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그들이 발견한 다크 엘프는 앞을 보지 못 하도록 눈에는 안대가 씌워져있고 입에는 재갈까지 물려있었다. 귀를 기울이니 옅은 숨소리가 들렸다.
살아있는 건가.
사슬 사이로 언듯 보인 피부색은 검은빛을 띠고 있었다. 다만, 머리카락의 색은 밝은 은빛이있었다.
다가가려는 카이엔의 어깨를 누군가 급하게 붙잡았다. 뒤를 돌아보니 글라스였다.
“와, 왕자님! 가까이 가시려구요?!”
“어? 으응… 그러려는데.”
“굉장히 나쁜 기운이 느껴지는데요? 위험해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서 글라스가 외쳤다.
그러나 카이엔은 잘 모르겠다며 고개만 갸웃거렸다.
목소리가 들려오는 걸로 봐선 살아있다는 거 아닌가? 살아있고 말을 할 수 있다면, 언어가 통한다면, 보다 원활하게 소통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카이엔은 구속된 저 다크 엘프가 그에게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지금도 열심히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저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걸까?
- …라니. 무슨 인간이 이런 곳에!
- 저놈들은 대체 뭐지? 허어, 이 땅에 인간이 들어올 줄이야! 목숨이 아깝지 않은 건가?
“내가 할 말인데, 그건.”
“왕자님?”
“아… 나한테만 들리는 건가. 이런 미친.”
짧게 욕설을 내뱉고 카이엔은 자신을 붙잡고 있는 글라스의 손을 떼어냈다.
저 다크 엘프의 목소리라면 일행 모두 들었을 텐데 오직 그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라면.
저 자가 내는 소리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카이엔은 혀를 차며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목소리는 당황하며 외쳤다.
- 뭐, 뭐야! 왜 가까이 오는건데?!
“너, 뭐야?”
- 내가 할 말이다!
“흠, 소리는 여기서 들리는 건가?”
카이엔의 온몸이 구속된 다크 엘프의 손에 쥐어진 검을 향했다.
손잡이부터 시작해서 검끝까지 모조리 검은색인, 처음보는 검이었다. 이 검을 보고 있으니 글라스가 왜 나쁜 기운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꺼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말하는 검이라니. 마검인가?
간단한 의식의 흐름으로 카이엔은 검을 마검 취급하기로 했다.
시끄럽게 떠드는 마검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그는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 다크 엘프의 눈을 가리고 있는 안대를 풀었다.
뺨이 꽉 조일정도로 세게 매어진 재갈도 풀어내니 그제야 그는 참아왔던 숨을 터뜨리듯 흘려댔다.
“헉…! 허억…”
“앞은 보이나?”
“다, 당신 대체 무슨 짓을…! 왜, 왜…!”
“시끄러워. 사슬은 안 끊었으니깐. 대체 왜 이런 데에 묶여있었는지나 말해봐.”
안대를 풀자 가려졌던 눈으로 쏟아지는 햇살. 터져나온 숨에 다크 엘프 청년은 당황해서 외쳤다.
카이엔의 말과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는 사슬, 움직이지 않는 몸에 그는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았다.
다행히 동포들이 일을 잘 마치고 갔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차분히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애를 썼다. 검은 머리카락은 다크 엘프들 사이에선 흔한 색이었지만 그를 풀어준 사람의 피부는 검지 않았다.
인간. 말로만 듣던 인간이 저런 형상을 취하고 있겠지. 은빛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 더스크라이즈에 인간이 왜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에게 아직 이성이 남아있을 때 이곳에서 일어난 일의 전말을 알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큰일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 같다.”
“제 이름은 엔베인, 이라고 합니다. 더스크라이즈에서 살아가는 다크 엘프 중 한 명으로… 이곳, 더스크라이즈는 어째선지 자연인데도 불구하고 죽음의 기운을 품은 검은 마나가 흘러나와 자연이 모두 죽음을 닮아가 숲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언데드가 비상하며 바깥에는 괴물들이 들끓는 곳입니다. 그러했기에 인간은 발길을 돌리고 오랜시간 떠돌던 다크 엘프들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엔베인’이라고 소개한 젊은 다크 엘프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느 날, 수상한 기운을 풀풀 풍기는 검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벼락이 내리치는가 싶더니만 그 자리에 꽂힌 그것을… 수상하게 여겨서 저희는 경계하며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습니다. 먼 발치에서 지켜보기만 했는데… 지나가던 작은 몬스터가 검에 닿은 순간, 검에 잡아먹혔습니다.”
앙증맞은 몸에 검이 달라붙어서 움직이다가 빠르게 숲속으로 도망쳤다.
큰일이 났음을 느낀 다크 엘프들이 서둘러 추적했지만 그 검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숲으로 도망친 그것은 이후 거대하게 몸집을 불린 뒤 나타나 수많은 동포들을 학살했다.
