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그럼 더스크라이즈로 갈 준비를 해야겠군요. 짐도 꾸리고 같이 갈 사람도 정해야 하니 지금부터라도 당장 준비해야겠습니다.”
“그럼 프라우디에는…”
“녀석은 여기 두는 게 좋을 거다. 라이프 베슬을 훤히 드러내놓고 다니는 건 위험하니. 대충 상처가 더 덧나지 않게 조치는 취해주겠지만 안정을 취해라.”
“병 주고 약 주냐?”
“닥쳐. 저놈들이 재료를 구해오기만 하면 네놈이 다시 고개를 내밀 일 없게끔 완전히 없애버릴 테니까.”
리치왕의 대꾸에 티아마티스의 손이 잠깐 멈칫했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보존 마법을 걸어주었다. 그렇다고 으르렁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나는 돌아가서 즉시 독스 백작을 족치…감시할 거다.”
“족칠 겁니까?”
“그래야지.”
살짝 말실수를 한 것에 바이스가 꼬투리를 잡자 티아마티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동의했다.
그로서는 기억을 잃은 리치왕보단 리치왕의 라이프 베슬을 고작 호문쿨루스 제작에 투입한 독스 백작과 연금술사들이 더욱 짜증나고 불편했다.
걸리적거리는 건 일찍 치워둬야 마음이 편하므로 그 역시 즉시 움직이기로 했다.
“아. 문제 생기면 다 뒤엎어버려도 된다. 외국에 있는 지역인데 알게 뭐람. 그리고 나는 제국에서도 활동하고 있으니 그쪽과 관련된 일이 생긴다면 얼마든지 묻어주마.”
“네?”
“드래곤은 참 힘들겠네요.”
“시끄럽다. 가르간트 왕국의 에빌라이 공작과 아이칸트라 제국의 빌헬름 후작은 일인이역의 동일인물이니 혹시나 제국쪽에 갈 일이 있으면 미리 연락을 해라.”
“일인이역…”
“염두에 두겠습니다.”
다들 어안이 벙벙한 와중에 바이스만이 시종일관 침착하게 대꾸했다.
할 말을 다 끝난 티아마티스는 돌아가려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아직도 고개 숙인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자네인을 보고 한숨을 쉬더니만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이마를 톡톡 치며 말했다.
“좀 더 있다가 와도 좋다. 네가 만족할만한 결과를 낼 때까진 말이다.”
“아…”
“간다.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보고하고. …이번엔 저놈들도 중간에 가로채지 않을 테니.”
그 말뜻을 알아차린 카이엔은 어색하게 웃었다. 범인인 바이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딴청을 피우고 있었지만 그는 평온을 유지하는 게 어려웠다.
티아마티스가 가고나자 바이스가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손뼉을 쳐서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티아마티스가 프라우디에의 출생의 비밀에 대해 알아낼 테니 그들은 서둘러 프라우디에의 치료를 해야했다.
“흑마법사니 네크로맨서니 하는 것들은 이름만 들어도 어디 한 군데 처박혀 사는 것들 같으니 더스크라이즈의 다크 엘프들에게 도움을 받죠. 몬스터들이 서식하는 을씨년스러운 곳이긴 한데 왕자님이 있으면 별 무리없이 넘어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 가야 하면 얼른 준비하고 떠나는 게 맞지. 세자르 남작에겐 잠시 여행을 다녀와야겠다고 해야겠어.”
“변명삼기엔 택도 없지만 믿어주시겠죠. 자, 갈 사람은 어떻게 정할까요?”
“일단 프라우디에는 영주성에 둬야지. 간호는 페이리에게 맡겨도 좋을 것 같아. 남을 사람은-”
“이종족과 대화하는 일이 필요하다면 제가 나서서 진행해도 되지 않을까요? 뱀파이어도 경계하긴 마찬가지겠지만 그래도 인간만큼 적대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요.”
“난 네 호위 기사하려고 왔으니까 당연히 가야지! 나만 빼놓고 가려는 건 아니지?”
“저도 왕자님의 곁을 비울 수 없습니다.”
다들 자기가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사람은 자네인 뿐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자네인.”
“…네.”
“너도 같이 가자. 프라우디에를 다치게 한 게 미안해서 그러는 거잖아. 같이 치료법을 찾아오자. 프라우디에도 똑바로 못 쳐다보는 지금 상황에서 프라우디에의 안전을 맡길 수는 없으니까.”
