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흰 바탕에 금실로 수놓은 옷. 일행의 중심에는 사제가 있었다.
바이스의 말대로 갑옷을 입은 자도 있었는데 갑옷의 문양으로 판단하건대, 성기사였다.
성국 에밀의 사람들이 몬스터들의 땅에 있다니.
카이엔은 입을 꾹 다물었고 옆에서 찍찍거리는 소금이에게 손가락을 펼쳐 보여주었다. 조용히 하라는 뜻이었다.
사제와 성기사로 구성된 일행은 카이엔 일행을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인사부터 했다.
“안녕하십니까.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인연이란 알 수 없군요.”
“안녕하십니까.”
대답한 건 바이스였다.
주인인 카이엔을 대신해 바이스는 웃는 얼굴로 한 걸음 앞으로 걸어나왔다.
“성국의 분들이신가요? 더스크라이즈에서 사제분들을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가르간트로 가시는 길인가요?”
“아닙니다. 그저 수상한 기운을 조사하기 위해 온 것일 뿐이죠. 아직 찾지는 못 했습니다만…”
“몬스터입니까?”
“그 이상입니다. 어느 순간 확 치솟아오르듯, 온 몸을 떨리게 할 정도의 불길한 기운이 느껴져서 조사단이 꾸려졌지만 기이하게도 찾을 수가 없군요.”
삼십 대 초반 정도의 젊은 사제가 일행의 대장인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그 뒤에 있던 성기사 셋과 보다 어린 사제 한 명 역시 표정이 어두워졌다.
조사하러 왔지만 성과가 없어서 헤메고 있다는 뜻이었다. 안타깝긴 했지만 그들이 도울 수 없는 일이었다.
카이엔이 입을 다물고 있었기에 바이스가 사제와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혹시 다크 엘프들과 만났냐는 물음에 사제는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일입니다. 그들에게도 자초지종을 묻기 위해 가장 최근에 교류가 있었던 마을로 갔지만 텅 비어있더군요. 거주지를 옮긴 건지… 확실히, 폐허가 된 곳이 많았습니다만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렇군요.”
“여러분은 다크 엘프와 만나기 위해 이곳에 오신 겁니까?”
“아. 사정이 있어서요. 다크 엘프도 일단은 엘프니까 식물에 대한 이해도도 높을 테고 능력도 있을 테니 조언을 좀 구하러 왔습니다.”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프라우디에의 상처를 낫게 하고 치유를 촉진하려면 검은 마나가 필요한데 어디 있을지 모를 언데드나 그것을 부리는 술사를 찾는 것보단 그나마 다크 엘프가 모여있다는 이쪽이 찾기 쉬울 것 같아서 온 거였으니까.
검은 마나는 죽음의 기운이라 그것에 닿은 엘프들은 하나같이 검은 피부에 검은색 혹은 갈색의 짙은 머리색을 가졌다고 한다.
네크로맨서던 흑마법사던 하는 놈들은 너무 찾기가 어렵고 어디 있을지 모르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바이스에게서 의심스러운 구석을 찾아낼 수 없는 사제는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확실히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다른 다크 엘프는 모르겠지만, 이전에 에밀과 접촉한 적이 있는 다크 엘프분들이라면 저희에게도 우호적으로 대해주셨으니까요.”
문제는 그 다크 엘프들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거였지만.
그리고 대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행의 성기사와 대화를 나누는가 싶더니만 사제가 입을 열었다.
“저희도 원활한 정보 수집을 위해 다크 엘프 분들을 찾고 있습니다. 혹시 가능하다면, 동행해도 될까요?”
“으음.”
그 말에 바이스는 입을 다물었다. 이건 그 혼자서 대답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슬쩍 카이엔에게 시선을 보내자 카이엔은 한숨을 쉬었다.
사제며 성기사들과 동행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마땅한 이유없이 거절하는 건 ‘나 수상해요’라며 광고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여기서는 그의 정체를 이용해야겠다며 카이엔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살짝 자네인이 뒤로 내민 손에 소금이를 올렸다. 소금이는 얌전히 자네인의 손 위에 넘겨지면서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일행에 한 명이 더 끼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사제도 성기사도 언급을 하지 않았다.
