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티아마티스는 자네인에게만 일을 맡겼다.
명령에 따르지 않는 종자에게 강제력도 심어줄 겸 억지로 폭주시켜 드래곤화 시켰다.
역시나 이성을 잃고 날뛰는 모습에서 우아함은 찾을 수 없었지만 그는 말 없이 그 상황을 지켜보았다.
프라우디에 독스.
그 소년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는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그것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 독스 백작과 교류하면서 자네인을 프라우디에의 옆에 붙여놨다.
그런데 이 멍청하고 바보 같은 종자녀석이 감시해야 할 대상에게 마음을 줘버린 것이다.
오랜 시간 그의 곁을 지키면서 마땅한 친구조차 사귀어본 적이 없으니 마찬가지인 신세의 어린 녀석에게 홀라당 넘어가버린 건지.
그 건에 대해선 날 잡고 혼을 내야겠다며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았다.
가관인건 프라우디에 역시 자네인을 애칭으로 부르면서 자기를 공격하라고 나선 것이었다.
어처구니 없었지만 티아마티스는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자네인의 발톱이 프라우디에의 가슴을 쥐어뜯고 그 몸 안에 품고 있던 심장이 모습을 드러내자 티아마티스는 급하게 지면을 박차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아무래도 그가 나이가 들어서 감이 많이 떨어졌던 모양이다.
저런걸 단번에 파악하지 못 한 멍청이가 바로 자신이었다.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될 물건이, 그곳에 있었다.
피를 흘리며 휘청거리는 프라우디에에게 카이엔이 달려가 쓰러지는 몸을 부축했다.
가늘고 얕은 숨을 흘리면서 프라우디에는 몸을 떨었다.
“흐억… 헉…”
“정신차려! 뭐, 뭐야 대체!”
카이엔의 소매와 옷을 적시는 피는 따뜻했고 붉은색을 띠고있었다. 인간의 것과 같았다.
허나 프라우디에의 심장은 인간의 것이라곤 할 수 없었다. 구슬 같은, 보석같은 것은 기분나쁜 검보라빛이었다.
프라우디에의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확인했다.
그것이 티아마티스가 자네인에게 내린 명령이었기에 그것을 완수해낸 자네인은 괴로워하며 몸을 비틀었다. 그제야, 서서히 이성이 돌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완전히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굵은 사슬들이 그녀의 몸을 구속하고 잡아채 넘어뜨렸다.
커다란 먼지구름이 일어나며 자네인은 드래곤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입고있던 코트를 벗어 쓰러진 자네인을 덮어 몸을 가려준 다음 티아마티스는 카이엔이 있는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이런 미친…”
누군가에게 하는 건지 모를 욕을 내뱉으면서.
그 모습에 카이엔은 의아해했다.
프라우디에의 심장이 이상한 색이고 좀 불길한 기운이 나는걸로 봐선 저 사람이 확인하려던 게 이거였던 것 같은데, 공격한 놈의 반응치곤 이상했다.
당황한 것 같기도 황당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짜증난 것 같기도 하고. 아주 복잡한 감정의 연속이었다.
“그 새끼들이 저딴 걸 어디서 구해서는…!”
“알아차렸으면 이 녀석 살리는 걸 좀 도와줬으면 하는데.”
“그건 재앙이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없애버리는 게 나아.”
카이엔의 품 속에서, 프라우디에의 숨소리는 점점 옅어져갔다.
가만히 놔둬도 죽을 것 같은 아이인데, 티아마티스는 반쯤 달리다시피 카이엔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프라우디에를 부축해 일으키면서 카이엔은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위험해 보이니 도망치는 게 상책이었다.
하지만 티아마티스 쪽이 더 빨랐다. 프라우디에의 심장을 향해 휘둘러진 팔은 카이엔이 막을 수 없는 속도였다. 그 손을 막은 건, 다른 사람이었다.
거의 숨이 끊어져가던 프라우디에의 손이 티아마티스의 손목을 붙잡았다.
“하…”
티아마티스는 실소를 흘렸고.
눈을 꼭 감은 채 숨 넘어가던 소리를 내던 프라우디에는 고요히, 긴 숨을 내쉬었다.
“길었도다… 너무나도 길면서도 짧은 한숨을 내쉬는 것만 같은 찰나이며 동시에 끝을 알 수 없었던 무한의 어둠 속에 잠겨있었노라.”