자네인은 카이엔의 말에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갈 사람과 남을 사람이 정해졌다.
사트로누스에게도 영주성의 안전을 부탁하기로 하고 카이엔은 남작에게 이야기를 하고 오겠다며 제일 먼저 응접실에서 나갔다.
바이스는 카이엔의 뒤에 냉큼 따라붙었다.
“그럼 저는 바로 준비를 하겠습니다.”
“응. 부탁할게. 더스크라이즈까진 얼마나 걸리지?”
“마차를 타고 쉼 없이 이동해도, 최단 경로로 향한다고 해도 거의 한 달은 걸릴 겁니다.”
“머네.”
카이엔은 혀를 찼다.
그렇다고 프라우디에를 데려가기엔,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몰라 섣불리 동행할 수 없었다.
가슴이 벌어져서 그 안이 드러나 보이는데. 누가 보기라도 했다간 큰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호문쿨루스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티아마티스의 반응으로 봐선 그리 좋은 건 아닐 테고. 잠시 걷는 것을 멈춘 카이엔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최대한 빨리 다녀오도록 하자.”
“네.”
오가는 시간만 두 달. 탐색하는데 얼마나 걸릴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더스크라이즈라는 광대한 영토 전체에 다크 엘프가 있지는 않을 테고 그들도 안전한 곳에 무리지어 생활을 할 테니까.
바이스가 잡다한 지식이 많다고 해도 그런 곳까지 속속 알고 있진 않을 것 같았다.
일단 급한 건 허락이므로 카이엔은 남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업무를 보던 세자르 남작은 카이엔의 갑작스런 요청에도 밝은 얼굴로 그를 환영해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왕자님? 검은 숲에는 잘 다녀오셨나요?”
“응. 그런데 또 나가야 할 것 같아서.”
“이런. 이번엔 어딥니까?”
“외국에 좀 다녀와야겠어. …더스크라이즈에.”
“더스크라이즈입니까? 그 먼 곳까진 무슨 일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카이엔은 쩔쩔맸다.
지금까지 그를 돌봐준 남작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에빌라이 공작이 실은 엄청 오랫동안 살아온 드래곤이고 프라우디에가 실은 호문쿨루스란 종족인데 그 심장에 이상한 게 있고 지금 살점이 너덜너덜하게 뜯겨져나가서 치료하러 간다, 라고 할 수는 없었다.
진실을 말해도 거짓말처럼 들릴 테고.
그러나 그 빈약한 설명에도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십시오. 하지만 너무 먼 곳입니다. 부디 몸 조심하시길. 바이스 군은 따라가는 겁니까?”
“응. 일단 프라우디에만 두고 갈 거라서… 프라우디에는 페이리에게 맡길 테니까 지정해준 방에 식사만 꼬박꼬박 가져다주면 돼.”
“그렇게 하겠습니다. 바로 떠나십니까?”
“짐 챙길 게 많아서 내일이나 모레쯤 갈 것 같아. 바이스가 알아서 잘 하겠지.”
“그렇군요.”
세자르 남작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카이엔의 뜻이 확고하고 준비도 잘 한다니까, 더 이상 걱정할 수도 없었다.
그저 갑자기 카이엔이 가르간트의 밖으로 나간다고 한 것이 의아할 뿐이었다.
남작과 이야기를 마치고 카이엔은 방으로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바이스가 커다란 가방에 그의 옷을 정리해 집어넣고 있었다.
“소규모로 이동할 겁니다. 호위할 병력도 저와 글라스 씨, 에빌 씨, 자네인 님이 전부고요.”
“나 하나 지키기엔 충분하겠네.”
“하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라스 씨도 두고 가야겠습니다. 프라우디에 님을 부탁드립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바이스는 카이엔의 짐부터 챙겼다. 자기 짐은 밤에 챙기면 된다면서, 금세 카이엔이 쓸 물건들의 준비를 마치고 마차를 수배하고 식량을 준비하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덩그러니 남게된 카이엔은 뭘 해야 할지 몰라 눈만 멀뚱히 뜨고있었다.
애초에 여행은커녕 소풍조차 다녀본 적 없었고 먼 곳으로 갈 때 뭐가 필요한지조차 몰랐다.
그런 그와는 달리 평소와 다른 부산스러운 움직임을 눈치챈 소금이가 카이엔을 향해 찍찍거리며 그를 불렀다.
- 너 어디 가냐?