무슨 이유가 있어서, 라고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짙은 푸른색 머리카락의, 집사같은 모습을 한 남자가 입을 다물고 기사들이 모습을 가리기 위해 앞에 나와있던… 감추려고 했던 자가 앞에 나오자 조금 놀란 듯 했다.
흑단과도 같이 검고 긴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흩날렸다.
착 가라앉은 붉은 눈이 사제들을 바라보았고 카이엔이 입을 열었다.
“…나는 가르간트의 폐세자입니다. 에밀의 사제 분들이라고 해도, 들은 것은 있을 테지요.”
“아… 죄송합니다. 왕자님을 못 알아뵙고-”
“인사는 필요없습니다. 인사받을만한 위치가 아닙니다.”
카이엔이 단호하게 손을 저었다.
왕성에서 일어난 잔인한 사건은 호사가들의 입을 타고 외국까지 전해졌다. 여러모로 그는 유명인인 것이었다.
그 소문이 이곳저곳 퍼진 게 지금만큼은 다행이라며 카이엔은 천천히 목소리를 냈다.
“더스크라이즈에는 비밀리에 방문했습니다. 친구의 병을 고칠 방법이 없나 알아보기 위함이라 오래 시간을 끌진 않을겁니다. 그래서, 사제분들과 동행했단 소문이 나면 곤란합니다. 보는 눈은 없지만 보이지 않는 것일 뿐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조용히 살고싶지만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서 최소한의 일행과 함께 온 겁니다.”
사제와 그 일행의 시선이 카이엔의 옆에 있는 세 사람으로 향했다.
시중을 들어줄 시종, 그리고 몸을 지킬 기사 두 명.
아무리 폐세자라고 해도 너무나도 조촐하기 그지없는 동행이었다. 정말로 비밀리에 남의 눈을 피해 급하게 여기까지 온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진실에 약간의 거짓말을 보탰다. 양심에 찔리긴 하지만 눈에 띄고 싶지 않다는 건 사실이었다. 성국의 사제들에게 연금술사가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생명체에 대해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사제의 눈동자에 안타까움이 더해졌다.
“무슨 병인지는 모르시는 건가요?”
“네. 그래서 다크 엘프의 도움을 받고자 합니다.”
“실례지만… 사제의 신성력으로는 나을 수 없는 겁니까?”
“그건…”
아, 망했나? 카이엔이 그렇게 생각했을 때. 이번에는 옆에서 바이스가 카이엔의 말을 받았다.
“왕자님을 노리고 든 암살자가 괴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자로 인해 검은 마나가 심장에 침식해 신성력이 깃든 물건을 가까이 하는 것만으로도 크게 괴로워하더군요. 그 정도였으니, 사제분들을 가까이 가게 했다간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고 말겁니다.”
…라며, 카이엔과 마찬가지로 진실과 거짓을 반쯤 섞어 말했다.
그 말에 사제며 성기사며 할 것 없이 진심으로 놀라고 안타까워하며 슬퍼했다.
분명 흑마법사일거라면서, 가르간트에 현상수배된 흑마법사를 찾아봐야겠다며 진심으로 슬퍼하고 분노하는 그들을 보며 카이엔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는 작은 거짓말을 한 것만으로도 양심에 찔렸는데 바이스는 더욱 기가 막히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지금도 아닌 척하면서 사제 일행을 설득하고 있었다.
설득이 통한건지 사제는 바이스에게 곱게 접은 종이 한 장을 내밀며 말했다.
“예전에 저희가 한 다크 엘프 주민에게 받은 더스크라이즈의 지도입니다. 워낙 옛날 것이라 도움이 되실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마을의 위치가 표시되어있습니다. 저희가 가본 곳은 이쪽입니다.”
“다른 마을에는 가보시지 않은 겁니까?”
“괜히 주민과 부딪쳐서 다툴 수는 없으니 일단 마을 외의 곳을 먼저 둘러볼까 싶습니다. 그럼 안전한 여행이 되시길. 친구분의 병이 낫기를 저희도 기도하겠습니다. 아… 신성력이 독이 될 테니 기도도 하면 안 되겠군요. 몸 조심하십시오.”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다.
사제 일행을 떠나보내고 바이스는 카이엔에게 지도를 내밀었다.
“그들은 이곳에 들렀다고 하는군요. 그럼 저희는 반대쪽으로 가보죠.”
