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먼저 가 있어라. 이쪽을 정리하고 뒤따라가마. 이 녀석도 챙겨갈 테니 안심하고.”
“그럼 믿겠어. …에빌라이 공작.”
“공작으로서 온 게 아니니 그렇게 부르지 말아 줬으면 하는데.”
“공작으로 온 거였으면 왕자님께 존대를 했을 겁니다.”
“아, 그래?”
바이스의 첨언에 카이엔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얼른 가자며 마차에 올랐다.
카이엔이 타자 사트로누스도 뒤따라갔다.
얼른 타라는 재촉에 하나둘 마차 안에 자리를 잡았다.
망토로 꽁꽁 싸매인 리치왕은 말없이 그 자리에 서있다가 카이엔의 재촉에 아장아장 걸어갔다. 카이엔이 너무 잘 싸매놔서 걸음을 크게 내딛기가 어려웠다.
피는 더 이상 흐르지 않는 건지 망토에는 젖은 흔적 하나 없었다.
마차 안에 들어가고 나면 질문 세례가 쏟아질 거라고 생각하는 그의 예상과는 달리 카이엔은 지쳤다며 마차 창문에 머리를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정말…”
“진정해 카이엔. 침착해.”
“아까 그 인간은 대체 뭐고 프라우디에 너는 왜… 설마 누군가가 날 음해하려는 음모라도 짠 건가?”
“크르릉.”
- 졸리면 자라. 헛소리 하지 말고.
냉정한 사트로누스의 말에 카이엔은 신발을 벗고 마차 좌석 위로 무릎을 굽혀 다리를 올렸다. 그대로 몸을 둥글게 말고 고개를 숙여버린 그 모습에 에빌은 어쩔 줄 몰라하며 카이엔을 툭툭 치며 기운 내라는 말만 반복했다.
망토에 꽁꽁 싸매인 리치왕은 그런 카이엔을 빤히 쳐다보았다.
분명히, 카이엔은 티아마티스가 그를 '리치왕'이라고 부르는 걸 들었을 텐데도, 태도에 변함이 없었다.
리치에 대해서 모르는 건가. 그래서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는 걸까.
이상한 인간이라며 쳐다보는 시선에 사트로누스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크워엉!”
- 뭘 보냐?
물론 리치왕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고 카이엔이 팔을 뻗어 사트로누스의 머리를 꾹꾹 눌렀다.
“이 드러내지 마. 시비걸지도 말고.”
“저게 나한테 시비를 건 건가?”
“으음. 일단 가서 이야기하자. 프라우디에… 아닌가?”
“아까 그 남자가 나를 어떻게 부르는지는 들었을 텐데.”
“리치왕이랬지. 그런데 그게 뭐지? 에빌 넌 알아?”
“아니. 나도 몰라.”
사트로누스도 모른다며 으르렁거렸다. 그 말에 리치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큰 사건이 잊어질 정도로 긴 시간이 지나지 않은 이상, 이 땅 위를 살아가는 사람이 ‘리치왕’에 대해 잊었을 리 없었다.
정말 치열하고 힘들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나니 별것도 아닌 일이었나 보구나.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이 탄 마차는 무사히 방벽 안을 넘어왔다. 벽을 지키는 병사들이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리다가 마차가 도착하자 그제야 얼굴을 펴고 괜찮은지, 다친 데는 없는지를 물었다.
그 질문에는 마부석에 앉은 바이스가 착실히 대꾸해줬다.
“별일 없었습니다. 이렇게 일찍 오지 않았습니까? 다만 역시 계획에 없던 외출이라 왕자님의 체력 소모가 심하군요. 얼른 영주성으로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아, 별문제는 없었나요?”
“네. 없었습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다들 수고하세요.”
팁이라며 돈 좀 쥐어주고 나서 바이스는 마차를 몰았다.
무사히 영주성에 도착한 뒤 프라우디에를 데리고 최대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움직였다.
사트로누스는 일단 정원의 제 구역에 가있도록 하니 콧방귀를 뀌면서도 카이엔의 말은 잘 들어주었다.
“…어디로 가지? 내 방?”
“응접실로 가죠. 그쪽이 나을 겁니다.”
바이스의 의견에 다들 비어있는 응접실로 들어갔다.
티아마티스가 정말 올지는 모르겠지만 소파에 앉아서 숨부터 돌렸다. 카이엔은 응접실에 도착하고 나서야 프라우디에를 감싸고 있었던 망토를 풀어주었다.