얼마나 많은 몬스터를 흡수한 건지, 베어도 베어도 쓰러지지 않고 상처조차 나지 않는 괴물.
그들은 겨우겨우 그 괴물을 몰아넣었지만 동족의 피해는 너무나도 컸다.
“부상을 입으면 근처에 있던, 자신과 닿아있던 것을 집어삼키더군요. 그때 약간의 빈틈이 생기는 것을 노리기로 했습니다.”
괴물은 부상의 수준이 심각하면 그대로 도망쳐서 회복한 뒤 다시 돌아왔다.
그 뒤를 밟은 동포가, 그것이 다른 몬스터를 흡수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들은 누군가의 희생으로써 만들어지는 빈틈을 노려 괴물을 처치하기로 했다.
“제가, 희생하겠다고 했습니다.”
“결과가 이런 걸로 봐선 바보짓한 거 아냐?”
카이엔의 칼같은 대답에 엔베인은 고개를 숙였다.
다른 마을에서도 도와주러 온 동포들이 일제히 공격을 감행했고 괴물의 팔에 휘감겨있듯이 엉켜있는 검을 떼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검은, 엔베인의 손이 닿자 그를 집어삼키기 위해 몸을 불렸다.
미리 계획한 대로 동포들이 그를 단단히 구속했다. 도저히 벗어나지 못 하도록, 움직이지 못 하도록.
그러나 엉뚱한 인간이 나타나 안대와 재갈을 풀어버렸다. 몸을 묶은 사슬을 풀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는데 카이엔이 사슬을 툭툭 치더니만 물었다.
“이 자식 목소리가 엄청 크더만. 친구라도 불러와서 다 망치려고 한 거 아냐?”
“목소리…라니 그게 대체…”
- 아.
검이 짤막한 신음을 흘렸다.
마검은, 이성을 갖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카이엔이 마검에게 말을 걸었다.
“야, 너 뭐 할 말 있냐?”
- 네놈은 인간 주제에 어떻게 내 말을 알아들은 거지?!
“난 몬스터 말을 알아들을 수 있거든. 어디서 그 말투를 들어봤다 싶었는데 우리 소금이랑 똑같네. 난 처음에 소금이가 말하는 줄 알았는데.”
“소금이…?”
“이놈 잡으면 나도 먹히는 거냐?”
“잠깐-”
엔베인이 뭐라고 만류하기도 전에 카이엔은 엔베인의 손에 들려있는 검을 살짝 만져보았다.
그는 멀쩡했다.
고개를 끄덕이더니 카이엔이 손을 탁탁 털며 말했다.
“아까 사제들도 만났는데 잘 됐네. 이거 가져가서 그 녀석들한테 넘기자! 그럼 해결되겠지!”
- 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겁먹은 걸 보니 맞는 모양이네.”
- 날 죽이면 이 녀석도 죽는다! 내가 이미 기생을 완료했으니, 목숨이 연결되있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뭐야 이게. 흠… 너 다크 엘프면 검은 마나 다룰 수 있지?”
“그…렇긴한데… 여기서는 그 마나를 다루지 못하면 죽어서…”
“그럼 같이 가자. 어차피 여기서 더는 못 살거 아냐. 거기가면 어… 마법사도 있으니까 떼어낼 방법도 찾아보고.”
어쨌든 목적은 이루었다.
다크 엘프를 만나서 도움을 요청하는 건데 마검한테 반쯤 잡아먹힌 다크 엘프지만 일단은 다크 엘프니까!
좀 복잡하긴 하지만 원활하게 해결되었다며 카이엔은 만족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엔베인은 떨떠름해하며 카이엔과 자신의 손에 감긴 검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폭주할지도 모르는데…”
“괜찮아. 야, 검.”
- …….
“대답 안 하냐?”
- 왜 그러지?
“너 내 말상대나 해라. 말하는 검이라니 완전 신기하네.”
- 이게 무슨…
마검에서 어이없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몸이 연결된 처지라 그런건지 엔베인 역시 마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째서, 카이엔과 만나고 나서야 그 목소리가 들리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자리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엔베인을 보더니 카이엔은 바닥에 말뚝으로 박힌 사슬을 툭툭 쳤다. 그의 힘으로는 다 풀어줄 수 없었다.
“음… 바이스랑 에빌로는 무리겠지? 자네인, 도와줄래?”
“네.”
“힘들겠지만 부탁할게. 드래곤…이면 너도 세지?”
“저는 정확히 말하자면 드래곤이 아닙니다. 정확히는 반룡… 아니, 반쪽도 아니군요. 드래곤의 피를 받은 인간이니까요.”
“이거 풀 수 있겠어?”
“문제없습니다.”
자네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땅에 박힌 말뚝을 쑥쑥 뽑아버렸다.