“그래. 찾으면 좋은 거고 못 찾으면 어쩔 수 없지.”
뜻밖의 사람들과 만나 당황하긴 했지만 좋은 정보를 하나 얻었으니 상관없었다.
마차에 오르려는 카이엔에게 바이스가 작게 소곤거렸다.
“왕자님.”
“또 왜?”
“저들 역시, 몬스터와 크게 부딪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군요. 조심해야겠습니다.”
“…그래.“
바이스는 사제와 대화를 하면서 그 일행의 모습을 살폈다.
전투의 흔적이 없는 매끈한 갑옷. 노숙으로 인해 더러워지긴 했지만 마찬가지로 찢기거나 헤진 곳 하나 없는 의복.
몬스터의 공격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으로 인해 바이스는 그들이 더스크라이즈에 발을 들인 이후로 몬스터와 마주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파악했다.
그 사실을 전해도 카이엔의 반응은 시큰둥했고 그는 미소를 지었다. 카이엔이라면, 그런 반응을 보일 줄 알았으니까.
잠시 후 글라스가 나무 위에서 떨어졌다. 근처에 도착했지만 사제들이 있기에 숨을 죽이고 있었다는 말에 카이엔이 말했다.
”잘 했어. 뭐 찾은 건 있고?”
“아뇨. 다크 엘프는 커녕 발자국도 못 봤어요. 에휴-”
“일단 이동하자. 그 사제 일행에게 지도를 하나 받았거든. 가장 가까운 마을부터 가보려고 해.”
“제가 가본 방향으론… 으음, 좀 더 멀리까지 다녀올 걸 그랬나봐요.”
“충분해. 자, 가자.”
목적지가 정해졌고 바이스가 마차를 몰았다.
낡긴해도 지도는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 중간중간 방향을 확인하면서 그들은 마차로 이동했다. 몬스터는, 단 한 마리도 발견하지 못 했다.
날이 저물기 시작하니 숲은 빠르게 어두워졌다. 익숙하게 노숙할 준비를 하는 일행을 쳐다보며 카이엔은 조심스럽게 마차 밖으로 나왔다. 귀를 기울여도, 몬스터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상해.’
마을이 망가질 정도고 다크 엘프들이 이동할 정도로 큰일이 있었을 텐데, 그게 몬스터의 짓이 아니라는 걸까? 그들의 지나온 경로만으로 판단한다면 숲은 망가진 곳 하나 없었다.
이전에 자네인이 검은 숲으로 들어갔을 땐 그녀를 두려워하는 몬스터의 웅성거림을 들을 수 있었지만 이곳은 너무나도 고요했다.
하루 반 정도 더 이동하니 가장 가까운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제들이 간 마을은 폐허가 되어있었다고 했지만, 그들이 향하는 곳은 다르면 좋을 텐데.
그 기대가 무색하게 도착한 마을은 입구의 돌담부터 무너져있었다.
“허…”
창문으로 바깥을 확인한 카이엔은 탄식과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멀쩡한 곳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숲에서 사는 엘프의 집은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나무와 한 몸인 것같은, 기이하게 생긴 구조의 집들은 반쯤 박살났거나 부서져있었다.
곳곳에 흩뿌려진 피로 봐선 몬스터의 습격이라도 있었던 것 같았다. 바람에 지워진 흙 위의 발자국을 확인하며 그들은 입구 근처에서 서성거렸다.
그때, 카이엔의 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 …니… …해.”
“어?”
“왜 그러십니까?”
“목소리가… 들려서.”
“엥? 정말로?”
“몬스터가 내는 거예요?”
“모르겠어. 이쪽에-”
손가락으로 한쪽 방향을 가리키며 카이엔은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이들의 귀에 들리지 않는 걸로 봐선 몬스터의 소리임이 분명했지만 그쪽으로 가야할 것만 같은 느낌에 저절로 발이 움직였다.
마을은 상당히 넓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성한 건물이 몇몇 보였지만 카이엔은 오로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폐허가 된 마을의 중앙광장쯤 되는 곳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누군가가 있었다.
온 몸이 사슬로 결박된 채로 서있는 이는 어딜 봐도 다크 엘프였다.
산 건지 죽은 건지 겉으로 봐선 알 수 없었다. 목소리는, 그에게서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