몸을 가리고 있던 망토를 거두자 훤히 드러난 심장이 보였다. 피는 멎은 상태였지만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창백하고 어두운 빛을 내는 심장을 보고 카이엔이 물었다.
“이게 뭐야?”
“심장… 라이프 베슬.”
“심장이라는 거지? 심장은 이렇게 생긴 거구나.”
“아닙니다, 왕자님.”
카이엔이 잘못된 상식을 얻을까봐 바이스가 급히 끼어들었다.
해부학에 대해 가르쳐야 하나. 실제로 보여줄 만한 심장이 어디 없나. 괜히 보여준답시고 시체 하나 가져왔다가 카이엔이 졸도하는 건 아닐까?
바이스가 진심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툭, 하는 소리가 나더니 티아마티스가 자네인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툭하는 소리는 구두굽이 바닥에 닿으며 내는 소리였다.
응접실 안에 있던 사람들을 쓱 훑어보고는 티아마티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부터 할 거지?”
“어… 당신이 누구인지부터요?”
“복잡한 것부터 묻는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티아마티스는 성큼성큼 소파로 다가가 빈 자리에 앉았다.
자네인은 그새 멀끔해진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우물쭈물하다가 티아마티스의 뒤에 서려는 것을 그가 팔을 잡아당겨 자신의 옆에 앉게 했다.
고개를 들지 못 하는 그녀를 힐끗 보곤 티아마티스가 말했다.
“자네인은 내 종자다. 정확히는 내 피를 내어주고 만든 자식, 혈족이지. 내 이름은 티아마티스. 이 세계에 남기 위해 내게 주어진 힘을 포기하고 스스로 날개를 꺾은 독룡이다.”
“독룡…?”
“이 세계에 드래곤은 오직 나뿐이다. 자네인은 내가 변화시켜 만들어낸 혈족이지만 반쪽도 못 되는 팔푼이지. 너희가 신경쓸 건 아니다. 나는 그저, 목숨이 다하기 전까지 이 세계를 지키려고 하는 것 뿐이지. 그리고.”
티아마티스는 턱짓으로 리치왕을 가리켰다.
“천 년 전, 세계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은 대재앙. 리치왕. 녀석의 라이프 베슬이 지금 저 호문쿨루스의 몸 안에 있지.”
“호문쿨루스?”
“그건 또 뭡니까?”
“연금술에 대한 지식은 없나?”
“연금술사를 가까이에서 본 건 프라우디에 님이 처음이니까요. 에빌 님은 어떠신가요? 라스 씨는?”
“어… 저도 같아요..”
“저도입니다.”
“허어, 늑대가 말을 하다니. 늑대 인간인 건가? 그런데 왜 사람모습이 아니라 늑대인 상태지?”
“그건 사정이 있어서…”
“내 알 바 아니군.”
티아마티스는 딱 잘라 선을 그었다.
“호문쿨루스라는 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생명체다. 딱 봤을 때부터 그놈 솜씨가 아닌거란 걸 눈치챘지. 그놈에겐 저 정도로 정교한 호문쿨루스를 만들 실력이 없어. 아마 고용한 놈들이 있었을 텐데, 그놈들이 어딘가에서 리치왕의 라이프 베슬을 얻어낸 거겠지. 그게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마력석으로 오인해서 넣어버린 것 같지만.”
“그럴 수도 있는 건가요?”
“멍청이들이 뭘 못 하겠어.”
날카로운 시선이 프라우디에… 리치왕을 향했다.
프라우디에의 정신은 잠들어있고 리치왕의 정신이 깨어난 건지, 리치왕은 똑바로 그 시선을 마주보았다.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티아마티스는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
“네가 자네인이 위험할까 봐 앞을 막아선 건, 프라우디에의 기억 탓이겠지. 넌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 게 맞나?”
“…그래. 내 이름조차 모른다.”
“네 몸은 리치왕의 심장이 이식된 탓에 신성력 따위가 통하지 않을 거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호문쿨루스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건 리치왕의 라이프 베슬과 독룡의 피. 키메라에 호문쿨루스를 섞은 것과 비슷한 형태군.”
“저… 질문이 하나 있는데. 독룡이란건 뭔가요? 수가 많습니까?”
카이엔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질문에 티아마티스는 살짝 인상을 쓰면서 대답해줬다.