“나는 죽지 않는다. 영원히 죽지 않는 나는, 나의 이름은…!”
눈을 뜬 프라우디에는 이상한 말을 내뱉다가 멈칫했다.
죽다 살아나서 애가 좀 이상해진 건가? 카이엔은 의아해하면서도 프라우디에를 그의 뒤로 숨기려고 했다.
그러나 눈빛이 달라져, 살기마저 품고 있던 프라우디에의 눈동자가 갑자기 갈피를 잡지 못 하고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했다.
작은 손이 제 몸을 탁탁 두드리며 확인했다.
프라우디에가 멀쩡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카이엔은 조심스럽게 손을 뗐다.
그러자 그 아이는 갑자기 몸을 홱 돌리더니만 카이엔의 얼굴을 붙잡았다.
마치 그의 눈동자 안에서 무언가를 확인하고 싶은 듯 했다.
붙잡은 상대의 눈 안에 비치는 것은, 은발의 작은 아이였다.
가슴이 헤집어진 인간의 몸뚱이었다.
해골이 아니었다.
뼈 밖에 남은 몸이 아니었다.
멀쩡히 피가 흐르고 살가죽이 붙어있는. 살아있는, 게다가 굉장히 조그마한 몸이었다.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어버버하고 있는 프라우디에의 몸이 사슬에 휘감겨 바닥에 내팽겨쳐졌다.
자신보다 한참 작은 어린 애를 무참히 던져버린 티아마티스가 짜증스레 외쳤다.
“하! 미친 연금술사 놈이 대재앙을 깨웠군! 정상은 아닌 모양이니 이번에야말로 뒈져라 리치왕!”
“날 알고있나?”
“조금은 알고 있지. 설마 봉인했던 심장이 살아있을 줄은 몰랐군. 게다가 독룡의 피라니, 내 눈을 속이기 참으로 쉬웠겠어!”
사건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카이엔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돌렸고 눈이 마주친 글라스와 바이스, 에빌, 라스는 자기들도 모른다며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사트로누스는 일단 카이엔이 안전하단 걸 확인해서인지 그 자리에 주저앉아있었다.
이 상황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건 사트로누스 뿐인 것 같았다.
난데없이 패대기쳐진 프라우디에… 리치왕은 눈을 깜빡였다. 그 역시 상황파악을 하지 못 해서 당황한 참이었다.
리치는 라이프 베슬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부수지 않는 이상 죽여도 죽지 않는 존재.
리치왕은 가히 대재앙이라고 불릴 정도의 힘을 가진 존재였으며 그의 라이프 베슬은 인간들이 차마 부수지 못 해 봉인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졌다. 그 탓에 견고한 성력이며 마법으로 둘러싸 봉인했는데.
그래서인 걸까.
눈을 뜨고 나니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데다가 힘도 대폭 줄어있었다.
기억나는 건 그가 한때 '리치왕‘이라고 불린 강력하고 위대한 존재였다는 것뿐이었다.
슬쩍 몸을 일으키니 멀쩡한 라이프 베슬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느껴졌다. 피식. 실소를 흘리며 그가 몸을 일으켰다.
“나를 알고 있구나.”
“너 때문에 고생한 적이 있어서.”
“꽤나 나이 든 드래곤인가 보군.”
“알아서 뭐 하게.”
“내가 기억나는 게 없어서 말이야. 싸우다 보면 떠오르려나?”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아예 끝장을 내주겠다.”
리치왕은 자신을 구속하고 있던 사슬을 단숨에 부숴버렸다.
허공에서 생겨난 검은색의 마력화살이 티아마티스에게 퍼부어졌다.
수십발의 화살들이 일제히 발사되었지만 그것들은 티아마티스에게 닿지도 못 하고 불꽃에 휘감겨 상쇄되었다.
리치왕의 발 밑의 땅이 쩍쩍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용암이 솟아올랐다. 실드를 두른 리치왕은 덮쳐오는 용암을 피하면서 티아마티스에게 달려들었고 마법으로 만들어낸 스태프와 검이 쩡하는 소리를 내며 맞부딪쳤다.
서로의 마력이 서로를 공격하고 잡아먹으려고 휘감기며 전류를 흘러댔다.
리치왕이 쓰는 흑마법은 검은색과 검보랏빛을 띄고있는 반면 티아마티스는 원소 마법을 쓰고있기에 그 종류가 다양했다. 주 전력으로는 불꽃과 번개를 사용했다.