덕분에 잔뜩 긴장상태였던 엔베인은 자신을 묶어놓은 사슬이 힘없이 풀리자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에 머리를 부딪친 그는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구속된 지 시간이 꽤나 흘렀던 탓에 온 몸이 저릿저릿하고 피가 잘 돌지 않았다.
팔짱끼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이엔이 바이스를 보며 물었다.
“내가 잘한 게 맞나?”
“사람을 구한 걸 생각하면 잘한 것은 맞습니다. 다만, 저 분이 본인 입으로 말하셨듯이 폭주의 위험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위험이 있다면 진작에 위험했겠지. 봐, 저 모습.”
다리가 저려서 꼼짝도 못 하고 있는 엔베인에게 마검이 마구 화를 내고 있었다.
마검에게 쪼이고 있는 불쌍한 다크 엘프를 바라보며 카이엔이 허탈하게 웃었다.
“쟤 좀 큰일난 것 같아.”
“네?”
“마검이랑 한 몸이 되어버렸잖아. 떼어낼 수 있을지나 모르겠네.”
엔베인의 말에 따르면, 저 검은 몸에 닿은 것을 집어삼켰다고 했다.
그렇게 몸집을 불리다가 다크 엘프의 마을을 습격했고 미끼로 나선 엔베인이 최후의 희생양이 되었을 테지. 제대로 봉인한 것이 아니라 마검은 다크 엘프의 육체를 얻고 마구 날뛰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지금 상황을 봐선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성이 생긴 건가?’
처음엔 몬스터들을 잡아먹었지만 조금은 생각을 할 줄 알고, 언어를 가지고 있고 이성이 있는 놈을 먹고 마검이 진화를 했을지도 몰랐다.
먹이사슬의 고위층에 속한, 다크 엘프를 잡아먹는 도중에 지능이 생겨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을지도. 물론 추측일 뿐이었다.
엔베인이 겨우겨우 몸을 일으키자 카이엔이 말했다.
“그럼 가자. 근처에 마차가 있으니까, 돌아가는 길엔 그걸 타고가면 돼. 아, 가족에겐 인사하지 않아도 되나?”
“어차피 미끼가 되기로 하면서 작별 인사는 다 나눴습니다.”
“그럼 문제없네. 가자.”
- 미친 인간 같으니…
“너 지금 나보고 미쳤다고 했냐?”
“네? 저, 저요?”
“아니. 너 말고 네가 들고있는 검.”
카이엔의 말에 마검은 아무 말도 안 한척 딴청을 피웠다. 피식 웃으며 카이엔은 손가락을 까딱였다. 엔베인은 머뭇거리면서도 카이엔을 따라갔다.
그에게 있어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의 연속이었다.
재앙과도 같은 마검에게 잡아먹혀 그대로 죽을 줄 알았는데 그는 죽지 않았고 인간의 도움을 받았다. 게다가 그 인간은 그를 바깥으로 데려가려고 하고 있었다.
혹시 마검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에게도 생생하게 들리는 건가 싶어서 그가 물었다.
“이 검에서 목소리가 나는 겁니까?”
“나 밖에 못 들을 거야. 난 몬스터의 말을 들을 수 있거든. 다른 녀석들은 검이랑 이야기하는 너나 내가 미친놈처럼 보일걸?”
“아…”
“다크 엘프를 데려가는 건 역시 시선을 끌겠지. 글라스, 네가 고생 좀 해야겠다.”
“어차피 환각 마법을 써도 오래 쓰진 않잖아요. 괜찮습니다.”
“다크 엘프의 법 상 인간의 사회에 살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그런 건 없는데…”
“그럼 됐어. 문제해결.”
빨리 돌아가자며 카이엔이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뒤를 바이스가 뒤따랐고 나머지도 움직였다. 아직 걸음이 서투른 엔베인이 제일 늦게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옆에서 마검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미친 인간이 확실하다. 대체 뭘 믿고 나에게 그딴 말을…
“신기하네.”
- 뭐?
“난, 너한테 잡아먹히는 와중에도 네 목소리를 듣지 못했어.”
그런데.
카이엔이 안대를 벗겨주었다. 그의 손이 마검에 닿았고 그때부터 마검의 목소리가 엔베인 자신에게도 들리기 시작했다.
‘신기한 사람.’
따라가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마검에게 잡아먹히는 끔찍했던 일이 떠올라 엔베인은 몸을 떨었다.
눈앞이 깜깜해지고 몸이 옥죄이며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그 와중에 옆에서 말하는 목소리는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의 조각에 불과했다.
점점 가라앉는 의식 속에서 카이엔의 목소리만은 선명하게 들려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이 사람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말이 통하는 마검의 존재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굉장히 신경질적이고 성격이 급한 녀석같긴 하지만, 목숨이 연결되어있는 이상 그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란걸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는 의식이 멀쩡히 존재했으니 마검 혼자 힘만으론 그를 조종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