“응. 외국에 다녀올 거야.”
- 멀리? 오래 걸리나?
“한... 두 달 쯤? 아, 이렇게 말하면 넌 모르려나?”
- 두 달?
소금이는 날짜에 대한 개념이 없기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달'이라는 단위가 꽤 많다고 여겼는지 앞발을 파닥거리며 외쳤다.
- 나도! 나도 갈래!
“엥?”
- 나도 데려가라!
“아니 거긴 왜 가려고…”
- 너 혼자 보낼 수는 없다!
“다른 녀석들도 같이 가는데?”
허나 소금이는 이미 마음을 굳힌 모양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소금이 때문에 카이엔은 한참 동안 소금이를 설득하기 위해 애를 써야했다.
그러나 그러기를 한 시간 째, 카이엔은 결국 소금이에게 지고 말았다.
“으으… 그럼 너, 새장 안에 넣어서 데려갈 테니까 조용히 하고 절대로 탈출하면 안 된다?”
“찍찍!”
- 당연하지! 나만 믿어라!
자신만만해하며 소금이는 가슴을 내밀었다.
어쩐지 그 모습에 더욱 불안해진 카이엔이었지만 바로 촘촘한 창살을 가진 새장을 꺼냈다.
예전에 박쥐였던 글라스를 돌보다가 아이디어를 얻어서 소금이 외출용으로 하나 샀다가 답답하다는 불평에 한 번도 쓰지 못하고 서랍장 안에 들어간 물건이었다.
디행히 소금이는 더 먼 바깥을 구경한다는 것에 들떠서 새장 안으로 쏙 들어갔다.
물론 중간중간 쉴 때마다 새장 밖으로 꺼내주기로 카이엔과 단단히 약속도 했다.
쫓겨난 왕자는 아직 살아있었다.
그러나, 쫓겨난 왕자라는 이름뿐 그 외의 직책이란 것이 없었다.
다행히 저금해놓은 돈이 있기에 바이스는 그 돈으로 일행이 타고 갈 마차와 비상금, 식량과 필요한 물품들을 빠르게 준비했다.
소금이가 따라간다는 말에 소금이용 씨앗과 물그릇도 준비해 짐에 끼워넣었다.
그로부터 이틀 뒤, 다섯 명이 함께 더스크라이즈로 떠났다.
카이엔을 주시하는 눈을 피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영주성 밖으로 나가야 했다. 물론 자리를 오래 비울 테니 눈치챌 법도 했지만 그들이 어디로 떠났는지 정확한 사정에 대해서는 모르리라.
한밤중의 텅 빈 거리를 질주하는 마차 앞을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미리 언질을 받아둔 병사들이 다가오는 마차에게 아무 말 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카이엔으로서는 어렸을 적 이후 처음으로 세자르에서 벗어나는 경험이었다.
들뜨고 걱정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밤이 깊은 탓에 꾸벅꾸벅 졸게 되었다.
마차는 바이스를 대신해 글라스가 몰기로 했다. 뱀파이어인 그는 낮보다 밤에 강했기에 밤에 마차를 운전하고 불침번을 서는 일을 맡기로 했다.
카이엔이 정식 왕자이며 대놓고 움직일 수 있었다면 더스크라이즈로 향하는 길에 지나치게 되는 귀족의 영지에서 좋은 대접을 받으며 편히 쉴 수 있었겠지만 그는 폐세자였다.
최대한 이목을 끌지않아야 했기에 카이엔은 마차 밖으로는 잘 나가지 않았다.
난생 처음 하는 여행은 카이엔에게 굉장한 피로를 안겨주었다. 마차를 타고 이동한 지 일주일째 되는 날엔 멀미까지 하기 시작했다.
“우욱…”
“괜찮아, 카이엔?”
“으으… 머리 아파…”
“잠시 쉬었다 갈까요?”
“아냐. 시간 없어. 얼른 가.”
“잠깐 누워있어.”
덜컹거리는 마차였지만 천을 씌워놓은 새장 안에서 글라스는 잘도 잤다.
그런 그가 부러워서 카이엔은 눈물이 날 정도였다.
소금이조차 지루해하긴 했지만 끄떡 없었는데 유독 그 혼자만 멀미가 났다.
수면제라도 먹고 자야 하나 고민했지만 점점 몸이 피곤해지니 낮에도 밤에도 졸기 일쑤라 멀미 문제는 금세 해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