는 겁니까?”
“엄청나게 도움이 되네요. 다른 분들이 이 소리를 못 듣는게 이토록 원망스러운 적이 없습니다.”
카이엔이 단언했다.
그 말에 사제는 성수를 몇 병 더 챙겨서 카이엔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런 곳에서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이니, 보다 도움이 되고 싶어서였다.
어차피 폐세자인 왕자는 몸을 사리고 있으니 사제에게 성수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주변에 퍼뜨리지 않을 테고.
카이엔은 사제의 도움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엔베인의 허락을 구하고 마검을 몇 번 만져보고 살펴본 다음 사제는 결론을 내렸다.
“비슷한 기운이 느껴지긴 합니다만, 잘 모르겠습니다. 조사가 더 필요하다고 여겨지는군요. 일단 에밀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여기서 에밀은 엄청 멀 텐데… 조심하십시오.”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왕자님도 부디 무사히 돌아가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서로 고개 숙여 인사를 하는 걸로 훈훈한 결말이 났다.
돌아가는 길, 엔베인은 카이엔이 성수를 뿌렸던 마검의 한쪽 귀퉁이를 말없이 쓰다듬었다.
흠이 생기거나 구멍이 난 건 아니었다. 그는 아프지 않았는데 마검은 비명을 질렀다는게 조금 이상하긴 했다.
‘그곳에 마법사가 있다고 했지.’
그럼 그의 상태도 봐줄 수 있는걸까? 그는, 이 검과 떨어질 수 있는 걸까?
만약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동포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안다. 하지만…’
검은 머리카락은 은빛으로 바뀌어버렸다. 거울을 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눈동자의 색도 바뀌었을 수 있다. 마검의 영향을 받은 탓이리라.
나는, 과연 내가 맞는 걸까. 의식은 나뉘어졌지만 알게 모르게 바뀐 부분이 있을지도 몰랐다.
엔베인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콰직!
무언가를 부수는 소리에 엔베인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앞을 바라보니 자네인이 맨손으로 호두를 쪼개어 그 안에 있던 알맹이를 새장 안의 햄스터에게 건네는 모습이 보였다.
호두 부스러기를 한쪽의 가죽 주머니에 탈탈 털어버리고 또다른 호두를 손에 쥔 자네인은 주먹을 콱 쥐는 것만으로도 단단한 껍질을 부숴버렸다.
…이번에는 힘을 너무 많이 준건지 알맹이까지 작살이 나버렸다.
“아.”
“어라.”
“소금이에겐 미안하게 되어버렸네요.”
“괜찮아. 많이 주지 마. 얘 살찐다.”
그때, 마검이 중얼거렸다.
- 소금이?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었다. 카이엔이 한번 언급한 적이 있었다.
마검이 말하는 걸 보고 소금이가 말하는 줄 알았다고 했었던…
- 내가 저 쥐새끼랑 같다고?!
“어, 너 깨어있었구나? 인사해. 얘가 소금이고 내 애완 햄스터 몬스터야. 그러고보니 아까 이름을 안 알려줬었구나.”
- 이게 무슨…!
“거만한 말투가 닮았지.”
- 내, 내가 저런 쥐새끼랑…
마검은 말문이 막혔는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분명 사람이었다면 뒷목을 잡고 쓰러졌을 정도의 말투에 엔베인은 빤히 소금이를 쳐다보았다.
한 손에 쏙 들어올 사이즈의 앙증맞은 햄스터는 누가 뺏어갈까 봐 열심히 호두를 입안에 쑤셔넣고 있었다. 작고 동그란 검은 눈이 엔베인과 마주쳤다.
인사를 해야하나 하고 고민하는 그에게 카이엔이 말했다.
“소금이가 뭘 보냐는데?”
“네?”
“쟤, 쬐끄만게 성격은 엄청 더러워. 조심해.”
“아…”
“네 마검이랑 비슷하지?”
엔베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검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서 한쪽 귀를 막았지만 머릿속으로 직접 전달되는 목소리인지라 여전히 시끄러웠다.
***
돌아가는 길은 멀었다. 카이엔은 심심한 건지 마검에게 자주 말을 걸었고 마검 역시 카이엔의 말에 대충이나마 대답을 해주었다.
마검은 자신이 왜 그곳에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리고,
- 네놈이 날 잡은 순간 보다 확실히 눈이 뜨인 것 같았다.
“내가?”
- 그래. 그 전까진… 몸을 불리고 더 많이 잡아먹고, 강해져야 한다는 것밖에 떠올리지 못 했다. 지금은 아니지만…
“지금은 어떤데?”
- 잘, 모르겠다. 뭘 해야할지도 이제 모르겠어.
“이젠 강해지지 않아도 되고 다른 생명을 잡아먹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 …아마도.
자신감없는 목소리였다.
카이엔은 턱을 괸 채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손을 대는 것으로 마검과 엔베인의 정신이 분리되었고 마검에겐 이성이 생긴 모양이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뿐인데.
‘우연이겠지’
아주 기막힌 우연.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카이엔이 일부러 웃으며 말했다.
“그럼 너도 이름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마검은 잘 모르겠고, 책에서 본 전설의 성검 엑스칼리버같은건 어때?”
- 무슨 미친 소리를!
“난 마검 이름 아는 거 없어. 넌 아냐?”
-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엔베인, 너는?”
“저, 저도 잘은…”
“그럼 됐어. 마검이라고 불러야지.”
사제는 마검에서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가르간트 내에도 사제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기에, 글라스가 마을에 들러서 간단한 약초와 몇 가지 도구를 가져와서 기운이 마차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간단한 마법을 걸었다.
이런 면에선 참 유능한 시종 대리였다.
다행히 세자르 영지로 돌아가는 길에 변수는 없었다.
물론 갈 때보다 좀 더 많은 도적들과 마주치긴 했지만 놈들은 바이스와 자네인 앞에서는 바람앞의 촛불이나 마찬가지였다.
입으로 훅 불면 촛불이 금방 꺼지는 것처럼 바이스가 검 한번 휘두를 때마다 도적들의 목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으니까.
창 밖을 내다보던 카이엔은 질색을 하면서 커튼을 휙 닫았다.
이번엔 에빌도 도와주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두 사람의 실력이 워낙 월등하니, 속도의 차이가 꽤 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