“이 땅에 완전한 드래곤은 나뿐이다. ‘독룡’으로 지칭되는 개체는 과거 내가 내 피를 뿌려 만들어낸 종자들이지. 심심풀이 겸 정보 수집용으로 애완동물처럼 기르던 놈들이니 야생화 되었다면 어딘가에서 몬스터로 살고있을 거다. 다른 몬스터에 비해 피에 담긴 마력의 양이 많으니 사냥꾼들이 노릴만도 하고. 아마 그 특성 때문에 저 녀석의 몸을 만들 때 독룡의 피를 사용했을 거다. 다른 것도 섞이긴 했지만 그 피라면 다른 피의 특성을 잡아먹고도 남지.“
그런거 막 만들어놓지 말라고. 게다가 야생화라니, 자기가 만들어놓은 주제에 책임감도 없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꾹 참고 카이엔은 다른 질문을 건넸다.
”이 몸은 어떻게 하면 됩니까? 이대로 둘 수도 없고 프라우디에는…”
“리치왕이 살아있는 걸로 봐선 죽지는 않았겠지. 다만 저 몸을 꿰매려면 시체에서 떼어오든가 인조피부를 만들어서 붙여야지. 흑마법사나 언데드에게 나오는 검은 마나가 좋겠군.”
“…검은 마나?”
“그게 뭐예요?”
“흠, 왕자는 그것도 모르는 건가? 옆에서 가르쳐주는 사람 하나 없었고?”
“이쪽엔 마법사가 드무니까요. 게다가 저도 마법에는 문외한인지라.”
웃으면서 바이스가 대답했다. 썩 마음에 들지 않는지 티아마티스는 한숨을 쉬었지만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따지고보면 이 상황이 된 것도 그가 나타났기 때문이니 책임을 지려는 것이었다.
“리치왕이 깨어남으로서 흐르던 마나가 모두 검게 물들었다. 다른 마나를 쏟아부어도 소용없어. 허나 녀석의 기억이 완전하지 못 해 예전만큼의 힘을 발휘할 수 없으니 다른 흑마법사나 네크로맨서의 도움을 받거나 그게 아니라면, 죽음의 기운이 흐르는 땅의 일족의 도움을 받는 게 나을거다.”
“죽음의 기운이라면… 더스크라이즈를 말하시는 건가요?”
“너는 아나보군.”
“다크 엘프의 땅이 아닙니까.”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바이스에게 향했다. 그러자 바이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왕자님, 제가 역사 공부를 시켰는데 아직 모르시는 겁니까? 더스크라이즈에 대해 아는 대로 말씀해보시죠.”
“그, 그건… 가르간트의 동쪽에 있고… 미개발 지역도 많고 땅의 마나 때문에 몬스터도 많고…”
“그 정도입니까? 공부 좀 하셔야겠네요.”
“큽.”
손쉽게 카이엔을 침몰시키고 바이스는 웃는 낯으로 마저 티아마티스와 대화를 나누었다.
티아마티스는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자세가 상당히 불량했고 자신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거는 바이스의 태도를 지적하지 않았다.
그가 ‘에빌라이 공작’으로서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니라 독룡인 ‘티아마티스’로서 왔기 때문이었다.
“다크 엘프의 도움을 받아라. 한 명 데려와서 상태를 보게 하면 더 좋고.”
“자네인 님을 프라우디에 님의 옆에 붙여놓은 건 이것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서였군요.”
“그래. 이제 궁금증은 풀렸으니 자네인을 여기 둘 필요는 없지. 너희에게 폐 끼친 것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한다. 빚은 조만간 갚아주지.”
“기대하겠습니다.”
“넌 어떻게 생각하지, 왕자?”
“…왕자라고 부르지 마세요. ‘에빌라이 공작’이 아닌 존재의 도움이라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왕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말이군. 그 자리가 그렇게 싫나?”
“조용히 구석에 처박혀서 살고 싶어요.”
진심이 묻어나오는 목소리.
티아마티스는 피식 웃으면서 더 이상 왕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어린 왕자가 과거 얼마나 혹독한 사건을 겪었는지는 그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때 사건의 주범인 만티코어가 아직도 왕자의 곁을 지키고 있다는 건 꽤 놀라웠지만.
왕자의 능력인 ‘몬스터의 언어를 알아듣고 소통할 수 있는 힘’ 역시 가까이에서 보았지만 이상한 점은 느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