꽈광!
번개가 치는 소리. 눈으로 따라잡지 못할 속도로 벼락이 떨어졌다. 리치왕의 실드는 두동강이 나며 산산히 부숴졌지만 팔이 살짝 베인 것 뿐이었다.
부숴진 실드를 구성하던 마력이 금속 결정을 이루더니 티아마티스를 향해 퍼부어졌다.
실드 따윈 두를 생각이 없는지 티아마티스는 손짓 한 번 하는 것만으로 그 공격들을 모조리 얼어붙게 만들었다.
무영창 마법.
두 사람 다 빠른 속도로 마법을 캐스팅하며 맞서 싸우고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마법사들의 전투에 입을 딱 벌리고 감탄할 법도 하건만, 놀란 이들 중에서 오직 카이엔만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미친놈들아 싸우려면 딴 데 가서 싸워! 왜 하필 여기서 싸우고 난리야?!”
그는 절규했다.
아무리 이곳이 외진 곳이고 검은 숲이라고 해도 검은 숲이 세자르 영지에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른 영지들은 사냥꾼이며 용병들이 한 쪽에 몰리는 것을 염려해 순차적으로 검은 숲과 연결되는 문을 개방했다. 그들 말고 다른 사람들이 이 땅에 있을 확률이 있었다.
게다가 리치왕인지 뭔지를 지껄이는 티아마티스든 그런 그와 싸우며 눈은 맛이 가고 가슴에선 피가 철철 흐르는 프라우디에든 계속 지켜보고 있기 어려웠다.
지금 이 순간도 이 어처구니없는 힘의 격돌로 인해 검은 숲의 몬스터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싸우려면 말로 하라고-!”
조용히 살겠다고 다짐했는데 그가 검은 숲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런 일이 터져버렸다.
이 소란이 바깥까지 퍼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다들 물어볼 테고, 그가 원하는 평화롭고 지루한 일상과는 멀어지게 되어버린다.
어떻게든 말려야 한다며 카이엔은 냅다 소리를 질러댔지만 티아마티스도 리치왕도 카이엔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저 서로 적으로 인식한 상대를 제거하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티아마티스가 만들어낸 불꽃의 창이 프라우디에를 향해 날아갔다. 지정한 타겟을 향해 끝없이 쫓아오는 창을 떼어내기 위해 프라우디에는 마법을 써서 창의 경로를 비틀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튕겨낸 다섯 개의 창 중 하나가 쓰러진 자네인을 향했다.
크게 놀란 리치왕은 자신도 모르게 그 앞을 막아섰다. 무심코 붙잡은 불꽃의 창이 리치왕의 피부를 태우며 번져나갔다.
“윽…!”
이대로라면 온 몸에 불이 붙을 게 뻔했다. 그러나 더 이상 주문이 떠오르지 않아 리치왕은 이를 악물었다.
그때. 딱, 하는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함께 불꽃의 창이 사라졌다.
티아마티스가 본인의 의지로 마법을 취소시킨 것이다.
리치왕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티아마티스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저 왕자 말대로 대화해볼 필요는 있겠군. 네가 왜 자네인의 앞을 막아선 건진 모르겠지만…”
“나도 몰라. 어쩌다보니 몸이 움직여서…”
“왕자, 네 말대로 대화해보겠다.”
아까까지만 해도 서로를 죽이려고 싸우던 놈들이 갑자기 진정하자 카이엔은 싸늘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엉망이 된 땅 주변을 한 번 쓱 둘러보곤 카이엔이 손짓을 했다.
“정했으면 일단 갑시다. 영주성엔 사람이 많으니까 둘 다 날뛰진 말고요. 그리고 프라우디에, 너 이쪽으로 와봐.”
“난 프라우디에가 아니-”
“이거라도 일단 입어.”
떡하니 가슴이 열린 채로 활보하면 다들 놀란다.
카이엔은 자신의 망토를 벗어서 프라우디에를 꽁꽁 싸맸다.
마치 도롱이 벌레와 같아진 모습에 리치왕은 인상을 썼고 티아마티스는 고개를 돌리고 웃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죽일 듯이 싸웠으면서 단숨에 얌전해진 게 이상했지만 다시 싸우는 것보단 나았다.
묻게 싶은 게 산더미였지만 여기서 할 말은 아니기에 카이엔은 애써 입을 다물었다.